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연출, 이야기의 3박자가 어우러진 영화
<아이덴티티>는 90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상영 시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빡빡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잘 짜인 스릴러영화다.
쏟아지는 폭우로 인해 모텔에 고립된 10명의 사람들, 이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 등 <아이덴티티>는 고전적인 스릴러의 꼴을 갖췄다. 그러나 영화의 반전에 이르면 이 고전 추리극은 답을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단순한 스릴러물인 줄만 알았더니 판사가 등장하면서 사이코 드라마로 번지 점프를 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지닌 장르로 결말을 맺는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관객들을 위해 자세한 내용을 언급할 수는 없지만 <아이덴티티>의 진짜 정체는 스릴러와 사이코 드라마의 절묘한 배합에 있다. 90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상영 시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장치와 상징을 밀어넣은 탓에 오히려 빡빡한 느낌이 들 정도다. 폭우로 인해 모텔에 갇혀 있는 10명의 사람들처럼, 관객 역시 폐소공포증의 긴장감 속에 매끈한 장르 영화 한 편을 감상하는 것이다.
<아이덴티티>의 기본 줄거리는 잘 알려진 대로 추리 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따왔다. 국내에서는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인디언 섬에 초대된 8명의 사람들과 손님들을 접대한 하인 부부가 차례차례 죽음을 맞이하는 기괴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람들이 죽어갈 때마다 인디언 인형이 하나씩 사라진다. 결국 10명의 사람 중 생존자는 하나도 없는, 그래서 범인도 찾을 수 없는 미궁을 만드는데 사건의 전말은 병 속의 편지를 통해 그것을 줍게 된 제3자의 눈과 입으로 풀이된다. <아이덴티티>는 모텔에 모여든 10명의 사람들과 1명의 모텔 주인이 방의 번호가 새겨진 열쇠를 남긴 채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의 결말을 고스란히 베낀 것은 아니다.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의 모티프는 워낙 많은 추리물에서 응용된 적이 있어 내용을 바꾸는 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만들어낸 폐소공포증을 영화로 그럴듯하게 옮겨 놓는 데 주력한다. 핸드폰이 연결되지 않고, 폭우로 도로가 유실된 상황, 그리고 모텔에 모여든 10명의 과거 행적 등을 감각적인 화면을 통해 속도감 있게 전개한다.
제임스 맨골드는 국내에서 <처음 만나는 자유>와 <캅 랜드>로 잘 알려진 감독이다.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연한 <캅 랜드>를 통해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그려보기는 했지만 전형적인 스릴러물을 연출한 것은 처음이다. 공교롭게도 국내에서 같은 날 개봉하는 <케이트 & 레오폴드>를 연출하기도 했는데, 걸출한 데뷔작인 <해비> 이후 필모그래피를 보면 할리우드에 적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하지만 최근작 <아이덴티티>가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상업적 재능을 증명했다.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구조나 고전적인 스릴러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덴티티>와 은근히 닮아 있는 영화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와 같은 작품들이다. 이들 역시 반전이나 스릴러 구조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형식을 통해 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다룬다는 사실이 공통점이다. 장르 영화의 경계를 슬쩍 허물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실제와 상상 사이의 차이를 넘나들며 관객들의 허를 찌른다. 미국 내에서도 커뮤니티를 통해 영화에 대한 활발한 정보 교환이 이루어졌는데 국내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 그만큼 <아이덴티티>는 정보를 감추고 노출하는 데 노련한 연출 솜씨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존 큐잭과 레이 리요타와 같은 성격파 배우들이 연기한 인물들의 분위기도 한몫 거든다. 전작들을 통해 익숙하기는 하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어두운 밤 장면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두 배우의 대결은 단단히 한몫 한다. <아이덴티티>는 고만고만한 할리우드영화 중 모처럼 연기와 연출과 탄탄한 이야기의 삼박자가 어우러져 90분을 즐겁게 하는 영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전 영화처럼 결론을 알고 나면 허탈해질 수도 있다. 자고로 영화의 반전이란 의표를 찌르는 것 이상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비밀은 내부에 있다
<아이덴티티>는 영리하고 교묘하게도 살인 사건을 풀만한 열쇠들을 곳곳에 보물 찾기처럼 숨겨두고 있다. 관객은 탐정이 된 것처럼 단서를 찾아 용의자들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게 된다.
미국 네바다주의 외딴 모텔에 10명의 사람들이 폭풍우를 피해 들어온다. 허영기 가득한 여배우와 그녀의 운전사, 서먹서먹한 신혼부부, 사고를 당한 부부와 아들,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매춘부, 폭력적인 경찰과 그가 호송중인 살인범이 그들이다. 괴팍한 모텔 주인까지 합하면 모두 11명.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그들은 이상하게도 하나둘씩 살해당한다. 그칠 줄 모르는 폭우로 모텔을 나가기는 불가능한 상태. 거기다가 모든 통신 수단도 끊겼다. 남은 사람들은 점점 공포로 질려가고 서로를 범인으로 의심한다.
영화 데이터 베이스 사이트인 'IMDb'에는 <아이덴티티>에 대한 관객들의 궁금증과 답변이 매일 같이 올라온다. “도대체 아무개는 어떻게 죽은 건가요?” “이해가 안 가는데… 그러니까 범인은 아무개인가요?” 미국 개봉은 지난 4월이었지만 여전히 관객들은 이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안달이다. <캅 랜드> <처음 만나는 자유> 등을 만들었다가 <케이트 & 레이폴드>로 관객의 매몰찬 외면을 받아야 했던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간만에 미소를 짓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는 “이런 영화는 관객과 함께 만들어 가야지, 내 개인적인 기쁨을 위해 만든 게 아니다”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아이덴티티>는 관객으로서 공포와 흥분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영화다. <아이덴티티>는 영리하고 교묘하게도 살인 사건을 풀만한 열쇠들을 곳곳에 보물 찾기처럼 숨겨두고 있다. 관객은 탐정이 된 것처럼 단서를 찾아 용의자들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게 된다. 평범한 예측은 금물. 영화 보기에 앞서 아주 조그마한 단서를 하나 주자면, <아이덴티티>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는 밀실 살인 사건은 <아이덴티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모텔은 갇혀 있는 공간이라기보다 폭우로 인해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심리적인 폐쇄 공간이다. 모두 우연으로 모텔에 모인 것 같은 10명의 사람들은, 실은 자신도 모르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영화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결말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는다. 반전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단서는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우연에서 나온다. <아이덴티티>의 미국 포스터에 적혀 있는 문구를 명심한다면, 퍼즐을 푸는 데 조금 더 유용할지도 모른다. '비밀은 내부에 있다'.
내용출처 - 필름2.0 이상용(영화평론가), 나지언 기자
첫댓글 본 아이덴티티는 아는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