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적
화가의 집에는 민달팽이도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좀 아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런 농담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색감도 없다. 오로지 선으로만 그어놓았다. 그렇다고 해도 단조로움은 없다.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희한하고 얄궂게 그어진 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것은 민달팽이가 물렁물렁한 몸을 끌고 갈팡질팡 살아낸 생의 길이었음을 깨달았다. 가파른 높이를 버겁게 올랐던 선이 보인다. 어쩔 수 없어 기어가야 했던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길도,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벼랑 끝자락도 보인다. 잃어버린 길에서 다시 길을 찾느라 얼마나 헤맸을까. 연한 갈색 페인트로 밑칠된 벽에 온몸을 쥐어짜 밀고 다녔던 끈끈한 점액이 허옇게 말라붙었다. 민달팽이의 고달팠던 삶의 길이 이리저리 뻗어 헝클어지고 꼬여 있다. 거침없이, 과감하게 살아낸 흔적이다.
별 욕심 없이 살아가는 이대로 족했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갖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두 식구가 먹을 만큼의 푸성귀를 심을 작은 텃밭이었다. 지인들이 소유한 땅에 채소 농사를 짓는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부러웠다. 마침 텔레비전에서 아파트 베란다에 채소 키우는 과정을 방송했다. 무료하던 터라 한번 도전해보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빈 상자와 넓은 화분에 흙을 채우고 상추와 토마토, 파, 가지, 오이 모종을 사서 심었다. 자라는 과정을 보려고 시도 때도 없이 베란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갔다. 마음을 써야 하니 시간 때우기도 좋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여린 모종이 쭉쭉 잘 자라니 기특하고 대견하다.
처음에는 실패도 있었다. 층이 높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채소를 키우기엔 조건이 맞을 리가 없다. 풍성한 포기로 키우려 했던 상추는 웃자라 힘없이 널브러졌다. 넉넉한 풋고추를 기대했건만 꽃은 피웠으나 열매는 달지 못했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고서야 요령도 생기고, 채소마다 키우는 방법도 다름을 터득해 갔다. 베란다 문을 열어 자연 바람을 쐬어주고 적당한 물을 주며 알맞게 거름도 주었다. 정성 들인 실내 텃밭에는 초록 깻잎이 무성하고 실한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방울토마토도 조롱조롱 빨갛게 익어갔다. 적은 결실이지만 수확하는 기쁨은 뿌듯하고 넉넉했다.
그런 텃밭에 이상한 기미가 보였다. 고춧잎에 구멍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새싹이 올라오는 순까지 잘라먹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벌레 한 마리 보이질 않았다. 이제는 깻잎까지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베란다 곳곳을 뒤지고 살펴보았지만 범인은 찾을 수 없었다. 밤새 남은 잎을 먹어 치우면 줄기만 앙상해질지도 모른다. 그동안 얼마나 애지중지 기른 채소인데 망쳐놓은 텃밭을 보니 괘씸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가늠해보니 녀석들은 밤에만 행동하는 야행성이 분명했다. 내 이놈들을 기필코 잡아 대역죄를 물어 능지처참하리라.
밤 열한 시 쯤이다. 플래시를 들고 베란다 고추나무를 비춰보다 깜짝 놀랐다. 길쭉한 민달팽이가 고춧잎마다 붙어 느긋하게 배를 채우고 있었다. 또 다른 녀석들은 줄기를 타기도 하고 흙바닥에서 저들의 놀이터인 양 여기저기 기어 다닌다. 앙큼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을 나무젓가락으로 한 마리씩 집어 창밖 숲으로 던져 버렸다. 다 잡았다 싶어 거실에 앉았다가 혹시나 해서 나가면 또 몇 마리가 나타났다. 몇 번을 들락거리며 서른여 마리는 족히 잡은 것 같다. 이후로 밤마다 끝없이 출현하는 달팽이 소탕 작전에 몰입했다. 드디어 치열하게 벌였던 전쟁은 통쾌하게 나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다시 흙을 고르고 열무 씨를 뿌렸다. 오종종히 떡잎이 났다. 민달팽이가 망쳤던 농사를 보상받는 듯 뿌듯하다. 모종을 바라보다 언뜻 고무나무 화분 뒤 벽이 달라 보였다. 화분을 반대쪽으로 옮겨봤다. 80호쯤 되는 베란다 벽에 그어놓은 선들이 예사롭지 않다. 간혹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을 관람할 때의 경험이 떠올랐다. 큐레이터 설명을 듣기 전에는 도대체 무엇을 표현했는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도통 이해가 불가능한 그림들을 숱하게 보아온 터다. 만약 어느 화가가 이처럼 표현했다면 예술작품으로는 그리 손색이 없을 듯하다.
그림은 자유분방하다. 민달팽이도 화가의 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창틈으로 행여 아들의 그림을 훔쳐보았을까. 텃밭의 푸릇한 채소 잎이 뻗어 있는 듯하고, 줄기가 어수선하게 엉클어진 작은 풀숲이 느껴진다.
넓은 들 풍성한 채소밭에서 자유롭고 넉넉하게 배를 채워야 했다. 어쩌다 그들은 협소한 베란다 텃밭에서 빈곤하고 기구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 밤이면 온몸을 밀어 벼랑길인 벽을 타고 이곳 채소밭으로 향했을 것이다. 낮이면 화초에 감쪽같이 몸을 숨겨야 했던 불안은 오죽했을까. 민달팽이에게는 멀고도 험한 고난의 길이었지 싶다. 먹고살자고 잎을 갉아 먹었던 일이 대역 죄인이 되어 내쳐진 가엾은 신세가 되었다. 나는 민달팽이가 사력을 다해 살아냈던 흔적을 보며 굳이 예술로 빗대며 호들갑을 떨었나 싶다. 변명해 보지만 불편한 마음은 오랫동안 애잔하고 목에 걸린 가시처럼 마뜩잖다. 누군가의 숨 가빴던 삶도 다르지는 않았을 텐데.
쭉 뻗은 길에서는 쉬지 않고 달렸다. 버거운 오름길은 포기할 수 없었다. 험한 계곡과 거친 돌밭길도, 길의 끝 벼랑에 서기도, 엉뚱한 길에서 헤매기도 했다. 숨이 턱까지 차는 먼 길을 걸어내느라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아팠다. 끝난 길에서 무언가를 놓친 듯 후회는 또 얼마나 했던가. 모질게 걸어냈던 그 길도 가끔은 되돌아보게 된다. 누구나 지나간 일에는 그리 자유롭지 않을 테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냈던 젊었던 그때의 내가 그리워진다.
이제 남은 길은 얼마일까. 그 길은 유유하고 잔잔하며 부드럽고 편안한 길이기를 소원해본다. 만약 그런 길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지난 세월이 주는 축복받은 선물이라 여겨도 되겠다.
베란다 벽에 그어놓은 선들은 의도한 것도 어떤 모방도 아닌, 오직 민달팽이의 고단했던 삶의 궤적軌跡이었음을.
첫댓글 ㅎㅎ 설마 민달팽이가 그 높은 벽을 타고….
흙갈이할 때 사 온 흙 봉지, 혹은 거름에 좁쌀만 한 것들이 따라오지 않았을까요?
저는 명색이 사내면서도, 최 작가님처럼 그런 재미에 푹 빠져 본 적 있어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