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64
11월4일[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연중 제30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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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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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R4PIFC5ILA
[서울대교구 노동준 안토니오 신부님 집전(흑석동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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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런 공동체!>
돌아보니 나름 꽤 오랜 시간 윗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절대 그렇지 처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지만, 속으로는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는 마음에 은근슬쩍 교만해지기도 했었습니다.
어디 가서 혹시라도 홀대받는다고 여겨지면 속이 상했습니다. 큰 행사장이라도 가면 내가 앉을 자리는 어디쯤인가 고민하느라 뒷골이 다 당겼습니다.
따지고 보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질타당하고 있는 위선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는 생각에 잠을 자다가도 이불킥을 하곤 합니다.
요즘 저희 피정센터를 찾는 교우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씀입니다.
여기오면 세상에 살 때와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를 느낍니다. 그것은 세상에서와는 다른 역설의 진리입니다. 높은 사람이 절대 높지 않은, 높은 사람은 낮은 곳에서 섬기는 사람이요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확인하고 갑니다.
아마도 저희 형제들이 오시는 교우들에게 기쁘게 봉사하는 소탈하고 진실된 모습이 그렇게 좋아보이는가 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윗사람은 섬기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 더 많이 움직이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세상의 논리를 뒤집는 장소, 아랫사람이 더 존중받고, 더 귀히 여겨지며, 더 사랑받는 장소! 그 장소가 세상 모든 그리스도 공동체의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합니다.
더 이상 지도자들이 내가 누군 줄 알아? 하고 외치지 않는 공동체, 윗사람이라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 않는 공동체, 윗사람이라고 멋들어진 옷만 걸쳐 입고 높은 곳에 앉아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않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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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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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집중하였고 그들은 과거의 율법 조항에 집중하였습니다. 사람이 꼰대가 되는 이유는 현재와 이웃사랑의 가치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잔치에 초대받거든 항상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과거와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교만’이 사람을 꼰대로 만든다는 것을 알려주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이웃사랑에만 집중하려면 나 자신만 생각하는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는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해지려 해도 잘 안 됩니다. 어느 순간엔가 윗자리를 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겸손이 힘들까요?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것이 더 행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겸손은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아니면 겸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조금씩 겸손하여지라고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의 가치를 오히려 교만으로 여겨 그냥 무시하고 흘려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 한 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스님들이 불자들을 부를 때 ‘보살님’이라고 부릅니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구도자를 말합니다. 보살은 어찌 보면 부처가 되기 직전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스님들이 불자들을 들어 높이며 자신들이 먼저 합장하고 불자들에게 인사합니다. 우리로 치면 신자들을 거의 예수님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스님들로부터 이런 대우를 받아서 자신을 보살이라고 믿게 되면 교만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을 보살이라 불러주지 않으면 스스로 그렇게 불림을 받으려고 명성을 구걸하게 됩니다. 그 비굴함이 나중에 스스로 자신을 부처로 만들려는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보살 대접을 받으면 오히려 합당하지 않다고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고 더 보살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신자들을 부를 때 ‘성도님’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성불이나 같은 뜻입니다. 불교에서 부처가 되면 성불한 것이고 개신교에서 그리스도가 되면 성도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성인입니다. 신자를 부를 때 이미 ‘성인’이라고 여기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신교 목사님들은 교회를 ‘섬긴다’라고 말합니다. 성인들을 당연히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가 자신을 성인으로 섬겨준다고 교만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아무도 성인으로 여겨주지 않을 때 그 사람 스스로 그렇게 여겨달라고 거룩한 척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남이 보지 않을 때는 모든 죄를 짓고도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물론 천주교도 이 모든 의미를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왠지 신자들을 부를 때는 그저 ‘신자’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믿는 자’라는 뜻입니다.
믿으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맞지만 그런 의미로 쓰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그 앞에 ‘평’자를 붙이며, 스스로 비하하듯이 ‘병신도’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어떤 평신도분이 사제들 앞에서 강의하실 때, 당신들은 사제들과 비교하면 아는 것도 없고 믿음도 부족하니 ‘병신도’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분의 말에서 평신도라는 말이 성직자들이 신자들과의 구분을 두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라는 비판이 담겨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닙니다.
그러면 사제들이 신자들을 평신도라고 부를 때 신자들은 겸손해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뭐가 잘나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사제들 앞에서 자신들도 사제들과 같이, 혹은 더 나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스스로는 평신도라고 말하며 성직자들과 차이가 난다고 여기는 것이 교만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런 비굴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겸손은 당당함과 함께 가고 교만은 비굴함과 단짝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겸손해지고 당당해집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제가 우리는 그리스도이고 그래서 하느님으로 불려도 된다고 말하면 교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이 있어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해도 되고, 또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성체를 하느님이라고 해도 된다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데 왜 우리는 하느님이라 하면 안 될까요?
겸손은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당당함에서 나오는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비굴하게 ‘그저 나는 조금 믿는 신자입니다’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그것 이상은 살고 있어서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이웃을 높여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당신과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살이요 성도를 넘어서 이미 부처가 되었고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온종일 내가 예수님이라 믿고 살아보십시오.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겸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기 때문에 나도 그리스도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나 자신을 미리 낮추는 비굴함은 오히려 교만으로 표현됩니다.
가난하기만 해서 부자들에게 비굴하게 돈을 구걸하던 사람이 복권이 당첨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자신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비굴해지기를 바랄 것이고 그래서 교만하게 첫 자리에 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겸손은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그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이웃을 하느님처럼 부를 수는 없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리스도나 성체처럼 여겨주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이 겸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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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지난 휴가 때에 한국에서 동창 신부님들과 지인들을 만났습니다. 만나면 비슷한 질문을 받곤 합니다. ‘언제 한국에 다시 오느냐?’라는 질문입니다. 태어나서 55년을 살았으니 한국에 제게는 조국이고, 모든 것이 익숙한 땅입니다. 가족들이 있고, 함께 사제서품을 받은 동창 신부들이 있고, 언어가 통하고, 모든 것이 편한 곳입니다. 동창 신부님의 사제관에 며칠 머물면서 그 익숙함이 편안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깨끗하고, 정갈하고, 대접받는 느낌입니다. 뉴욕에서 5년 째 살면서 들에 핀 꽃 같다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온실에서 자란 꽃은 안전하고, 아름답고, 풍요롭습니다. 들에 핀 꽃은 비와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야 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에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주 신문을 만들면서 보람이 있지만 늘 긴장이 함께 합니다. 구독자의 감소로 신문사 운영에 대한 부담도 어깨에 짊어져야 합니다. 청소, 세탁, 식사도 혼자 해야 합니다. 뉴욕에서의 삶에서는 들에 핀 꽃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와 충만함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왜?’라는 삶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성서의 땅,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땅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이천년 동안 나라 없이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전에 다시금 정착한 땅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했던 땅입니다. 신앙인들은 그 땅을 ‘성지(聖地)’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들어오기 전에 그 땅에는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지붕 두 가족이 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신념과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평화와 자비’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삶의 지침과 이정표로 여기는 ‘쿠란과 토라’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방인을 따뜻하게 돌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화 땅에서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라는 ‘땅’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라는 ‘삶’을 먼저 생각한다면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입니다. ‘왜’라는 원인을 찾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배려와 포용을 선택한다면 그곳은 평화의 도시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참된 평화와 자유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참된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심수봉 씨가 불렀던 ‘젊은 태양’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햇빛 쏟는 거리에선 그대/ 고독을 느껴보았나 그대/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종소리 바람소리 고이고이 잠들던 날/ 먼 하늘에 저 태양이 웃는다./ 모진 바람 거센 파도 가슴속에 몰아쳐도/ 먼 하늘에 저 태양이 웃는다.”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라는 가사가 마음에 남습니다. 수천 년을 그 땅에서 살아왔던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도 결국은 모두 이방인인 것을 왜 서로를 사랑할 수 없는지 안타깝습니다. 18년 전 캐나다에서 지낼 때입니다. 저는 빅터라는 분의 집에서 홈스테이하였습니다.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지내다 보니 시간이 늦어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빅터에게 양해를 구하고 친구를 집으로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빅터는 낯선 손님 때문에 당황했고, 저에게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존중하니, 당신도 나를 존중하면 좋겠습니다.’ 짧은 말이지만 제게는 깊은 울림을 주는 말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부부도 그렇게 하지 못해서 서로 다투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와 같은 존중과 배려가 없어서 갈등과 분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소유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내려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겸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달인 10월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11월에게 자리를 내줍니다. 아름다운 색으로 멋을 내던 나뭇잎도 바람이 불면 떨어져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 시작은 겸손입니다. 겸손의 다른 이름은 존중과 배려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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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세상을 3부분으로 나누는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빛의 속도보다 느린 세상입니다. 뉴턴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두 번째는 빛의 속도와 같은 세상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통용되는 세상입니다. 양자역학이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빛의 속도보다 빠른 세상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되는 세상입니다. 인드라의 세상이고, 홀로그램 우주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세상을 인간의 의식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의식의 세계가 있습니다. 감성, 이성, 오성으로 질문에 답을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깨달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몸은 이 세상에 있지만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타볼 산에 오르셨을 때 제자들이 보았던 놀라운 모습입니다. 무의식 또는 초의식의 세상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동굴 속에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동굴 밖의 세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지는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꿈꾸었던 세상입니다. 모든 성인과 성녀들이 원했던 세상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앞에 경찰들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걸어가면 좋은데 약간 주춤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이 저를 불렀습니다. 신분증을 보여 주었고, 지갑도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가려 하는데 경찰이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릇된 욕망, 헛된 욕망으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치 사도행전에서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필립보 사도에게 질문했던 것 같았습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위로와 고독’을 이야기합니다. 악으로부터 오는 위로도 있고, 선으로부터 오는 고독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위로와 고독이 어디에서 오는지 ‘식별’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릇된 욕망, 헛된 욕망은 넓고 화려해 보여도 결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지 못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그것을 두 개의 깃발로 이야기합니다. 사탄의 깃발은 멋지고, 웅장하고, 강해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초라하고, 볼품없고,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따라야 할 깃발은 그리스도의 깃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200년 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당신이 천주교인이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은 당당하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은 고통과 죽음을 의미하였지만,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희망의 대답이었습니다.
생각하니 예수님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친구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에게 박해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회광이가 목을 잘 칠 수 있도록 협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하였습니다.
환난의 때이니 믿음을 더욱 강하게 가지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3살의 삶을 사셨지만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25살의 삶을 살았지만 수선 탁덕으로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화려한 깃발이 아닙니다. 그릇된, 헛된 욕망이 아닙니다. 낮은 데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당당함입니다. 나는 어느 깃발을 향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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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1.7-11: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다가, 사람들이 모두 상석에 먼저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 하신다.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8절) 이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창피할까! 이것은 도둑질하다 붙잡혀서 훔친 물건을 도로 내놓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으므로 가지고 있던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그 자리를 남에게 양보한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그를 헛된 자만에 차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받아 마땅한 명예를 누리게 된다.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10절)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마땅히 빛나는 덕행으로 다른 사람을 앞서야 한다. 덕행의 법칙은 뽐내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다.
겸손한 신앙인이 있고 교만한 신앙인이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를 자신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참된 겸손으로 오를 수 있는 높은 곳에 닿고자 한다면, 선행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야곱이 보았던 사다리이다. 사다리의 양쪽 장대는 우리의 영과 육이며, 가로대는 겸손과 수양으로 만들어져 있어 그것들을 밟고 하느님께로 올라간다. 겸손의 덕을 어떻게 갖출까? 그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여 인정하는 데 있다. 자신의 처지를 올바로 인정할 때, 우리는 겸손하게 하느님께 자비를 청했던 세리의 기도 자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겸손하고 가난한 자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들어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참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세리였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삶의 균형을 이루신 예수님의 마음과 삶 앞에, 복음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서 살펴본다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 들고나오는 교만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언제나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진정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1) 교회가 연옥에 대한 가르침을 정식으로 정의한 것은 리용 및 피렌체 공의회(1274년 및 1439년), 그레고리오 13세 및 우르바노 8세의 신경(信經),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여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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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2023년 11월 04일 토요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상우 바오로)
일상 속에서 우선순위를 잘 따져야 합니다.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서 바른 선택을 하는 것은 판단력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를 포함하는 로마서 9-11장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다른 민족들의 구원 문제를 다룹니다. 유다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갈등 속에서 함께 살았던 로마 교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 구원의 우선순위를 구약의 백성에게 먼저 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으며 유다인들에게서 시작된 구원은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됩니다. 그렇다고 이방계 그리스도인들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도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우선순위와 주도권은 늘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집에 초대된 예수님과 율법 교사들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맨 윗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어 간접적으로 꾸짖으십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순위와 판단력과 겸손의 문제는 오늘 성경 말씀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특징입니다.
본당과 가정과 직장에서 우선순위를 착각하며 판단력이 부족한 경우를 때때로 겪습니다. ‘완장’ 하나 채워 주면 뭐라도 된 듯 거들먹거리며 우쭐대는 태도를 쉽사리 보게 됩니다.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겸손이 무엇인지 각자에게 질문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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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보다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권고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겸손해야만 합니다. 교만한 지식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코린토 1서 8장 1절-2절).
겸손이야말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적지 않은 경우 윗자리를 선호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만한 자세로 산다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계실 공간이 없어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겸손하려면 먼저 자신을 잘 알고, 남을 인정해 주어야만 합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하지요.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대하는 이를 만나더라도, 이마저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가 나에게 서운하게 대한다면, 나 역시 그에게 무언가 서운하게 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되돌아보는 것이지요. 또한, 상대방의 언행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마저 깨닫습니다.
따라서 겸손한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이웃을 통해 전해 주시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함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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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윗자리’와 ‘끝자리’, ‘영광스러움’과 ‘부끄러움’이 이루는 강한 대조가 오늘 복음을 이끌어 갑니다.
흥미로운 것은 윗자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부끄럽게 되고, 끝자리를 찾는 사람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논리적 모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논리에서는 윗자리가 영광을 주고, 끝자리는 부끄러움을 준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당연하고 자명한 논리를 거스르는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세상 논리와 예수님 말씀이 충돌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 말씀을 듣고 예수님 말씀을 따를 수 있을지 묻게 됩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초대한 이에게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라는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밀려나더라도, 또다시 윗자리를 고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 논리를 더 익숙하고 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논리의 옷을, 예수님 말씀의 옷으로 갈아입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것처럼, 우리도 부끄러움이 아닌 영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이요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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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앞에 겸손한 사람>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7”(루카14,11) 예수님께서는 몸소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마구간에서 그 낮아진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필리2,7-8)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하신 대로 벌거벗은 채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위엄에 대해 대단히 까다롭게 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윗자리에 앉기 좋아하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특별한 예우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였고 윗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역시 그런 위치를 당연히 차지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혹 누가 만일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에 앉는 척한다면 그는 끝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고 따라서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잘나가는 파리들만 모여 사는 높은 동네에 어느 날 밑바닥에서 놀던 파리 한 마리가 냉큼 날아들었습니다. 잘나가는 파리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저 밑바닥 파린데 어떻게 여기까지 날아왔소?’
그러자 밑바닥 파리가 말했습니다. ‘예, 줄을 잡았지요. 소꼬리를 꽉 잡고 있다가 소가 휙 꼬리치는 덕에 이곳까지 올라오게 됐죠.’” 우리도 줄을 잡아야 하나요? 줄 잡고 올라온 것이 그리 배가 아프던가요?
자신을 낮추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힘써 조심할 일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남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입니다.‘내가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이다’, ‘일은 내가 더 했는데 나보다 더 저 사람을 알아주는군.’하는 따위의 말은 물론 그런 생각조차 마음에 두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십시오.”하고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하루라도 겸손함으로 주님을 찬미하시길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시편에는 “주님께서는 높으셔도 비천한 이를 굽어보시고 교만한 자를 멀리서도 알아보신다.”(시편138,6)고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샘’은 겸손한 자의 '마음의 골짜기’로 흘러듭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겸손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깊은 믿음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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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때 여행을 너무 좋아해서, 여행 관련 책과 잡지를 보고 직접 찾아가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새로운 장소에 새로운 생각도 많이 나온다고 말하면서 여행 마니아의 모습을 자주 보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렇게 말하는 저를 봅니다.
“집이 최고야! 역시 집만 한 곳이 없어.”
집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자기 집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기에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도 익숙하고 편함을 자기 집에서 느끼게 됩니다. 뇌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뇌가 긴장 상태에 있으면 불편하고 불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 뇌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납니다. 이때 창의적인 생각들을 나오게 됩니다. 예전에 저는 익숙하고 편안한 집보다 새로운 환경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반대되었습니다. 이제는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 좋습니다.
익숙하고 편한 것을 좋아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제 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몸이 약해지고, 이에 따라 낯선 공간보다 편안한 공간인 ‘집’을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글이 잘 안 써지면 낯선 장소를 찾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환경을 집에 만듭니다. 방 청소를 하고 서랍 정리를 해봅니다. 또 잘 쓰지 않았던 펜과 노트를 써보기도 합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변함’을 ‘나’ 안에서 봅니다. 내가 이렇게 변하는데 ‘남’은 안 변할까요? 당연히 변합니다. 그런데 자기만을 옳다고 생각하면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그 안에서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 자신을 낮추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겸손의 마음을 통해서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이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높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겸손의 마음을 통해서만 이웃과 함께하고 더 나아가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지도자는 초대했으면서도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호의가 아닌 꼬투리를 잡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마음을 간파하십니다. 자기를 낮추는 변화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남의 변함만을 보려고 하는 교만이 이제 주님을 반대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변해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교만이 아닌, 낮은 자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겸손의 삶으로의 변화해야 합니다. 주님도 그런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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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과 자리>
루카 14,1.7-11 (끝자리에 앉아라)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람과 자리>
사람에게
영원한 자리는
주어지지 않으니
자리 때문에
빛나는 사람은
언젠가 빛을 잃지만
자리를
빛내는 사람은
언제나 빛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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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높여주시도록 낮추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자신을 높이면 낮아지고 낮추면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니 이 말씀은 자신을 낮추라는 말씀이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저는 자신을 높이지도 말아야지만 낮추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에 벗어나 제가 잘못 생각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서면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 앞이 아니라 우리 인간끼리 있을 때 높으니 낮으니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 앞에 가서 ‘하느님, 제가 저 인간보다 높지요? 제가 저 인간보다 낫지요?’하고 얘기하면 어떨지 상상해봅시다.
어떤 자식이 부모에게 와서 내가 형보다 높고 낫다고 주장하면 어떤 부모가 그런 자식을 좋게 보고 그래 네가 높고 낫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사랑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에 높으니 낮으니 하지 않습니다.
미숙한 사랑이나 불완전한 사람의 경우, 내 사랑이 더 크니 네 사랑이 작으니 해도 네가 높다거나 내가 높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있지요. 사랑하기에 나를 낮추는 경우 말입니다. 너처럼 낮아지고 너보다 더 낮추기도 합니다.
엄마는 아이처럼 낮추고 아이보다도 더 낮추는데 하느님은 엄마보다도 더 낮추시지요.
하느님의 이 사랑의 낮춤을 필리피서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을 낮추시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하느님에서 사람으로 낮추시는 사랑인데,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개로 자신을 낮추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낮추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본받으라고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
그런데 낮추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높이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들 때 하느님께서는 그런 자를 내치시고 낮추십니다.
이것을 마리아의 찬가는 이렇게 노래하지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오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심이로다.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치시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습니다.”
마리아처럼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권고처럼 높여주시도록 낮추는 나를 꿈을 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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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겸손의 덕>
-“끝자리의 겸손을 사랑합시다!”-
"주님,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시편 92,2)
아침 새벽 독서의 기도, 시편136장 26절까지는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라는 매구절 반복이었습니다. 이런 끊임없이 흥겹게 노래하는 주님 찬미의 마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감사와 겸손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이자 참 좋은 겸손의 덕입니다. 하느님 앞에 참으로 회개할 때 그 회개의 열매가 겸손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겸손이요,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러니 인간 무지에 대한 답은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내적 아름다움은 겸손에 있습니다. 여름철 오랫동안 피어있는 “자귀나무꽃”의 은은한 향기에서 연상된 것은 겸손이었고 써놓은 글이 있습니다.
“향기맡고 찾아내는 꽃
한참가다 향기맡고 뒤돌아 보는 꽃
자귀나무꽃
존재의 향기
생명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
당신은 이런 분이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2023,6,19
겸손한 이들에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러면 복음 선포는 저절로 이뤄질 것입니다. 복음화는 개종이 아니라 증거와 매력을 통해 이뤄진다는 교황님 말씀이 생각납니다.성덕의 잣대가 겸손이요, 존재의 향기, 겸손의 향기를 발하는 아름다운 분들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성인들이요 오늘 기념하는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잔치에서 윗자리를 탐하는 이들을 바라보시며 제자들에게 겸손히 끝자리를 택할 것을 권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매사 끝자리를 택하는 겸손한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아예 끝자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에 보면 “단식을 사랑하라”, “순결을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끝자리의 “겸손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겸손뿐 아니라 기도를 사랑하고, 공부를 사랑하고, 침묵을 사랑하고, 수도생활을 사랑하고, 그러면 저절로 자연스럽게 덕도 몸에 배게 됩니다. 잠언에도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임금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지체높은 이들 자리에 서지 말라. ‘이리 올라오게!’하는 말을 듣는 것이, 귀족들 앞에서 하대 받는 것보다 낫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의 드러내기 좋아하는 모습을 경계하라 주신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기다란 예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요,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 회당에서도 높은 좌석, 잔치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런 속빈 허영을 택하지 말고 속이 꽉찬 겸손의 삶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 말씀은 선택된 이방인들의 자만에 대한 경고와 유다인들의 구원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강조하는바 구원은총에 대해 한결같이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구원이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이니, 이런 구원은 은총의 선물이라는 자각에서 저절로 “감사”와 “겸손”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복음 말씀이 겸손에 대한 결론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자신이 아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참으로 자신을 겸손히 낮출 때 주님 친히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베네딕도 규칙서 7장은 “겸손에 대하여” 열두 단계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공부하는 마음으로 간단히 살펴봅니다.
1.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늘 눈앞에 두어 잠시도 잊지 않는 것이다.
2.자신의 뜻을 좋아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것이다.
3.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온갖 순종으로 주님을 본받는 것이다.
4.순명에 있어 어렵고 비위에 거슬리는 일 또는 당한 모욕까지도 묵묵히 인내로써 받아들이는 것이다.
5.자기 마음속에 들어오는 모든 악한 생각이나 남므로게 범한 죄악들을 겸손된 고백을 통하여 숨기지 않는 것이다.
6.수도자가 온갖 비천한 것이나 가장 나쁜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7.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신이 가장 못하고 비천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의 말로써 드러내는 것이다.
8.수도자들이 수도원의 공동규칙이나 장상들의 모범이 권고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9.수도자가 말함에 있어 혀를 억제하고, 침묵의 정신을 가지고 질문을 받기 전에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10.쉽게, 또 빨리 웃지 않는 것이다.
11.수도자가 말할 때는 온화하고 웃음이 없으며 겸손하고 정중하며 간결한 말과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큰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다.
12.수도자가 마음으로뿐 아니라, 몸으로도 자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항상 드러내는 것이다.
말그대로 겸손의 수련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사랑하듯 겸손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겸손을 사랑할 때 능동적 자발적 기쁨으로 겸손의 훈련에 항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은 겸손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겸손의 이 모든 단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자는 곧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 이전에는 공포심 때문에 지키던 모든 것을 별로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키기 시작할 것이니, 이제는 지옥에 대한 무서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하게 될 것이다.”(성규7,67-69)
오늘은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16세기 가톨릭 개혁시대를 주도했던 인물중 하나로 일생동안 한결같이 교회를 위해 치열하게 일하며 살았던 성인입니다. 46세 과로로 점차 체력이 소모되어 은퇴후 선종까지 성인의 행적은 경이로울 뿐입니다.
교황청 국무원장, 프란치스코회 지도 사제, 가르멜회 지도 사제, 구호기사단 지도 사제, 밀라노 대교구장, 트리엔트 공의회 교리서 편찬 위원장, 그리스도인 교리 신심회 설립자, 성 암브로시오 헌신회등 참으로 불철주야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했던 성인입니다. 성인은 1584년 11월3일 밤, “주님, 제가 여기 대령했나이다.” 라는 마지막 겸손한 임종어를 남기고 선종하였고 주교좌성당 중앙 제대 아래 묻힙니다.
성인은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였고 권력을 휘두를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고 성덕을 높임으로써 개혁의 반대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았으며, 자신의 성직자나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권력을 남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성인은 후대 성직자와 교리교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교회의 충실한 종, 매력적인 겸손한 성인,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이자 성덕의 잣대가 겸손의 덕입니다. 참된 회개의 열매인 겸손이요,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이야 말로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겸손이요, 겸손 또한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훈련과 습관을 필요로 하는 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하느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 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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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사랑과 행복!>
오늘 복음(루카11,27-28)은 '참행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11,27) 하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11,28)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오늘 행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드러내 보여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동정의 영광을 간직한 채, 영원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으신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곧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외아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하게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의 삶을 본받으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이사61,10)
오늘 독서인 이사야 예언자 전하는 말씀입니다.
단순한 믿음과 공경 안에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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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evB4On1K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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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 11)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는
자연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마침내
더 낮은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단풍의
단순한 삶과
마주합니다.
또 더 낮은
곳으로
흐르는
넉넉한
물의 흐름이
그 어떤 것보다
자유롭습니다.
자연의
순리와는
사뭇 다른
부실하고
허약한
우리내면을
만납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진리의 힘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힘으로
드러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무의 뿌리가
나무를 키우고
나무를 살게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는
윗자리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끝자리입니다.
낮춘다는 것은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모상들과
함께 어우러져
소통한다는
것입니다.
어우러져야
어울릴 수 있는
참된 기쁨입니다.
진리로 향하는
방식은
자신을 낮추는
실천의 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도
한 없이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십니다.
소통과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소통하는
끝자리들의
행복입니다.
반갑고 빛나는
행복이 쏟아지는
그곳이
윗자리가 아닌
낮아지고
낮추는
끝자리에 있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끝자리가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마음을
되찾아줍니다.
하느님의 잔치
하느님의 나라는
자신을 낮추는
뿌리의 잔치
뿌리의 나라입니다.
나무를 지탱하는
것은 뿌리이며
우리들 마음임을
기억하는
새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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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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