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
[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Aimez-Vous Brahms> ]
좋아하는 사람에게 음악회 티켓을 주면서 함께 보러 가자고 하는 것은 데이트 신청의 고전적인 수법이다. 이때 “함께 음악회 보러 가실래요?”라고 하는 것보다 “모차르트를 좋아하세요?” 혹은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훨씬 근사해 보일것이다.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남자 주인공 시몽(안소니 퍼킨스 분)도 그렇게 센스 있는 남자였다.
그는 평소에 흠모하던 폴라(잉그리드 버그만 분)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면서 이렇게 묻는다.(사진, 폴라와 로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아나톨 리트박 감독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1961년에 나온 고색창연한 흑백 영화로 프랑스와 미국이 합작해서 만들었다. 영화는 프랑스에서는 소설의 원제목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Aimez-vous Brahms)>로, 미국에서는 <굿바이 어게인(Goodbye Again>>, 우리나라에서는 <이수(離愁)>라는 제목으로 각각 상영되었다.
사강의 소설 중에서 네 번째로 영화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호화로운 출연진으로 눈길을 끈다. 세계적인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50대의 나이로 주인공 폴라 역을 열연했으며, 그녀의 바람기 많은 연인 로제 역으로는 유명 샹송 가수 이브 몽땅이, 폴라를 좋아하는 젊은 변호사 역으로는 <사이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미국 배우 안소니 퍼킨스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원작의 작가인 프랑수아즈 사강이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더욱 화제가 되기도 했던 영화이다.(사진, 폴라와 로제)
파리에서 실내장식가로 일하는 폴라는 트럭 매매를 하는 부유한 사업가 로제와 5년째 사귀고 있다. 하지만 로제는 폴라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 바람둥이 대부분 그렇지만 그는 폴라를 두고 틈만 나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데, 그때마다 폴라에게는 일 때문이라고 핑계를 댄다. 폴라는 주말마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적이 많지만 그래도 로제에게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데...
그러던 어느 날, 폴라는 실내장식을 의뢰한 고객의 아파트에 갔다가 그 집 아들 시몽을 알게 된다. 시몽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데, 매우 자유분방하고 로맨틱한데다가 유머 감각까지 갖추고 있는 멋진 청년, 24살의 풋풋한 청년 시몽은 폴라에게 사랑을 느낀다. 폴라는 시몽의 관심이 싫지 않지만 자기가 그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어느 날, 시몽이 폴라에게 브람스 교향곡이 연주되는 음악회의 티켓을 주면서 데이트를 신청한다. 폴라는 시몽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여 함께 음악회에 가게 된다. 음악회를 계기로 급격하게 가까워진 두 사람.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바로 15살이라는 나이 차이, 폴라는 시몽의 관심이 싫지는 않지만,(사진, 폴라와 시몽)
그가 자기에게 갖는 애정이 순수하게 이성에 대한 관심인지,아니면 연상의 여인에게 느끼는 모성애적 관심인지 몰라 안타까워한다.
폴라에게는 자기 나이에 어울리는 애인 로제가 있지만 로제는 자기 애인이 젊은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지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젊은 여자들과 열심히 바람을 피우고 있다. 폴라는 이런 로제의 행각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지만 커리어 우먼 특유의 자존심 때문에 애써 쿨한 척한다.
그러는 사이 시몽은 더욱 노골적으로 폴라에게 구애를 하고... 하지만 오랜 망설임 끝에 폴라는 시몽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시몽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폴라의 말에 깊은 상처를 받은 시몽이 계단을 뛰어 내려갈 때, 폴라는 울면서 이렇게 외친다.
“나는 늙었어. 너무 늙었다구”
[ 브람스의 음악과 그의 교향곡 1번 4악장,3번 3악장 이야기 ]
연상의 여인과 젊은 남자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브람스의 삶과 일부 닮아 있다.
브람스 역시 평생 동안 스승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연모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시몽이 폴라를 브람스의 작품이 연주되는 음악회에 초대하도록 한 배경에 이것을 암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시몽은 폴라에게 브람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은 것일까?
폴라와 시몽이 음악회에서 감상한 곡은 브람스의 교향곡 1번과 3번이다. 브람스는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던 고전주의자로 불린다. 그는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였다.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고전주의 시대에 두고, 그 시대의 형식과 질서를 작품을 통해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브람스 음악은 당대의 화려한 음악들과 대조를 이룬다.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 같은 작곡가들이 갖가지 요란한 제목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 때에도 브람스는 제목 없는 순수음악, 그 어떤 음악 외적인 상념도 갖지 않은 절대음악을 신봉했다.
그는 그 흔한 오페라나 교향시도 쓰지 않았다. 표제음악 신봉자들은 이런 브람스의 음악을 가리켜 메마른 음악, 무기력한 음악, 창의성 없는 음악이라고 비판했다. 브람스는 작곡에서 영감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떠오른 영감이나 과장된 감정들을 아무런 원칙 없이 나열하는 것은 그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떤 영감이라도 이것을 진지하게 다루어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낼 때 비로소 예술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자로서 그의 혁신적인 화성이나 관현악법, 다채로운 음색들은 모두 이런 기준 속에서 만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람스는 고전적 형식 속에 낭만주의의 꽃을 피운 작곡가라 할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은 1876년, 브람스가 나이 마흔 살이 넘어 발표한 첫 번째 교향곡이다. 이것은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다른 작곡가에 비해 무척 늦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상에서부터 완성까지 무려 20년이 넘게 걸렸는데, 그가 이토록 교향곡 발표를 망설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가 극도로 흠모하는 베토벤 때문이었다. 실제로 베토벤이 기념비적인 교향곡 아홉 개를 내놓은 후, 작곡가들 사이에서는 “베토벤 이후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베토벤의 교향곡에 버금갈 만한 작품을 내놓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브람스는 왜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느냐는 한 친구의 질문에 “베토벤의 위대한 발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교향곡을 작곡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아느냐?”고 털어 놓았다고 한다. 베토벤이 애써 세워 놓은 교향곡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그로 하여금 선뜻 교향곡을 작곡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브람스가 오랜 세월 고심한 끝에 세상에 내놓은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극찬을 받았다. 특히 당대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우 같은 사람은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이 나왔다.”고 얘기할 정도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베토벤의 전통을 이어받은 불멸의 교향곡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작품은 ‘암흑에서 빛으로’ ‘고뇌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삶에 대한 인간의 투쟁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연주되는 제4악장은 ‘승리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브람스가 추구하는 승리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과 같은 고양된 분위기의 영웅적인 승리가 아니다. 그는 마지막 악장에서조차도 지극히 브람스다운 방법으로 이 승리의 감정을 처리하고 있는데, 우수와 번민, 명상을 연상시키는 내면적인 표현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승리를 향해 돌진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곡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선율이다.
교향곡 1번의 4악장과 더불어 이 영화에서 주제음악의 역할을 한 것은 교향곡 3번의 3악장이다. 이 악장의 멜로디는 브람스 교향곡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로맨틱하다. 그래서 널리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실 브람스 교향곡은 대부분 내성적이고 함축적이고 진지해서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음악으로 쓰인 3번의 3악장만은 예외이다. 멜로디가 아름다워 대중음악가들이 로맨틱 버전, 에로틱 버전 등 다양한 스타일로 편곡해서 연주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도 다양한 버전의 3악장이 나온다.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의 멜로디는 너무 달콤하고 몽환적이어서 얼핏 들으면 브람스 작품이 아닌 것 같다. 진지하고 내성적인 브람스에게 이런 사탕발림 같은 감정이 있었나 놀랍기도 하다.
지나친 로망은 참담한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폴라는 시몽의 사랑이 비현실적인 로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으로 대응했고, 이에 시몽은 깊은 상처를 받는다. 영화에서 시시때때로 울려 퍼지는 브람스의 멜로디는 환상은 환상으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지도 모른다.
[ 프랑스인들이 무척이나 사랑했던 가수이자 배우였던 이브 몽땅 ]
1991년 11월 9일 프랑스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은 모든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국민가수이자 국민배우인 이브 몽땅(Yves Montand 1921∼1991)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였다.
대표적인 샹송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비롯해 그의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울려 퍼졌고 텔레비전에서는 그가 출연한 영화가 방영됐다.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해 "그와 함께 우리시대의 위대한 목소리와 배우로서의 뛰어난 재능이 사라졌다"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샤를 드골 사망 이후 프랑스는 다시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이브 몽땅은 이처럼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영화배우였지만 그의 생애를 더욱 빛나게 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편에서 좌파 정치활동을 벌여 온 것이었다. 프랑스 공산당(PCF)의 당원이자, 정치영화의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정치활동과 예술을 결합시킨 프랑스 최고의 좌파 예술가였다.
< 이탈리아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 >
이브 몽땅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지오반니 리비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오반니 리비는 이탈리아 농노 출신으로 1921년 당시 급부상하던 사회당의 급진적 다수파가 결성한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해 중부 토스카나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해 10월 그의 셋째 아이 이브 몽땅이 이보 리비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당시 이탈리아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들불처럼 번졌지만 1차대전 이후 반동의 물결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앞세운 파시스트당이 점차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2년 결국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과 검은셔츠단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다.
무솔리니는 집권 후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는데 지오반니 리비는 1924년 파시스트당에 소환되어 "협력을 하지 않으면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유로 피신했다. 그는 원래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할 계획이었으나 미국 이민법의 개정으로 이민이 불가능해지자 마르세이유에 정착해 1929년 시민권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11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빵공장에 다녀야 했던 이보는 15살 때부터 누이인 리디아의 미용사 일을 도우며 돈을 벌어야 했다. 가난했던 유년시절, 프랑스로 건너와서도 공산당 활동에 열성이던 아버지와 공산당에서 전업활동가로 일하던 형 길리아노의 영향으로 인해 이보는 약자의 편에 서있는 좌파가 정당하다는 인식을 점점 굳혀갔다.
제철소에서 노동을 하던 1938년 17살의 이보는 우연히 마르세이유의 한 밤무대에서 공연 전 분위기를 잡는 가수 역할을 하면서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예명을 이브 몽땅으로 지었다. '몽땅'은 그가 어렸을 때 밖에서 뛰어놀면 집안에 있던 어머니가 창문가에서 그를 "이보! 올라와(monta)"라고 불렀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 프랑스 공산당 당원 가입 >
이브 몽땅은 점차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고 변두리 극장이긴 했지만 자신만의 공연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2차대전으로 인해 그는 나치의 강제노역에 동원돼야만 했다. 파리가 함락된 이후 그는 원래 이름 리비가 유태인 이름 레비(Levi)와 비슷해 독일 비밀경찰(게슈타포)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44년 2월 수용소를 탈출해 파리로 간 이브 몽땅은 파리에서 가수로서 명성을 날리게 됐고 1945년 8월 전설적인 샹송가수 에디뜨 피아프와 만나게 된다. 에디뜨 피아프의 도움으로 더욱 유명해진 이브 몽땅은 영화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할리우드가 그에게 주목하기도 했지만 당시 매카시즘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미국은 가족의 공산주의 전력을 들어 그의 입국을 불허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가수이자 배우로서 몽땅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1951년 그는 당시 인기 여배우인 시몬느 시뇨레와 만나 이듬해 결혼을 한다.
그가 공산당 활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쯤,
그는 1950년 원자폭탄에 반대하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으로 가입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가 공산당 당원이 된 것이다. 그의 아내 시몬느 시뇨레 역시 공산당 당원으로 가입해 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몽땅과 시뇨레)
몽땅은 가수,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집회에 참가해 연설을 하면서 정치적인 활동을 벌였고 1956년에는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을 방문해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스탈린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는 소련군의 헝가리 침공이 있었던 이 때부터 소련에 대해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매카시즘의 열풍이 잦아들었던 1960년 그는 아내인 시몬느가 상을 받기 위해 로스앤젤리스에 머무는 동안 마릴린 먼로와 '사랑합시다(Let's Make Love)'라는 영화를 찍었다. 영화보다는 그와 마릴린 먼로와의 염문이 세인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 쏘, 체코침공에 항의 공산당 탈당 >
1960년대 그는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동참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968년 소련군이 탱크를 밀고 체코를 침공한 것에 반발해 그는 공산당에서 탈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좌파에서 완전히 멀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 출신의 정치영화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의 <Z>와 <계엄령>에 출연해 군사독재와 미국의 제3세계 정치개입을 비판하는 한편 피노체트 독재시절 칠레의 민주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산티아고를 방문해 샹송을 부르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또 1980년대에는 폴란드 연대노조 지원에도 힘썼고...
그가 사망한 지 30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샹송가수나 명배우의 경지를 뛰어넘어 프랑스인들의 가슴 속에 거인으로 남아있는 것은 바로 지칠 줄 모르는 이러한 사회적 발언과 활동에 있었을 것이다.
1980년대 프랑스인들은 이브 몽땅을 대통령 후보로 거론하기도 했으나 그는 죽는 날까지 영화에만 전념했다. 1991년 11월 8일 장 자끄 베네 감독의 영화를 찍고 있던 그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다음날 파리교외의 상리병원에서 70세의 인생을 마쳤다.
그는 연인이었던 에디뜨 피아프와 시몬느 시뇨레가 묻혀있는 파리의 공동묘지 페르 라 셰즈에 안장됐다. 국내 언론에서는
그가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 이후 가장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전향'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는 말년에 자서전 <나는 잊지 않았다>에서 회고한 것처럼 일평생 동안 좌파의 길을 지킨 인물이었다.(사진, 파리 페르라셰즈 공동묘지의 몽땅과 시뇨레 무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첫댓글 이브몽땅 날씬하고부듭럽쥬
한시대를 풍미했던 대배우
평생 처치할수없는여복과 명성
복받은 선배에반해 코리아에서
인민국 포소리에 놀라 자지러지고
따발총소리 따발따발에식겁
덕분에 짜리몽땅으로 긴여정을
이어가면서 서러움과 아픔이 죤나
많쥬
아! 불란서 몽땅과 한국몽땅은
비교불가
예술대학교재로 손색없는고교수님의 아카데미명작 숨차게 감동먹으면서 즐독했음
어몌이징! 인크레이드불!
ㅎㅎㅎ 변대감의 썰은 역시 감칠맛이...
이브 몽땅 중의 영화 중에는 <Z>와 캔디스 버겐과 공연한 <파리의 정사>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여기에서는 동영상으로 올리지는 않았지만 브람스의 교향곡 1번 4악장
은 언제 들어도 근사하지요. 베토벤 냄새가 약간 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역시 브람스의 품격이...
변대감의 건승을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