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1편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제목은 언급하는 곳 중 하나의 특징을 잡아서 달아본다. 용강서원에서 나와 권필묘를 찾지 못하고 이천우묘를 들러 숙종의 부인 장희빈의 아버지 장경을 비롯한 인동장씨 집안사람들이 묻혀 있는 묘역을 찾았다.
장희빈의 친정아버지 옥산부원군 장경 신도비 및 묘의 주소지는 일산동구 중산동 산 96-2번지다. 이 주소를 어떻게 확인했는지는 자료를 남겨두지 않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실제 묘소의 주소와 일치한다. 다만 이 묘역의 정문 앞은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2’이며, 이쪽에 철책과 출입문이 있는데, 문이 열려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나는 위 주소를 입력하고 갔는데 '일산동구 중산동 1(성석로 77-9)'로 안내되었다. 공터 아래에 TIME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있었다.
이쪽이 정상적인 진입로는 아닌 게 길이 제대로 없었다. 계곡으로 내려서서 계곡을 따라 조금 내려간 뒤 오른쪽으로 올라가니 너른 묘역이 보였다. 신도비는 남쪽 묘역 초입에 있고, 장경의 묘는 서쪽 위에서 두 번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 묻힌 장경(張烱[장형으로 읽기도 한다. ‘烱’은 ‘炯(형)’과 같은 글자라는 글도 보이고, 그렇지 않으며 ‘형’으로 읽으면 안된다는 글도 보인다. 더 이상 찾아볼 여력은 없지만 분명 이 분의 이름을 ‘경’이건, ‘형’이건 둘 중 하나로 읽었을 텐데 집안에서는 어떻게 읽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하에서는 장경으로 적는다.] 1623년 2월 25일~1669년 1월 12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통역관이다. 희빈 장씨, 장희재(張希載), 장희식 남매의 아버지이며 경종(景宗)의 외조부이다.
막내딸이 숙종의 후궁이 되어 낳은 왕자가 숙종의 원자로 정해지면서 원자의 외할아버지로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 되었다. 숙종 15년(1689년), 숙종의 계비 민씨(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원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왕비로 정해지자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가, 갑술환국의 여파로 폐비 민씨가 왕비로 복위하고 왕비 장씨가 다시 희빈으로 강봉되자 장형의 부원군 교지도 처분되었다. 본관은 인동이고 시호는 안헌(安憲)이다.
장경은 사역원 역관이었다. 신도비에는 그의 최종관직이 종9품 부봉사로 기록되어 있지만, 아들 장희식의 역과 취재 기록에는 정9품 봉사로 기록되어 있다. 병으로 일찍 퇴직하고 집에서 음률을 즐기며 지내다가 1669년 1월 12일에 사망했다. 거문고를 즐겼다고 전한다. 재취 부인 소생인 막내딸 옥정을 궁녀로 보낸 것으로 전하는데, 그가 죽기 전에 사촌형 장현의 권유에 따라 옥정을 궁녀로 만든 것인지 그의 사후에 옥정이 궁녀가 된 것인지는 의견만 분분할 뿐, 명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현의 딸도 효종 때에 나인이 되어 숙종 때 상궁으로 있었다.
아버지 장응인(張應仁)은 선조~인조 때 활약한 유명 역관으로 그의 이름과 행적이 통문관지에 기록되어 있다. 외가도 중인으로 벼슬을 한 집안이고, 재취 부인 윤씨의 친정아버지 윤성립도 사역원 종4품 첨정으로 왜학 역관이었다. 윤씨의 친정어머니 변씨는 부호 역관 변승업의 당고모였으며, 역관의 신분으로 종1품 숭록대부에 오르고 더 이상 진급을 할 수 없어 그 공이 아들 뿐만 아니라 조카들에게까지 넘어갔다는 거물 역관이자 국중거부라는 별칭을 얻은 갑부 역관 장현은 그의 사촌형이다. 한 마디로 엄청난 富를 누린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사별한 부인 고씨에게서 1남을, 재취 부인인 윤씨에게서 1남 2녀를 두었다. 재취 부인 소생인 막내딸이 바로 희빈 장씨이다. 전실 고씨가 낳은 아들인 장희식(1640~?)은 18세의 나이로 1657년 역과식년시에 장원을 한 수재였지만 일찍 요절하였다. 윤씨에게서 훗날 김지중에게 출가한 장녀 장씨와 차남 장희재(1651년~1701년), 차녀이자 막내딸 옥정(1659년~1701년)을 보았다. 차남 장희재는 역과가 아닌 무과에 급제하여 경신년(1680년)에 내금위에 있었다.
사후 궁녀였던 막내딸이 숙종의 후궁이 되어 1688년 10월에 왕자를 생산하는데, 이 왕자가 바로 조선 20대 임금인 경종이다. 1689년 1월, 숙종이 서자인 이 왕자를 원자(元子: 왕의 적장자)로 삼은 것이 원인이 되어 1689년 2월 2일에 기사환국이 발발했다. 같은 날인 2월 2일, 숙종은 원자의 외조부인 장경을 정1품 영의정으로, 장경의 아버지 장응인을 정1품 우의정으로, 장경의 할아버지 장수를 정1품 좌의정으로 각각 추증하였다.
1689년 5월 2일, 송시열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던 숙종의 계비 민씨(인현왕후)를 끝내 폐출한 숙종은 5월 6일 새로이 계비를 간택하지 않고 원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할 것을 선포한다. 권대운 유명헌 등 남인이 반대하여 책봉을 3년 후로 연기하기로 하였지만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버지인 장경을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으로, 전처 고씨(高氏)는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을 추증하였으며, 윤씨(尹氏)는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으로 봉하여 희빈 장씨가 비공식적이나마 이미 왕비임을 포고하였다. 1691년 9월 장경의 묘소에 옥산부원군 신도비가 세워졌다.
1694년 4월 1일, 갑술환국이 발발하여 집권당인 남인이 출척되고 다시 서인의 독점 정권이 세워졌다. 4월 11일, 숙종은 포도대장 장희재가 국가죄인 이시도에게 사사로이 형벌을 가했다는 이유로 긴급 체포하라 명하고, 이와 동시에 앞서 4월 9일에 궐 안 서궁(西宮)에서 지내게 해도 좋다고 허락한 폐비 민씨(인현왕후)의 입주 날짜를 길일과 상관없이 다음날로 당겨 옮기도록 하고 폐비 민씨의 처소에 호위를 배치했다. 다음날인 4월 12일에 그녀가 서궁으로 입주하자 숙종은 즉시 인현왕후의 복위를 선포하였다. 동시에 왕비 장씨는 국모가 두 명일 수 없다는 국법과 인현왕후가 먼저 왕비였으며 왕비 기간도 더 길었다는 이유로 1계급 강등되어 다시 희빈이 되었고, 장형 부부의 부원군 부부인 교지도 소각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숙종은 부원군으로 새겨진 장경의 묘비와 옥산부원군의 신도비의 처분을 허가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묘비를 철거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와 비판이 쇄도했으며 묘비가 훼손되거나 넘어뜨려지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였다. 1696년에 발생한 장경의 무덤 방자 사건은 이러한 배경의 연장으로, 처음엔 노론 병조판서 신여철의 종 응선의 범행으로 판결되어 제주에 유배되어 역질로 추정되는 병을 앓던 장희재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동정론이 일어나던 중에 이 사건이 장희재가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는 주장이 생겨나 상황이 역전되고, 장희재는 아비의 무덤을 훼손한 강상의 죄와 세자를 저주한 대역죄 그리고 노론을 무고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형될 위기에 처해졌다가 소론의 변호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1701년 무고의 옥으로 희빈 장씨가 죽은 후 장희재가 압송되자 다시 거론되어 장희재의 처 김씨(작은아기)의 증언으로 장희재의 죄로 판결되어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제주(祭主)였던 아들 장희재가 처형되고 손자들도 유배되기에 이르자 숙종은 장희재의 재산 일부를 내어주고 장경의 신주와 제사를 장희재의 동복 누나의 남편인 김지중과 그들의 아들에게 기한적으로 맡도록 하였다. 장경의 묘소는 장씨 일족의 묘산이었던 서울 은평구에 소재하였으나 개발바람에 밀려 이곳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전처인 제주 고씨, 후처인 파평 윤씨와 셋이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묘소의 석물은 별 다를 것이 없지만 장명등만은 눈여겨 볼만하다. 석등은 전체적으로 6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복련이 새겨진 하대석 위에 대나무 줄기를 닮은 두 마디 간주석이 올려져 있다. 그 위에 앙련을 새긴 받침을 밑에 둔 6각형의 상대석이 있고, 역시 6각형으로 된 화사석과 옥개석을 쌓아 마무리하였다. 화사석에는 3면에 화창을 냈고, 나머지 3면에는 문양을 새겼다. 조성연대가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묘역 아래 있는 신도비는 일단 규모가 거대해 보는 이를 압도하게 한다. 今上의 장인, 國舅의 신도비로 세웠으니 규모나 정성이 대단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액은 ‘옥산부원군 신도비조선국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옥산부원군 시호 안헌 장 공 신도비명과 서문’라고 되어 있다. 내용 중 일부를 옮긴다.
지금의 왕(숙종) 16년 경오년(1690년) 2월 25일 왕이 조정에 명령했다. “국구(國舅: 왕의 장인) 옥산부원군의 묘소로 가는 길 오른쪽이 비었는데 석물을 갖추지 못했으니 내사가 맡아서 처리하고, 태학사 민암은 비명을 짓고, 호부 상서 오시복은 글씨를 쓰고, 공부 우시랑 권규는 전액을 쓰라.” 민암은 실로 황공하여 삼가 머리를 조아리며 쓴다.
공의 이름은 경(烱)이고 자는 백야(伯夜)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엄숙했으며 총명이 뛰어났다. 10살에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글을 두어 번만 읽으면 당장 줄줄 외우곤 했다. 가훈을 마음에 새기고 문밖을 나가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만 하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며 어른처럼 의젓하니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다. 장성해서는 관직이 사역원부봉사가 되었다.
공의 종형제들은 돈을 많이 모아 일국의 갑부가 되었다. 그러나 공은 늘 청빈한 생활을 하며 재산에 마음을 두지 않고 분수에 자족하며 부러워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병이 나자 조용한 방에 가만히 앉아서 거문고와 노래를 즐기니 세상 사람들이 남북완이라고 불렀다. 기유년(1609년) 정월 12일 병으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47세였다. 불광리(佛光里: 현재 서울 은평구 불광동)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 선영 옆에 장례 지냈다. 나중에 영의정 옥산부원군에 추증되었고, 앞서 말한 것처럼 3대가 추은(推恩)을 받았다. 왕의 장인으로서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절충 고성립(高誠立)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아들 희식(希栻)을 낳았는데 희식은 후사 없이 요절했다. 두 번째 부인 윤씨(尹氏)는 사역원첨정 성립(誠立)의 딸이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둘째 딸이 바로 왕비(장희빈)이다.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대궐에 들어가 성장한 뒤 비빈의 자리에 올라 원자를 길렀다. 성스런 성품을 타고 났으니 실로 우리나라의 무궁한 복이 아닐까? 무성하구나! 첫째 딸은 관상감 직장 김지중(金志重)에게 출가하여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둘째 아들 희재(希載)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재 훈련원부정 겸 내승이고, 사과 김덕립(金德立)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3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옛말에 “선을 쌓은 집안은 남은 경사가 있다.”라는 말이 있고, “공후(公侯)의 후손은 반드시 복을 누린다.”는 말도 있다. 덕령공의 굳은 절개는 후손들을 창성하게 하여 몇 세대를 내려와 의정공에 이르자 밝게 빛나진 않았지만, 삼대 째 쌓은 덕이 한데 뭉쳐서 성녀가 탄생하여 국모가 된 것이다. 참으로 집안과 국가의 경사이고 은택이 자손에게 미친 것으로 천도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명왈(銘曰),
화산 높이 솟아 왕성의 진 되고 한 갈래 서쪽으로 무성한 숲 되었네 하늘이 좋은 땅 열어 공의 선영이고 줄기 따라 산기슭에 정기 모였네 하늘이 일을 하여 궁중의 빈 되니 집안의 상서로움 문중의 경사라 모두가 덕령군의 절개 때문이네 성쇠에 따라 세상도 대우하는 법 떨치지 못하다가 갑자기 창성하니 쌓은 덕으로 인해 빛 더욱 밝았네 오직 나라의 복이요 집안의 경사라 예전에도 드문 일 사람들이 놀라네 백세 뒤의 사람들 이 비문 살펴보라
숭정기원 무진년 후 64년 신미년(1691년) 9월 일 세움.
장경의 묘 위에는 한 기의 묘가 더 있다. 위치로 보아 그의 선대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할아버지인 장수의 묘다. 좋은 말만 써놓을 수밖에 없는 비문이지만, 장경의 신도비문에 따르면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된 조부 수(壽)는 성품이 중후하고 모습은 의젓하였으며 마을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서서 바로잡아 주었다. 공이 한 마디 말로 결판을 내니 비록 패한 자들도 마음속으로는 승복했다. 80세가 넘을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가의대부에 제수 받았고, 흰 눈썹과 흰머리가 빛나는 빼어난 모습으로 거리를 지나가면 마치 지상에 나타난 신선 같았다.
장경의 아버지로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된 행 첨지중추부사 응인(應仁)과 사촌으로 거부였던 장현의 묘역은 어디인지 확인해보지 못했다.
장경의 묘에서 머잖은 향토문화재 제13호 홍이상선생묘 및 신도비(일산동구 성석동 산56-1)로 향했다. 먼저 적을 것은 묘역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신도비와 미리 조사했으나 이날 프린트한 목록에는 없었던 정조의 둘째딸 숙선옹주(淑善翁主)와 혼인하여 영명위(永明尉)에 봉해진 홍현주(洪顯周)의 묘를 놓치고 말았다는 점이다. 철저한 준비를 하지 못하면 항상 놓치는 게 많은 법이다.
홍이상(洪履祥)선생묘는 성석동 성동마을의 풍산홍씨묘역에 위치하고 있다. 貞敬夫人 安東 金氏의 봉분과 쌍분으로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 주위로는 둘레석이 쳐져있으며 봉분 앞에는 높이 170㎝, 너비 65㎝, 두께 25㎝ 규모의 묘비가 있다. 홍이상(1549~1615)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처음 이름은 麟祥이며 자는 元禮, 또는 君瑞이다. 호는 慕堂이며 본관은 풍산으로 洪修의 아들이다. 高陽八賢의 한 사람으로 문봉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주위에 이 집안의 더 많은 묘역들이 있지만 홍이상선생의 묘가 있는 묘역은 모두 4기의 묘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최하단에는 홍구(洪龜)라는 분의 묘소가 있다. 홍구는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승의교위, 우령낭장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고려가 멸망할 조짐이 보이자 모든 관직을 버렸다. 그는 고향인 풍산으로 가던 도중 고봉현(高烽縣: 현재의 고양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이곳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부인 상산 김씨(商山金氏)의 묘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홍이상묘의 위, 이 묘역의 최상단에는 홍이상의 부친이 홍수와 어머니 문경백씨의 묘소가 자리한다.
[인용 설명문 출처: 두산백과, 위키백과, 고양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첫댓글 장형 묘의 석등 옥개석 귀꽃은 일본 풍 같아 보입니다. 희빈이 인동(옥산) 장씨였군요. 제 10대 조모님이 옥산 장씨 할머니인데 ㅎㅎ
10대 조모님 본관까지 꿰고 계세요?
저도 족보 좀 들여다봐야겠습니다^^
잘 살아보겠다는 이들의 눈물나는 싸움.....
이를 막고 나만 잘 살겠다는 이들의 역겨운 싸움....
조선 후기 당쟁사는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현재까지 제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 위에서는 잘 봐줄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