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오늘날은 문자의 시대이다
*(책)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데리다가 보기에 음성중심주의의 해체는 음성에 짓눌려 가치가 폄하되었던 ‘문자(데리다는 문자를 글자(lettre), 글쓰기(écriture), 그람(gramme) 등 다양한 용어로 사용함)’의 발흥과 관련이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미 이집트 시대부터 문자는 인간에게 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대화편 《파이드로스》(Phaidros)에서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BC 399)의 입을 빌려 문자와 관련된 이집트의 신화를 소개한다.
이 신화에 따르면 이집트의 왕 타무스는 철저하게 문자를 금지하고 어떠한 명령도 문자가 아닌 말에 의해서 직접 전달하도록 했다.
그러나 타무스가 전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자리를 비운 사이 그를 대행한 아들 토트가 문자를 보급하였다.
타무스가 문자의 보급을 반대한 것은 문자가 말을 대신할 경우 문자의 특성상 말을 하는 사람 없이도 어떤 사실이 마음대로 유통되고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타무스의 권위를 빌려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나타나서 궁극적으로는 타무스의 권위 자체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자가 말을 위협하게 되어 말의 생생한 현전성(現前性)을 파괴할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이집트의 신화에 반영된 것이다.
플라톤이 이 신화를 예로 든 이유는 바로 문자가 지닌 위험성을 고취하고 음성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문자를 오늘날 약의 의미를 지닌 ‘파르마콘(pharmakon)’에 비유하였다.
그런데 이 파르마콘은 단순히 몸에 좋은 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독당근’처럼 몸에 이로운 것이자 동시에 해로운, 이중적인 특성을 지닌다.
사실 알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먹는 어떤 약도 그러하다.
심장약은 심장을 낫게 하지만 신장에는 간혹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진통제는 위에는 독이다.
이처럼 플라톤은 문자를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토트가 타무스 왕의 권위를 찬탈하는 위험한 대리인이자 보충인이듯이 문자는 음성의 위험한 대리물이자 보충물이다.
데리다는 오랫동안 이어진 플라톤의 전통을 전복하고자 했다.
문자가 음성의 위험한 보충대리물(supplément)이 아니라 오히려 음성이 문자라는 보충대리물의 보충대리물이라는 것이다.
데리다의 논리는 이러하다. 타무스 왕이 비대해진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대리하는 보충대리인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방 관리는 왕의 보충대리인이다.
하지만 정작 지방 관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왕의 낙관이 찍힌 문서 없이는 자신의 권위도 없다는 점에서 왕이 자신의 보충대리인이 된다.
말하자면 왕은 자신의 보충대리물인 지방 관리의 보충대리물이 된 것이다.
음성과 문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음성은 확장을 위하여 문자라는 보충대리물이 필요하지만 문자는 현존하지 않는 발화자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음성이라는 보충대리물이 필요하다.
어떤 것의 대리물도 아닌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음성이 하나의 보충대리물로 전락한 것이다.
문자란 음성과 달리 태생적으로 다른 것의 흔적을 담고 있다.
발화자가 없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문자란 항상 발화자와 상관없는 맥락으로 해석되거나 덧씌워지기도 하고 자의적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문자란 애초에 이물질이 들어간 것으로서 순수한 내면의 소리인 음성과는 다르다.
하지만 데리다는 흥미롭게도 서구의 전통적인 가치로 숭배받던 음성 또한 알고 보면 애초에 다른 것의 흔적이 개입된 문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미 음성 자체가 문자의 보충대리물이라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서구의 보편적인 가치로 숭상받는 음성의 절대적 권위가 해체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제 남는 것은 문자밖에 없다.
세상은 음성이 아닌 문자로 가득 차 있을 뿐이며, 문자는 그것을 발화한 발화자 없이 그저 제 마음대로 떠돌아다닐 뿐이다.
그러한 문자에는 음성과 달리 발화자가 명시한 고정된 의미가 없으므로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문자의 확고부동한 의미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며, 문자의 의미는 그저 다른 문자들과의 유희를 통해서만 발생할 뿐이다.
데리다는 이를 ‘책(livre)’이라는 전통적인 텍스트를 새로운 ‘텍스트(texte)’의 개념과 비교하면서 보다 명확하게 구분한다.
책이란 음성중심주의를 나타내는 일종의 은유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을 때 그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한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알아채는 것이다.
말하자면 발화자의 내면을 나타내는 것이 책이라는 점에서 책에 쓰인 글은 결국 음성인 셈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오늘날 이러한 책의 은유는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소설, 추상화, 현대적인 영화가 보여주듯이 모더니즘 이후 저자는 자신의 의도를 확고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열린 텍스트를 생산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텍스트의 의미는 쓰거나 그릴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라는 타자가 개입할 때 만들어진다.
텍스트를 쓰는 것은 저자가 아닌 독자인 셈이다.
따라서 텍스트를 이루는 것은 발화자의 내면이 담긴 음성이 아니라 발화자가 부재한 우발적인 문자다.
데리다의 이러한 생각은 건축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건축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궁극적으로 문자에 대한 데리다의 발상과 일치한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로버트 벤투리의 건축론은 음성중심주의에서 문자로의 이동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개막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저서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tecture, 1977)에서 벤투리가 주장하는 핵심은 건축의 모든 요소는 음성처럼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대가들의 건축물을 보면 기둥은 기둥이라는 고정된 음성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천장을 받치는 것과 무관한 장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계단은 층간의 연결을 위한 보조 공간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개방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옥의 대청마루는 경우에 따라서 방이 될 수도 있고 거실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마당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모호함은 벽은 디자이너에 의해서 벽으로 설계(발화)되었으므로 다른 무엇이 아닌 벽일 뿐이라는 음성중심주의적 태도와 상반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궁극적으로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전복이며, 세상을 문자로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