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난 그와 춤추면서 만났다. 15년 전이었다. 이대 앞 락카페 [올로올로]는 당시 나의 아지트였다. 토요일 저녁이면 그곳으로 가서 캔 맥주 하나를 마시며 춤을 추었다. 음악도 좋았고 포스트모던한 바의 인테리어도 좋았지만 그곳에 오는 사람들이 더 좋았다. 그때 같이 춤을 춘 사람 중 하나가 이상봉이다.
설치미술가 최정화가 디자인을 했고 김중만 김용호 안웅철 같은 사진작가들이, 그리고 이상봉 박윤수 같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장정일 마광수 등의 시인 소설가들이, 이목일 같은 화가와 장선우 황규덕 등 영화감독들이 자주 출몰하던 곳이 [올로올로]였다. 90년대 중반 청담동 문화가 형성되기 몇 년 전이었고, 전문직 종사자들이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난 [올로올로]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신문 지면에 발표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올로올로]에서 그때 나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올로올로]는 단순한 락카페가 아니었다. 나는 그곳을 존재의 숨구멍이라고 불렀다. 그곳에 가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상봉은 그중에서도 가장 빛났다. 빡빡머리인 그의 머리에서만 빛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수줍은 듯 웃으며 춤을 추던 그의 미소와 깎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과 다리에 착 달라붙은 그의 바지를 기억한다.
그때 만난 사람들 모두와 지금까지 교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정신적 내통을 지속하는 사람이 이상봉이다. 나는 그를 동지라고 생각한다. 나이는 물론 나보다 위고, 혼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1985년 설립한 (주)이상봉을 운영하고 있으며 논현동에 있는 그의 6층 빌딩에는 제자이며 후배이고 스텝인 수십 명의 직원들이 함께 작업하고 있지만, 세계를 창의적 감각으로 접근하면서 독특한 상상력으로 재해석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동지적 존재다.
지난 15년 동안 나는 비교적 지근거리에서 그의 작업을 지켜봐왔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한국 패션디자이너들의 중심부인 SFFA의 신인 디자이너로 막 등장한 직후였다. 그때부터 그는 지금까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도전은, 서울이 아닌 파리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는 올해 2월 세계 패션산업의 심장부인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에 자신의 샵을 오픈했다. 뤼비통 매장 건너편의 [J스토어]는 전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모아 놓은 멀티샵 매장이다. 파리에 자신의 샵을 오픈한 한국 디자이너들은 몇몇 있지만 최고의 명품거리인 상젤리제 거리에 최종적으로 진입한 디자이너는 이상봉이 처음이다.
이상봉의 파리 도전은 우리가 가장 힘들었을 때인 1998년 IMF 시기에 처음 시작되었다. 국가적 위기를 겪고 있을 때 그는 오히려 대담하게, 해외에서 활로를 찾으려고 했다. 전세계 바이어들이 몰리는 프레타포르테 살롱 전시회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9년 동안을 한결같이 참가해오고 있다. 그리고 프레타포르테 쇼에는 2002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해서 06-07 F/W 시즌까지 총 9회의 쇼를 통해 세계적 디자이너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의 창의적 도전정신과 예술적 실험정신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지만, 그의 성실함과 열정적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 2월 26일 오후 1시 30분, 루브르 박물관 앞에 있는 오페라 거리의 써클 리퍼블리칸에서 개최된 이번 시즌 프레타포르테 이상봉 쇼에는 총 45룩 120 피스의 새로운 디자인의 옷들이 선보였다. 지난겨울 사무실 근처의 선릉역에 산책 나갔다가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이번 쇼의 컨셉은 윈터트리로 정했다. 모델들이 워킹하는 페덕에 인공눈을 뿌려 놓고 쇼에 선보이는 의상 원단에는 앙상한 겨울나무를 인쇄했다. 겨울나무와 함께 이상봉이 요즘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한글이다.
[한국적 미가 집대성 된 것이 한글이다. 자음과 모음이 조화롭게 배치된 시각적 미도 뛰어나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한글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 옷으로 외국인에게 한글을 입혀보려고 한다. 바이어들도 한글이 프린트 된 옷들이 예쁘다며 주문을 많이 한다. 그동안 내가 받은 편지를 다시 읽다 보니까 가수 장사익, 화가 임옥상씨의 글씨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들의 편지 글씨에 칼라를 넣고 재창조해서 이번 쇼에 출품했다. 우리는 우리 것을 스스로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영문 글자가 들어간 옷은 선호하면서 왜 한글이 들어 있는 옷들은 멀리하는가?]
한글이 등장한 옷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 파리 프레타포르테 이상봉 쇼 전체에 출품된 옷에는 전부 한글이 프린트되어 있다. 이런 전면적 시도는 처음이다. 그리고 그 옷들은 세계 패션계의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한 사람의 패션 디자이너가 수 백 명의 외교관 이상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상봉은 정부로부터 임명장을 받지 않은, 한국의 문화대사다.
[이상봉은 더 이상 한국 디자이너가 아니다. 그는 세계적 디자이너다]라고 말한 사람은 파리의상조합협회장 디디에 그랑빅이다. 이상봉의 옷들은 특히 상업성과 예술성의 조화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상봉의 프레타포르떼 쇼 중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것은 2003년 가을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서 개최된 2004 S/S쇼였다. 패션쇼는 항상 두 계절을 앞질러 개최된다. 이상봉은 그때 한국의 전통적인 무당 굿판을 패션쇼에 도입해서 파리 예술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샤머니즘의 색채가 진하게 묻어나는 옷들뿐만이 아니라, 무대 입구에 설치된 당산나무는 그 뛰어난 조형적 아름다움으로 무대를 지배했다. 그리고 강렬한 원색과 동양적 신비, 섹시함이 조화된 그의 옷들이 걸어나왔다.
그때부터 프레타포르테에서 이상봉 패션쇼는 가장 인기 있는 쇼가 되었다.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한다고 저절로 세계적 디자이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파리 예술계의 통과제의를 거친 후 비로소 인정을 받았다. 이제는 유행을 창조하고 새로운 룩을 만들어내는 유럽 최고의 패션 스타일리스트 패티 일슨도 쇼가 끝나면 백스테이지까지 찾아와 인사를 하고 갈 정도가 되었다.
[우리나라 패션이 발전하려면 예술과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패션의 매력은 예숦과 산업의 조화에 있다. 패션은 문화의 척도가 되면서 그 나라의 경제적 부를 가늠할 수 있는 산업화의 척도가 되기도 하다. 국내 패션산업은 성장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비하면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패션을 옷으로만 생각한다. 패션은 그 시대의 전체적인 생활패턴이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 전체가 패션이다. 화장품도 패션이고 악세서리, 인테리어, 건축, 영화도 패션인데 지나치게 협의의 개념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외국에서는 패션쇼를 박물관, 축구장 같은 곳에서도 한다. 정치인들도 패션쇼에 자주 참석한다. 문화 콘텐츠 전체를 패션의 개념으로 보고 항상 깨어있는 창조정신으로 역동적 패션을 만들어나갈 때 우리는 문화강국이 될 수 있다.]
나는 이상봉의 이런 점이 좋다. 그는 이렇게 늘 움직인다. 대부분의 문화종사자들이 어느 정도 사회적 명성과 지위를 얻으면 그때부터는 수성에 들어가서 기득권에 연연한다. 자기가 가진 것들을 지키기만 하려는 보수적 자세로 변한다. 그러나 이상봉은 그렇지 않다. 내가 그의 작업을 특별히 눈여겨 본 것은 십여년전, 무용가 홍신자가 주최하는 죽산국제예술제에서였다. 야산의 골짜기를 배경으로 모델들이 입고 나온 그의 옷들은 너무나 실험적이었고 너무나 아름다웠다.
우리는 1997년 홍대 앞 녹색갤러리에서 함께 작업한 적도 있다. [발전소]라는 내 시집을 홍대 교수이며 조각가인 고경호가 시각예술로 만들어 전시를 했었는데 나는 오프닝 퍼포먼스를 이상봉에게 부탁했다. 옥상에서 바이얼리니스트가 연주를 하고, 갤러리 입구 주차장에서는 두 명의 남녀 모델이 퍼포먼스를 했다. 여자는 천으로 몸을 칭칭 감고 있었고 남자는 거의 알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각각다른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자 두 사람 사이에 연결된 끈이 풀리면서 여자는 알몸이 되고 그녀가 입었던 옷은 남자에게로 옮겨가는 뛰어난 퍼포먼스였다. 그는 이렇게 디자이너이면서도 각종 예술할동에 끊임없이 참가해서 옷을 통해 시대의 예술정신을 표현해왔다.
[일본은 세계적 디자이너들이 많이 나왔다. 중국은 막강한 인력과 투자로 .세계적 브랜드의 생산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한류에 아직까지 패션은 없다. 저개발국들이 개발도상국으로 올라갈 때 가장 집중적으로 노력하는 부분이 패션 산업이다.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자금 회전도 빨라서 국가적 성장에 패션을 중요시한다. 중국 인도 베트남 .터키 그리스 루마니아 의 패션 산업은 아주 발달해 있다. 우리나라도 같은 경로를 거쳤지만 그만큼 세계적 디자이너들이 배출되지는 못했다. 산업으로서의 패션이 아니라 문화로서의 패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상봉의 옷을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은 중동의 왕족이나 부호들이다. 그의 강렬한 원색과 대담한 디자인에 끌린 것이다. 할리우드 톱스타들도 이상봉의 고객이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힐러리 스윙크는 물론 제시카 알바, 제니퍼 로페즈 등 국내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여배우들이 그의 옷을 입고 있다.
[디자이너가 가장 민감한 것이 칼라다. 내가 빨강을 사랑하게 된 것은 어린시절 경험한 불때문이었다. 동네의 제일 큰 공장에서 불이 났었다. 그때의 불구경이 내 무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집에 불이 났다.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불을 보고 있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불이 꺼지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벽은 검게 글을려 있고 진화하기 위해 뿌린 물이 무릎까지 찼다. 나에게 불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친근감의 대상이다. 검정과 빨강이 그래서 좋다.]
나는 그의 예술적 힘이, 항상 자신을 새롭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사무실에 가 보면, 투자가치로 산 예술품이 아니라 그의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있는 여러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구형 타자기에 흑백 모니터를 집어넣고 알몸의 남녀가 워킹하는 모습이 나오는 콘스탄티노 시에르보라는 독일 작가의 비디오 아트는 너무나 탐이 날 정도였다.
이상봉 에스프리의 원천은 원이다. 그의 옷에는 둥근 원형의 무늬에 바탕을 두고 디자인된 것들이 많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환생에 대한 열망이 표현된 것이다. 어쩌면 그는 전생에 앵무새였을까? 가끔 그의 빡빡머리 위에서 노는 앵무새의 이름은 오월이다. 그 외에도 빨강색 칼라가 매혹적인 뉴질랜드산 앵무 한 쌍이 더 있는데 이름은 상, 봉.
[올해는 여행을 많이 다니려고 한다. 특히 가고 싶은 곳은 티벳이다. 그리스와 터키도 꼭 가고 싶다. 올해는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질 생각이다.]
하지만 창조적 디자이너에게 휴식은 더 무서운 창조의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계 패션계의 한 복판에 진입한 이상봉. 그의 날개가 더 힘차게 날아오를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