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11.26 오순절후 스물여섯 번째 주일/ 왕이신 그리스도주일
예배로 부름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 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 지어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 지어다 나팔과 호각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시98:4-6)
예배 기원
하나님아버지!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죄와 사망에서 죽어가던 인류를 구원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영원한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여! 영원토록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며, 구원받은 백성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온 성도들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옵소서. 만왕의 왕이 되셔서 영원토록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면류관 벗어서(25)/다 감사드리세(66)/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95)/다 나와 찬송 부르세(131)/ 교회의 참된 터는(600)/놀라운 그 이름(619)
고백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한 주간도 세상에서 살면서 더러워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내어놓으며 용서를 구합니다. 성전에서는 성도로 살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죄인으로 살았습니다. 주일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행동했지만, 평일에는 믿음 없는 세속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라고 건강과 물질과 직장을 주셨지만, 어느새 저희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며 살라고 하셨건만, 하나님보다는 내 수단과 세상의 권력을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사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이 모든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6:11b)
제목: 생명의 주요, 왕이신 그리스도
본문: 고후5:1-10
☞ 마음 문을 열고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삶이 풍요롭고 여유로울수록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자신을 더 사랑하면 할수록 무서워지는게 죽음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언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 죽음은 내 인생의 소멸을 말하는지…, 죽음에 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1. 건강식품, 건강법이 넘쳐나는 세상
요즘 TV를 틀면 홈쇼핑마다 백세시대를 열어준다는 건강식품 광고가 이어집니다. 건강식품도 시대에 따라 유행이 돌고 돕니다. 오래전 현미효소, 율무효소 등의 요즘 말로 선식 같은 곡물가루 건강법이 유행하였습니다.
또 한 때는 집집마다 녹즙기를 사놓고 케일이나 사과 등의 야채와 과일의 생즙을 짜서 먹기도 하였습니다. 또 죽염열풍이 일어나더니 집집마다 죽염을 비롯한 소금 구입의 열풍이 불기도 했습니다.
또 비타민c를 고용량을 먹어 면역력을 올린다는 메가 비타민요법이 유행하고, 홍삼, 흑삼 등의 인삼제품들은 언제나 명절이면 손꼽히는 선물 아이템이었습니다. 혈액순환을 돕는다는 오메가3가 유행하더니 갑자기 최고의 오메가3라는 남극 새우크릴에서 채취했다는 크릴오일이 또 반짝하더니 사라졌습니다.
그 가운데 분명히 몸에 좋은 것도 있고 별 효과가 없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건강식품이 수입업자들의 전략에 의해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혜성처럼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식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건강법들이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실제로 우리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우리의 건강을 오히려 망가뜨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7년 당시 31년 경력의 한의사가 운영자였고 6만 여명의 회원이 가입했던 네이버 카페 “안아키: 약 안쓰고 아이 키우기''를 중심으로 아이들을 키울 때 약 안 쓰기 방법을 홍보한 적이 있습니다.
홍역이나 수두 등의 예방접종은 오히려 면역력을 저하하고 아이들에게 해가되니 예방접종을 하지 못하게 하고 열을 내리려면 소금물을 먹이고 또 아이들의 피부질환에 대해 스테로이드 계통 약은 전혀 쓰면 안 되고 숯가루나 자신들이 만든 비누나 샴푸 등을 사용하여 자연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홍보하는 등의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카페에서 주장하는 건강법을 따라하다 피해자가 속출하여 대한 한의사협회에서는 카페“안아키'’의 운영자에 대해 한의사 자격을 정지시키고 윤리위원회에 제소하였고, 시민단체에서도 보건복지부에 제소하여 2017년 11월 18일 SBS다큐멘터리(그것이 알고 싶다)에 보도되기까지 하였습니다.
2. 유사과학, 건강과 관련한 부정확한 정보들
쏟아지는 건강식품이나 건강법 중 일부는 과학적으로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고 또 입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마치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인 것처럼 사람들을 기만 하는 소위 유사과학을 통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유사과학은 사이비과학 또는 의사과학이라 하는데, 건강과 관련된 대표적인 예를 들면, 긍정적인 언어와 부정적인 언어를 듣는 물의 결정이 달라진다고 주장하는 것, 수소수나 육각수의 건강효과, MSG가 몸에 좋지 않다는 것, 또 한국에서만 있는 도시괴담의 일종인 선풍기를 켜고 자면 죽는다는 것, 선인장이나 스티커 등의 전자파 차단, 쌓인 독소의 작용으로 몸을 망가뜨린다는 대장 속의 숙변 등이 있습니다.
심지어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소위 감동 호르몬 다이돌핀은 엔돌핀의 4,000배나 되는 효과가 있는 호르몬이라며 마치 실재하고 있는 것처럼 신문의 칼럼에도 실리고 성공학 강좌나 블로그 등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검증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세계 1위 검색사이트인 구글에 들어가서 다이돌핀의 영문 이름(?)인 Didorphin 또는 Dydorphin을 검색해 보면. 검색 결과가 참 이상합니다.
한국 사이트 외에 어떤 외국 사이트에도 Didorphin이나 Dydorphin에 대한 검색결과가 나오질 않습니다. 한국 내에서만 존재하는(?) 호르몬이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다이돌핀이라는 호르몬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이 이름이 회자되게 된 것은 비슷한 이름의 다이놀핀(Dynorphin)이 잘못 인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이놀핀에 대한 기록은 1990년대 초반 한국사회에 운동을 통한 엔돌핀 신드롬을 일으켰던 이상구 박사가 당시 본인이 운영했던 건강 관련 사이트인 “이상구 박사의 뉴스티트”에 2006년 7월 30일 ‘왜 강의에서 다이돌핀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 기록이 있습니다.
“다이돌핀(Dydorphin)의 본명은 Dynorphin입니다. 엔돌핀, 엔케팔린과 사촌 간이며 통증을 감소시키는 면에서는 엔돌핀보다 훨씬 더 우수합니다. 그러나 다이놀핀이 주는 느낌은 엔돌핀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엔돌핀은 기쁨을 주지만 다이놀핀은 정반대로 불쾌감을 주어 오히려 우울증을 유발 시킬 수도 있는 물질입니다. 그러므로 엔돌핀보다는 ‘별로'이기 때문에 저의 강의에 등장시키지 않고 있지요”
즉, 다이돌핀은 실재하지 않는 호르몬이며. 이름이 비슷한 다이놀핀조차도 통증 감소의 효과는 있으나 불쾌감을 주어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는 호르몬이라는 말입니다.
실재하지도 않는 감동 호르몬이야기가 한국교회 강단에서도 퍼져 나갔으니 우리 설교자들도 한국사회에 만연한 부정확한 정보의 피해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쏟아지는 건강과 관련한 무수한 정보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무병장수)을 원하고 있는지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례식장이나 납골당, 공동묘지에 가면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땅에 오는 것은 순서가 있으나 떠나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는 백세시대이기 때문에 나도 백세이상을 살 것이라는 희망 섞인 말들을 하곤 하지만, 실제로 100세 넘게 사는 사람들은 굉장히 드물고 우리도 대부분 100세 이전에 이 땅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때까지만 이 땅에서 살게 되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다윗의 말처럼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왕상2:2)로 떠나가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는 우리를 죽음너머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금년 한 해에도 우리 곁을 떠난 성도들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 가운데 다시 돌아와서 죽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인생의 끝인가?’, ‘동시에 존재의 소멸인가?’, ‘소멸이 아니라면 죽음 후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명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가장 실제적인 질문, 즉 ‘내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어떤 질문을 해도 명확한 대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삽니다. 삶이 풍요로울수록 삶에 대한 애착이 커집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더 커집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죽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사실 성경에도 죽음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주어진 곳은 없습니다. 단지 인간이라면 당하게 되는 당연한 과정으로 담담하게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직 사도 바울만이 죽음에 대한 진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뭔가를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뭔가를 알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바울은 무엇을 알고 있단 말입니까? 그가 알고 있는 첫 번째는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은 한 번은 가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때 장막 집은 무너집니다(1절).
여기서 ‘장막 집’이란 유약한 인간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천막은 생명이 짧듯이 인간의 생명도 점점 약해지다가 얼마 되지 않아 삭아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허물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1절).
여기에 사용된 ‘우리에게 있다’는 신기한 말입니다. 헬라어 ‘있는’(ἒκομεν에코멘)은 ‘가지다’라는 동사 ‘에코’(ἒχω)의 현재 직설법으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주택 소유주입니다. 하나는 장막 집이지만, 또 하나는 견고하고 영원한 집입니다. 그러므로 장막 집이 무너져도 걱정이 없습니다. 더 영구하고 튼튼한 집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번에는 옷 이야기로 전환하며, 우리가 지닌 두 벌의 옷을 말합니다.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3절). 한 벌은 장막 집이 무너지면서 벗게 되고, 또 한 벌은 그때 입게 되는 옷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입은’이란 이미 입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입고 있는 이 땅의 옷은 낡아도 괜찮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영광스런 옷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언급한 사실에 대해 성령께서 보증이 되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성령이 우리의 보증이 되실까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에게 그런 확신을 줍니까?
로마서 8:9은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신다면 그것은 죄 용서 받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가 다 옷을 가지고 있는데, 왜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도록 하라고 할까요?
죽음을 넘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분명히 벌거벗은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처음부터 잘못된 믿음으로 살아서 생명의 옷을 받지 못했지만, 받은 자처럼 속고 산 사람들이 있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옷을 받았지만 도중에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는 해석입니다. (마 21:11-14; 계22:14). 고린도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장막 집이 무너지고 하늘의 집으로 덧입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장막 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집 위에 하늘의 집이 덧입혀지기 때문에, 장막 집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의 삶의 연속성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로마서 8:17b에도,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할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바르고 영광스런 삶을 살지 않으면 죽음 후에도 결코 영광스런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합니다. 탄식하며 간절히 사모하라고 합니다.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에 대한 진리를 누구에게 전합니까? 아무에게나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신자를 ‘우리’라고 합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들이고(1절), 장차 온전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 사람들이고(2, 4절), 하나님의 사람들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4절).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주어진 사람들입니다(1절).
그들에게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도록 하라고 권고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하늘에 새로운 처소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에겐 이 땅에서 현재의 삶이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음은 하늘나라의 집으로 연결되는 영광을 입게 됩니다.
동시에 영원한 삶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삶과 직결돼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믿음의 삶의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 때문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참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거짓 전도자들이 득세하고, 진실 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거짓 사도로 배격하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자기가 받은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것을 배격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핑계로 교회 안에 파당을 일삼았으며,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음란이 부끄럼 없이 활개를 치고,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경고하기 위해 죽음의 문제를 그들 앞에 내세웠습니다. 바울은“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이라면서 그렇게 살아도 되느냐?”라고 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늘에 영원한 집을 소유하고, 하나님이 지어주신 영원한 옷을 입고 살아가는 분들이 그렇게 살아도 되는지 묻는 것입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도 바울은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사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벗은 자들로 나타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긍정적으로 권고합니다.
기독교는 현실의 종교입니다. 그런 기독교가 죽음을 이야기하고, 종말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미래를 강조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믿음으로 현실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포인트는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이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게 해 줍니다. 영원한 미래를 준비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름답게 죽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면 죽음을 아무리 열심히 준비했다고 해도 주님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4세기까지 믿음생활에서 가장 강조한 내용은 거듭남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강조한 거듭남은 단순한 한순간의 감정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들의 삶에서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신념의 변화이고, 두 번째 단계는 소속의 변화이며, 세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새로운 행동의 변화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거듭남을 위한 교육을 2-3년, 길게는 4년에 걸쳐 실시했다고 합니다.
그 교육 기간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세 가지 변화가 있었는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된 삶을 살게 될 때 그를 거듭난 사람으로 인정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교회 공동체에 속하고 이웃에게 소속됐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예배도 허락되지 않았고,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것도 금지 됐습니다. 순교자 저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살고 있지 않다고 밝혀진 사람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바로 그분의 가르침을 입에 달고 있다할지라도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라는 겁니다. 동시에 “그렇게 살아도 죽음을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없고, 그 후의 세상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벗은 인간으로 주님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 갈무리
알렌 크라이더가 쓴 《회심의 변질》에서 감명 깊었던 부분은 초대교회는 전도를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4세기까지는 ‘대중 전도’란 말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계속해서 폭발적으로 부흥했습니다. 그들의 삶이 곧 전도의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준비하지 마십시오.
대신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인가를 점검하며 사십시오. 그리고 거듭난 사람으로 하나님과 화평하며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이것만이 잘 죽는 길이요,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죽음너머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양하며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