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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5일 연중 제2주일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 1,35-42)
They said to him, “Rabbi” -.
which translated means Teacher .-,
“where are you staying?”
He said to them, “Come, and you will see.”
So they went and saw where Jesus was staying,
and they stayed with him that day.
It was about four in the afternoon.
말씀의 초대
소년 사무엘은 성전에서 엘리 사제 밑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을 부르시는 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었을 때 그는 곧바로 그분을 섬길 자세를 보인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그들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의 성전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성령의 성전이 된 이들은 거룩한 생활을 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첫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그 가운데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 주신다. 이름에는 그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바위라는 뜻의‘케파’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은, 앞으로 베드로는 바위처럼 교회의 기둥을 든든히 받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삶을 보면, 생전에 좋은 일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 주셨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 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더욱이 그토록 아끼셨던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고난을 받고 결국 남을 위해 목숨을 잃는 어린양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보면 겉으로는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순전히 밑지는 장사를 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보처럼 사신 것이고 예수님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삶이 바보의 삶, 실패한 인생이 아님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철저히 남을 위해 사시고, 남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살게 하시어, 예수님의 삶이 옳았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비록 육체가 살아 있다고 해도 그 영혼은 죽은 것이나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만 살려고 하면 남은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자기만 살려고 하면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죽으려고 하면 남을 살리고 자신의 영혼도 영원히 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나를 살리는 길이며, 남도 살리는 길입니다.
☆☆☆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처음 만난 그에게 이름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본래 이름 ‘시몬’ 대신에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숨기고 싶을 때 이름을 바꿉니다. 지난날의 모습을 없애고 싶을 때 이름을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런 암시를 주셨던 것입니다.
‘시몬은 죽었다. 그러니 너는 이제 베드로로 다시 태어나라.’ 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이렇게 이름을 바꾸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베드로의 운명을 바꿉니다.
바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견디어 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모습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고 있는지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흐느적거리며 살고 있는지요? ‘별것도 아닌 말’에 속상해하고, ‘별일도 아닌 사건’에 격분합니다. 지나고 보면 정말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베드로 사도만이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세례명에 걸맞게 살고 있는지 오늘은 돌아봐야겠습니다.
일치 주간의 묵상 - 1일째
우리는 누구나 첫 만남과 첫 경험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예수님과 첫 만남을 가졌던 장소와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교회 안에서 세례성사로 하나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함께 고백합니다.
일치 주간의 첫날인 오늘은 갈라진 우리의 현실에 대한 성찰로 시작합니다. 민족이 분단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교회마저 갈라진 채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분명히 분열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현실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복음적 증언 능력에 막대한 손상을 입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십자가 안에서 끌어안으시는 하느님과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친교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서로가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대화와 공동 증언, 선교의 노력을 기울일 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일치시키시고, 반목과 질시로 얼룩진 우리를 서로 화해시켜 주실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그 구원의 사랑으로 온 인류를 화해시켜 주시고자 하시니, 갈라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일치를 위하여 일하고 기도하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체험하게 하시고, 주님 손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와서 보라
-서광석신부-
오늘 복음 묵상 내용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묵고 계시는 곳을 가서 보고 '메시아를 만났다'며 예수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아와 시몬 베드로의 단순한 믿음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던 요한의 제자 두 사람에게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었다. 그들은 "랍비,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하고 답했다. 와서 보라는 예수님 말씀에 그들은 그 분이 묵고 계시는 곳으로 갔다. 그들은 형인 시몬과 형을 데려온 동생 안드레아였다.
예수님이 머무르시던 곳이 도대체 어떠한 곳이기에 두 형제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게 되었을까?
그 당시 유다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다윗 왕조를 재건해 온 천하를 다스리며 정복할 분이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고 구원해 줄 세상의 왕, 정치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시며 지상에서 당신의 무소유와 청빈을 밝히셨다.
안드레아와 베드로는 이런 가난한 예수님을 그들 메시아로 받아들였다. 정치적 왕이 아닌 봉사하는 사랑의 메시아를 확인한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어린이 같은 단순한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고 하시며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마태 18,4)하고 가르치신다.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만이 인간이 찾아야 할 하느님이며 하느님 나라에 관해 말씀해 주실 수 있다. 이분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고 말씀하신다.
생각을 바꿔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은 혼자 판단하고 해결하는 스스로 잘난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 사랑에 단순하고 겸손한 신뢰를 보내며 완전히 의탁하는 사람이다.
어린아이는 양손에 먹을 것을 가득 쥐고도 없는 아이와 나눠 먹어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을 하기 어렵다. 허나 낯선 사람, 고통스럽고 불편함이 있을 때 큰 소리로 운다.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엄마의 사랑에 절대적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엄마가 독약을 준다고 해도 믿고 마실 정도로 엄마 사랑을 무조건, 완전히 신뢰한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과 사랑도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바로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신앙도 이렇게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에 들은 강원도 어느 시골 신부님 경험담은 잊히지 않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1학년 남학생 5~6명이 학교수업이 끝나면 항상 성당 앞 빈터에서 공차기하며 놀다가 집으로 갔다. 그들 중 한 아이는 성당에 오면 꼭 성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감실 앞에 섰다. 허리에 둘러매고 온 책보를 풀어놓고 "예수님, 저 동수 왔어요"하며 절을 했다. 또 공을 차다 갈 때는 "예수님, 저 동수 가요"하고 책보를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동수는 며칠을 성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독감에 합병증인 폐렴까지 겹쳐 몹시 앓고 있었다. 그런데 아픈 동수의 방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분은 "동수야, 나 예수 왔다"하고 말하더니 "동수야, 나 예수 간다"는 말을 남기고 곧 가셨다. 동수의 병은 나았고 친구들과 성당에서 다시 공을 찼다.
동수는 커서 수사 신부가 됐다. "감실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어머니 말씀을 수사 신부는 어릴 때부터 무조건 믿었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하느님 현존을 수없이 체험하며 살고 있다. 이것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막연한 감정적 믿음이 아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창조 당시의 모습으로 복귀된 새로운 삶을 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이다. 상속자가 되는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고 전인적 응답이다.
“신앙교육, 잘못하면 혼납니다”
-장재봉 신부-
자녀에게 신앙교육 하고 계신가요?
곤히 잠자던 어린 사무엘이 그분의 음성에 화들짝 깨어나 세 번이나 냅다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가는 모습을 생각하니. 애처롭습니다. 그런데 젖을 뗀 후 곧바로 하느님께 바쳐졌던 나지르인이며 “어린 나이에 아마포 에폿을 두르고” “주님 앞에서 자라났다”는 사무엘이 ‘아직’ 주님을 알지 못했다는 게 의아합니다(1사무 2장 참조). 오늘 독서가 “소년 사무엘”의 잠자리가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 있었다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분을 ‘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고민됩니다.
흔히 그분의 세례를 받은 후에도 “하느님을 모르겠다”하는 일, 성당은 나가지만 “구원의 확신은 없다”는 우리 모습은 아닐지, 하느님의 말씀이 옳고 좋지만 “어떻게 그 말씀대로 살아 갈 수 있느냐?”고 딴전을 부리는 우리 모습은 아닐까 짚어봅니다. 그분의 자녀임에도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비극적인 상태의 우리를 일깨우시는 것이라 싶습니다. 미사에서 그분의 음성을 빤히 듣고서도 세상 품에 폴싹 안기는 우리를 향한 질책으로 들립니다. 그분 사랑을 피상적인 것으로 폄하시켜 그분의 희생과 아픔과 사랑에 무감각한 우리를 향한 그분의 호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어버이들에게 자녀를 맡기시며 그분을 제대로 알고 깨닫도록 가르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며 축복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자녀에게 세상의 것만 가르친다면 “그분의 총애”를 잃게 할 것이라는 매서운 경고로 읽습니다.
이때문에 오늘 독서에서 생략된 부분이 마음에 거치적댑니다. 엘리 제사장이 자식의 패악한 행위 탓에 하느님께 혼쭐이 난 사실을 무심히 흘리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엘리의 죄악이 “자기 아들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책망하지 않은 것”이라고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2,30)라고 분명히 지적하십니다. 이런 주님 앞에서 유구무언이던 엘리의 딱한 처지를 충분히 감안하여 모든 어버이의 영혼이 깨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생각해 봅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기막힌 현답을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는 남에게 주님의 길을 알려주고 가르쳤으며 나름 충실하게 제사장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백성과 관련된 사제들의 규정도 무시”(2,12-13)하는 아들들에게 “내 아들아 안 된다!”며 나서서 말린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식들은 안하무인으로 지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제사장직을 맡은 사제라는 걸 생각하면 딱할 뿐입니다. 이때문일까요? 주님께서는 자녀가 엇가는 줄 뻔히 알면서도 책망하지 않은 아버지 엘리의 죄를 “제물이나 예물로는 영원히 속죄받지 못하리라”고 단언하십니다. 따져보면 그들의 불량함은 그들의 몫일 수 있음에도 그렇습니다. 타고난 드센 성정이, ‘오냐오냐’ 하던 환경이 그들을 불량하게 만들었을 수 있음에도 그렇습니다. 한 가지 찜찜한 것은 사무엘이 하느님의 환시를 보았을 때 그 말씀을 “한마디라도 숨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실 것이라며 똑부러지게 잘라 말했던 그가 “아버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2,25) ‘아들’에게는 한없이 허약하고 나약했다는 점입니다(2,17 참조). 이야말로 자신의 피붙이 신앙교육에 소홀하여 모든 걸 수용하고 모른 척 덮어주는 무조건적인 관용에 대한 따가운 경고라 믿습니다.
자녀들에게 그분을 알려주고 일깨우는 신앙교육을 하고 계신지요? 자녀에게 주님을 알도록 가르치고 계신지요? “하늘이 자식을 내려준 것은 세상에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지만 그분께는 그 의미가 통하지 않는 듯합니다. 내 자녀가 그분을 모르고 그분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걸 알면서도 ‘그만하면 됐다’고 방임하는 일도 “세례 받았으니 됐다”며 그들을 영적 어린 아이로 방치시키는 행위도 모두 그분의 소명에 대한 직무유기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새해, 온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이 부모님 성화에 못 견뎌서 성전으로 몰려오기를 기대합니다. 모두 그분을 ‘알게’ 되기를 꿈꿉니다.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콜로 1,10) 키우는 일, 정말 중요하고 귀한 최고의 소명입니다.
아픔에로의 부르심
-고찬근신부-
요한의 두 제자는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분이 묵고 계시는 곳에 가서 하루를 지내고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요? 예수님이 묵고 계시던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에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요?
탈무드에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벤 레비라는 한 랍비가 예언자 엘리야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메시아는 언제 오십니까?” 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가서 그분에게 물어보시오.” “그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성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분을 알아볼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상처투성이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상처를 치료할 때, 감았던 붕대를 전부 풀었다가 다시 감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다른 사람이 아파하면 금방 달려가 도와주려고 자신의 상처에 감았던 붕대를 조금만 풀고 치료를 하십니다.”
이 전설에 따르면 메시아는 상처 입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계시며, 자신도 상처를 입은 처지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이 전설 속의 메시아는 우리 예수님과 무척이나 비슷합니다. 예수님도 항상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가운데 계셨고, 날이 저물도록 그들을 고쳐주시곤 하셨습니다. 급기야는 인간이 지은 죄의 상처를 치유 하시고자 당신 손발에는 못 구멍이 뚫렸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계시던 그곳,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았던 그곳은 바로 ‘아픔의 자리’였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예수님시대보다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운 세상이라지만, 아픔의 자리는 여전히 존재하고 눈물은 마르지 않습니다. 아픔의 자리에 제일 필요한 것은 돈이나 약품이 아니라 아픔을 함께하는 친구입니다. 그 아픔의 자리에 이제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다만, 더욱 간절한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여기 아픔이 있다. 이제는 너희 차례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이 아파하는 그곳에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안전지대에는, 무풍지대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없습니다.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픔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아픔을 보고, 아픔을 함께하고, 아픔을 치유하라!”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아픔이 있는 곳에 있건만 우리의 몸은 마냥 편하기만 원합니다. 서 있는 것 보다 앉아 있는 것이, 앉아 있는 것 보다 누워 있는 것이 편합니다. 또 그냥 누워 있는 것 보다 잠자는 것이 더욱 편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편한 것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육체적 편함의 마지막은 무의미한 죽음입니다. 우리는 몸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늘 편안함을 떠날 줄 알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를 니다. 우리의 몸은 쾌락의 온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시는 그릇이며 의 일을 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임숙희-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요한의 제자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넘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마음의 지혜를 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연중 2주일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제자를 부르셨다는 것을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영혼을 준비시켰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될 “자기 제자 두 사람”(요한 1,35)까지 마련해 줍니다. 요한은 신부를 차지하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는 “신랑 친구”(3,29)로 끝까지 완전하게 머물다 사라져 갑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1,37) 예수님을 ‘따르다’라는 말은 오늘 본문에서 세 번이나 되풀이됩니다.(37.38.40절) 이 말은 스승인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36절)이라고 가리켰기에 아무 생각 없이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뜻을 찾는 사람이라면 겉으로 좋아 보이고 누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해서 아무나 따라가지 않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따르다’라는 말을 제자직에 대한 헌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합니다. 이는 제자들의 따라감이 곧 제자직의 첫걸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8,12; 10,4.27; 12,26; 13,36; 21,19.22)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돌아서서 두 사람에게 “무엇을 찾느냐?”(1,38)라고 질문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으로 제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담긴 하느님에 대한 갈망과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타오르게 이끌어 주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위대한 선교활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스승을 따라오려고 애쓰는 사실만 보고 이 질문을 하시고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머물기를 원한다고 대답합니다.(38절)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 머물고 싶은 이유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실 분(4,14), 베드로처럼 ‘영원한 생명의 말씀’(6,68)을 주실 주님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단순히 “와서 보라.”(1,39)고만 답하십니다. 요한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에게 ‘오다’라는 것은 신앙을 묘사하는 데 쓰입니다. 그분에게 ‘오는’ 사람은 빛(3,21), 생명(5,40), 결코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빵(6,35), 생수의 강인 성령(7,37)을 얻습니다. 그분께 오는 사람은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다’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보다’라는 말도 신앙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그분을 보는 사람은 그분을 믿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6,40)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라.’는 말씀으로 그들을 믿음으로 초대하시고 함께 ‘머물면서’ 신앙의 여정을 인도해 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서 보고 그분과 함께 머물렀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감으로써 ‘와서 보라.’고 초대하는 과업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사명임을 미리 보여줍니다.(1,41)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을 ‘눈여겨보시고’ 바위를 뜻하는 ‘케파(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42절) 복음서 안에서 자신을 ‘사랑받는 제자’라고 종종 소개하는 요한은 자신을 눈여겨보았던 예수님의 깊은 시선을 잊지 못했나 봅니다. 그는 자신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사랑의 눈길에서 죽음까지 함께 가는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옆에 머물면서, 그분의 사랑의 눈길을 받으며 그분에 대한 내적 지식을 깊여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직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묵상(Meditatio)
주님, 오늘 저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질문하십니다. 늘 그렇듯이 당신의 은총으로 저는 요즘 요한의 제자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은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사무엘을 인도하는 지혜로운 사제 엘리처럼(제1독서 참조) 제가 스스로 체험해야 할 것을 존중하면서 그들의 식별과 영감과 사랑으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중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당신 뒤를 따라 걸어오라고 초대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이나 말하는 것을 통해서보다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움직이며 스스로 체험하고 식별하면서 당신에게 와서 머물고 당신 사랑의 눈길 안에서 제가 당신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을 직접 배우라고 초대하십니다. 사랑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기도(Oratio)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즐겨 이룹니다. 제 가슴속에는 당신의 가르침이 새겨져 있습니다.(시편 40,9)
찾으려는 갈망 있을 때 하느님 만나
-배광하신부-
무엇을 찾느냐?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인간은 정말 조화의 묘공이로구나! 이성은 숭고하고 능력은 무한하지 않은가. 자세와 거동은 얼마나 찬탄할만한 일인고! 행동은 천사와도 같고 이해력은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 그는 과연 세계의 꽃이요 만물의 영장이로다.”
이 말은 영국의 자존심이요 영광인 윌리엄 셰익스피어(1547~1616)의 작품 ‘햄릿’(1600년)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셰익스피어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를 남성 우월주의자요, 제국주의자이며 인간 중심주의자라고 혹평합니다.
실제로 그가 활약하던 시대 유럽은 인본중심주의 르네상스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던 시대였습니다. 중세 하느님 중심의 시대를 암흑기라고 칭하며 인간에 대한 찬탄과 환희가 물결쳤으며, 인간 해방에 대한 모든 사상의 조류가 폭발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선해 보였던 인본중심 사상은 곧바로 하느님을 잃어버린 사생아의 시대로 전락해 버리고 인간의 교만은 하늘을 찌를 듯 커져갔습니다. 넘치는 교만의 힘은 곧바로 식민지 경쟁과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와 착취, 파괴와 유린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인류의 대 재앙인 1, 2차 세계대전으로 번져갔습니다.
결국 르네상스시대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깨달은 시대였다면, 그 이후의 역사는 교만의 인간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이기적이며 파괴적인가를 극렬히 보여준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멀리하고 배반한 역사요, 하느님을 잊어버린 역사였지만, 하느님께는 끝없이 인간을 찾아 나선 사랑과 용서의 시간이요, 인간을 향하여 목메어 부르시는 역사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셨으며, 소년 사무엘을 부르셨고, 수많은 예언자들을 부르셨고, 마리아를 부르셨으며, 사도들을 부르셨고, 바오로를 부르셨으며, 오늘 또다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급변하는 세계화 시대에 오직 경제적인 논리 앞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배신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돈이라는 우상을 세워놓고 하느님 부르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지상 최고라는 교만 속에 제2의 잘못된 르네상스를 살아가려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소년 사무엘을 부르시듯 우리를 찾기 위하여 애타게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을 등진 걸음을 멈추고 그분 부르심에 응답하여야 합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 10).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세례 받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모두가 그 뜻에 동의해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정도가 아니라 그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토록 부르시는 주님 말씀에 응답하여 그분과 한 몸으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는 세례 받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확실히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 27).
오늘 안드레아는 자신의 형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그러나 바오로는 한 발 더 나아가 그분을 우리 모두가 옷 입듯이 입어 한 몸이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플라톤(B.C 429?~347?)의 중기 대화편인 ‘향연’에는 이 같은 글이 있습니다.
“신들이 인간을 처음 만들었을 때, 인간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현재 인간의 모습과 비교할 때, 그 때 인간은 두 사람을 합체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전후좌우 모든 방향을 볼 수 있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두 개의 얼굴, 네 개의 팔, 네 개의 다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다 인간은 신을 모독하게 되어 신은 인간에게 그 벌로 몸을 둘로 나누는 형벌을 내렸다. 원래 한 몸이었던 사람들이 둘로 나뉘게 되자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여기서 원초적 욕구와 욕망의 문제가 생겨났다.”
어떻게 이 같은 말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의 믿음과 신앙으로 보자면, 인간은 분명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기에 만들어 주신 분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찾습니다. 우선은 내가 그분을 찾으려는 갈망이 있을 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그럴 때 우리는 복음의 제자들과 같이 물을 수 있습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 38)
세상 욕망의 짝을 찾기 위한 허망함의 찾음이 아니라, 영원불변의 진정한 창조주를 찾아 나설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을 만날 수 있고 타인들에게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와서 보아라 "
-이기양신부-
"와서 보아라"(요한 1,39).
요한의 제자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하고 관심을 보였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초대할 때는 뭔가 자신 있게 보여줄 만한 것이 있을 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다 할 거처도 자랑할 만한 좋은 가구도 잘 나가는 차도 없으셨습니다.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라는 옛말도 있듯이 혼자 사는 사람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한 순간에 매료되어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하며 확신에 찰 수 있었을까요? 그 사건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지 복음은 구체적 시간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
오래 전 봉쇄 수도원에서 한 주간을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이 수도원에서 하는 것이라고는 24시간 침묵하며 기도하고 노동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때 한 주간을 지내면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외국인 수사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 곳 책임자도 아니고 그저 기도하고 노동하는 평수사로서 이야기를 나눠 본적도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 시간에 모두가 함께 기도를 해도 그분이 유독 빛이 나는 것입니다. 또 노동하는 시간에 여기저기 흩어져서 일을 해도 시선은 자꾸 그분에게 가서 멈춰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집의 중심은 저분이시구나!"
물론 그 집 중심은 하느님이시지만 그 수도원을 꾸려가는 힘이 그분에게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게 됐습니다. 그분 얼굴 표정, 기도하는 목소리에서 권위가 풍겨 나왔지요. 한 마디 말없이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그 힘이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안드레아가 예수님의 바로 이런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예수님은 수도원 수사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한순간에 매료됐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자기 형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소개했고 베드로 역시 한순간에 예수님 제자가 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묻게 됩니다. 왜 우리는 보지 못 할까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재미있는 사람이 두 사람 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같은 성당에서 신앙생활도 꼭 같이 했습니다.
한 사람은 가정도 평안하고 사업도 잘 되고 신앙도 성숙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점점 존경받는 인물이 돼 순탄한 인생길을 걸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친구는 그렇게 순탄치가 못했습니다. 가정도, 사업도, 그리고 신앙도 별반 성장하지 못했지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성공한 친구는 모두가 좋아할 정도로 매사 긍정적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다른 친구는 눈에 띄게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으며 교만했습니다.
성당에 나와서 강론을 들어도 부정적 성향이 강해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긍정적으로 잘 받아들이고 함께 하려고 애를 쓴 친구와는 수십 년이 지나면서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른 결과를 낳게 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보아라"(요한 1,39)하고 초대하셨을 때 와서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의 차이는 아주 간단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은 볼 수 있는 눈이 생깁니다. 하지만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며 순응하지 않고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봐도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당연히 긍정적이며 좋은 것을 볼 줄 알고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안드레아나 베드로만이 아니라 매사에 열심히 준비하고 참여하며 실천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지요.
연중 2주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가 살아야 할 길이 보입니다. 주님 말씀에 순응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십시오. 때가 되면 '와서 보아라'는 말씀을 깨닫는 특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제자를 소개합시다.
-곽승룡신부-
주님은 세례 후 공생활의 시작을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로 출발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는데 공개적으로 광고를 해서 선택하지 않고, 어떤 조건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경력자 우대, 고학력자 환영, 지방에서 재력이 있는 자 적극 환대.... 이렇게 객관적인 조건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더욱이 다른 그룹의 능력 있는 사람도 빼내오지 않으십니다. 다만 스스로 주님께 다가오는 자들을 거부하시지 않으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있다가 제자들에게 걸어가시는 주님을 소개합니다. "보시오. 하느님의 어린양이시오!" 백성을 위해 하느님께 희생 제사의 제물이 되실 어린 양 주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갑니다. 아마 그들도 평소에 세례자 요한의 삶에서 하느님의 어린양과 같은 모습을 발견했겠지만 자신의 스승이 직접 소개하는 하느님의 어린양, 주님을 따라갑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는 그들에게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들이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곳을 묻자, "와서 보시오." 하고 주님은 그들을 초대하십니다. 그 후 그들은 주님과 함께 지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베드로의 동기 안드레아인데 그는 시몬을 만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했습니다. 안드레아의 소개로 시몬이 주님께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시몬을 눈여겨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군요. 게파(베드로)라고 불릴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들을 주님께 그분의 제자로 소개합시다.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게 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는 이유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해서입니다. 가난에 억눌린 사람들은 빵이 필요해서, 질병에 고통 받는 사람들은 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할 때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하느님을 찾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우리를 찾고 계신데 우리는 하느님께는 관심이 없고 단지 돈과 건강과 명예의 선물만 기다리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느님보다 하느님의 능력을 찾는 갈망이 순결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기에 우리는 바른 것을 구해야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메시아를 갈망하며 찾고 있었기에 결국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여러 명의 제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 위대한 광야의 선지자를 스승으로 하여 하느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서 있을 때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향하여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스승의 권면대로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그분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무엇을 찾느냐?”(1,38) 하고 물으십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 뒤를 따라오면 “왜 따라오느냐?”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너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얻기 위해 나를 찾아왔느냐는 것입니다.
그 당시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입니다.(6,26 참조) 이렇듯 군중이 기대한 것은 육신 생명에 필요한 빵이었고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우리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면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가는 방향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분주한 우리를 향해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무엇을 찾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1,38) 하고 여쭙니다. 이것은 마치 동문서답을 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예수님이 살고 계시는 ‘장소’를 물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를 ‘살펴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면서 예수님의 삶과 인격과 진리를 배우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와서 보아라.”(1,39) 하고 초대하십니다. 보통 초대는 아무한테나 더욱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사는 것이 초라해서 보여주기 부끄러우면 찾아오겠다고 해도 오지 말라고 막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라고 하셨는데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을 직접 체험하고 깨달으라는 초대입니다.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묵으면서 그들의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말대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방법은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도 주님과 대화를 통해 그분이야말로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우물가에 물동이를 버려둔 채 고을로 달려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4,29)라고 했습니다. 여인의 이 같은 전도 결과 그 고을에 살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와서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4,42)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는 “와서 보아라.”(1,39)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 보니 그분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것은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과 같이 와서 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안드레아는 메시아를 찾았기에 먼저 형 시몬을 찾아가 다짜고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1,41)라고 증거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이렇듯 우리는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시몬을 눈여겨보신 예수님은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1,42) 예수님은 이미 시몬이 누구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시몬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될지를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시몬은 케파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여기에 있게 한 것도 지금 나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장차 변화될 나의 모습을 이미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허물과 약점으로 범벅된 시몬으로 살지만 그 안에 이미 케파가 있음을 보고 알아주시는 바로 이 한량없는 신뢰와 자비의 시선 때문에 시몬은 점점 케파로 변화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사실 시몬, 아니 주님께서 보시는 대로라면 케파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무엇을 찾느냐?” 하며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지만 동물처럼 땅의 것만, 밑에 있는 것만을 찾지 말고 위의 것, 곧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하느님한테서 왔기 때문에 하느님 없이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물었던 요한의 제자들처럼 그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으면 합니다.
그 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마침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하고 말하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양승국신부-
<산들바람 같은 주님 음성>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었던 안드레아와 다른 한 제자는 세례자 요한의 안내로 예수님을 소개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여기서 "따라나섬"은 그저 괜히 한번 따라나서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회성 따라나섬도 아닙니다.
자신의 미래를 송두리째 맡기는 결정적인 선택입니다. 자신의 인생과 목숨을 건 절대적인 추종을 의미합니다.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수님께 맡기겠다는 선택, 결국 예수님만을 추종하겠다는 일생을 건 도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명예, 부, "물 좋은 한 자리"가 절대로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삶 그 자체, 그분이 한평생 추구했던 가치관, 사고방식, 행동양식, 모든 말씀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똑같이 살겠다는 서원입니다. 이 세상에서 손해보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남보다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겠다는 약속, 돈도 안 되는 이웃봉사를 하면서 바보처럼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오늘 복음을 천천히 읽으면서 이런 묵상을 한번 해봤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두 제자는 어찌 그리 일말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는가?" 하는 묵상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봤더니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준비된 제자"였습니다. 평소부터 따라나설 준비를 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제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 있을 때부터 그를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업을 충실히 받아왔던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사무엘처럼 "주님 언제든지 불러만 주십시오. 이 몸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는 마음으로 이미 제자로서의 삶을 준비해왔던 것입니다. 출동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완전군장을 갖춘 "5분대기조"처럼 말입니다.
복음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사람, 우상숭배에 젖어 사는 사람, 매일 술과 유흥에 빠져 허우적대며 사는 사람, 매일 자기 한 몸 챙기기에만 바쁜 사람이 어떻게 산들바람처럼 지나가는 주님의 음성, 속삭이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음성조차 듣지 못하니 그분을 따라나서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사무엘 상권 3장 10절).
새벽을 열며
어제 어떤 신부님의 방에 들어갔다가 텔레비전을 아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인기가수가 나와서 노래를 하는 생방송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지요. 그런데 관중석에서 보이는 그 인기가수를 향한 환호소리와 함성이 정말로 대단하더군요. 바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신부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세요.
“학생들이 교회에 저렇게 열광하면서 다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관중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주로 어린 중고등학생들이었거든요. 그에 반해서 교회 안에서 중고등학생들의 환호를 듣기란 그렇게 쉽지 않지요. 미사를 할 때면 고개를 푹 숙이고서 ‘빨리 끝나라’만 외치고 있는 학생들, 눈을 감고서 잠을 자고 있는 학생들, 질문을 던지면서 반응을 원하지만 전혀 반응 없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이 인기가수가 나왔다고 그렇게 환호성을 지른다는 것이 도저히 믿겨지지를 않습니다.
왜 이렇게 교회 안에서는 소극적인 아이들이, 인기 연예인들을 만나면 저렇게 적극적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 연예인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겠지요. 물론 그 연예인들도 자신에게 그런 사랑을 주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만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만족하고 그렇게 환호성을 지릅니다.
바로 이 순간,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모습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말 한마디, 노래 한곡을 통해서 만족감을 얻으면서 큰소리로 함성을 부르는 아이들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 하나, 사랑의 모습 하나를 통해서 만족할 수 있으며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가요? 인기 연예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반해, 주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것을 주고 있는데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는 우리들은 아니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따라오는 이들에게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지요. 이 질문에 이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고 하시지요.
제자들의 질문은 지금 예수님을 쫓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도 계속 던져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그런데 이 질문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응답하시는지요? 돈을 찾습니다. 명예를 찾습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것들만을 찾고 있는 우리들은 아니었는지요? 그러다보니 주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질 수 없습니다. 단지 주님은 그러한 세속적인 것들을 보다 더 쉽게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오히려 질문을 던짐으로써 주님만을 따르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것을 간접적으로 허락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앞에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그 순간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록 자신들이 얻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저 너무나 좋고 너무나 사랑해서 연예인을 보며 함성을 지르는 아이들처럼, 우리들 역시 원하는 것 없이 주님을 향한 기쁨의 함성을 질러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주님을 쫓는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빠다킹 신부
와서 보아라
-이철구신부-
요즘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참선, 요가, 명상 등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고 그것들이
마치도 유행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산사의 템플 스테이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만 보더라도 현대인들에게 무엇인가 부족한 2퍼센트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예수님 시대에도 이처럼
채워지지 않는 2퍼센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인가를 얻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찾느냐?”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러시면서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보라는 말씀이실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율법에서 명한 것을 철저히 지켰다 하더라도 그 삶이 예수님과 닮은 삶이
아니라면 참된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 욕구를 버리고 진정한 자아
안에서 내면의 소리,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삶일 것입니다.
부족한 2퍼센트, 그것을 어디에서 찾고자 하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유 루시아 수녀(메리놀수녀회) -
◆예수께서 자기를 따라오는 요한의 두 제자에게 “너희는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어보시자 그들은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에 낙심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며 대화를 하십니다. 이 엠마오의 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밤을 같이 머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 헤맬 때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혼란스럽고 낙심하고 사리를 잘 분간 못할 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와 같이 묵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야 하며 예수님은 우리의 영성생활이 어려워질 때는 오셔서 우리와 함께 머무심을 저는 믿습니다.
부족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양승국신부-
은혜와 감동과 축복의 순간이었던 성탄시기가 어느덧 끝나고 이제 교회는 연중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사순이나 부활, 대림이나 성탄시기에 비교했을 때 연중시기는 평범한 절기입니다. 두드러지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연중시기는 전례력의 근본이자 바탕이 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1년 365일 매일이 성탄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매일같이 부활미사를 봉헌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시사철 축제만 벌이다가는 땀 흘려 일할 시간을 어떻게 낼 수 있겠습니까? 다들 꽃 일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 답답함을 참으며 무진 고생을 견뎌내는 뿌리로서 역할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연중시기는 바로 부활, 성탄이라는 전례력의 꽃을 피우기 위해 묵묵히 존재하는 뿌리와도 같은 절기입니다. 연중시기는 부활, 성탄이라는 전례력의 주인공이 더욱 돋보이도록 조용히 존재하는 조연배우와도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들떠 있었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일상에로 돌아갈 순간입니다. 평상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이 시기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은 무엇보다도 일상에 대한 지속적 충실입니다. 신앙생활은 한 며칠 열심히 하고 끝낼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은 평생을 두고 강물처럼 흘러가야 할 그 무엇입니다.
제 경험에 비춰볼 때 신앙은 절대로 한꺼번에 몇 단계씩 수직상승하지 않습니다. 매일의 작은 기도를 빼먹지 않고 꾸준히 바치는 데서 신앙은 성장합니다. 매일의 고통을 기쁘게 참아내는 데서 신앙은 깊어집니다. 매일의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 데서 신앙은 도약을 시작합니다.
오늘 첫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주님 부르심에 대한 지속적 응답, 평생에 걸친 응답이 필요한 연중시기입니다. '와서 보아라'는 예수님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는 노력이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순간순간 다가오는 구체적 삶의 모든 십자가들을 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직면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오늘 첫 사도단에 가입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의 성소여정을 바라보며 제 개인적으로 큰 위안을 받습니다. 이 두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했던 사람, 지극히 나약했던 인간, 너무나도 인간적 인간, 우리와 똑같은 부족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배경으로 구차한 삶, 그저 그런 삶, 변두리 인생을 살아가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어부로 살아간다는 것, 꽤나 팍팍했던 삶이었습니다. 고기를 잡는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 때나 나가서 그물 친다고 고기가 잡히는 것이 아니지요. 무엇보다도 먼저 물때가 잘 맞아야 고기가 잘 잡힙니다. 어떤 때는 밤새도록 단 한 마리도 못 잡을 때도 많았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비가 많이 오거나 파도가 높이 일면 즉시 그물을 걷고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겨울이 오면 물고기들도 동면에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도 않습니다. 가끔씩 물때도 맞고 화창한 날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날 조차도 고기가 잘 잡히는 '포인트'에는 다른 어부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에 치열한 경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한 마디로 고기를 제대로 많이 잡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 옛날 정말 보잘 것 없었던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대단해서, 뛰어나서, 잘나서가 아닙니다. 흠도 티도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안쓰러워서, 죄인이어서, 병자여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셔서, 우리 내면 안에 깃든 변화 가능성을 눈여겨보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허세를 부릴 일 하나도 없습니다. 뻐길 일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어깨 으쓱할 일도 아닙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기쁜 얼굴로 "예!" 하고 따라나서는 일, 주님의 부르심에 지속적으로 응답하는 일, 고달픈 매일의 성소여정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 그것이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자세일 것입니다.
오늘도 부족한 우리를 생명에로 부르신 자비의 하느님께 찬미 드리는 일, 부족한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 구원사업을 계속하시는 은총의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일이 부르심 받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눈이라도 마주쳐야지”
눈여겨 보는 것
-서공석신부-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세 개의 복음서들이 이미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그 세 개의 복음서들에서 주제들을 택하여 명상하고, 그 내용을 그 시대 사람들의 표현 방식, 곧 이야기 양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을 보고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고 고백하였다는 이야기와 안드레아와 베드로가 그 고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인물에 불과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이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증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성전에서 피 흘려 바쳐지는 희생양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 피 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서(9,22)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해지며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죽임 당하신 사실에 주목하고, 예수님을 바로 그 어린양과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으로부터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증언을 들은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 그분과 함께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그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이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는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체험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곳(15,5)에서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안에 머무는 사람, 그리고 내가 그 안에 머무는 사람, 그런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같은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처럼, 그대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입니다”(15,9-10).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은 그분이 보여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그분이 실천하신 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여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머문 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해 본 사람이 그분을 메시아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라는 호칭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예수님이 사용하지 않으셨던 호칭입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고 세상 만방을 다스리게 해 주는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먹이시자,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시다”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피해서 당신 “혼자 산으로 물러가셨다”고 요한복음서(1,15)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염원을 이루어 주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 독립하고, 강대국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력해서 이루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흥부전의 제비는 흥부에게 박씨를 갖다 주었습니다. 지극히 가난했던 흥부는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대박이 터져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흥부의 꿈을 제비가 이루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해 주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염원을 이루어주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예수님 시대 혁명당원이라는 이스라엘의 분파가 기대하던 하느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는 하느님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정성을 바치면 부자도 되고 출세도 한다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앞에 열어놓으신 신앙의 길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이용하여 사람이 잘 되기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당신 스스로는 죄가 없으면서 사람들을 위해 당신을 내어주어 피를 흘리신 분입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그분의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듣고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랑 안에 머무시는지를 보고 배워서 제자도 같은 사랑 안에 머물렀더니,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몸소 해 본 사람이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듣는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어 피를 흘리신 메시아였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같은 실천을 하기로 나선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생명을 위해 기여하면서 살고 죽어갑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지 못하는 생명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삽니다. 그런 생명은 자신 안에 갇혀서 살다가 볼품없는 자기 모습 하나 남기고 허무로 사라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생명의 순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 생명의 순리를 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그 순리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내어주는 몸’이라는 빵을 먹으면서, 그 생명의 순리를 실천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 안에 갇힌 소인의 근성을 넘어서 넓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그분의 자녀 되는 운동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과 함께 묵었던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눈여겨보시며’ 그의 이름을 바꿔놓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시선이 닿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세례에서 우리는 전과는 달라진,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새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그분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그분 죽음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 때, 곧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을 실천할 때입니다. 신앙인은 과거 관행과는 달리, 예수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분이 하신 실천을 합니다. 그 실천에서 그분이 메시아이며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보는 새 사람이 됩니다.
“와서 보시오”
-구요비 신부-
지난 성탄 전야에 KBS스페셜은 ‘영원과 하루’라는 주제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학생들이 7년간의 수련을 거쳐 사제가 되는 과정을 방영하였습니다. 시청자들은 신학생들의 맑고 순수하고 늘 웃는 모습이 참 좋았다고 합니다. 이 방송 이후 많은 네티즌이 반응을 보냈는데, 특히 비신자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보는 내내 가슴시리도록 아름다웠습니다”, “가톨릭신자는 아니지만 제게도 영혼이 있다는 걸 놀랄 만큼 일깨워 준 방송이었습니다”, “그분들의 해맑은 미소, 하느님을 향한 그분들의 마음, 정말 아름답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네요”, “가슴이 메말라 가는 이 세태 속에 그들이 있기에 이 세상은 아직도 의미가 있고 아름다운가 봅니다.” 이들의 반응에서 ‘아름답다’는 단어가 참 많이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아름다움(美)을 한자로 풀어보면 커다란 제사상 위에 놓여있는 양(羊)의 모습입니다. 지나친 비약인지 모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고 증언하는데, 이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름다움(美)’이라고 풀이해 봅니다. 히브리서에는 예수님을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어린 양이십니다. 어느 철학자는 ‘아름다움’은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한 희생의 피에서 흘러나오는 빛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의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초대합니다. 사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생의 끝까지 가는 사랑에는 찬란하며 평화스러운 어떤 것이 있습니다”(신학자 H.J. 가제). 이런 예수님의 아름다움은 당신의 첫 제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지내면서 무언가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찾고 있던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이때 제자들을 사로잡은 예수님의 매력,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와서 보시오”(요한 1,39)라고 초대하십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스스로 하도록 초대하며 각자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는데 어떤 자격기준이나 조건을 걸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됨됨이, 과거, 학력, 집안, 인간적인 과오나 죄를 캐묻고 따지고 판단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분 앞에서 아주 편안하고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즉 자기들이 구원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이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2코린 1,19-20 참조). 우리는 늘 받아 주려고 기다리시는 분의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김두완 신부 -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고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당신을 따라오는 두 제자들에게 던진 물음입니다. 이 두 제자는 요한 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첫 제자들입니다. 당신의 첫 번째 제자들에게 던진 이 물음은,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질문이며,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던져진 질문이라고 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물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찾고 있는지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찾고 추구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관심은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하느님같이 되어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힘도 있고 영향력도 있으며 남의 부러움을 사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고 돈을 벌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태세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고 있기에 이러한 세상의 영향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돈에 대한 관심을 끊어 버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 관심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 권력, 영향력 등에 있다면 우리가 찾는 것도 바로 그런 것들이 되겠지요?
사실 많은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자기가 원하고 얻고자 하는 것에 집착합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내 놓고 기도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겠지만, 건강, 출세, 자녀들의 진학, 사업의 성공 등을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또 빕니다.
사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대다수의 신자들의 관심사이며 찾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나오는 제자는 예수님의 질문에 되물음을 주님께 아룁니다. “랍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살고 싶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와서 보아라"하고 제자들을 초대하고, 제자들은 그 날 주님과 함께 묵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 지냄으로서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알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우리가 무엇 보다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지내는 것,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많겠지만, 가장 소중하고 놓쳐서는 안될 것이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고 지냄은 예수님의 정신이 우리 안에 살아 있고, 그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일, 즉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바치는 일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음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고 그의 제자가 되겠다는 우리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보다도 주님의 정신을 배우고, 기르는 일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물으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배우려는 데 우리의 마음을 모으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 조욱현 신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인옥-
하느님 앞에서 '건강한 사람'이나 '의인'은 물론 없을 것이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어느 면으로든 다 병자이고, 죄인임이 분명하기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고
모든 사람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병자이며 죄인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왔다." 하시지 않고
(모든 병자들 중의) '건강한 이',
(모든 죄인들 중의) '의인'을
구별하여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
병원에 꼭 가야하는데도 두렵고 귀찮아 시기를 놓치는 사람도 있고,
모든 병을 자가진단하며, 병 찾기에 골몰하는 사람처럼
의사 말도 신뢰하지 않고 병원을 찾아 떠도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어떤 타입인가?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너무나 손쉽게, 적당히,
자신이 병자들, 또는 죄인들이라고
자가진단(自家診斷)하고 있다.
그러나 말은 '죄인'이라면서도 실은 어떤 구체적인 죄를 짓고 있는지
그 정도나 결과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또 인간 본성의 유약함 때문에 일어나는 유혹과 갈등까지도
죄라고 스스로 단죄해버리는 오진(誤診)도 많다.
자신이 혼자 만든 강박적 규범에 얽매여,
교회에 나온 이후로 더 큰 죄의식에 사로잡혀 고통받는
불행한 자가진단 '죄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사는 게 몽땅 죄지유!"하는 순박한 촌로도 아니면서
얼렁뚱땅 그렇게 넘어가서는 안될 것 같다.
어쩌면 자신의 구체적인 죄상을 들여다보기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안토니 불룸은 "마귀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기 자신을 명상하는 허무일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만큼 처참하고 힘들지만 자신을 자알 들여다보고
그 고통 안에 일정 기간 머물 결심만 있다면 그것은 은총이다.
하느님이 떠나버린 것 같은 두려움과 좌절 속에 머물러
"구해달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때,
주님의 치유는 마침내 효과를 발휘하고
그분의 현존은 죄인의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바로 그때 주님은 명의가 되는 것이고
우리는 구체적인 그 병에서 성하게 되는 것이다.
레위 역시 자신의 참상을 잘 들여다보고 있었으며
자신을 구해줄 어떤 분을 늘 갈망했기에
그의 앞에 오셔서 그를 부르시는 음성을 놓치지 않고
즉시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정말로 치유해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
자신의 병이 정말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모든 병자들 가운데 그래도 조금은 건강한 사람이 아닐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을 따라나섰으면서도
자꾸 부르셨는지 아닌지 의심을 갖는 것은
마치 의사에 대한 신뢰심을 갖지 못해,
이 병원 저 병원 떠돌아 다니는 염려증 환자와 같다.
우리도 레위처럼 부르심을 받아 따라나선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확신에 찬 건강한 상태로 있지 못하고
감기도 자주 걸리고 때로는 중병에도 시달린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정상인 것이다.
우리는 철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때마다 우리의 주치의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치료를 받고, 다시 성하게 되어
자신의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 건강한 사람인척 해서도 안되지만.
공연히 아무 때나 죄인이며 병이 들었다고 비하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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