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 지로 디탈리아 이탈리아의 전통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4. 12. 12:52
지로 디탈리아
이탈리아의 전통
2008년 지로 디탈리아에서 경기를 펼치는 선수들
첫 번째 지로
1908년 이탈리아의 스포츠 신문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Gazzeta dello Sport)〉는 경쟁사인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지가 자전거 회사인 비앙키(Bianchi)와 이탈리아 자전거 클럽과 손잡고 이탈리아 일주 자전거 대회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정보는 비앙키의 경쟁사인 아탈라(Atala) 바이크가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의 아르만도 코녜트(Armando Cougnet)는 이미 프랑스에서 투르 드 프랑스가 성공을 거두면서 이 대회를 개최한 〈로토 벨로〉의 발행부수가 크게 늘어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이탈리아에서 사이클링은 아주 중요한 스포츠였다. 이미 이탈리아에는 지로 디 롬바르디아, 밀란-산레모, 밀란-토리노 대회가 있었다.
〈가제타〉는 1908년 8월 7일 신문 1면에 1909년 5월에 이탈리아 일주 자전거 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함으로써 경쟁자보다 선수를 쳤다. 자전거 대회를 개최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 〈코리에레〉는 아주 품위 있게 가제타의 승리를 인정했다. 〈코리에레〉는 우승자에게 3천 리라의 상금을 내걸며 대회를 축하했다. 이렇게 해서 '지로 디탈리아(Giro d'Italia)'가 탄생했다.
첫 번째 지로는 1909년 5월 13일 시작됐다. 새벽 2시 53분 127명의 선수들이 밀라노의 로레토 광장을 출발했다. 여덟 개 구간에 걸쳐 2448km를 달려 다시 밀라노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1909년 제1회 지로 디탈리아
이탈리아 일간지에 실린 그림
대회가 열리는 동안 경기 소식을 알리는 포스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6일 후인 5월 30일 5만 명의 밀라노 시민들이 선수들을 환영하기 위해 모였다. 깃발이 펄럭이고 기마부대가 호위하는 가운데 끝까지 완주한 마흔아홉 명의 선수들이 결승선에 들어왔다. 우승자는 '루이지 간나(Luigi Ganna)'라는 석공이었다. 그는 매일 일하러 가면서 왕복 95km를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이것이 완벽한 대회 준비가 된 셈이었다.
티포시와 지로 디탈리아
지로 디탈리아는 가장 이탈리아적인 대회다. 지로는 오랫동안 이탈리아 선수들의 독무대였다. 1950년 스위스의 후고 코블레트(Hugo Koblet)가 우승할 때까지 외국인은 단 한 명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지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티포시(Tifosi)의 존재다. '티포시'는 이탈리아에서 프로 축구와 사이클링 경기에 열광하는 팬들을 일컫는 말이다. 지로 디탈리아, 밀란-산레모, 지로 디 롬바르디아 같은 이탈리아의 프로 사이클 대회가 열리는 곳에는 항상 티포시들이 있다.
티포시들은 매년 지로가 열리는 5월 중순에서 6월 초면 알프스와 돌로미테의 고개에 모여든다. 이들은 흙길을 올라가는 가비아 고개와 스텔비오 고개에서 선수들을 열광적으로 응원한다. 꼴찌 선수의 등을 밀어주기도 하고 선두에 선 선수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2001년에는 블라디미르 벨리가 티포시들이 자신을 모욕하는 데 격분해 자전거에서 내려 욕하는 관중을 때렸다. 결국 그는 이 일 때문에 실격됐다. 돌로미테의 한 구간에서는 관중들이 선수들의 등을 밀어줬는데 이탈리아의 선수들은 관중들이 너무 많이 밀어주는 바람에 페달을 돌릴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티포시들은 10km가 넘는 구간을 손에서 손으로 선수들을 계속 밀었다.
지로의 코스는 처음에는 사이클의 인기가 높은 북부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가 점차 가난한 남부 지역으로 확대됐다. 또 알프스와 돌로미테 산악 지역이 추가되면서 코스는 점점 더 길어지고 험난해졌다. 그것은 투르 드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오직 강한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지로는 여름에 열리는 투르 드 프랑스나 가을에 열리는 벨타 아 에스파냐(Vuelta a España)보다 먼저 열리기 때문에 날씨가 좋지 않을 때가 많다. 2000m 이상의 고지대에서는 눈보라가 일어나기도 한다. 1988년 선수들이 가비아 고개를 넘을 때의 일이다. 가비아 고개는 좁은 흙길이었는데 이날은 눈이 내려 선수들이 자전거를 타고 올라갈 수 없었다. 내리막길에서 선수들은 조금이라도 손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손에 오줌을 누었다.
1931년 19회 대회 때에는 지로를 상징하는 분홍색 상의인 '말리아 로자(Maglia Rosa)'가 도입됐다. 지로를 '핑크 레이스'라고도 부르는데 핑크빛이 대회 상징이 된 것은 〈가제타〉 신문의 종이 빛깔이 분홍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핑크 저지를 도입할 때 신문은 이 저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았다.
이는 무솔리니가 분홍색이 여성적이어서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로가 이탈리아에서 차지하는 위상에도 불구하고 파시스트당은 지로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스페인의 프랑코 군부 정권이 벨타 아 에스파냐를 홍보수단으로 이용하고 프랑코 총통이 시상식에 나타났던 것과 달리 무솔리니는 시상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캄피오니시모
이탈리아의 사이클 역사는 챔피언 간 대결의 역사다. 이탈리아에서는 위대한 챔피언을 캄피오니시모(Campionissimo)라고 부른다. '최고의 챔피언' 또는 '챔피언 중의 챔피언'이라는 뜻이다. 1920년대에는 첫 번째 캄피오니시모인 코스탄테 지라르덴고(Constante Girardengo)와 알프레도 빈다(Alfredo Binda)가 대결했다.
두 사람은 자전거 경기에서는 대결을 펼쳤지만 서로에 대해 말하기를 피하면서 존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지노 바탈리와 파우스토 코피가 최고의 맞수였다. 그 다음에는 아도르니와 지몬디가 대결했고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모세르와 사론니가 라이벌이었다.
알프레도 빈다는 '이탈리아 사이클의 아버지'로 불린다. 코스탄테 지라르덴고의 뒤를 이어 캄피오니시모가 된 그는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지로에서 5연승을 했고 41개 구간 우승기록을 갖고 있다. 또 세 번이나 세계도로사이클 챔피언이 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그는 은퇴 후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바탈리와 코피를 훈련시켜 전후 사이클의 황금기를 이끈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우아한 자세로 유명했고 기술도 뛰어났다. 그의 자전거 기술은 사이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알프레도 빈다는 여성들의 흠모를 한 몸에 받은 선수였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신사로 인정을 받았다.
투르 드 프랑스의 창시자 앙리 데그랑주는 그를 가장 뛰어난 도로 사이클 선수라고 하며 에디 메르크스나 코피에 필적할 만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르네 비에토는 그의 부드러운 라이딩 스타일에 대해 "산 밑에서 그의 어깨에 우유 한 잔을 얹는다면 그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산을 넘을 것이다"고 했다.
빈다가 어릴 때 그의 가족은 돈을 벌기 위해 프랑스 니스에 있는 삼촌 집으로 가서 살았는데, 그곳에는 일거리도 많았고 자전거 경기도 많았다. 빈다는 트럼펫 부는 것과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트럼펫을 잘 불어서 형제들과 함께 연주를 하기도 했다. 1925년 지로의 한 구간에서 시상대로 가던 빈다는 오케스트라가 있는 것을 발견하자 자전거를 내려놓고 트럼펫을 집어 들어 연주를 하기도 했다.
빈다는 그해 지로에서 우승했는데 다른 선수들이 390g짜리 타이어를 쓸 때 그는 좀더 두꺼운 500g짜리 타이어를 썼다. 당시에는 타이어가 쉽게 펑크가 나서 선수들이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빈다는 타이어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알프레도 빈다는 항상 자전거 선수는 다리도 튼튼해야 하지만 머리도 좋아야 한다고 말했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빈다는 너무 쉽게 지로의 우승을 차지했다. 그를 앞설 수 있는 선수가 아무도 없었기에 대회조직위원회는 빈다가 출전하면 대회가 재미없을 것이라며 그에게 돈을 주고 대회에 참가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빈다는 우승 상금과 같은 금액인 2만 2500리라를 받고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투르와는 인연이 없었다. 1930년에 투르에 참가해 두 구간에서 우승했지만 그다음에 넘어지는 바람에 투르를 그만뒀다. 빈다는 은퇴 후에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감독으로 있을 때 그는 단호한 면을 보여주었다. 1949년에는 코피의 아내가 팀을 따라다니지 못하게 했는데, 그녀는 남편에게 전화도 할 수 없었다. 이는 빈다가 선수 시절 엄격한 금욕 생활을 했기에 코피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그는 "진정한 프로는 경기에만 전념해야 한다. 내가 우승했을 때 나는 1년에 한 번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말했다.
감독으로 활약한 빈다는 1948년에 지노 바탈리의 우승을, 1949년과 1952년에는 파우스토 코피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서로 화합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바탈리와 코피가 같은 팀에서 활동하게 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챔피언들의 대결
바탈리와 코피의 관계는 물과 기름 같았다. 그들은 같은 팀에서 활동하고 이탈리아 국가대표 팀에서 함께 뛰었지만 라이벌 관계가 지속됐다. 영국 〈가디언(The Guardian)〉 지의 팀 힐튼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코피가 바탈리를 크게 이기면서 바탈리는 모욕을 당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경쟁 관계가 더욱 치열해져 자신이 우승하는 것보다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어떤 스포츠에서도 그렇게 오래 지속된 라이벌 관계는 없을 것이다."
사실 코피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바탈리였다. 그가 코피를 자기 팀으로 데려왔는데 코피가 자신을 이기자 당황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 새로운 경쟁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코피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차렸고 코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전거 위에서 코피는 신과 같다. 그는 출발할 때는 인간이지만 달리기 시작하면 신이다. 그의 유연한 자세는 정말 멋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후 이탈리아는 바탈리 팬과 코피의 팬으로 나뉘었다. 점차 세속화돼가는 이탈리아에서 가톨릭교회와 보수층은 신앙심이 깊은 바탈리를 좋아했다. 반면 코피는 애인과의 스캔들로 가톨릭교회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았지만 이 나라의 진보적인 세대와 신세대를 상징했다.
두 사람은 강박적으로 서로를 의식했는데 코피는 바탈리를 가리킬 때 이름을 부르는 대신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바탈리는 코피가 약물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코피가 경기 도중 도로가에 유리병을 버리는 것을 보고 병을 집어 던진 곳을 잘 봐뒀다가 경기가 끝나고 돌아와 병을 찾은 뒤 그것을 조사하기도 했다.
코피는 약물 복용을 인정했다. 그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암페타민을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가치가 없다고 했다. 그도 암페타민을 사용하느냐는 질문에는 "필요할 때마다 사용한다"고 대답했는데 필요할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 묻자 그는 "항상"이라고 답했다.
지노 바탈리(왼쪽)와 파우스토 코피(오른쪽)
두 사람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라이벌이었다.
사자왕 치폴리니
자전거 경기에서 마리오 치폴리니(Mario Cipollini)만큼 관중들을 즐겁게 해준 선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기발한 복장과 엉뚱한 행동으로 사이클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수퍼 마리오(Super Mario)', '치포(Cipo)', '사자왕(Lion King)' 등 여러 가지 별명을 갖고 있다. '사자왕'이라는 별명은 그의 외모와 갈기 같은 긴 머리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는 별난 행동으로 대회조직위원회를 화나게 했지만 관중들은 이를 즐거워했다.
치폴리니는 아주 뛰어난 스프린터였다. 스프린터는 평지에서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선수를 말한다. 2002년 그는 밀란-산레모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세계도로사이클 챔피언이 됐다. 2003년에는 1933년에 알프레도 빈다가 세운 지로 디탈리아의 41개 구간 우승의 기록을 깼다. 그는 타고난 체력과 체격을 바탕으로 스프린트 능력을 길렀으며 길고 평평한 스프린트 구간에서만큼은 무적의 선수였다. 그의 전략은 간단했다.
그는 평지에서 우승해서 최대한 관중의 이목을 끈 다음 산악지대에 들어서자마자 대회를 그만두었다. 1992년에서 1999년까지 그는 일곱 번 투르 드 프랑스에 참가했지만 한 번도 완주하지 않았다. 투르 드 프랑스의 조직위원장은 화가 나서 2001년과 2002년 치폴리니와 그의 팀의 출전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런 조치도 그의 엉뚱한 행동을 막지 못했다.
치폴리니가 근육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고 달리고 있다.
사자왕 치폴리니는 기발한 복장과 엉뚱한 행동으로 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특이한 복장으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자전거와 신발, 선글라스, 바지 같은 복장이 서로 잘 어울리도록 입는 정도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충격적인 의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99년 지로 기간 중에 그는 고대 로마인의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자신의 구간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근육 모양이 그려진 옷과 얼룩말과 호랑이 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고 대회에 출전했다.
그의 옷장에는 입지 않은 수백 벌의 옷, 넥타이, 신발 등이 있었다. 그는 투르의 한 구간에서 자전거 핸들에다 캐나다 출신의 육감적인 여배우 파멜라 앤더슨의 사진을 붙이고 경기를 했는데 그렇게 하면 남성 호르몬을 높여 경기를 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투르에서 매일 다른 색깔의 바지를 갈아입었고 대회조직위원회는 규정위반으로 그에게 벌금을 물렸다. 그는 멋을 부리기 위해 벌금을 냈다. 약간의 벌금은 그가 거둔 홍보 효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가 입던 근육 무늬 유니폼은 자선 경매에서 43만 달러에 팔렸다. 이 금액은 그가 낸 벌금의 1백 배가 넘는 것이었다.
치폴리니는 자기 집 근처의 고속도로에서 훈련을 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는데 경찰에서 "안전하게 최고 속도를 낼 수 있는 곳은 그곳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섹스 심벌의 이미지도 갖고 있었다. 치폴리니는 "나는 프로 사이클 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포르노 스타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이클 선수 중에는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많았으나 치폴리니는 성적인 금욕 생활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별난 행동에도 불구하고 치폴리니에게는 가정적이고 겸손한 모습도 감춰져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한 대회에서 우승한 다음에는 이런 말을 했다.
"내 아내는 내가 우승할 때마다 자기에게만 감사의 말을 빼놓는다고 불평한다. 이번 승리는 그녀 덕분이다. 마리오 치폴리니 같은 사람하고 사는 일은 특히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선수생활도 오래했는데 서른다섯 살의 나이에도 스프린트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을 했다. 그리고 "만약 브레이크를 잡는다면 당신은 이길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런가 하면 동료 선수들에 대해서는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빈다의 지로 최다 구간 승리 기록을 깬 다음에 "나는 빈다의 신발을 닦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해적 판타니
이탈리아의 마르코 판타니(Marco Pantani)는 샤를리 골과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같은 위대한 클라이머의 반열에 드는 선수다. 클라이머는 오르막에 강한 선수를 말한다.
그는 체구는 작았지만 폭발적인 힘을 가졌다. 그가 오르막에서 속도를 내서 달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는 선수들의 무리인 펠로톤 앞에서 혼자 달렸다. 1994년 지로에서는 돌로미테 두 개 구간에서 승리하고 종합 2위를 차지하면서 유명해졌다. 그의 클라이밍은 큰 얘깃거리가 됐는데 기자들이 왜 그렇게 빨리 산을 오르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고통을 빨리 끝내려고."
1997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경기를 하고 있는 판타니의 모습
마르코 판타니는 위대한 산악왕이었다.
이탈리아는 새로운 스타를 찾아냈다고 흥분했다. 이제 막 사이클의 새로운 전설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운명의 여신은 판타니에게 승리 대신 시련을 안겨줬다. 그는 1995년 밀란-토리노 대회의 내리막길에서 자동차와 정면충돌해 정강이뼈와 종아리뼈가 부러졌다.
당시 그는 스물다섯 살에 불과했는데 그의 자전거 인생은 끝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판타니는 다시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강한 정신력으로 부상을 이겨낸 뒤 1996년 8월, 다시 경기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그는 빡빡머리에 두건을 쓰고 나타났다. 그 모습과 공격적인 경기 방식 때문에 그에게는 '해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해적'이라는 별명을 얻은 마르코 판타니
부상에서 회복한 판타니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8년 그는 지로에 도전해 뛰어난 클라이밍 기술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투르 드 프랑스가 남아 있었다. 판타니는 그해 투르 드 프랑스에서 첫 주에는 고전했지만 피레네의 산악구간에서 전년도 우승자인 울리히를 9분 차이로 따돌리며 구간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투르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선두 주자인 울리히를 추격하고 있었다. 판타니는 알프스 산악 구간에서 다시 한 번 울리히에게 큰 타격을 줬다. 그는 갈리비에에서 비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두 차례 공격을 했고 결국 울리히는 포기하고 말았다. 마침내 판타니는 투르에서 챔피언이 됐다. 끔찍한 사고를 겪은 지 3년 만에 지로와 투르에서 모두 우승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1998년 투르는 판타니에게는 영광스러운 대회였지만 투르 자체는 약물 파동으로 얼룩졌다. 주최 측은 선수들을 조사했으며 많은 팀이 스스로 경기를 그만뒀다. 이러한 스캔들 속에서 약물과 상관없이 우승을 차지한 판타니 덕분에 그나마 투르는 체면을 지켰다. 그때부터 판타니에게 도전할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1999년까지 그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였다.
그러나 1999년 지로에서 그의 비극적인 몰락이 시작됐다. 1999년 6월 5일 그는 지로 디탈리아에서 큰 차이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네 개의 산악 구간에서 우승한 판타니는 종합우승이 거의 확실했다. 판타니가 지로에서 이겼다는 내용의 티셔츠까지 이미 인쇄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런데 대회가 끝나기 이틀 전에 실시한 약물 검사 결과 그의 혈액에서 금지 약물인 에리스로포이에틴(EPO)이 한계치를 넘게 검출되었다. 그가 도중에 경기를 포기하자 팬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욕설을 퍼붓고 심판의 차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지로 디탈리아는 한순간에 리더를 잃고 말았다. 이탈리아의 국가적인 영웅인 판타니가 약물 스캔들에 연루됐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이후 판타니는 약물 복용 의혹과 싸우는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1998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했을 때만 해도 '진정한 챔피언이자 아주 깨끗한 선수'로 묘사되었는데, 이제 그는 약물 복용 혐의를 받고 재판에 시달리는 처지가 됐다. 이 때문에 그는 한때 종적을 감췄고 1999년 투르 드 프랑스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판타니는 훈련을 시작했고 2000년에 다시 돌아왔다. 지로 디탈리아가 로마를 출발할 때 그는 교황의 축복을 받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약물 사용 혐의를 받고는 있었지만 산악지역에서 뛰어난 경기를 펼치며 대회를 재미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많은 팬들이 그를 좋아했다. 그는 위대한 클라이머의 전통을 이어가는 선수였으며 그의 뛰어난 클라이밍은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깊은 인상을 줬다.
2000년 그는 투르에 참가해 몽방투에서 울리히, 암스트롱, 비랑크 등 투르의 가장 강한 선수들과 함께 정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정상을 5km 앞두고 그가 공격에 나섰다. 암스트롱이 그를 추격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속도를 늦춰 판타니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판타니는 그의 이런 행동에 분개했다. 판타니는 암스트롱이 그날 우승감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암스트롱은 판타니를 '엘리판티노'라고 불렀다. 그것은 '작은 코끼리'라는 뜻으로 판타니의 귀가 큰 데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판타니는 이 별명을 몹시 싫어했고, 두 사람은 경기 내내 설전을 계속했다. 며칠 뒤 판타니는 다시 쿠쉐빌 구간에서 우승했다. 이탈리아인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쿠쉐빌에서 모르진까지 가는 구간에서 판타니는 무모하고 성급하게 공격을 펼쳤다. 그는 곧 뒤처졌고 그다음 날 위통으로 경기를 중단했다. 안타깝게도 판타니의 승리는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판타니는 그 뒤에도 계속 경기에 출전했지만 거의 우승하지 못했다. 그의 미래는 불확실해 보였다.
2004년 2월 14일 초저녁 이탈리아 리미니의 한 호텔에서 판타니는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대뇌부종과 심장마비였다. 검시관의 조사 결과 그는 심각한 코카인 중독 상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마리오 치폴리니는 그의 죽음에 대해 "충격이다. 그의 죽음은 사이클링과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크나큰 비극이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고 말했다.
투르 드 프랑스의 5회 우승자인 스페인의 미겔 인두라인은 "그의 경기는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판타니보다 많은 것을 성취한 선수들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겼던 선수는 결코 없었다"는 말로 판타니를 추모했다. 지로 디탈리아의 조직위원회는 매년 산악구간 중 하나를 그에게 헌정하기로 했다.
지로의 미래
이탈리아가 통일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탄생한 지로 디탈리아는 이탈리아를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지금도 지로는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모든 지역을 지나간다. 시칠리아, 사르데냐, 엘바 섬을 지나가고 이탈리아 안의 작은 나라인 산마리노와 바티칸도 방문한다.
지로는 2009년 1백 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지로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1999년 판타니의 약물 파동에 이어 2002년 대회도 약물로 얼룩졌다. 중요한 스폰서들이 사이클 팀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 대회조직위원회에 약물 사용을 막지 못한 데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조직위원회는 약물 스캔들 없는 지로를 만들겠다고 말했지만 무기력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지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해마다 5월이면 3대 투어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이 멋진 축제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출처
제공처 정보 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 자유롭고 아름답고 강한 두 바퀴 2013. 1. 20. 책보러가기 이 책은 지난 2백 년 동안 자전거의 역사에서 있었던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자전거를 발명하고 이 기계를 훌륭한 탈것으로 만든 사람들과 순수한 마음으로 자전거를 즐겼던 애호가들, 수많은 드라마를 만들어 낸 위대한 챔피언들의 이야기를 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