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금古猿琴 / 임보
옛날에 고원금이라는 거문고가 있었는데, 그 울림이
심히 신묘하여 사람은 물론 짐승들의 가슴도 사로잡았다.
신비스런 일은 병이 든 자들이 그 가락에 귀를 적시면
병이 낫고, 사나운 짐승들도 그 소리 앞에서는 양처럼
유순히 누그러진다. 도대체 이 거문고가 어떻게
만들어졌기에 이렇단 말인가.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후한後漢의 장중경張仲景이란
이는 명의名醫인데 그의 앞엔 병든 사람들이 늘
구름처럼 밀려든다. 어느 날 한 노인이 크게 부른 배를
안고 찾아와 진맥診脈을 청하기로, 살펴보니 사람과
달랐다. "인맥人脈이 아니라 수맥獸脈이로고" 하니
노인이 엎드려 사실을 고했다. "실은 이 산중에 사는
원숭이로 선생님의 인술仁術을 빌고자 둔갑遁甲을
했습니다. 살려 주소서" 이에 장중경은 병에 人獸의
구별이 있을까 보냐며 환약을 주어 치료케 했다.
늙은 원숭이는 돌아가 천 년 묵은 오동나무를 보내
그 고마움에 보답했는데, 장張이 이 오동으로 금琴을
만든 것이 곧 천하명기天下名器인 고원금이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명의名醫가 덕의德醫를
겸했을 때 고원금을 얻었다고도 한다.
거문고에 덕의德醫의 혼이 깃들어 장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금이 장을 대신하여 그렇게 세상에 덕을 베풀었던
것인가. 우리가 만진 한 개의 돌멩이나 나뭇가지 속에도
우리의 체온이 서려 세상을 덥게도 혹은 차게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평생 그 많은 것들을 만나고 있으니
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은수사銀水寺의 북 / 임보
은수사는 마이산馬耳山 골짝에 자리한 작은 절인데
법당의 동편에 절의 키만큼 높은
큰북이 하나 매달려 있다
이 법고法鼓는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항상 열려 있어서
찾아오는 손들이 많을 때는 종일 산골을 울린다
<둥-둥-둥-, 둥-둥-둥->
북의 울림은 온 산천을 메아리쳐
초목군생草木群生들의 가슴을 흥건히 적신다
주지主持의 얘기론
법고는 짐승의 원혼寃魂을 깨우쳐 구원하는 소리라는데
그래서일까
천만 짐승들의 원혼이 이 골짝에 몰려들어 우글대는지
석산石山은 온통 짐승들의 발자국들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한 마리 죽은 소가
그의 질긴 가죽으로 온 산천을 휘어잡고
흔들며 울고 있는 셈이다
빙옥도氷玉島 / 임보
- 빙옥도(氷玉島,Ice-pearl)는 남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이다.
오색의 영롱한 빛깔을 띤 아름다운 조약돌들이 해안을
덮고 있다. 만조滿潮에 이 섬을 내려다보면 마치 한 마리의
청개구리 형상이다. 그러나 간조干潮에 보면 영락없는
도마뱀이다. 말하자면 빙옥도는 긴 꼬리를 달고 있는데
그 꼬리는 썰물인 때만 드러나게 된다. 이 섬은 이름난 뱃놈
메피스토가 처음 발견한 무인도다. 어느 날 메피스토는
그의 친구 안토니오 내외를 요트에 태우고 와서 그의 섬
빙옥도를 구경시킨다. 메피스토, 안토니오 그리고 그의
아내 바바라는 한 마을에서 자라난 죽마고우들이다.
다음의 글은 메피스토의 독백이다.
바바라,
당신은 이 언덕에서 기다려요
갯벌이 험해서 우리를 따라가기는 어려울 테니까
심심하면 갯바위에 매달린 굴을 따든지
웅덩이에 갇힌 게나 새우들을 잡아도 좋겠오
한 둬 시간쯤 지난 뒤
우리가 돌아오게 되면 당신은
아마 세상의 케럿으로는 잴 수도 없는
엄청난 다이아몬드를 안게 될 것이요
안토니오, 어서 서둘러 떠나세
나는 망치와 끌을 짊어지고 갈 테니
자네는 로프를 둘러메고 가세 그려
조수가 밀려오기 전에 서둘러 다녀와야지
이 영롱한 조약돌의 무리들을 보게
마치 용의 꼬리에 매달린 비늘 같지 않는가
이끼가 묻어 미끄러우니 조심하게나
그래 바닷바람도 상쾌하지
바다의 물결은 하프처럼 흔들리고
아침 햇살도 눈부시지 않는가?
우리가 지금 밟아가는 여기가 이 섬의 꼬리일세
꼬리의 끝에 5, 6미터 높이의 곧은 석주石柱가 있는데
그 돌기둥의 윗부분이 온통 금강석金剛石으로 덮여 있다네
자네 같은 알피니스트면야 식은 죽 먹기겠지만
나 같은 물놈이야 바위를 탈 수 있어야지
밑에 떨어진 몇 개의 부스러기를 줍는 것만으로도
이제는 뱃일도 팽개치고 이렇게 빈둥대며 지낼 수 있게 됐다네
믿을 만한 사람을 찾던 중
우리들의 옛 친구 바로 자네를 선택하게 된 것이야
저놈들은 상어지
갈기를 번득이며 무리를 지어 달리는 저놈들은
이빨이 사나운 바다의 사자들이지
바바라가 손을 흔들고 있군
옛날처럼 아직도 여전히 아름답네 그려
우리들의 고향은 얼마나 평화로운 마을이었던가!
자네집 넓은 광속에 숨어 숨바꼭질도 하고
수수밭에 뒹굴며 간지럼도 많이 했었지
나는 바바라를 자주 울린 편이었고
그럴 때마다 자네는 늘 달래 주곤 했었지
나는 대장지기의 천한 아들이었고
자네는 대지주를 아버지로 둔 귀공자였지
바바라의 포도원에서 함께 놀던 우리들은
나이가 들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
자네는 먼 도시의 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나는 더운 대장간에서 해머만 열심히 내려쳤네
한 10년쯤 지나간 뒤 자네는
이름난 알피니스트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지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최초로 밟은 우리 고장의 영웅이라고
주민들은 플래카드를 높이 걸고 자네를 환영했었지
그리고 자네는 젊은 나이로 주의회의 의원이 되고
아무런 장애도 없이 아름다운 바바라를 신부로 맞았지
안토니오, 내가 고향을 등진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네
자네들이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올리던 그날 말일세
아, 저기 우리의 보고寶庫 석주가 서 있군
기둥의 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보이지?
이제 십여 분 후면 금강석金剛石의 성城에 오를 수 있을 걸세
고향을 등진 나는 바다로 밀려갔지
고깃배를 타고 망망한 대해에서 파도와 싸우며 그물질도 해 보았고
상선商船의 갑판에 올라 하역荷役을 하면서
이국의 수많은 항구들을 드나들기도 했지
화려한 도시의 도박장에서 전 재산을 하룻밤에 다 날려도 보았고
폭풍으로 파선한 뱃조각을 붙들고 무인도에 표류해 본 적도 있다네
이 빙옥도의 꼬리는 바로 나의 표류지漂流地― 내 생명의 은토恩土일세
안토니오, 드디어 도착했네
이 장엄한 보석의 돌기둥을 보게나
어서 로프를 걸어 저 기둥의 정상으로 기어오르세
밀물이 달려오기 전에 말일세
줄이 잘 걸렸는가?
자네가 먼저 오르게나 내가 뒤를 따를 테니
천하의 알피니스트도 이 미끄러운 바위를
줄 없이는 못 오르겠지?
자, 어떤가? 여기서 내려다보는 조망이 말일세
다이아몬드가 어디 있느냐고?
반짝이는 것은 금강석이 아니라 석영石英이라고?
너무 서두르지 말게나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네
이 순진한 사람아, 세상에 그런 큰 보석이 설령 있다고 치세
자네 같으면 친구와 나누어 가지겠나?
안토니오, 자네를 속였다고 너무 노여워하지 말게
다이아몬드보다 더 값진 보석을 우리는 아직 가지고 있네
저 해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바바라 말일세
서둘러 내려갈 생각은 하지 말게
로프는 이미 물 속에 떨어졌네
잠시 기다리노라면 조수가 차오를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헤엄쳐 되돌아갈 수 있네
이제 밀물이 밀려들기 시작하는군
자네는 헤엄을 잘 못한다고?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그래 얘기해 주지
애초 우리들의 경주는 출발부터서 너무나 불공정했네
자네는 수백만 에이커의 거대한 토지를 후원군으로 지녔고
나는 서너 평 대장간의 불구덕이 유일한 후견인인 셈이었지
모든 기회는 자네에게만 주어졌고
세상은 일방적으로 자네의 편이었네
그래서 자네는 킬리만자로의 정상에까지 기어오를 수 있었고
나는 바다의 밑바닥까지 밀려 내려가지 않았던가?
안토니오, 내가 바바라에게 구애求愛한 사실을 아는가?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아홉 번씩이나 말일세
애초에 우리들의 여건이 뒤바뀌었더라면
바바라는 자네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되었을 것일세
우리들의 경주는 너무나 불공평했지 않는가?
자, 이제 새로운 경주를 해 보세
우리들의 출발점을 좀 바꾸어서 말일세
뭍(陸)에서는 내가 너무나 열세였지만
물(海)에서는 내가 좀 나을 듯도 싶네
조수가 이미 섬의 꼬리를 삼켜가고 있군
물이 더 차오르면 바바라를 향해 헤엄쳐 가도록 하세
먼저 도착한 자가 우리들의 보석을 얻기네
욕설은 그만 하고
자, 자네가 먼저 뛰어들게나
잘못하면 상어의 밥이 될 수도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