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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9. 추수감사주일
예배로 부름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 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43:3-4)
예배 기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변함없는 사랑으로 저희의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시고, 거룩한 주일 교회로 부르사 주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평생에 주님의 이름을 송축하게 하시며, 주님의 그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거룩한 손을 들어 경배하게 하옵소서. 예배하는 저희는 골수의 기름진 것을 먹음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만족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면류관 벗어서 (25장) /주 은혜를 받으려 (39장)/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86장) / 감사하는 성도여 (587장) /논밭에 오곡백과 (590장) /저 밭에 농부 나가 (591장)
고백의 기도
성전에 나와서 예배하면서, 주님의 탄식하시는 음성을 듣나이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저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베푸신 은혜를 깨닫지 못하여 멀리 떠나 살았습니다. 죄악 중에 거하다가 하나님의 매를 맞아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완악하여 아직까지도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이켜 순종의 길을 걷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제목: 인생을 감사를 꽃피우십시오.
본문: 사무엘하 9장 1-13절
☞ 마음 문을 열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하는 생애로 나아가는 첫 단추를 꿰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감사의 첫 단추를 제대로 꿰어야만 성경이 요구하는 감사의 수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감사를 위한 첫 단추는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성경은 감사의 첫 단추는 ‘인정’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감사는 인정의 산물입니다. 감사의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감사를 꽃피우게 되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인정해야 할까요?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감사를 꽃피우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9장은 다윗이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데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장면이 바로 감사를 위한 첫 단추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다윗은 왕으로 등극한 후에도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힘 있는 통치자가 되기까지 힘겨운 고비 고비를 지나옵니다.
그동안 치열한 삶의 시간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야 조금 한숨을 돌리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다윗은 문득 지나간 세월들을 회상합니다. 우리도 지난 시간을 반추해 볼 때가 있습니다.
지나온 날들의 여러 사건들과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그 중에서도 다윗은 그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 자신을 미래의 왕으로 인정해 주며 목숨을 걸고 자신을 보호해준 사람, 요나단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다윗은 갑자기 신하들을 부릅니다.
“혹시 요나단의 자손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있는지 알아 보거라!” 곧 신하들은 사울 집안의 종이었던 시바가 있다고 보고합니다. 시바를 통하여 요나단의 아들 중에서, 두 다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므비보셋’이라는 아들의 존재를 듣습니다.
사무엘하4:4은 새 정권이 들어서고 사울의 집안이 몰락했을 때 므비보셋을 안고 도망가던 유모가 아이를 떨어뜨려 그만 두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5살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의 아들이었기에 아버지가 왕이 되었다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므비보셋이 몸의 장애까지 안고 소망 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즉시 딱한 처지에 놓인 그를 보살펴 줍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에 므비보셋을 도왔습니다(1,3,6,7절). 늦은 감이 있지만 요나단에게 진 사랑의 빚을 그의 후손에게 갚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는 수소문 끝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극진하게 대접합니다.
므비보셋에게 사울이 소유한모든 땅을 줍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므비보셋에게 왕자들에게나 허락되는, 왕의 상에서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영예를 선사했습니다. 사실 다윗이 이렇게 므비보셋을 대접하면 적지 않은 어려움과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5:8 하반 절을 보십시오. 다리를 저는 자는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면, 장애우가 왕궁의 식탁에 앉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환대할수록 민심은 등을 돌리고, 온갖 여론의 몰매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어리석은 모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므비보셋을 왕궁의 식탁에 앉게 합니다. 그를 왕자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장 어려울 때 요나단이 베풀어준 극진한 사랑과 배려를 생각해 어떤 욕을 먹어도 므비보셋을 환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이 요나단에게 받은 사랑에 비해 그가 므비보셋에게 베푸는 인내와 긍휼은 오히려 작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다윗의 황송한 대접 앞에서 므비보셋은 바닥에 엎드려, “도대체 제가 무엇이라고 죽은 개 같은 존재에게 이렇게 선처를 베푸십니까?”라며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므비보셋이 감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자신의 비천함에 비해 다윗왕의 은혜가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므비보셋이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 같은 비천한 인생이 평생 왕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장애우의 신분에서 왕자 대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이제 므비보셋을 우리에게 대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므비보셋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에는 너무나 죄악과 허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C.S.루이스는 말합니다.
“나는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이기적이지 않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뼛속 깊이 이기적인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그런 존재이기에,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어떤 수고로도, 어떤 공로로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본문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식탁에 앉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죽은 개보다 못한 우리에게 구원의 역사가 펼쳐졌습니다. 우리가 왕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자녀 된 우리가 평생 감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신자 된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첫 단추가 바로 은혜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리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초라한 몰골과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쏟아 부으신 열정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평생 감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 당시에 철저하게 지켜온 금기 사항을 깨뜨리며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를 각오를 하고 므비보셋을 대접했습니다. 므비보셋이 감격할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므비보셋이 평생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다윗이 베풀어준 은총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감사해야 할 존재들일까요? 저와 여러분은 므비보셋보다 더 풍성한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왕의 식탁에 앉게 하시기 위해지불하신 대가는 다윗이 지불한 것과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크고 위대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그 당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만이 달렸던 치욕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상의 손가락질을 묵묵히 견디시며 우리 주님은 우리를 왕의 자녀로 사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한량없으신 은혜는 감사의 고백과 삶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는 내 수고로 얻는 임금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의 작품이기에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정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라면 ‘자랑’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므비보셋 같은 이가 오직 왕의 선처로 왕의 식탁에 앉게 된 것이기에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은혜란 한마디로 인과율이 아닙니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를 얻으면 그것이 인과율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원리입니다. 율법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내가 의로워서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이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인과율이 아닙니다. 나에게 어떤 원인이 없는데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의 선물을 얻게 된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인해”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푼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하여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쏟아 부으십니다. 우리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의 자리로 초청해 주셔서 복덩이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은혜 때문에 위대해진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분노하시다가도, “예수님으로 인해”,“그분이 지불하신 십자가로 인해” 우리를 선대하십니다. 그래서 진노 받아 마땅한 우리를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은혜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나오는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인정해야 영혼 깊은 곳에서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환경이 좋을 때만이 아니라 어떤 환경을 만나도 여전히 은혜 안에 있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잘 될 때는 은혜를 베푸시고 순풍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이 역풍의 자리에서도 우리와 동행하심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인정하는 사람은 휘몰아치는 풍랑조차도 나를 무너뜨릴 수 없음을 확신합니다.
또한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항해하시는 우리 주님으로 인해 감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은혜가 감사의 첫 단추임을 강조했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만으로도 우리는 평생 감사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은혜 위에 어떤 것이 덤으로 주어지지 않아도, 우리는 마땅히 감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가 당연시 되고, 은혜의 감격보다는 여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감사를 잃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엄청난 은혜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감사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늘 생각해야합니다.
3. 감사를 꽃피우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므비보셋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를 연결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감사를 연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본문 어디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교훈이 숨어 있을까요?
이를 위한 실마리는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더라”는 구절입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므비보셋은 평생 기막힌 감사의 조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그 당시에 금지사항이라고 할 수 있는 다리 저는 자로 왕궁의 식탁에 앉는 대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를 퍼 올릴 수 있는 마르지 않은 은혜의 샘이 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므비보셋은 감사하며 살기가 쉬웠을까요?
본문은 이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지만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므비보셋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자신이 위대한 은혜의 수혜자임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자신은 두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인생일 뿐입니다.
위대한 은혜를 인정할 때는 감사하다가도 초라한 자신의 형편으로 눈이 돌아가는 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섭섭함이 밀려옵니다. ‘유모가 나를 떨어뜨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불편함은 없었을 것을…. 이렇게 은혜로 나를 대접해 주시는 분이 왜 나에게 있었던 그 불행한 사건을 막아주지 않았을까?’
이것이 므비보셋이 평생 마음에 품고 있던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므비보셋은 자신이 지금 누리는 것을 당연시 하고, 하나님의 불공평한 인도하심에 대한 질문이 커지면서 감사를 서서히 잃고, 대신에 원망의 모습이 늘어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므비보셋은 하나님을 향한 진한 감사와 처절한 자기 연민 사이를 왕복 여행하며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막힌 은총에 감격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다가도, 순간 마음이 격동하여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마주할 때, 불공평하게 자신을 대우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원망의 마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그에게 있는 아픔과 고통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기에 감사하는 시간과 감사 없음의 자리를 마치 열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듯 살았을 것입니다. 그의 심령에 은혜가 충만할 때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격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배터리가 방전되었을 때는 스스로 힘으로 한 걸음도 우아하게 걸어갈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몰골로 인해 심히 분노했을 것입니다. 불편한 다리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자신을 향한 연민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므비보셋과 우리의 또 다른 공통점입니다. 무가치한 자로 은혜를 받은 것이 한 가지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은혜를 받았으나 수없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방식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감사를 잃고 사는 것이 또 다른 공통점입니다.
우리는 그 한량없는 은혜의 자리에 있음에도 늘 감사를 놓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은혜의 역사가 승리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언제나 포만감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죄를 저지르며 사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그 풍성하고 놀라운 은혜를 망각합니다.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를 잃게 됩니다. 여전히 내 앞에 있는 이루지 못한 소원과 불편한 상황 때문에, 고작 하나님의 은혜가 이것 밖에는 안 되느냐고 항변하는 자리로 떨어집니다.
은혜로 왕의 식탁에 앉게 되었지만, 여전히 온전히 걸을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은 그대로 떠안고 살아가야 하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이상 그다지 감격스럽지 않은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시시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감사는 마치 여름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메마르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관리하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늘 은혜로 인해 당장에 누리게 될 혜택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혜택이 편안한 세상살이를 보장해 주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을 때 실망합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차라리 예수님 없이 세상에서 잘 될 수 있다면 그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은혜로 편한 삶이 보장되지 않거나 오히려 은혜 받고 나니 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생기게 될 때, 감사 대신에 탄식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에 대해 분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감사의 자리로 갈 수 있는 또 다른 첫 단추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를 이끄실 수 있는 자유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머니 속에 넣고 만지작거릴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껏 조작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도 내가 따라야 하고 경배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뜻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를 무슨 용도로 쓰셔도 우리는 따라야 합니다. 다른 이들과의 비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은혜 안에서 한평생 건강하게 사는 사람과 질병과 싸우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 안에서 큰 교회를 하는 사람과 개척 교회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 안에서 사업의 대박을 이룬 사람과 사업이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으로 말하면, 은혜 안에서 식탁에 앉은 왕자들 가운데, 태어날 때부터 왕궁에서 자란 다윗의 아들들과 5살 때 불의의 사고를 겪은 생애를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닌 주님이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나를 이렇게 이끄시는지 아직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통해서 하고 싶으신 특별한 사역과 독특한 배역이 있어서 우리를 캐스팅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평생 불편한 므비보셋과 같은 인생의 길에서도 감사를 놓치지 않게 됩니다.
므비보셋은 의롭고 잘 난 사람의 배역은 아닙니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왕족이지만 숨어서 살아야 했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몸이 불편한 배역을 맡은 사람입니다. 감사하며 살 이유만큼 감사하지 못할 이유를 가진 것입니다.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하지만 살아온 환경을 생각하면 감사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감사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불평의 문이 닫히게 됩니다.
그가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장애를 안고 살았기에, 그런 사람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환대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써 내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 안에서 그에게 부여된 배역의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는 그 강력한 교훈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편지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는 사람이 된 것이 감사의 대목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은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소원과 내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어찌 하든지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꿈과 하나님의 사역이 펼쳐지는 것을 더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 어떤 자리에 있든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하고 싶으신 일에 쓰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 갈무리
추수감사절입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하지만, 절기를 통하여 감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감사는 은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꽃피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가운데 점이 있는 종이 한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무엇이 보입니까?
다들 점이 보인다고 합니다. 흰 종이가 보인다고 하는 분이 없습니다. 이 점을 지적하면서, 조지 버트릭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 검은 색의 상처만 볼 뿐 널리 퍼져 있는 자비는 잊어버린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 있는 점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그분의 은혜와 선하신 통치 때문에 감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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