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을 하는데 장암진료소 겨울봉사활동 계획이 생각났다. 온천 관광이라고 해서, 나도 온천 생각만 하고 수안보가 제일 좋겠다고 했는데, 부모님께 여쭈어보니 온천 말고 다른 계획이 없다면 1시간 반이나 걸리는 수안보보다는 가까운 유성 온천으로 가든지 아니면 초정 약수가 훨씬 좋을거라고 하신다. 유성 온천은 잘 모르겠지만, 오늘 다녀와보니 수안보보다는 초정 약수가 훨씬 더 좋겠다는 생각이다. 어차피 당일 코스라면 멀리 가는 것보다 가까울수록 좋고, 초정리 정도라면 버스 대여할 필요없이 회원들 승용차만으로 충분할 것 같다. 아니면 오리농장 봉고차나 버스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내가 오늘 가 본 곳들에 대해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초정 약수 원탕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오물신을 목욕시키는 난관에 처한 치히로에게 가마 할아범이 공급하는 최고급 물은 온천수가 아니라 바로 약수다. 초정 약수는 온천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약수다. 덧붙이자면 충북 지역 탄산 음료의 대표 주자인 천연 사이다의 원료가 되는 그 유명한 세계 3대 광천수다.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톡 쏘는 느낌. 이는 입에 넣으면 맛으로, 약수탕에 들어가면 촉각으로 알 수 있다. 다른 어느 온천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초정약수만의 매력이다.
이를 살려서 초정약수에도 목욕탕이 생겼으니 그 원조가 바로 "초정약수원탕"(목욕탕 이름)이다. 내가 예전에 가봤던 4,5년 전에는 그 목욕탕 하나뿐이었는데, 그 당시에도 주말이면 그 약수의 효험을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관광버스가 몇 대나 드나들곤 했다. 지금은 주위에 그런 목욕탕이 2개(천지탕, XX텔)나 더 생겼고, 초정약수원탕도 옛 건물을 헐고 완전히 새 건물로 확장 개업하여 현재 3개의 목욕탕이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이런 경쟁에서는 원조가 유리한 법, 초정약수원탕이 가장 손님이 많은 듯 하다. 오늘도 일요일이라 목욕탕 앞 주차장에는 관광버스도 보이고, 승용차가 꽉 들어찼다.
다른 관광지도 대개 그렇지만 온천등의 목욕탕은 일요일에는 절대 가면 안 된다. 새로 지은 목욕탕이라 규모가 크다고는 하지만, 최소 100명은 확실히 넘고 많게 잡아 약 200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로 꽉 들어차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런 적은 어렸을때 수안보 온천가서 경험한 이후 처음이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오죽 하면 의자와 바가지 구하기도 힘들 정도다. 평소에 많아야 십여명이 목욕하는 한산한 우리 동네 대중탕을 이용하다가 이런 곳에 오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 탕 안에 있는 안락의자에 누워 눈감고 수면, 또는 명상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박수쳐 주고 싶었다.
목욕탕이 지하에 있어서 탈의실에서 거기까지 나무 계단을 내려가는데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미끄럽기도 해서 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욕탕 안에는 노인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애들, 청년들, 중장년층이 많았다.
목욕탕 안에는 열탕, 온탕, 냉탕, 녹차탕, 약수탕, 수영장, 한증막 등이 있는데 초정 약수의 진가는 바로 약수탕이다. 옛날에 세종 대왕이 눈병과 피부질환 치료를 위해 초정에서 60일간 요양했다고 하던데, 약수탕안에 들어가보면 뭔가 틀리긴 틀리다는 느낌을 받는다. 온 몸의 피부에 전해지는 톡 쏘는 듯한 감촉, 특히 일반 목욕탕에서도 열에 민감한 회음부나, 여드름이 난 부위, 상처 부위등은 더욱 민감하다. 이게 뭔가 치료되는 느낌인가보다.
열탕, 온탕, 냉탕은 일반 목욕탕에도 다 있는 거고, 녹차탕은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수영장에는 애들만 몇 명이서 놀고 있었는데, 그 녀석들은 어른들한테 혼나가면서도 왜 그리 시끄럽게 떠드는지, 역시 애들은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햇다.
시간이 없어서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불가마를 이용했다는 한증막은 이름과 달리 겉모양이 꼭 에스키모 얼음집처럼 생겼다. 옆에 난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그 안에 들어가있는 사람들이 꼭 펭귄같다. 아니, 좀 떨어져서 보니까 스타크래프트의 테란족 벙커 같기도 하다. 그럼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혹시 마린? 4명보다 훨씬 많이 들어간다는 점이 다르군...
목욕을 끝내고 카운터에 물어보니, 목욕비는 1인당 4500원, 목욕 시간은 새벽 5시부터 저녁 9시까지이며 입장은 저녁 7시 30분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30인 이상이면 1인당 500원씩 단체 할인되어 4000원이랜다. (후후후... 난 소메 총무할때 이런 경우 모르는 사람들하고 합쳐서 30명 이상을 만들었다. 우리도 좋고 그 사람들도 좋고... 안 되도 손해볼 거 없고...) 노인들은 따로 할인되는게 있는지 모르겠네... 우리 가족은 군부대에 근무하시는 친척 아저씨가 계셔서 그 분이 주신 1000원 할인권을 통해 3500원으로 목욕을 했다. 군인들은 그런 할인권을 따로 나눠주나보다.
2. 초정 약수
온천수는 목욕에만 사용되지만, 약수는 목욕뿐 아니라 음용으로서의 가치가 더 크다. 목욕탕을 나와 좀 옆으로 가면 길가에 초정 약수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다. 페트병을 몇 개나 가져와서 약수를 떠가는 사람들도 많다.
위치상 차들도 많이 다니는 이런 길가에 음용이 가능한 약수터가 있다는 사실이 좀 의아하지만 이런 곳의 물은 대개 수질 검사가 가장 확실한 법이다. 아마 물은 끌어온거라 거기서 나오지만 음용수, 목욕물, 천연사이다 원료등을 공급하는 수원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을 것이다.
마셔보니 거부감없이 마실만하다. 가게에서 파는 석수나 탄산수와 비슷한 맛이다. 몇 년전에 마셨을 때는 그 톡소는 강도가 너무 강해서 한 입 먹으면 도저히 더는 마실 수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시판되는 석수나 탄산수와 비슷한 수준으로 조절되었다.
솔직히 맛으로만 따지면 보통 물이 훨씬 먹을만하지만, 몸에 좋다니까 초정에 오면 초정약수를 꼭 맛보고 페트병도 가져와서 많이많이 떠 가기 바란다.
3. 강촌털보초정오리농장
이름 외우느라고 힘들었다. 현재 가경동, 용암동 등에도 비슷한 이름의 분점을 냈는데, 초정이 원조다. 4년전에 가족들과 함께 처음갔을 때는 비닐하우스 같은 가건물에서 시작했는데, 그 맛 하나로 현재는 분점까지 낼 정도로 번창한 곳이다. 옛날에는 털보 사장이 직접 서빙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안 하나 보다. 대신 종업원들이 아주 친절하다.
주메뉴는 생오리구이 1마리 15000원, 훈제오리구이 1마리 30000원, 한방오리백숙 25000원등이다. 난 여기 세 번째 오면서 생오리구이랑 한방오리백숙만 먹어봤는데, 가족들 말로는 한방오리백숙은 나중에 추가된 메뉴로서 다른 곳보다 맛이 못하다고 한다. 훈제오리구이는 너무 비싸서 못 먹어봤고, 역시 이 식당의 주인공은 생오리구이다.
뼈와 내장은 제거되고 고기만 통째로 잘 발라져서 나오는데, 이를 돼지고기 삼겹살 구워먹을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구워먹으면 된다. 따라서 밑반찬도 돼지 고기 먹을때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자주 먹기 힘들어서 그런지 고기 맛은 돼지고기를 능가한다. 유일한 단점은 평균적인 두께로 썰어놓은 돼지고기보다 익는데 두 배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점인데, 고기를 통째로 익히므로 어쩔 수 없다.
돼지고기를 먹을 때 공기밥을 추가하는데, 여기서는 밥대신 오리죽(1인분 1,000원)을 먹는게 또 별미다. 남자들 셋이서 생오리 구이 한 마리에 각각 오리죽 한 그릇 정도씩이면 적당한 양인것 같다. 이 정도면 오리 고기나 돼지 고기나 가격은 비슷한 수준이다. 마지막으로 커피는 무료.
여기 손님이 너무 많아서 봉고차와 버스로 청주에서 초정까지 손님들 실어다주고 식후에는 다시 청주로 데려다주는 서비스도 한다. 그렇게 하면 추가비용이 더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도 오리농장 봉고차 한 대가 도착하자 열 명쯤 되는 아주머니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예약된 자리로 찾아가더라.
주말에는 정신없다. 되도록이면 평일을 이용하자. 단체라면 예약하는게 좋다. 적당한 크기의 방이 서너개는 있는 것 같지만 조용해보이는 방들은 다 예약 손님들 몫이었다.
4. 운보의 집
오늘은 못 가봤지만, 초정 근처에 운보의 집이 있다. 운보의 집은 2년쯤 전에 타계한 천재 화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생가이다.
그냥 집이 아니라 옛날 사대부 집안을 연상시키는 멋진 한옥으로서 방이 몇십간은 될 것 같다. 운보의 집 진입로와 한옥안에 있는 마당에는 연못도 있어서 볼거리를 더한다. 한옥 옆으로는 진입로에서부터 연결된 산책로와 잔디밭, 조경수들로 꾸며진 아담한 정원이 있고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운보의 작업실이었던 공방, 카페, 조각 공원등이 있다.
3년전에 갔을 때는 봄이었는데, 어디가나 아름다운 계절탓도 있겠지만 정원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턱시도와 웨등드레스 입고 기념 촬영하고 있는 신혼 부부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공방은 못 들어가봤고, 조각 공원은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난다.
카페에 들어가면 한쪽은 카페와 레스토랑이고 다른 한쪽은 운보 미술관이다. 운보의 작품들 중 일부가 전시되어 있고 나머지는 화보집으로 감상할 수 있다. 운보의 작품 세계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하던데, 그 중 기억나는 것은 바보 산수와 예수의 생애이다.
예수의 생애는 예수의 탄생부터 죽음, 부활에 이르는 일대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이를 완전히 한국적인 소재와 기법으로 표현해냈다. 그 기법은 동양화요, 등장 배경은 조선 시대요, 등장 인물은 한국인이다. 예를 들면 예수는 마굿간이 아니라 외양간에서 태어났고, 동방 박사들은 갓을 쓰고 있으며, 사람들은 상투를 틀고 댕기를 따고 한복을 입고 있다. 심지어 예수의 죽음 장면에서 로마군 병사는 포졸로 바뀌어 있다. 말로만 표현하면 다소 이질적인 이러한 그림들을 처음 보았을때, 이런 그림들을 그린 화가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경외감에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국내외 미술 평론가들은 예수의 생애를 운보 미술의 최고봉으로 꼽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바보 산수를 훨씬 좋아한다. 바보 산수는 조선 시대 민화의 현대적 계승이라 할 만하다. 옛 민화풍을 소재만 달리하여 그대로 답습하는게 아니라 마치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가, 아니 말 그대로 바보가 그린 그림처럼 등장 인물과 동물들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과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그는 바보가 아니라 천재였다.
내가 3년전에 갔을 때는 아직 운보가 살아있을 때였고, 무료로 개방해놓고 있었는데, 그 아들이 이어받았다는 그곳을 지금은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겨울철에 가면 어떨지 모르지만 다른 계절, 특히 봄이라면 꼭 한 번 가볼만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