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인물에 권필[權韠 1569년 ~ 1612년]이란 분이 있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승지 기(祺)의 손자이며, 벽(擘)의 다섯째아들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술로 낙을 삼아, 부인이 금주를 권하니 시 <관금독작 觀禁獨酌>을 지었다.
젊었을 때에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철을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찾아가기도 했다. 동료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고, 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 강화에서 많은 유생을 가르쳤다. 강화에서의 흔적은 유허비로 남아 있다. 이 유허비는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지난해 찾아볼 수 있었다.
[강화도에 있는 석주권선생유허비]
임진왜란 때에는 구용(具容)과 함께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했다. 광해군 초에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교제를 청했으나 거절했다. 유희분(柳希奮) 등의 방종을 임숙영(任叔英)이 <책문 策文>에서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 宮柳詩>를 지어서 풍자, 비방하였다.
宮柳靑靑花亂飛 궁궐 버들은 푸르고 꽃잎은 어지러이 흩날리는데
滿城冠蓋媚春暉 성 안에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을 떠네
朝家共賀升平樂 조정에서는 태평하고 즐겁다고 서로들 치하하는데
誰遣危言出布衣 그 누가 위험한 말이 선비에게서 나오게 하겠는가
사람들은 다들 여기서 ‘궁류(宮柳)’, 즉 ‘궁궐의 버들’을 임금의 처남인 유희분이라고 생각했지만, 당대의 권세가 유희분은 ‘궁류’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여동생인 왕비를 지칭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광해가 노여워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에 광해군이 대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연좌되어 해남으로 귀양 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이 부분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은 것 같다. 자료마다 서술이 조금씩 다르고, 송시열이 지은 묘갈명에는 그저 ‘광해군이 직접 선생에게 혹형(酷刑)을 가하고 국문하였다. 그때 대신(大臣) 이백사<李白沙, 이항복(李恒福)>공이 극력 간쟁(諫爭)한 끝에 선생이 사형을 모면하고 귀양 가다가 동성(東城) 밖에 이르러 4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라고만 되어 있다.]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시재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는 데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위양리에 있고, 묘갈은 송시열(宋時烈)이 찬하였다. ≪석주집 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 周生傳>이 현전한다.
권필묘와 금정굴은 첫 목적지였던 용강서원 후에 곧바로 가보려 했지만 찾지 못해 다른 곳을 먼저 들른 뒤 검색을 다시 시도하여 찾아갈 수 있었다. 두곳 모두 고봉산삼거리에 있는 고봉산주유소[지도 A 지점]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된다. 주유소 옆에 식당 등도 있으며 주차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여기 차를 세우고 횡단보도를 건너 모퉁이를 돌면 금정굴 입구 표지판이 서 있다.[지도 B지점] 여기서 금정굴까지는 120M 정도 거리다.
권필묘는 지도의 중산힐스와 고양실업고등학교 사이에 있다.[C지점] 주요시설 입구 우측에 있는데 앞에 비각이 보인다. 비각 뒤에 묘소가 있고, 비각 건너편에는 (주)에릭스도자기라는 회사가 있다. 권필묘의 주소지는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1336-10이다.
권필묘는 부인 숙인(淑人) 홍주 송씨(洪州宋氏)의 묘와 함께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쌍분 앞에 높이 112cm, 폭 52cm의 흑요암 묘표가 세워져 있다. 그 밖에 상석 1기가 있다.
묘 아래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높이 148cm, 폭 62cm의 대리석 묘갈은 1719년(숙종 45)에 건립한 것이다. 묘갈명은 당대 주자학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국역 국조인물고에 있는 권필의 묘갈명(墓碣銘) 중 명(銘)만 옮긴다. 묘갈명은 전체적으로 소략한 편이다.
아! 선생이여, 그 지기(志氣) 호방했도다. 처음에 연허[燕許 당나라 현종 때 문장으로 이름난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과 허국공(許國公) 소정(蘇頲)]를 사모하고 나중에 정주(程朱)를 사모했는데, 이윽고 화변(禍變)의 기틀에 빠져 여기에 그치고 말았도다. 내가 후인(後人)이 두려워서 선생의 시만 전하도다. 그윽한 것을 천명하여 무궁한 후세에 고하도다.
권필의 ‘途中(도중)’이라는 시 한 편을 더 옮겨본다. 쓸쓸하다.
日入投孤店(일입투고점) 저물어 외로운 객점에 드니
山深不掩扉(산심불엄비) 산 깊어 사립도 닫지 않는다.
鷄鳴問前路(계명문전로) 닭 울어 앞길을 묻노라니
黃葉向人飛(황엽향인비) 누런 잎 날 향해 날아오누나
대로변 금정굴 입구 표지판에는 ‘통한의 금정굴을 평화의 공원으로’라고 새겨져 있다. 이 표지판의 글에서부터 금정굴에 얽힌 문제들이 결코 간단치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금정굴과 관련해서는 “[이슈&이슈] 조례안 계류·부결 반복… 해결책 못 찾고 헤매는 ‘금정굴 사건’ ”이라는 제목의 서울신문 2012-12-31(14면) 기사를 옮겨온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60년이 됐다. 1953년 태어난 아기가 환갑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전쟁의 상흔은 아직 다 치유되지 못하고 국민을 분열시키고 있다. 전쟁 당시 수많은 양민들이 북한에 동조하는 좌파에 처형당하거나, 부역 혐의자 또는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군·경 및 우익청년들로부터 보복성 집단학살을 당했다.
피해자들은 10여년 전부터 억울한 원혼을 달래야 한다며 반세기 만에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결국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가운데 좌익에 피해를 입은 65건과 군·경 등에 의한 피해 사건 151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정부에 권고했다. 그러나 일부 사건에서는 또 다른 난제가 지역을 분열시키고 있다. 고양 금정굴 사건이 그렇다.
●부역혐의자 153명 학살·매장
이 사건은 1950년 9·28 수복 직후, 부역혐의자 또는 그 가족 153명이 경찰 등에 끌려가 집단 학살된 뒤 금정굴에 매장된 사건을 말한다. 2007년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가가 사과와 함께 유해 봉안 시설·위령시설 설치 등 화해와 위령사업에 대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15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두 형을 금정굴에서 잃은 유족회 서병규(81) 회장 등 유족들은 1995년 9월 자비와 시민단체가 모은 1300만원을 들여 유해 발굴작업을 폈다. 당시 발굴된 유골은 모두 153인으로 추정됐다. 여성 10여명과 어린이 유골도 1구 발굴됐다.
●진보 ·보수 정면충돌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이 사건 피해자 유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3330만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정당한 이유와 절차 없이 구금했다가 부역 혐의 등으로 살해해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자유, 생명권, 적법절차에 따라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했다.”고 밝혔다. 8월에는 서울고법이 같은 피해자 35명의 유가족들에게 총 100억~12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유해 발굴부터 법원의 피해 배상을 이끌어 내기까지 고양시민회 등 이 지역 시민단체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좌익이 먼저 군·경 가족들을 집단 학살해 보복을 당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고양 지역 보훈단체 및 재향군인회 관계자들은 “친북 부역자들이 먼저 고양경찰서장 등 당시 군·경 가족들을 금정굴 등에서 집단학살해 보복이 이뤄진 것”이라며 “명예회복 및 배상이 적절치 않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고양시민회 등 야권 연대와 시민사회단체 공동 추대로 2010년 6월 당선된 최성 고양시장 등이 지난해 4월부터 금정굴 공원화 관련 조례안(고양시 전쟁희생자를 위한 고양역사평화공원 조성 및 관리 운영 등에 관한 조례안) 제정을 추진하고 있으나 시의회에서 찬반이 엇갈려 다섯 차례나 계류와 부결을 거듭하는 등 진통을 겪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조례안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자 시의회를 맹비난하는 등 반발하고 있고, 고양재향군인회 측 보훈단체들은 반대로 수개월 동안 시청 정문 앞에서 조례안 반대 시위를 하는 등 양측 갈등은 한 치의 양보 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인도적 차원에서 해법 찾아야”
이런 가운데 최근 고양시의회에서 평화공원 규모와 사업을 크게 축소한 절충안을 제시해 반대 측 반응이 주목된다. 박윤희 고양시의회 의장은 “이념이 아니라 인도적 차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금정굴 현장에 최소한의 소규모 공원을 만들어 납골당에 임시로 안치돼 있는 유해를 이전 봉안하고 위령비를 세우는 방안을 도출해 내기 위해 곧 관련 협의기구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보훈단체 등에서는 “평화공원이 되려면 먼저 학살당한 군·경 피해자들의 상처까지 아우를 수 있는 시설이 돼야 한다.”면서 “어느 한쪽만을 위한 공원이 되면 ‘공존’이라 볼 수 없다.”고 밝혔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박문각에서 발행한 “시사상식사전”을 저본으로 한 네이버지식백관에 나와 있는 ‘금정굴사건’은 이렇게 설명된다.
1950년 9월 28일 국군의 서울을 수복 직후인 10월 9일부터 약 20일간 고양경찰서의 지휘아래 북한군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 등을 재판 없이 총살 후 매장한 사건. 6ㆍ25전쟁 직후인 1950년 10월 9일부터 31일까지 북한군을 위해 부역했거나 부역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이 고양ㆍ파주지역 주민을 일산서구 탄현동 황룡산의 금정굴에서 주민 153명을 총살ㆍ암매장한 사건이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6월 이 사건을 경찰의 지휘하에 불법적으로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로 규정하고 희생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평화공원 조성을 포함한 위령사업을 정부와 지자체에 권고한 바 있다. 그리고 서울중앙지법은 2011년 11월 24일 '고양 금정굴 민간인학살사건' 희생자인 이 모 씨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가 1억 원을 배상하라."는 원고승소판결을 내린 바 있다.
한편 1993년 문제를 제기한 유족회와 시민단체가 1995년 9~10월 사건 현장에서 153구의 유해를 발굴했지만 안치할 곳이 없어 2011년 12월 현재 16년 간 서울대병원이 연구실 창고에 보관해 오고 있다.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홈페이지(http://cafe.daum.net/gJpeace)에 올라와 있는 추모시를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내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서 혹시라도 이 글을 접하게 되실 분들께 미안하지만 아직 내 感傷을 내놓기에는 모자란 점이 너무 많다.
금정굴, 그 황금무덤
-금정굴 양민학살, 그 영령들에게 부쳐
보아라, 여기 세상에서
가장 큰 무덤 있나니
일천의 몸, 일천의 뼈, 일천의 이름, 일천의, 일천의, 일천의… 아으,
일천의 하늘도 묻혀 있구나
묻혀 있는 일천의 얼굴 생생하게 그려내면
생전의 모습 낱낱이 그려내면,
알 수 있다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렇다
논두렁 밭두렁에서 잡아가고
길 가다가 생일날 잔칫날에도 잡아가고
식구끼리 밥상 앞에 둘러앉아 있을 때도
잠자다 끌려가고 초상집에 나타나 끌고 가고
그저 끌려가면 그뿐, 이유 없이 끌려가고
시레기 조기 엮듯 묶어 끌고 가서는
여기 금정굴 속으로 천 길 굴속에서
총으로, 죽창으로, 흉기로, 닥치는 대로 학살하여
개, 돼지 죽이듯 패대기쳐 죽여서는 여기,
여기 금정굴 속으로
산 지옥 속으로 밀어 던졌던 것이다
무엇을 잘못 했냐고 외쳤지만
털끝만치도 죄 지은 것 없다고 외쳤지만
이유나 알고 죽자고 외쳤지만
어린 것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외쳤지만
비굴하고 치욕적으로 바지가랭이 붙들고 애원했지만
무심하게 쏟아지는 하늘 보고 원망 했지만
한 마을이 싹 쓸리고
한 가족이 싹 쓸리고
사내란 다 싸잡아 죽이고
그 씨마저 싹쓸어 죽였던 여기 금정굴
좌익이 무엇인지 우익이 무엇인지
땅이나 일구던 사람들
우리들 합지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초 누님 고모 이모 아저씨…
그런 따뜻한 사람들 깨끗한 사람들
누가 죽였나 아으,
빌어먹을 누가 죽였나
그렇다. 우익을 빙자하여 평소 감정 있었던 사람
마구 죽였다 서북 청년이니 반공청년이니, 치안대니
그런 자들이 살기등등하여 죽였다.
경찰들도 경쟁으로 죽였다.
이제 하나 둘 밝혀지고 있는 역사의 진실을
누가 감히 은폐하랴 누가 감히 막으랴
그 범죄자들이 아직도 살아
그 가족이 건재하여
정치를 논하고, 문화를, 언론을, 교육을, 사업을…
이런 모순투성이의 시대에
영령들이시여 여기 살아 모여 있는 자
부끄럽고 죄인이 마음 뿐
영령들이시여 영령들이시여
불러도 금방 대꾸할 것 같은 금정굴
지옥처럼 캄캄한 속에서
눈 멀고 귀먹은 채 마흔 세 해,
그 마흔 세 해를 거듭 죽기만 하신 영령들이시여
얼마나 통한으로 울부짖으셨는지
얼마나 춥고 배고프셨는지
얼마나 빛이 그리우셨는지
그 억울함, 그 천추의 누명
고삐처럼 멍에처럼 짊어지신 영령들이시여
유족들의 삶은 말 그대로 시궁창 같은 삶
숨어 살고 고향도 이웃도 친인척도 버리고
숨어 살고 사람답게 살려는 의지마저도
이 시대에 저당 잡히고 그렇게 살다
오늘, 여기 유족들이 영령들 앞에 모였어라
이 세상에 당당히 모습을 나타냈어라
이 세상에 당당히 모습을 나타냈어라
떨어지는 낙엽도 서걱이는 풀잎도 피해가라던 그날
그 날로부터 마흔 세 해 지난 오늘
당당하고 떳떳하게 진실을 밝혀야 하리
그렇게 해야 하리 반드시 해내어야 하리
일천의 영령들 한분씩 받들어
일천 채 희망의 집, 양지바른 언덕에 지어 모셔야 하리
유족들의 진저리친 치욕, 명예 회복해야 하리
영령들이시여 유족들이시여
여기 금정굴로 집중되는 갈채
저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빛세례를
온 몸 온 마음으로 받으소서
길이 빛 되게 지켜내소서
영령들이시여 유족들이시여
최창균( *시인 *1960년 경기 일산 출생)
[인용 설명문 출처: 네이버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역 국조인물고, 서울신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홈페이지]
첫댓글 石洲 權韠 선생의 묘소가 바로 이웃에 있네요.....찜해놓겠습니다. 그리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니브로님~~^^
단순히 부역혐의만으로 학살한 것은 분명 죄악이지만
만약 정말 부역을 해서 공산 치하가 됐다고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
그러니 가해자에게도 무조건 매도의 언사만 퍼부을 께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현금의 북조선을 보면 어디 김가왕조 치하에서 숨이나 제대로 쉬겠습니까?
당시로서는 나이브한 공산세계를 꿈꾸었겠지만.....
권필선생님 묘소의 정확한 위치를 찾으려고 무척 검색을 많이 했는데 정확한 정보를 알기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얼핏 언급해놓은 것으로 바탕으로 찾아갔는데 사실 저곳이 아니라 지도의 중산힐스 수련관 앞 개울건너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고 그곳으로 가다 길을 잘못 들었는데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찾게 되었습니다.
쓸쓸한 묘역, 권필선생이 좋아했다는 술 한 잔 올리시지요.
저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되지 못해 그저 바라보고만 왔지만요...
지금 이 나라도 정은이나라처럼 되는거 같습니다. 가만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