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손(팀 버튼/100분/1990/미국)
1. 나는 팀 버튼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의 그로테스크하고 악동같지만 소수자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는 그의 작품세계가 좋았다. 첫 작품인 단편 <빈센트>를 보면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정서를 잘 느낄수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6분짜리 귀여운 단편을 맛볼수 있다. 뒤늦게 나는 최근작에서부터 그의 영화들을 거슬러 찾아보았다. <비틀쥬스>도 그의 악동기질을 맛볼수 있어 좋아하는 영화이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에드우드>이다. 삼류감독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흑백으로 찍어서 과거 무성영화시대의 느낌을 느낄수 있다. <에드우드>의 실제 주인공인 에드워드 D. 우드 주니어의 이름과 <가위손>의 주인공 에드워드는 왠지 같은 이름처럼 보인다. 그리고, 에드워드를 창조한 괴짜 과학자는 팀버튼의 자전적 이야기인 <빈센트>에서 소년이 동경하는 호러배우 빈센트 프라이스이다. <빈센트>에서 빈센트 프라이스는 나레이션을 맡는다. 빈센트 프라이스는 강렬한 호러영화배우였지만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져간 배우이다. 그는 이렇게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들에게 작은 위안과 꿈을 안겨준다. 그의 영화를 보다보면 내가 위로 받는 느낌이 들때가 종종 있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그안에 소수자의 정서를 담는 감독이기에 나는 팀 버튼을 좋아하는 것이다.
2. 나에게 <가위손>의 중반부까지의 이야기는 크게 재미있지 않았다. 그로테스크한 악동적 기질이 약했고, 대신에 에드워드의 순수함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좀 심심했다고 해야할까?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 나는 심하게 영화에 몰입하게 되었고 좀 심각해졌다. 영화속에서 에드워드는 가위손을 가졌다. 그래서 그를 배려하고 있더라도 의도하지 않게 그로인해 다칠수도 있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그의 순수함에 호의를 베풀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던 대중은 그들이 원하지 않는 태도를 경험하자 무섭게 돌변해서 그를 죽이려 든다. 평범한 그들은 그들안의 폭력성을 대중전체에 투사해서 에드워드에 대한 그들의 공격성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돌변이 무서웠다. 아니, 단순히 호기심으로 그에게 접근하는 영화초반의 다수의 역동에서부터 두려움을 느꼈다. 연민과 선행의 의미로 펙(다이안 위스트)은 에드워드를 성에서 데려온다. 그러나 결국 연민은 연민에서 그치고 말고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성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민의 한계인 것이다. 그는 특별한 혹은 위험한 에드워드를 돌봄으로해서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함께한다는 것은 연민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에드워드에 대한 공포가 이해와 사랑으로 변한 킴(위노나 라이더)도 서로가 너무 다르기에 함께할 수 없음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많이 다른 존재라는 것은 서로에 대한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영화속에서 에드워드가 가위손을 가지고 있어서 위험에 보였다면, 대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위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무서운건 그들이 가위손을 가졌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에게 무심했던 경찰이 펙보다 더 에드워드에게 호의적인 존재였다. 펙은 에드워드를 마을에 데려왔을때 어떤일이 벌어질지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데려와서는 그에게 선의를 베푼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경찰은 그가 사람들과 어울리기엔 힘든 사람들이라는걸 알고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가라고 허공에다가 총을 쏘고 사람들에게 그는 죽었을거라고 이야기 한다. 상대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배려없는 선행은 오히려 당사자를 더 힘들게 할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그런 이해가 없다면 많이 다르다는 것 정도라도 제대로 아는 경찰이 당사자에겐 더 호의적인 존재이다.
3. 이 야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가 된 킴은 그 뒤로 성에 가지 못했고, 그가 온 뒤로 마을엔 크리스마스마다 눈이 내리게 된다. 그녀는 그가 보고 싶었지만 왜 가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렇게 보더라도 함께 보내기에 힘든 사이임을 잘 알고 있기에 일부러 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에드워드에게 혼란을 안겨주지 않으려고 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엔 그런 가위손조차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성소수자, 노동자,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 혼혈 아이들, 정상가족의 틀안에 들지 못하는 가족들, 가난한자.......등등. 대중은 그들이 가위라도 들까봐 미리 겁을 먹고 그들과 우리사이에 테두리를 두른다. 때론 일부 권력자와 부자들이 그들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기도 하고 대중은 그 공포에 합승하여 그들을 격리시켜야 할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무서운건 자신이 소수자들에게 그런 폭력적 시선을 가진지도 모르고 선하고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위손을 가지지 않은지 영화를 보고 한참 동안 생각에 빠졌다.
4. 펙을 연기한 배우가 눈에 익어 검색을 해보니 다이안 위스트이다. 우디 앨런 영화에 많이 출연했고, <브로드웨이를 쏴라>에서 아주 강렬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저렇게 착한 연기를 하던 배우가 강력한 사자후를 뿜어내며 명성을 잃어가는 카리스마 넘치는 중년의 여배우를 연기한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배우는 정말 천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임을 실감했다. <브로드웨이를 쏴라>는 그녀의 강렬한 연기때문에 그녀에게 엄청나게 많은 조연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재미도 있으니 보길 권하고 싶은 영화이기도 하다.
첫댓글 대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위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무서운건 그들이 가위손을 가졌음을 모른다 <- 왠지 많이 공감가는데요.....
저도 그 가위손을 가지고 있는것을 잊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가위손=편견 이라고 맞바꿔도 이상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