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2]-허경영 저-
♡박 대통령과 나의 신비한 구사일생♡
박 대통령과 나는 참으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상한 현상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 죽음의 직전에서 살아나는 일들이 많았다.
4살 때 어머니를 잃고 시골에서 농부의 양아들로 자라고 있던 때의 일이다.
내가 있던 집 뒤쪽에서 200m 쯤 떨어진 곳까지는 밭이었고 그 다음부터는 논이 연결되는데 그곳에 작은 웅덩이(연못)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내가 5살이 되던 해의 여름, 나는 혼자서 그 웅덩이에서 물장난을 치려고 들어갔다가 그만 깊은 웅덩이에 빠져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1km 쯤 떨어진 개울 옆에 정자나무 몇 그루 있고 그 아래에서 나무를 하러 가던 우리 동네의 김영기라는 청년 (당시 마을의 머슴)이 지게를 옆에 놓고 깊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애절하게 이름을 부르면서 잠을 깨우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떠보니 여자는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한 방향에서 여자가 이름을 부르길래 그 청년은 소리나는 쪽을 향에 논두렁길을 한참을 갔다는 것이다.사람이 다니지도 않는 들판 한 가운데를 걸어가며 여자가 부르는 곳으로 1km 쯤 갔더니 그곳에 웅덩이가 있고 어린 아이가 배가불룩한 채 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은 나를 급히 물에서 끄집어 내어 물을 토하게 하여 겨우 살려냈다는 것이다.
한발만 늦었어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분이 나를 발견한 그 순간부터 여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그 김영기라는 청년이 그 1년 전
내 어머니의 시신을 마을의 앞산에 갖다 묻어준 일꾼이었다는 것이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내가 1살 때부터 어머니는 몸이 너무 아파서 젖을 먹을 수가 없는 중환자여서 마을 사람들의 젖을 얻어 먹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이 서울의 가마니 움막에서 겨울에 나를 낳다가 얻은 어머니의 병명을 막연이 산후 병으로만 알았지만 혹시 전염이 되지 않을까 하여 나는 어머니 옆에 가지도 못하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나는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방문을 열고 처음으로 밖으로 나와서 마루의기둥에 길다란 명주끈으로 묶여 있는 나를 보시면서
[''어린 자식을 내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이렇게 기둥에 묶어 두다니, 내가 빨리 죽어야 네가 마음대로 뛰어놀 텐데'']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내 뺨을 만져 주셨다. 농사 철이라서 모두 들에 일하러 나갈 때는 나를 어머니 방에 못들어가게 기둥에 묶어 두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 날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며칠 있다가 돌아가셨다. 어린 자식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놀게하고 또 남에게 신세지는 것이 괴로우신 어머니는 그날부터 일부러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듣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를 묻어준 그 청년이 들었던 그 애절한 여인의 목소리가 나의 어머니였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져나갔다.
마을에 아주머니들이 그 일이 있은 이후부터 나만 보면 어린 것이 고생한다면서 머리를 쓰담쓰다듬어주고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먹을 것을 주고 위로하며 나를 자기 자식보다도 더 사랑해 줌으로서 나는 그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랄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 소나무의 솔방울을 따러 올라갔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윗도리가 부러진 나뭇가지에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9살 때 솔방울을 한 가마니 주어서 짊어지고 험악한 잘벽길을 아슬아슬하게 내려오는데 갑자기 돌풍이 불어 지게를진채나 날아가 절벽 아래로 굴러 내려 갔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난 일, 밭두렁에서 소에게 풀을 먹이다가 새끼를 밴 소가 밭두렁에 미끄러져 물고랑으로 뒤집히는 것을 두 손으로 일으키다가 조 밑에 깔려서 죽을 뻔 했던 일, 산에서 풀을 베다가 풀 속에 있는 독사를 모르고 손으로 풀을 잡으면서 잡다가 물려서 두 시간만에 깨어난 일과, 몰고 가던 소가 벌집을 밟아서 수백마리의 벌이 어린 나를 집중 공격해서 몇 백미터를 달려가서 개울물 속으로 뛰어들어 갔는데도 수백마리의 벌이 내 옷 속에서 나오지 않은 채 온몸이 벌에 쏘인 채 일주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일, 산에서 소를 타고 내려오다가 소가 작은 개울을 갑자기 뛰어넘는 바람에 떨어져 의식을 잃었으나 이상한 현상에 의해 나는 다시 깨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 때마다 특이한 현상의 꿈같은 것을 기억하는데 너무나 신비하고 현실감이 없어서 밝히지 않겠다.
나는 어린 시절 아홉번 씩이나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들으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신비한 결과였다. 그러다 서울에 와서 또 다시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만나게 되었다. 서울에 처음 와서 야간 중학교에 들어갈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남대문시장에서 구두를 닦을 때 하루는 영화 엑스트라로 불려갔는데 도봉산에서 있은 전쟁영화 촬영 도중 아군복장을 하고 산을 오르는 장면이었는데 바로 내 얼굴 앞에서 폭약이 폭발하여 10m 쯤 상공으로 떴다가 땅에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목사님이 양아들로 있을 때 처음엔 낮에는 폐타이어를 찢어서 밧줄을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저녁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원효로4가의 폐타이어 공장의 높이 쌓아놓은 폐타이어가 무너지면서 그 밑에 깔려서 중상을 입었었다. 그 다음 목사님의 소개로 서울역 부근의 금반지 수출공장에 다니며 금과 신주에 청산가루를 넣어 끓이는 일을 했는데 청산가루에 질식해서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나기도 했다.
그리고 홍제동 판자촌 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살다가 추운 겨울 밤중에 눈보라에 날아가 버린 천막을 찾아 헤매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어으나 다리만 부러지고 살아났던 일, 내복이 없어서 온몸에 신문지를 감고 교복을 입고 추운 천막 속에서 잠을 자던 야간고등학교 3학년 시절 갑자기 배가 아파와 밤새 추위에 떨며 이틀을 참다가 결국 야간 학교를 가는 길에 길에서 의식을 잃었는데 눈 떠보니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병명은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되었는데 도저히 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수술후 기적적으로 살아 났으나 무료 수술이라서 3일만에 퇴원시키려 하자 병원을 상대로의 일주일만 더 입원해 있게 해달라며 관원들이 집단 호소를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자 다시는 천막 속에서 살지 말라며 돈을 모아 병원을 나서는 내 손에 꼭 쥐어주며 눈물을 흘리던 간호원 누나들을 보며 나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서 사랑을 받으며 목숨을 이어올 수 있었다.
산꼭대기 천막 속에서 살던 야간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 입학 등록금이 모자라서 명동의 빌딩 공사장에서 벽돌을 지고 빌딩 4층으로 올리는 일을 하다가 2층에서 지게를 진 채 떨어져 의식을 잃었었다.
그 후 입학금을 마련키 위해 할 수 없이 청량리 위생 병원에서 피를 뽑아 돈을 받는 매혈을 했는데 한 번 뽑는데 3000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 돈으로는 등록금이 모자라 사흘간 세 번이나 계속 찾아가 피를 뽑았는데 결국 세 번째 피를 뽑고 나오다가 위생병원 잔디밭에서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가 되어 죽음의 세계를 헤매다가 이상한 현상에 의해 깨어나 보니 잔듸밭에 내가 누워 있었고 위생병원안에 있는 교회 저녁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복막염 수술을 받고 퇴원한 뒤 야간학교를 한 달간 쉬면서 155번 시내버스 경비공으로 잠시 있었다. 그 때는 자동차 수리가 끝나면 잠을 그 버스 안에서 잤는데 너무 추운 나머지 자동차 수리할 때 비추는 전등을 끌어안고 자다가 그 전등에 의해 덮고 자던 모포와 시트에 불이 붙어 그것이 내 옷에까지 타들어와 잠을 자다가 불타는 버스 안에서 연기에 질식되어 의식을 잃었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던 일, 타고 가던 차의 정명충돌로 나 혼자만 살아난 일 등 참으로 죽을 고비는 많았으나 그때마다 그 무엇인가에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곤 했다. 또한, 내 자신의 일이 아닌 남을 구해주려다가 수 없는 죽을 고비를 당하고도 무사히 사라날 수 있었다. 싸움을 말리고 교통사고 환자를 구하면서 나는 수 백 번의 위기를 만나야만 했었다.
여성으로서 서울대 의대 수석과 하버드 의대를 나왔다는 김영희 (강남 삼성병원 과장, 의대 교수)와 그 분의 어머니가 탄 택시가 정면충돌로 두 사람이 팔다리가 다 부러지고 엄청난 피를 흘리며 무의식 상태로 택시 안에 방치된 채 차에 불이 붙었는데 수 백 명의 주변에 있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택시의 엘피지 탱크 쪽으로 불길이 불어가자 모두 도망을 가고 없는 흑석동 원불교회관 앞 삼거리에서 나는 목숨을 포기하고 그 택시쪽으로 달려갔다.
여기저기서 택시가 폭발한다면 빨리 물러나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내가 타고 가던 차를 옆에다 대고 네 사람을 차에 싣고 1.5km 쯤 떨어진 강남 성모병원으로 5분 이내에 옮겨 모두 기적적으로 살려냈을 때 응급실의 의사가 조금만 더 피를 흘렸더라면 네 사람 모두 죽었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나 역시 긴장이 풀어지면서 의식이 몽롱해졌다.
그때 엔진 쪽에서 나온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고 그 불길이 가스통 있는 뒤쪽으로 옮겨 가는 것을 보고도 수 백 대의 자동차에서 소화기 하나 들고 나오는 사람이 없었고 가스통 이 폭발한다면서 수많은 차들이 경적을 울리면서 줄행랑을 치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는 숙명같은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손으로는 살려낼 수 없는 죽음도 있었다. 나의 이러한 죽음 직전의 구사일생은 나를 더 강하게 변화시켜 주었지만 단 한 마리의 소와 한 사람의 죽음을 직접 바라보면서 나는 나의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으며 남의 고통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이런 정신은 내가 그늘에서 35,000여 명의 불우자를 보호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일곱 살 때 양아버지가 사온 금방 죽을 것 같은 작은 송아지를 내가 어른 소가 될 때까지 키웠는데 그 소가 또 다시 새끼를 한 마리 낳고 나서 새끼를 남겨둔 채 도살장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대문을 나서지 않으려고 하는 어미 소와 그 어미 소를 보면서 소리내어 울어대는 새끼 송아지를 보며, 주인을 위해 죽도록 논밭을 갈아 일해주고 또 다시 새끼를 남겨둔 채 늙었다고 도살장으로 팔려가야만 하는 어미 소와 어쩔 수 없는 농부의 삶을 보며 어린아이의 그 정든 소를 살려낼 수 없어서 뒷곁에 숨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가 복막염 수술을 받은 야간고등학교 시절 면역이 떨어진 몸으로 천막 속에 있으니 배가 퉁퉁 부어오르고 아파서 잠시 북한산성 부근에 노고산에 있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흥국사에서 땔감을 해주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내가 거처하는 곳은 절의 대문에 붙어 있는 한 평 정도 되는 문간방이었다. 낮에 나무를 하고 밤엔 야 간고등학교를 다녀오는데 늦게 오면 절간에서 저녁을 먹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절간의 내 방에서 마주 보는 건너편 별채의 넓은 방에 어떤 부잣집 딸이 폐결핵 3기로써 요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야간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그 여자는 대학 3학년이었다. 나는 그 누나의 부탁에 의해 그 분을 누나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는 야간 학교가 끝나면 구파발역 버스 종점에서부터 걸어서 전혀 불빛 하나 없는 4km 정도를 걸어 무시무시한 흥국사 계곡을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내가 멀리서 절이 있는 쪽을 바라보면 언제나 그 누나가 켜놓은 누나의 방 불빛이 아련히 이정표가 되어 있었다. 절은 저녁이면 일찍 불을 다 끄고 잠을 자고 새벽 3시 반이면 일어나야 하므로 내가 야간수업이 끝나는 밤에는 전혀 불빛이 없게된다. 나는 그 누나 방의 불빛을 보며 용기를 내어 절에 도착하면 누나는 내가 먹을 저녁밥을 누나 방에서 이불 속에 묻어 두었다가 따뜻한 밥으로 내가 저녁을 굶지 않게 해주었다.
낮으로 절에서 사용할 땔감을 하러 빨갛게 낙엽진 숲속에서 나무를 하고 있을 때면 언제나 내 옆에 와서 누나는 시를 읽어주었다. 나는 그 누나와 함께 종종 시를 암송하다 보니 100여 개의 시를 암송할 수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선녀와 같았던 그 누나가 결국 어느 겨울 발목까지 눈이 오던 날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는 그 누나의 죽음을 직접 내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고 그동안 그 누나에게 받았던 따뜻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야간학교가 끝나고 절간으로 들어올 때 단 한 개 불빛도 보이지 않는 산골짜기를 걸어 들어오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혼자 흘렸는지 모른다. 저녁을 굶은 채 절간의 문간방에서 자정이 넘도록 숙제를 할 때마다 금방이라도 누나가 밥상을 들고 들어올 것 같아 누나가 더욱 그리웠다.
나는 그 누나의 병을 고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 때부터 나는 한 번도 얼굴 본 기억이 없는 내 어머니와 내가 시골에서 키운 도살장으로 팔려간 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다 떨어진 신발을 보고 아름다운 운동화 한 컬레를 나의 두 손에 꼭 쥐어주며 나의 눈물을 닦아주던 그 누나는 나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바로 인간의 한계였다. 어린나이에 도살장으로 팔려가는 어미소와 18세의 내 가슴에 낙엽처럼 죽어가는 누나를 살릴 수 없었던 그때의 기억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꾸만 떠올랐다. 내 어머니 역시 내가 그 당시 7살만 되었어도 어떤 약을 구해서라도 어머니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4살 밖에 안 되다 보니 결국 나도 모르게 불효자가 된 것이 자꾸만안타까워졌다. 나는 그 얼마 뒤 그 절을 떠나서 다시 홍제동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장인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의 총탄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육영수 여사님을 두 눈으로 보고도 남은 연설을 다 마친 뒤 단상에 떨어져 있는 육 여사님의 핸드백과 신발을 주워서 나가던 박 대통령. 그리고 병원에서 떠나가는 육영수 여사님을 바라보며 대통령으로서 어쩔 수 없었던 박 대통령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도 육여사님의 서거를 보며 그리고 빈소에서 소리내어 통곡하는 박 대통령을 보며 그 아픈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었다.
내가 4살 때, 어머니의 상여 가 나갈 때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고 [''너네 엄마 꽃가마 타고 서울 간다'']는 말을 할 때 철없는 나는 그것을 믿고 춤을 추면서 아이들에게 자랑을 했고 그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울었다고 한다. 나를 낳은 지 3년 6개월만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덮고 자던 이불과 옷가지들이 개천변에서 불 태워지면서 누런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던 그 때 나는 불구경을 하며 영문도 모른 채 즐거워했다. 참으로 그 때는 어머니의 죽음을 알기 못한 채 떠나 보냈다. 그러나 낙엽 떨어진 산사의 계곡을 거닐면서 외로운 한 소년에게 수많은 아름다운 시를 가르켜준 그 누나의 죽음에서 비로소 나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누나가 떠난 그 절을 떠나면서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는 중량교 다리 밑에서 하룻밤을 새며 다 떨어진 책가방을 끌어안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새삼스럽게 더더욱 어머니가 그리워졌다.
또한 초등학교 3학년 때 새로 부임해온 김명숙이라는 여 선생님이 나에게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수업이 끝날 때마다 교단 위의 선생님과 함께 나란히 손을 잡게 한 뒤 학생들로부터 열중쉬어 차렷 경례를 받게 했다. 그리고 교무실로 데리고 가서 항상 나를 옆에 앉혀놓고 일을 시키고 대화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 여선생님이 갑자기 내가 11살 때 멀리 다른 학교로 떠나게 되었다. 학교의 다른 선생님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 마을 동구 밖으로 떠나가시는 여 선생님의 뒷모습을 골목 귀퉁이에 숨어서 쳐다보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떠나기 이틀 전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마을 옆 강변 언덕에 앉아서 저 강물이 언젠가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다시 꼭 만나게 될 거라며 공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며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시던 선생님이 모습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4살 때 떠난 어머니와 11살 때 떠난 김명숙 여 선생님과 18살 때 떠난 절에서 만난 누나와의 이별은 나에게 많은 번민과 그리움의 고통과 방황과 위로와 용기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나는 그 세 여인을 생각할 때마다 그 세 여인이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언제나 그 분들이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떤 난관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윤리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목숨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평소에도 길거리에 앉아 행상을 하고 있는 여인들만 보면 이 세 여인이 생각나서 눈물이 핑 돌곤 하는 버릇이 생겼다. 수많은 상처를 안고 성장한 내가 육영수 여사님의 서거를 보니, 박 대통령의 심정을 너무나 깊이 헤아릴 수 있었다.
참으로 박 대통령에게도 수많은 죽음의 문턱 있었다 박 대통령이 5.16 혁명을 성공했을 때 북한의 경제와 군사와 전력과 GNP가 남 한보다 10배 정도나 앞서 있었다. 그나마 북한의 십분의 일에 불과한 남한의 국방과 경기도 60%는 미국의 원조와 유엔군에 의존하고 있었다. 국가 경제와 국군통수권 마저도 미국이 가지고 있었으며 크리스마스는 공휴일로 제정된 지가 10년이 지났는데도 석가탄신일은 공휴일 제정을 미국에서 맡고 있었으니 정치,경제,국 방에 이어 종교에까지 미국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뿐인가 6.25 후유증으로 세계 제1의 실업자와 극심한 굶주림과 가난하기 때문에 못 배우고 못 배웠기 때문에 가난해야만 하는가난과 문맹의 악순환을 보며 박 대통령은 5.16 혁명 당일에 이어 두 번째로 목숨을 던질 위기에 직면했다.
이름뿐인 껍데기 대통령이요, 껍데기뿐인 대한민국이 아닌가?
그리고 1969년 3선 개헌과 미군 철수 앞에 박 대통령은 세 번째 위기를 맞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운명은 한 평생 동안 이러한 절박한 위기의 운명을 하늘로부터 타고 나왔으며 그것이 하늘이 준 소명이었다.
그는 청용상의 얼굴이었는데 청룡은 가난이라는 암울한 먹구름이 낀 대한민국에 나타나 그 먹구름인 보릿고개를 걷어내어 우리 국민이 쌀밥을 먹기 시작하는 햇빛이 날 때 떠나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늘도 자연에 물을 주기 위해 여름에는 장마와 홍수로 사람을 죽게 할 때가 있듯이 그 분은 가난한 나라를 성장시켜야만 하는 소명을 받은 여름 대통령이었기에 그 목표를 이루려다 보니 한편에선 엄청난 장마와 태풍과 천둥과 벼락에 의한 희생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61년 5월 16일 3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걸어서 한강 인도교를 건너와 나라를 구한 뒤 1979년 11월 3일 국민의 애도 속에 그가 건너왔던 그 다리를 우연하게도 삼천육백여 명의 조문객을 이끌고 누워서 건너갈 때까지 십팔 년간의 세월이야말로 필 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검소와 굴욕의 세월이었다. 또한 그분은 차지철 경호실장을 5.16혁명 때부터 데리고 와서 저승길로 갈 때도 경호실장을 대동하고 저승길에 동행함으로써 결코 그 분은 평범한 대통령이 아니라 하늘이 보낸 대통령이었음을 보여주었다.
크게 본다면 거대한 독재자 미국에 맞서서 싸운 민족주의자요, 자주독립의 지도자인데도 소아적 시각으로 본다면, 독재자라는 오명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였기에 나라를 구하고도 누명을 쓰고 백의 종군과 함께 죽어간 이순신 장군의 충정을 보는 듯한 18년의 의국충정의 세월 속에 그 분 역시 나라를 구하고도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오해와 고난을 겪었다.
국민의 반대에 부딪친 월남 파병 문제,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건설 등의 경제문제에 이어서 1968년 1월 21일의 청와대 무장 간첩 침투와 196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1968년 11월 2일의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에서 수많은 고비를 맞았다.
5.16을 시도하던 그 날과 그리고 생애 첫 번째로 맞이한 사상범으로 몰려 죽음 직전에 사면 된 일. 그리고 북측의 미묘한 각종 도발과 3선 개헌, 미군철수 움직임 앞에 또 다시 박 대통령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하늘은 박대통령에게 새로운 구원자를 예비해 두었다. 그것은 바로 나와 박 대통령과의 만남이었다.
1969년 10월 14일 저녁 청와대의 비밀연회장에서 한국 첫째 재벌인 나의 양아버지와 박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나의 양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어린 나의 지혜, 총명함 때문에 그룹이 놀랍도록 어려운 문제를 잘 풀어가고 있다면서 나를 양자로 맞이하게 된 경위와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박대통령에게 소개하게 되었다.
그때 나의 양아버지는 국가의 어려움에 도움이 될 터이니 대통령이 한번 나를 만나보도록 권유하자 박 대통령이 꼭 한번 시간을 만들어달라고 하여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3편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