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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בְּמִדְבַּר 바미드바르" : 토라포션 알리야(Aliyah) in 5781
민1:1-4:20(To), 호1:10-2:21(Haft), 롬9:22-23(Brit), 히1:1-7:28(신약)
화요일(셋째 날)
민2:1-34(To), 히3장(신약)
성경 말씀은 참 어려운 것 같다. 알듯말듯 하면서도 모른다. 성경 말씀이 어렵다는 말은 별로 돈이 안된다는 말과 비슷하다. 내 삶에 느낌으로 팍팍오고, 뭔가를 줘야하는데 알듯말듯 하면서 모르고, 나에게 실제적인 이익이 안되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잘 배우면 지금 당장은 그것이 본질에 해당되기 때문에 우리의 눈 앞에 이익, 해결책은 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아주 근본적인 힘과 원리를 알기 때문에 결국 그 성경 말씀을 깨달은 그 사람은 우주를 다스리게 되고, 통치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우리가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학생이 되는 것과 같다. 학생 때 배우는 것은 다 쓸모 없는 것 같다. 지금 시대는 쓸모 있는 공부만을 하는 것을 지혜롭다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순수과학, 순수학문이 없으면 이 사회는 무너진다. 우리나라가 약한 것이 순수학문이다. 성경은 마치 그와 같다. 학교 다닐 때 전혀 쓸데없는 것을 배우는 것 같지만 그것을 배워야 인간이 된다.
히3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40년동안,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노하신 이유는, 참 재미난 것이,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말을 듣지 않았다가 아니다. 들었는데 화딱지 나게 한다. שׁמע 쉐마라는 것이 정말 놀랍다. 왜 들었는데 격노하게 할까? 오늘 아침에 제자 하나가 저에게 오더니 여자친구가 말을 너무 예쁘지 않게 하고, 자기의 마음을 공감해달라고 하는데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공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 여자 친구는 계속 화를 낸다고 한다. 차라리 듣지 않으면 상대방이 화가 안 난다. 들어서 더 화가 난다. 분명히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 속에 자기의 말이 가득차 있기 때문에 엉뚱하게 알아 듣는다. 그것을 듣고 격노하게 한다고 한다. 남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하는데, 여자는 여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알아 듣는다. 그러니 오히려 더 성질이 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자기 소리가 가득차있으면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것이 곧 뱀의 소리, 욕망의 소리다. 욕망이란 자기소리, 자기의 원함이다. 자기의 원함으로 가득차있으면 누군가의 소리를 듣는 것 같지만 내가 순종하는 것 같지만, 절대 순종 못한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소리를 왜곡한다. 창3장에서 있었던 일이 이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의 욕망으로 바꿔 버린다. 뱀이 추구했던 것이 그것이다.
광야는 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회복하는 것이다. ראשׁ 로쉬를 들으라고 민수기는 시작한다. 리더십을 드는 것이다. 이 리더십은 그냥 그리스도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리더로 들기 위해서 광야로 나가셨어야 했다. 광야란 리더가 되는 곳이다. 머리가 주어지는 곳이다.
리더가 되려면 왜 광야로 가야 하느냐?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다. 광야의 특징 중 하나는 엄청난 고요함이다. 도시는 기본적으로 소리가 있다. 도시 근처에 있는 산 꼭대기에 올라가보면 도시에서 소리가 24시간 난다. 도시의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고요함 가운데 있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광야에는 그런 인간의 인위적인 소리가 전무한 곳이다. 그 고요함을 דממה 드마마라고 한다.
사람의 창의성, 생각, Imagination을 דמיון 딤욘이라고 한다. 자율성으로 뭔가를 하려면 창의성이 있어야 하는데, 아인슈타인이 했던 생각들을 딤욘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에 의해서 우리는 리더가 된다. 리더란 그런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많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은 다 고요함에서 나온다. 고요함이란, 자기 소리가 없는 것이다. 자기 소리가 없어야지 쉐마가 일어난다. 자기 소리가 없어야지 주님의 소리가 들어올 수 있다.
광야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선진국에 데려가겠다는 것이 아니다. 약속의 땅은 물리적인 땅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광야로 데리고 왔느냐? 하나님의 미션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פקד 파카드라고 한다. 파카드를 계수라고 했는데, 하나하나 세는 이유는 미션을 주기 위해서이다. 어떤 회사가 자기 회사원이 몇명이 있는지 파악 못하고 있는 회사는 없다. 신입사원 몇명 뽑았어? 그 몇명을 계수하는 이유는 그 미션을 줄게 있을 때, 미션의 숫자만큼 계수한다.
계수한다라는 것은 미션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미션을 주려면 그 미션을 받을 사람이 쉐마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리더로 만든다고 한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리더이다. 하나님을 이끄는 자라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있는 리더라는 것이다. 리더가 아닌 인간은 한명도 있을 수 없다. 왜? 하나님의 미션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미션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그 미션을 이루기 위한데로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은 리더이다. 리더가 되려면 미션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쉐마라고 한다. 다 말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하면 그것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왜 광야에서 듣고도 격노케 하냐면, 문제는 자기 욕심이 있는 사람은 말을 해도 왜곡하고 뒤틀어 버린다. 그래서 부정을 저지르고,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에게 집을 제공하라, 미션을 줬더니 그 미션을 수행을 하는데 미션을 수행하면 자기 가족 이름으로 그 땅을 사놓고, 이름도 광명이다. 그 빛으로 명확해졌다. 여기 땅값이 오를 것이라고 말이다. 미션을 수행하는 그 사람은 들었다. 그리고 그 미션을 잘했다. 단지 조금 내가 분명해진 것을 가지고 미리 땅을 사놨을 뿐이다. 그 사람이 미션을 수행한 것일까?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자기 소리, 뱀의 소리가 사라지지 않으면 미션을 줄 수가 없다. 미션을 줄 수가 없다라는 것은 리더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광야로 집어 넣는 것이다. 광야란, 드마마, 고요함이 있는 곳이다. 고요함이란 자기 소리가 없는 것이다. 이 고요함은 물리적인 고요함이 아니다.
광야는 명상, 묵상이라고도 하는, 또는 기도의 장소이다. 거기에 하나님이 집어 넣으신 것이다. 출애굽을 해서 레위기에서 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셨다. 결국 하나님의 토라를 완성하는 모든 비법을 베하르, 시내 산에서 다 가르치셨다. 그러고 난 다음에 그것을 실제화시키기 위해서 광야로 집어 넣으신다. 광야는 어떤 곳이냐? 기도하는 곳이다. 고요함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 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속에서, 자기 소리를 제거하고 머리를 드는 자들은 주님이 계수하라고 한다. 내가 미션을 줄 것이다.
이 광야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열매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에덴동산의 특징은 열매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죄를 범한 것은 다 이 열매 때문이다. 그런데 광야는 정말 열매가 없어 보인다. 하나님이 이런 곳에 집어 넣으신다. 왜 열매가 없어 보이느냐? 단독자는 실제로 열매가 하나도 없다. 단독자는 황량한 광야와도 같다. 광야에 집어 넣으면 우리는 광야에서 뱀의 소리, 자기 소리는 이렇게 황폐하게 되는구나를 배운다.
במדבר 바미드바르의 뜻은, 미드바르에 다바르라는 뜻이 있다. 말하다, Speech이다. 광야에서는 도대체 말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주님의 교정이 나온다. 말이 무엇인가 같으신가? 말이 정말 필요한, 왜 우리에게는 말이 필요할까? 말이 정말 필요한 곳이 어디일까? 리더한테는 말이 정말 필요하다. 리더십이란, 결국 말이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리더이다. 그리스도는 온 우주의 리더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우리는 말씀에 비유한다. 말씀은 곧 주님이시다. 왜 그러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리더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말이, 교정되지 않으면 말이 교정되는 곳이 광야이다. 리더의 말을 할 수 있는 곳이 광야이다.
그런데 이 말이 교정되기가 정말 힘들다. 단독자들은 리더의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 자기의 말만 한다. 자기 말은 기가 막히게 한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에 관련된 말은 엄청나게 많이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Written Torah,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Written Torah를 주시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기 위한 Oral Torah, 이것은 다 말이다. 하나님의 말을 통해서 모든 창조를 이끌어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한다. 이 Oral Torah가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리더의 말은 Oral Torah이다. 모든 리더십들은 Oral Torah이다. 모든 리더십들은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기 위해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지파가 납달리 지파이다. 최후의 승리가 온다. 여기에 푸림이 온다. 아말렉은 자기를 높이는 말만 한다. 하만처럼 말이다. 나에게 절해라, 왕에가 나아가서도 자기를 높이는 말만 한다. 자기 이야기만 한다. 그런데 납달리는 이것을 딱 끝내는 것이다. 납달리는 Oral Torah로 말이 겁나게 많다. 왜 그러냐? 이 데스티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Oral Torah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양대로 역사한 것이다.
진짜 Oral Torah는 말이 많지 않다. 리더가 말이 많으면 리더가 아니다. 전쟁에서 장군이 말이 겁나게 많다면, 하루종일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리더가 아니다. 예수님이 많은 것을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면 이미지가 말이 겁나게 많은 것인가? 오히려 잠잠하셨다고 한다.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하셨다고 한다. 드마마이다. 드마마는 דם 담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피이다.
피의 특징이 아무 말 없이 온 몸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피는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피를 다루는 심장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아담이란, 이것을 민수기의 언어로 직역해보면 신의 잠잠함이다. 주님이 왜 인자이시냐? 주님은 잠잠하셨다. 주님은 잠잠하심으로, 얼마나 할 말이 많으셨겠는가?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고 나서 부활하셨는데, 얼마나 할 말이 많겠는가? 그 간증 말이다. 내가 순종해서 십자가에 갔는데, 겁나게 아팠고, 그런데 내가 거기에서도 참았고, 그리고나서도 했는데 주님이 부활시키는구나, 그런데 제자들이 그것도 모르고 와서 나는 시체 찾으려고 했고,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말이 많으셨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말이 없으셨다. 그리고 그냥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티칭만 하시고 가셨다. 자기 이야기가 없다.
주님이 어떻게 Oral Torah를 완성하실 수 있었느냐? 어떻게 리더의 말을 가질 수 있었느냐? 제가 심지어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굉장히 의문을 가졌던 것이 주님의 모든 티칭을 왜 주님 살아계실 때 기록해두지 않았을까? 주님은 당신의 말씀조차도 기록해두지 않으셨다. 리더가 되려면 반드시 잠잠함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광야로 들어가야 한다. 자기 소리를 없애는 그 훈련에 들어가야 한다.
광야는 묵상의 장소라고 했는데, 우리가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해서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묵상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큐티하고 묵상하는 이유가 이렇게 하면 내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그래서 자기 소리가 더 많아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미션을 주실 수가 없다. 자기가 하나님 말씀으로 다 해석해놨다. 자기 삶에 맞는대로 다 해석해놨다. 하나님은 이 묵상하는 자에게 미션을 줄 수가 없다. 진정한 묵상이란, 고요함 가운데 자기 소리를 없애는 것이다.
납달리가, 에스더가, 택한 것이 그냥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도 아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도 아니다. 그냥 금식하는 것이다. 광야로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백성에게 우리 광야로 들어가자,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광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다 죽게 생겼다, 그러나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광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단독자로서 다 죽게 생겼다, 다 죽어가고 있다고 서로 아우성이다, 나 사랑 못 받는다고, 나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미드바르이다. 광야로 나아와서 네 소리를 죽여라.
하나님의 모든 리더십들은 다 광야에서 탄생한다. 모세도 광야에서 탄생했다. 광야 40년동안 모세는 뭐했는가? 왜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셔서 40년동안 뭐했는가? 양 떼를 쳤다. 그냥 광야에 있게 했다. 이 드마마는 그냥 그릇이다. 그릇은 자기 소리로 가득차있으면 안된다. 우리가 음식을 주기 위해서 그릇을 가져와 그랬는데, 그릇이 가득차있다면, 과부가 먹고 살 길이 없어졌다, 그래서 엘리야를 찾아갔는데 엘리야가 빈 그릇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 만약에 이 과부가 빈 그릇을 가져오지 않고 뭐가 가득찬 그릇을 가져왔으면 그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하나님의 미션을 받는 자이다. 하나님의 미션을 받는 자들은 반드시 내면이 비어있어야 한다. 고요해야 한다. 내면이 비어있다는 것은, 내면의 내장을 다 끌어내라는 것이 아니라, 내명이란 다 소리이다. 내 소리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소리가 들려온다.
시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이것은 놀라운 소리다. 하나님께서 계속 창조의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낮에 미션을 주시고, 밤에 그 미션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이것이 드마마이다. 이것이 אין אמר 에인 아마르이다. 에인이란, 없다라는 말이다. 무이다. 없다라는 말이 진짜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그릇을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אין אמר ואין דברים 에인 아마르, 에인 드바림이란 그냥 공요함의 상태이다. 소리가 들려지는 소리 없이, 내 소리가 없는 에인 아마르, 에인 드바림의 상태이다. 내 시끄러운 소리, 내 욕망의 소리, 내 뱀의 소리가 하나도 없다. 내 중심의 자기 관점, 자기 이야기,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것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에인 아마르라고 한다. 정말 놀라운 소리이다.
에인이란, 하나님을 뜻한다. 무란, 없다. 이것은 있고 없고의 차원이 아니라 현존, 존재가 생기기 이전의 상태이다. 이미 뭐가 있다없다 라는 것은 존재가 생겨난 것인데, 존재가 생겨난 이전의 상태를 에인이라고 한다. 사실 그렇게 비어있는 그릇이 되면 에인 아마르가 와서 담긴다는 것이다. 내 말이란, 뭐가 있다없다, 좋다 나쁘다 이런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리는 그런 것을 떠한 에인 아마르이다. 그것이 와서 담기는 것이다.
내 소리를 지우는 이 고요함에 다다르면, 납달리 지파가 고요함에 다다르면 경장에서 이긴다고 한다. 진짜 큰 이김이 온다. 이기는 것은 승리인데, 이 승리는 리더가 생겨야 온다.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미션을 완성한 것이지 내가 경쟁하고 싸워서 나아진 것이 이김이 아니다. 그것이 승리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미션을 어떻게 완성하느냐? 어떻게 승리하고 이기느냐? 리더를 중심으로 군대가 형성되면 하나님의 미션을 완성할 수가 있다.
그래서 민수기에서 카운트를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영별로 배치하면서 이 군대를 리더의 군대라고 한다. 르우벤 지파의 리더를 누구라고 하는가? 여러분들은 지원이를 생각할 수 있지만, 지원이가 리더가 아니다. 민수기를 배우지 못하면 자기의 경험, 자기의 나하쉬가 리더이다. 그래서 지원이라는 자기가 리더이다. 자기 말로 모든 것을 이끌려고 한다.
광야에 들어가면 너는 르우벤이다. 그리고 르우벤 지파의 리더는 엘리쭈르이다. 나의 하나님은 반석이다. 이것이 그냥 생겨나는 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쭈르라는 말은 반석이라는 말이다. 이럴 때 우리는 이길 수 있다. 그래서 드마마의 상태로 들어가면 엘리야가 그 위대한 승리를 하고 난 다음에 아합, 이세벨에게 겁을 먹어서 어마어마하게 도망간다. 그것도 참 이해가 안된다. 그 위대한 승리를 하고 난 다음에 한 걸음에 북이스라엘부터 브엘쉐바까지 한 걸음에 달려간다. 엘리야가 축지법을 쓴 것 같다. 이 시대에 있었으면 이봉주를 능가하는 마라톤 선수가 아니였을까 생각한다. 밑의 호렙 산까지 달려간다. 거기에서 주님을 인카운터한다.
왕상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קול דממה 콜 드마마 : 세미한 소리
드마마가 아무 소리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 소리가 없는 소리이다. 콜 드마마란, 소리없는 소리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소리로 들려지는 것이 아니다. 드마마, 고요함 가운데서 들려오는 소리이다. 이것이 리더십을 결정한다. 엘리야가 이세벨의 선지자들과 싸운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을 뿐이다. 그때 엘리야는 백성들의 리더가 아니였다. 그때 백성들은 이세벨을 따르고 있었다. 진짜 백성의 리더가 아니다. 자기가 잘 났고, 자기가 힘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은사가 있고, 그렇긴 했지만 진짜 백성의 아버지, 백성의 리더는 아니다. 왜 그러냐? 리더십은 반드시 드마마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
진짜 리더십이 탄생하려면 하나님은 그 리더십을 아무소리 없는 곳으로 집어 넣으신다. 그래서 엘리야가 드마마 가운데서 주님은 인카운터한다. 위대한 싸움의 현장도 없고, 백성도 없고, 이세벨의 선지자도 없는 광야, 시내 광야로 데리고 온다. 그 광야에서 엘리야는 드마마의 상태로 들어간다. 침묵의 상태로 들어간다. 침묵의 상태로 들어가자 하나님의 소리가 들어온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리더가 되고 난 다음에 엘리야가 한 것이, 지명할 수가 있다. 계수한 것이다. 그래서 예후한테 가서 예후를 기름 붓고, 엘리사를 기름 붓고, 이렇게 민수기의 사역을 한 것이다. 파카드, 이것이 계수하다는 말이지만, 또한 임무를 주는 것이다. 엘리사에게 임무를 주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한 것이다. 이것이 리더이다.
리더의 모든 말은 콜 드마마여야 한다. 리더가 자기를 비워서, 침묵속의 소리, 소리 속의 침묵, 멋진 말이다. 리더가 되는 첫 번째 단계는 침묵속의 소리를 알아야 한다. 드마마란, 고요인데, 고요는 자기 속, 내면의 소리를 다 없애는 것이다. 그것을 침묵이라고 한다. 그냥 말 안하고 있는 것이 침묵이 아니다. 오늘 아침에 성민이를 보니 자기를 못 하겠다고, 이런 것은 그냥 자기 속에 꾹 누르고 좌물쇠 채우는 것이다. 그것을 드마마라고 하지 않는다. 진짜 고요함, 진짜 호드, 진짜 지식은 고요함이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다 배우는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경험의 언어, 뱀의 언어, 욕망의 소리, 나 살겠다고 하는 생존의 소리, 다 죽을 것 같다는 소리, 이것을 다 비우는 것이다. 내일 그때 찾아오는 것이 고요이다.
이렇게 비우면 이 상태를 에인 아마르라고 한다. 소리가 없다. 말이 없다. 에인 아마르란, 창조 이전의 하나님을 에인이라고 한다. 창조 이전에 존재했던 말을 에인 아마르라고 한다. 뭐가 생기기 전에, 사건이 발생되기 전에 있는 소리이니, 이 소리가 딱 등장하면 그 소리대로 모든 것은 창조되게 되어있다. 뭐가 생겨나기 전에 있던 소리, 그것이 설계도고 계획이다. 그래서 창조주가 그 계획을 공포하면 그것대로 모든 것을 움직이게 되어있다. 주님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리더이다. 그것을 머리라고 한다. 그런 머리를 가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머리를 가진 사람에게 에인 아마르를 줘버리면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고요함 가운데 들어가면, 그 속에 소리가 있다. 에인 아마르이다. 그래서 진짜 고요함 가운데 들어간 사람은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제 아내가 갑자기 아침에 거듭났다며 내 속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솟아난다고 난리가 난다. 저에게 뭔가를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그런데 말을 못하겠다고, 하루종일 그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에인 아마르라고 한다. 진짜 하나님을 인카운터 한 사람은 사실 말이 없다. 왜냐하면 자기를 비운 상태에서 들려온 소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말은 자기 중심으로, 자기의 기준이 있어야지 거기에서 그것을 가지고 이렇다저렇다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를 가운데 세워두고 있어야 말이 거기에 와서 붙는다. 그래서 자기가 강한 사람일 수록 말을 많이 한다. 자기에게 붙는 말이 많다.
그런데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 자기 소리가 없어져야 한다. 모든 리더십들이 지나는 과정이다. 특별히 다윗은 그 과정을 지났다. 그냥 오죽하면 침을 질질 흘리고, 하나님은 다윗을 광야에 집어 넣으신 것이다. 아둘람 굴에 집어 넣으셨다.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이 에인 아마르,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윗은 목동으로, 사무엘이 자기 형들 기름 부으러 왔을 때, 자기 혼자 광야에서, 이것이 에인 아마르이다. 침묵속의 소리, 자기의 고요함 가운데로 들어가면 거기에 아무 소리도 없는 것 같지만, 에인 아마르이신 하나님의 소리가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면 소리속의 침묵이란 뭔가? 이제 소리가 죽어야 한다. 이 그릇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자기 소리가 아니라, 에인 아마르가 소리로 나오기 시작한다. 에인 아마르란, 소리가 없는 것인데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들려지는 소리가 없다. 아무에게도 소리를 들려줄 수가 없다. 그런데 거기에서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시19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여기에서 그의 말씀은 מל 말이다. 히브리 말로 밀라하면 Word 단어, 세상의 언어로 우리에게 들려질 수 있는 언어로 그것이 세상 끝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어라, 땅끝까지 나를 증거하고, 말씀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는 것은 말로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들려질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에인 아마르를 리시브하지 않고 하면 그것은 다 사탄의 말이 된다. 에인 아마르를 리시브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진짜 리더의 말을 하게 된다.
광야로 하나님이 우리를 집어 넣으신 것은 다 이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를 리더로 세우기 위해서, 리더의 말을 주기 위함이다. 광야만큼 그것을 훈련할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에게 실제로 광야로 가라는 것이 아니다. 광야는 자기를 비우는 그 시간, 다른 사람으로부터 떨어져서 아주 고요한 시간, 거기에서 자기를 비우는 시간을 가진다면 그곳이 광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리더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
* 기도
바미드바르에 들어오면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생각들이 내 자랑, 내 경험들이 다 쓸데 없어지고, 광야에서는 아이폰마저도 쓸데 없어진다. 아무것도 쓸데가 없다. 광야에서 우리는 그냥 자기를 비우는 것이 하나님을 인카운터하는 놀라운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 사시기 힘들지 않으신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하고, 자기 소리를 내야하고, 안 그러면 죽을 것 같고, 그런데 그냥 나를 비우면 이 땅에 내가 온 목적이 완성된다는 것을 믿길 바란다. 영원한 생명, 하나님을 만나는 그 길은 아주 심플하다. 그냥 나를 비우면 된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나를 비우면 주님이 이제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 상태이다. 모든 사망의 세력, 사탄은 떠난 상태가 된다.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 사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케되는, 그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케되는 그 놀라운 시간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광야에서 발견되어집니다. 이스라엘의 리더십으로, 이스라엘의 머리로 우리가 발견되어집니다.
수요일(넷째 날)
민3:1-13(To), 히10:19-39(Haft), 히4장(신약)
오늘 호세아서는 광야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 해준다. 호세아서에서 보면 이스라엘 자손과 하나님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이야기 되어진다.
남편 -- 아내
하나님 -- 이스라엘
왜 광야에서 레위기까지 우리는 아주 위대한 사실을 배웠다. 신랑과 신부라는 위대한 사실을 배웠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이 파라독스를 믿는 것이다. 무한자와 유한자가 결합한다는 것이다. 무한의 생명과 유한의 생명이 결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소리다. 이것을 가지고 바미드바르의 시작이 되어진다. 바미드바르는 그냥 결혼생활 이야기이다.
호2: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란해지면 광야처럼 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목 말라 죽게 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음란함이란, 광야같이 되어서 목 말라 죽는다는 것이다. 목 말라 죽는다는 것은 마시는 것을 못 마신다는 것이다.
שׁתה 샤타 : 마시다 / 형상을 완성한다 = 십자가의 형상
하나님께서 우리는 광야로 데리고 들어가시는 이유는 형상을 완성하고자 함이다. 형상은 어떻게 완성이 되어지느냐? 남편과 아내의 결합을 통해서 형상이 안성된다. 무한한 생명 + 유한한 생명의 결합이 형상을 완성한다. 그러면 무한한 생명과 유한한 생명의 결합은 무엇이냐?
유한한 생명은 어떻게 해서 태어나냐면 육신의 부모, 육신의 아버지; 이것이 바미드바르에서 정말 배워야 할 것들이다. 유한한 생명은 다 피지컬한 아버지를 통해서 이 땅에 내려온다. 그래서 유한한 생명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무한한 생명에 대한 개념을 우리는 정말 가지기가 힘들다. 무한한 생명이 태어나야지 무한한 생명과 유한한 생명이 결합할 것이다. 무한한 생명은 육신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지 않고 영적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다.
사람에게 무한한 생명이 태어나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과의 결합을 할 수가 없다. 사람이 유한한 생명만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음란함이다. 그래서 생명이 무한한 생명과 결합하지 않으면 광야에서 난리가 난다. 목 말리 죽게 생겼으니 말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집어 넣은 것은, 너희들이 유한한 생명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란, 유한한 생명으로만 살면 안 된다, 진짜 유한한 생명이란 이 육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유한한 생명, 한계가 있다, limitation이 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겸손한 생명을 이야기한다. 즉, 나는 그릇이다, 나는 모양이다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유한한 생명으로 오셨다. 죽을 몸으로 오셨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죽지 않는다. 실제 몸은 죽지 않는다. 옷을 벗는 것이다. 성경에서 살을 옷이라고 비유하는 이유는, 이 몸이 죽는다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몸은 영원하다. 몸이 없어지지 않는다. 몸은 없어지면 안 된다. 유한한 생명은 그 없어지지 않는 몸이다. 죽는 생명이란 뜻이 아니다. limitation, 한계가 있다는 것은 겸손을 뜻하는 것이다. 그냥 나는 그릇인데, 여기에 무한한 생명이 담겨야 한다, 여기에 담길 것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이다. 이것을 신부라고 한다. 신부는 제한적이여야 한다. 신부가 자유부인이면 안 된다. 신부는 신랑에 의해서 제한된다. 나는 임자있는 사람이다, 이런 소리다. 나는 주인이 있다, 나는 주인에 의해서 제한되어진다 라는 소리다.
유한한 생명은, 아주 겸손한 생명이다. 육신의 아버지에 의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교만한 사람들을 제일 싫어하시는 이유가, 이것은 하나의 도구이다. 어떤 그릇, 기관, 이런 것들이 주어지는 것이다. 육체의 기관, 세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기관, 마음이라는 기관이 주어지는 것이다. 영, 혼, 몸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이 겸손한 생명이 탄생하면 무한한 생명이 담길 수 있다. 무한한 생명이 그릇에 담기는 것이다. 무한한 생명을 주는 일이 발생해야 한다. 무한한 생명을 주는 것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냐면 말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Oral Torah라고 한다. 이것은 교육, 가르침으로 이루어진다.
가르침을 통해서 무한한 생명이 담긴다. 이것을 Second life, 거듭난 생명이라고 한다. 교육을 통해서 담기는 것이다. 이 교육은 그냥 교육이 아니라 토라를 가르치는 교육이다. 토라를 가르침에 의해서 무한한 생명이 여기에 담기는 것이다.
이것은 광야에서 완전히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희들이 육신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말로 사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내가 그렇게 살아지는 줄 안다. 그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것에 대한 비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 토라를 가르침에 의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여기에(그릇)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한한 생명을 실어나르는 자를 נביא 나비라고 한다. 나비는 בוא 보의 사역 형태이다. 오다의 사역 형태이다. 생명을 오게하는 자이다. 선지자라고 한다.
광야에서의 히어로는 모세이다. 우리가 민수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없음을 배우는 것이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개념이 도대체 뭐냐?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무한한 생명을 토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서 무한한 생명과 유한한 생명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과 신부의 결합식과 같다. 이것은 마치 결혼식과 같다.
토라를 가르쳐서 무한한 생명이 그릇에 담기면, 이 그릇은 무한한 생명의 어떠함을 표현한다. 이것을 낳는다고 한다. 무한한 생명의 본질을 표현해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무한한 생명의 모든 가르침은, 무한한 생명 자체는 그냥 성품이다. 이 그릇이 무한한 생명의 성품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을 살게 된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그것은 생명이 완전히 다르다. 이 껍데기, 그릇이 자기가 생명이다라고 하고, 그릇 안에 있는 어떤 육체적 욕망을 사는 것하곤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하나님, 신의 생명이 들어왔다는 것은, 신의 성품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것을 살아낸다고 한다. 이것을 낳았다고 한다. 이런 존재를 제자라고 한다.
Oral Torah, 이 가르침, 토라를 사는 것, living Torah 자체는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왜 나는 진짜 너희들을 그리스도아 중매하기를 힘쓴다는 것은 다 민수기 이야기이다. 민수기에서 남편과 아내가 완전히 결합하는 이야기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마마이다. 자기를 고요하게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신부들을 얻으시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다 자기 소리를 없애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고요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 신랑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신부를 얻는 것이 광야이다. 그래서 결혼이란, 광야에서 하는 것이다. 결혼은 자기를 비우지 않은 사람은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후파란, 초막하고 너무 비슷하다. 그런데 후파 안에 아무것도 없다. אין 에인이다. 다 텅비어있다. 참 놀라운 것이다. 우리 같으면 후파를 휘황찬란하게 금으로 은으로 장식을 해야한다. 그런데 사실 후파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비어있다. 초막하고 똑같다.
시19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한다는 것이다.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한다는 것은, 되게 재미있다. 히브리어로 보면, 베콜 하아레쯔, 온 땅에, 야짜, 나간다는 것이다.
קום 카밤 from 카브
에인 아마르 에인 드바림,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그런데 무한한 생명이 들어올 수 있는 그런 비어있음, 고요함의 상태, 자기 소리가 없는, 이 욕망의 소리가 없는, 그릇의 소리가, 육체의 소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욕망의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아시는가? 꽹과리 같이 시끄럽다. 조금만 내가 하고 싶은거 못하게 해도 이거 왜 못하게 하는거야, 왜 나를 무시하게 하는거야, 이 육체란 놈은 엄살이 얼마나 심한지 모른다. 조금만 죽을 것 같아도 별거 아닌데도 말 한 마디 무시했으면 그것을 가지고 과장법을 얼마나 잘 시행하는지 모른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 죽음에 대한 것으로, 징크스, 요만한 불운이 생겨도 이렇게 될지도 몰라, 아침에 그릇이 하나 깨졌어, 어젯밤 꿈자리가 뒤수숭해, 가지고 하면 그것을 갖고 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껍데기가 자기가 생명이라고 안 하고, 그릇이라고 하고, 내가 주님을 담기 위한 그릇이면 주님이 이 그릇을 보존하신다. 그렇지 않은가? 주님이 당신의 아들을 여기에 담기로 했다면 그릇을 함부로 하시겠는가? 귀한 그릇으로 보존하실 것이다. 주님이 담기실 수 있도록 그 영, 혼, 몸을 엄청나게 보존하실 것이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말이다. 여러분들이 나는 신랑을 담기 위한 그릇이랴 라고 한다면 그 평강의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들을 다스린다. 왕과 결혼할 여자가 맨날 나를 누가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 그것은 정상이 아니다. 왕이 최고의 무사들을 보내서 다 보호하고, 왕의 여자이니 나는 아무도 못 건드린다, 이런게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맨날 그릇의 욕망에 의해서 나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사실 비어있는 그릇이 되면 사람은 놀라운 것을 체험한다. 모든 땅에 카밤을 보낸다라는 것은 카브란, line이다. 창1장 셋째 날에서 땅 아래의 물들이 한 곳으로 모여라, 이런 뜻이다. 이것은 line으로 선과 같다. 온 땅에 선을 깐다 이런 말이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온 땅에 나의 모든 갈망, 욕구 가운데 선을 쫘악 까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선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이 마치 전기 선하고 비슷하다. 마치 신호를 보내는 그런 선들과 비슷하다. 우리가 유선하고 무선이 있는데, 무선도 선이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마지막 때는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온 땅에 와이파이, 건물에 가서 와이파이 검색하면 어마어마하다. 강남 이런 곳에서 와이파이 한번 검색하면 엄청난 선들이 깔려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 가르침이 통하는 것이다. 이 선이 온 땅에 깔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슨 선이냐?
에스겔 선지자는 굉장히 특별한데 제사장에게 임한 이야기이다. 에스겔 서는 굉장히 특별하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되심에 대한 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도대체 뭐냐, 아담이 도대체 뭐냐에 대한 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겔1
3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4 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사람의 형상의 계시가 나온다. דמות אדם 드무트 아담이다.
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보좌에 앉아계신 분은 하나님이다. 이때는 예수님이 아직 안 오셨을 때이다. 그런데 에스겔 선지사가 그 하나님을 사람의 모양이라고 한다. 에스겔 선지사는 정말 놀라운 것이다. 그런데 드무트 아담, 사람의 모양이란, 드무트, 모양, 담은 드마마, 고요함, 소리가 없는 상태, 에인 아마르 에인 드바림, 소리가 없는 상태인데 거기에 진짜 소리가 있다. 에인 아마르, 하나님의 소리, 무한의 소리가 있다. 무한의 소리는 원래 안 들린다. 무한의 소리를 담으려면 나의 욕망의 소리를 고요하게 해야한다. 광야로 집어 넣은 이유가 하나님과 사람이 결합하기 위해서이다. 신랑과 신부가 결합하기 위해서이다. 드마마, 이 고요함, 사람은 다 아담, 사람답게 고요하게 해야한다. 사람이 고요함을 잃어버리면 진짜 매력없다. 울리는 꽹과리 같으면 진짜 매력없다. 꽹과리보다 더 시끄러운 것이 징이다. 징징이 되면 꽹과리는 좀 경망스럽게 시끄러운데 징으로 한번 훼방 놓으면 끝이다. 징징이 한번 등장하면 정말 징하다. 그런데 우리가 다 징징이라는 것을 아시는가? 조금만 자기에게 무슨 일만 나면 그 울림도 대단하다. 징~ 하면 옆에 사람이 울린다.
그러나 아담이란, 고요한 것이다. 아담의 모양이 그런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고요함이다. 이것이 아담의 모양, 드무트 아담이다. 사람의 모양이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고요함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막 떠드셨으면 주님이 아니다. 우리는 내가 죄 없는데 십자가에 못 박았다면 조용히 할 수 있겠는가? 죽어서 혼백이 되어서도 떠든다. 맨날 전설따리 삼천리에 나오는 것이 나 억울하게 죽었다, 이 원한 좀 풀어주세요, 이것이 맨날 지옥, 스올에서의 일이다.
악인들은, 지옥은 굉장히 시끄럽다. 지옥은 고요함이 없다. 엄청 시끄럽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주님한테 스올에 있는 악인들 좀 잠잠하게 해달라고 한다. 스올 표현할 때, 그들이 가만히 있는가? 아아악, 나 억울해요! 다들 그러고 있다. 우리 주님이 진짜 아담의 모양이신 이유가 십자가에서 잠잠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담의 모양이다. 그게 사실은 유한한 생명이다.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왔지만, 진짜 온 것은 주님의 생명이 온 것이다. 진짜 내가 유한한 생명이 되려면, 만약에 내가 육신의 아버지가 준 이 그릇이 단독자다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 시체이다. 그런데 이 육신의 아버지란, 다 이스라엘의 아버지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다. 아보트라고 한다.
우리가 이스라엘이구나, 그래서 토라에서 여러분들에게 제일 정체성을 주려고 하는 것이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유한한 생명으로 왔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 겉세포가 유한한 생명인 줄 안다. 그렇지 않다. 이 세포는 그냥 사라 없어질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유한한 생명이란 몸이다. 몸인데 어떤 기관이다. 몸에 속해있는 것이 혼, 영, 네샤마까지이다. 하나의 기관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그릇이다. 그래서 몸이라는 것은 내적인 몸이다. 이 안에 있는 기와 비슷하다. 체력이 아니다. 육신을 벗어도 몸이 있다. 그래서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고, 부자가 혀에 물 한 방울 찍어 달라고 한다. 겉의 것이 아니라 너의 몸, 혼, 영, 네샤마는 그릇이다, 주님을 담기위한 신부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엄청나게 어렵다. 이것을 깨닫게 하면 그렇구나, 내가 이스라엘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된다. 혈과 육으로 이스라엘이냐, 한국 사람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들은 다 이스라엘이고, 지파다라고 하니, 예수님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을 다 끝내셨는데, 우리는 이스라엘이니, 무슨 지파이니, 그런 이야기를 하냐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자체가 혈과 육이 뭔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코리안이다, 혈과 육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코리안인데 왜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느냐? 이스라엘에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포가 이스라엘 사람처럼 생긴 것이다.
이 몸, 혼, 영, 네샤마가 우리 안에 있는 몸이, Inner body, 우리 몸에 있는 안의 기관이 이스라엘인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 세계에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가 다 이스라엘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요해진다. 그러면 결혼을 위해서 바미드바르로 갈 수 있다. 육체는 광야로 절대 못 간다. 거기에서 목 말라 죽으니 말이다. 그런데 광야로 결혼을 위해서 갈 수가 있다.
세상 사람은, 육체의 결혼은 도시로 간다. 잘난 사람, 돈 많은 사람, 나를 잘 먹여줄 사람, 도시로 간다. 육체의 결혼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결혼은 고요함 속으로 간다. 그것을 다 떠난다. 그리고 자기는 그릇이다라고 한다. 십자가로 간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기 소리를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광야 중의 광야는 십자가이다. 십자가 위가 광야이다. 골고다 언덕이 광야이다. 그래서 그것을 굴골레트라고 한다.
민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계수도 정말 쉬운 것이 아니다. 남자의 수를 세고, 그들의 종족과 조상 가문의 따라 그 명수대로라니 무슨 말인가? 그런데 히브리어로 보면 콜 자카르 레굴골레탐이라고 한다. 굴골레트란 해골이란 말이다. 해골을 세우라는 소리와 비슷하다. 이 해골이란, 이 해골을 세는 것이 아니다. 해골이란, 골고다 언덕을 이야기 한다. 골고다 언덕을 가는 사람을 세라, 광야로 가는 사람을 세라, 도시의 화려함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담으려고 하는 사람, 신부란 다 광야로 가는 사람이다. 신부란, 신랑을 이용해서 자기가 잘 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부란 다 광야로 가는 사람이다. 그냥 신랑의 존재만을 담으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릇이야, 나는 쏘드야, 신랑을 그냥 담기만 할 거야, 신랑의 존재만을 담을거야, 신랑이 무엇을 가지고 있던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을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광야에서 주님은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을 세라고 하신다. 이제 내 소유가 된다, 결혼할 것이다, 이 소리다.
겔1:4 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아담의 모양에 대한 계시인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난다. 이것이 굉장히 핵심이다. 이것에 의해서 형상이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כעין החשמל 케에인 하하슈말 : 단 쇠
하하슈말이란, 오늘날 히브리어로 보면 하슈말 하면 사람들은 전기로 알아 듣는다. 오늘날 전기가 없어진다라면 온 지구는 난리가 날 것이다. 선을 타고 오는 전기뿐만 아니라 Electric은 에너지이다. 이것에 의해서 다 움직여진다. 전기 에너지가 없다라면 인공위성도, 다 멈출 것이다. 동영상으로 보고 계신 분들도 하슈말이 없으면 끝장이다. 모든 것이 셧다운 된다. 에너지의 이동이 없어지는 것이다. 하슈말이란, A에 있던 에너지를 B에 보내서 A를 살게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슈말이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란, 그런 것이다. 왜 신랑을 양이라고 하냐면, 전기 관계에 비유하는 것이다. 여자와 남자를, 그래서 너무나도 쉽게 동의한다. 남자는 양이다. 그리고 여자는 음이다. 물론 마지막 때에는 페미니즘 영향으로 왜 꼭 남자아 + 냐고 하지만, 여자가 음이다. 그래서 부부관계는 Electric하고 똑같다. 사랑에 빠지면 전기가 통한다고 한다. 그것에 의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이 생명이 저 생명으로 가서 합쳐지는 것이다.
주님을 하슈말이라고 한다. 이것에 의해서 무한자와 유한자의 결합이 일어난다. 전 진구가 전기 에너지로 구성되어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하슈말이란, 주님의 별명인데, 주님의 본체이다. 그런데 하슈말이란, 하쉬와 말로 구성되어있다. 드마마이다. 하쉬란, 조용히하다 이 소리다. 그리고 말은, 말이다. 말이 땅 끝까지 간다고 한다. 밀라 이러면 단어, 이런 뜻이다. 하슈말이란, 사람의 모양에 가장 핵심이다. 그냥 조용한 것이다.
광야에서 침묵과 고요가 흐르면서 주님의 조용한 말, 이것이 들리지 않는 소리인데, 땅 끝까지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이 말이다. 주님의 조용한 말, 카브, 이 소리다.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사람들, 신부들은 모든 땅에 라인이 깔린다. 땅이란, 우리의 모든 갈망이다. 육체적 욕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갈망이다. 모든 내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갈망, 이 기관, 몸, 혼, 영, 네샤마에 전선이 쫘악 깔리는 것과 똑같다. 땅끝까지 깔린다는 말이 이 말이다. 이렇게 전선이 깔리면 주님이 단 쇠 같이, 하슈말 같이 나타나신다. 주님이 그 하슈말을 통해서 들어오시는 것이다. 무한자가 유한에게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러면 희한한 것이다.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처럼, 사랑 고백하는데 에버랜드를 통채로 빌려서 거기로 와 했는데, 갑자기 불이 쫘악 들어오면서 너를 위해서 준비한 것이야, 마치 이와 같은 것이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내 혼과 영, 몸은 내 욕망의 더러운 에너지 때문에 흐르면 흐를 수록 파괴가 되어진다. 녹물이 나오고, 상한다. 파괴된 우주선처럼 말이다. 그런데 주님의 하슈말이 들어오면 비로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밝혀진다. 그러면서 정말 놀라운 결혼식이 진행되는 것이다. 광야는 정말 놀라운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사람의 모양을 가진다면, 진정한 이스라엘의 모양을 가진다면 주님은 우리 속에 하슈말로 오신다. 무한한 에너지로, 영생의 에너지로, 우리에게 오신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신다. 하다르라고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화로움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행하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하는 것은 곧 주님이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랑과 신부의 결합, 그것이 진영의 결합이고, 그 진영 가운데 계신 주님이시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탄생이다. 이제 그 이스라엘의 온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아무도 못 막게 된다. 그 일이 광야에서, 후파 안에서, 아무것도 없는, 그 곳 안에서 자신을 비우고, 고유하고 침묵 가운데로 들어간 진정한 사람 모양을 한, 골고다 언덕에 오른 신부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기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세계는 놀라운 세계이다. 그냥 나에게 천만원, 이천만원 주는 것은 정말 유치한 것이다. 그것은 짐승을 조련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짐승으로 만든다. 영의세계, 신비한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 그러나 보이는 세계, 들리지 않는 세계, 그러나 들리는 세계, 유한한 세계, 그러나 무한한 세계, 이 세계로 여러분들을 초청한다. 이 민수기에 광야로 여러분들을 초청한다. 골고다 언덕 위로, 십자가 위로, 드마마의 삶으로, 진정한 리더십의 세계로 초청한다. 무한한 세계의 하슈말을 가지고 올 수 있는 그 신부의 위대함으로 초청한다. 가슴 떨림으로 고백하자. 주님 내가 기꺼이 골고다 언덕 위에 오르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이신 주님, 하슈말이신 주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이 유한의 세계에 오실 수 있는 카브, 그 선을 까는 우리 신부가 되겠습니다. 당신의 신부가 되겠습니다. 고요함으로, 잠잠함으로, 무한을 담는 그릇이 되겠습니다.
바미드바르 다섯째날 5월13일
목요일(다섯째 날) 유니스 사모님
민3:14-39(To), 히5(신약)
바미드바르, 민수기가 시작되었고, 그리고 새로운 달, 시반월이 시작되었다. 시작하는 시간, 시작하는 기름부으심이 온 우주에 가득한 시즌에 들어온 여러분들의 삶에 오늘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오늘 여러분이 만날 사람들, 마주하게 될 모든 상황들에 새로운 피조물로서 반응하게 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민1: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의도적인 시간법이 나오고 있다. 쉐니, 샤나. 다 변화하는, 새롭게 되는 뜻을 갖고 있다. 내가 너희들을 새롭게 하길 원한다. 그리고 첫째 날에, 베에하드 안에서 내가 너희들에게 말을 하는데,
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그래서 민수기 Numbers이다. 계수하라, 숫자가 막 나오고 있다. 우리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시라 이런거 다 덮어주실 것 같은데 나중에 레위인 계수하실 때 보면 일정까지도 정확하게 계수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가 있다.
שְׂאוּ אֶת־רֹאשׁ 쓰우 에트 로쉬 : 계수하다 / 머리를 높이 들어라
마치 놋뱀이 들린 것 같이 번쩍 들어라 라는 뜻이다. 토라에서 가장 사랑하는 단어가 무엇이 있으신가? 토라에서 가장 신비로운 단어를 꼽으라고 한다면 무엇을 드시겠는가? 바로 ראשׁ 로쉬이다. 하나님의 토라를 בראשׁית 베레쉬트라는 단어로, 로쉬를 넣어서 시작을 하셨다. 성경의 모든 것을 한 단어로 해보라고 한다면 베레쉬트 안에 다 들어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처음에 주님은 בר 아들로 시작하신다. 하나님 눈에는 한 사람, 아들만이 있는 것이다. 이 아들은 집에 머리이다.
민수기는 다 이 이야기다. 머리를 드는 이야기, 집의 머리가 누구인지, 여러분의 머리는 누구인가? 정확하게 곧장 넣을 수 있는 나의 머리가 있는가? 이스라엘은 지금도 이 머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스라엘이 7월이면 백신 맞은 이방인에게도 열린다고 하는데, 민수기의 시간이 풀어지고 있는데 모든 것이 다 아들에 대한 이야기, 그 머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머리가 번쩍 들려지게 되는 시간들이 열리기를 정말 축복한다. 그래서 민수기는 광야로 들어가는, 바미드바르의 시간이고, 머리를 드는 시간이다. 아주 기초적인 것을 다시 한번 집고 넘어가길 원한다.
사실 광야는 머리만으로 충분하다, 머리만 쫓아가겠다, 이것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수한다는 것은 센다는 이야기인데, 저희 결혼식 첫날 밤에 저희가 부조금을 세느라 저녁에 결혼을 해서, 새벽인 것이다. 그 다음날 이스라엘 가야 하는데 말이다. 돈을 센다는 것은 내 것을 만든다라는 것이다. 카운트한다는 것은 너가 내 것이다라는 뜻인데, 여러분들은 뭐를 카운트하고 계시는가?
광야는 나에 속한 것을 전혀 카운트 할 수 었는 곳이다. 광야는 내가 카운트 해놓았던,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 건강, 명예, 내가 했던 화장들, 포장지들을 다 뜯어낼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우리의 에고는 정말 카운트 하기를 즐겨한다. 내가 했던 말들을 카운트하고, 저도 밤에 누워서 자려고 하다보면 내가 오늘 이런 말을 한 것은 실수였어, 왜 그런 말을 했지, 내가 했던 행동, 말들을 카운트하는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에 생각을 할까 생각하니, 결국 내가 어떻게 될까봐 너무 두려운 것이다. 나의 에고는 내가 어떻게 될까봐 너무 두려워서 계속해서 소유하고 카운트하려고 한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광야로 넣으시려고 하는 것은, 너가 카운트하고 소유하고 포장했던 것들을 다 뜯어내라.
광야에 가면 화장이 소용없다. 예쁜 것도, 명품도 소용없다. 그냥 다 귀찮을 뿐이다. 선크림을 발라도 땀에 다 지워지고, 우리의 모든 포장지가 다 벗겨지는, 오직 존재만이 남는, 그리고 내가 오직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앞에 가는 목자구나, 이곳으로 광야라고 한다. 광야에서는 오직 머리만을 붙든다, 머리만을 든다.
레위기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났는지 이번 년도에는 다루지 않았는데, 사실 레위기의 마지막은 하나님이 안식년, 희년을 가르치시고 나서 십일조로 끝이 난다. 민수기를 광야로 우리를 하나님이 집어 넣으시기 직전에 가르치시는 것이 십일조이다.
레27:30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מעשׂר 마아쎄르 : 십일조
아싸르 : 10
십일조는 다 내 것이라 하셨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이고, 내 안에 다 주님이 넣어두셨구나, 나의 모든 10을 주님의 주권 아래에 내리는 그런 것을 의미한다. 준성이가 열심히 장교 시험을 준비했다. 고시생처럼 열심히 준비하다가 지난 주 토요일에 시험을 봤는데, 그 이야기를 하면서 준성이의 눈이 글썽글썽 한 것이다. 시험 보는 날 열심히 준비해서 눈을 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을 했다면서,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시험을 잘 보고 왔다고 한다. 정말 토라의 아들이 맞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레위기의 마지막, 민수기의 시작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제 새빛이가 어른들이 보기에 아무이유없이, 거의 하루종일 울었는데 그때 우리는 절망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그런데 우리는 그 전화를 받고서도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진짜 광야의 시간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주님, 나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주님이 비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구나.
어제 어떤 한 제자가 자기 아버지가 지방에서 농사를 지으시는데, 고추 농사를 지으시는데 그 전에 배추 농사를 지으셨다고 한다. 다 짓고나서 수확해야 할 때 고라니가 다 먹어버려서 다 망쳤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하나님이 인도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손에 어떠한 열매도 주어질 수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을 광야의 시간이라고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을 또한 십일조를 드리는 삶이라고 한다. 결국 모든 것을 하나님이 넣어두셨고, 그것을 꺼내는 삶을 산다, 그것을 마아쎄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있을 일도 주님이 다 넣어두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일조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매달 십일조를 뗀다고 해서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왔던 것, 지금 사는 것, 오늘 하루를 살 수 있는 것, 앞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넣어두셨다는 것이다.
주기철 목사님 사모님의 성함이 오정모 사모님이시다. 목사님이 죽으시고 나서 어떻게 살까 얼마나 막막하셨을까? 그런데 막내 아들, 지금은 돌아가신 주광조 장로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읽었다. 주기철 목사님 돌아가시고 나서 김일성이 보냈다고 하면서 군인들이 두 상자를 가져왔다고 한다. 열어보니 지폐, 현금이 가득했고, 논밭 문서와 집 가옥 문서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사모님이 받으셨을까? 그 어린 주광조는 엄마가 그것을 왜 안 받았는지 평생 한을 품으며 원망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정모 사모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시면서 돌려보내셨다고 한다. "우리 목사님은 후세에 이런 선물을 받으려고 순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뜻은 받지만 물건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목사님이 순교하신다고 자꾸 이야기하시면 어떻게 먹고 살까가 제일 사실 걱정이다. 우리 남편이 그 걱정을 하는 저를 보면서 당신이 먼저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것을 갖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입이 불러나온 막내를 불어 앉히며 사모님이 하셨던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시37
25 착한 사람이 버림받거나 그 후손이 구걸하는 것을 나는 젊어서도 늙어서도 보지 못하였다.
26 그런 사람은 언제나 선선히 꾸어주며 살고 그 자손은 복을 받으리라.
그런데 이미 넣어두신 삶, 그것을 꺼내는 삶, 그것이 십일조의 삶이라고 했는데 그 이후로 이분들의 삶이 정말 넉넉했을까? 넉넉히 꾸어주고 베풀고 복을 받는 삶이였을까?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하나님이 넣어두셨다고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이분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게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우리의 영적 아보트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도은미 사모님은 북한 선교를 준비하고 계신데, 그때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황기철 목사님이 만약에 가서 북한군에게 잡혔다, 잡히면 당신은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말라고, 어떻게 아셨는지, 쓰우 에트 로쉬, 머리를 들라. 민수기의 시간을 결코 놓치지 말라고 하시면서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생명이 아니라, 내가 그릇이고, 정말 주님이 담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표현하는 삶이 있을까? 내가 생명이라면 우리는 머리를 어떻게 해서든 숙여서 살아야하지 않는가? 그러나 내가 생명이 아니라 내 안에 담기실 그분이 생명이시기에 우리는 머리를 들고 당당히 죽을 수 있다라는 것이다.
오정모 사모님이 주기철 목사님께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 당신은 순교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 교회가 산다고 했던 말씀이 계속 귀에 쟁쟁하다. 당신은 순교해야 합니다, 왜냐, 당신이 생명이 아니고 전체가 생명이기 때문에 당신은 죽어야 합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생명을 담는 그릇, 정말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 신부의 모습인지, 이것이 바로 십일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인생이다.
결국 이 주광조 장로님은 굉장히 고생을 하셨고, 그 아버지의 순교 장면을 목도한 다음에 실어증에 걸리고, 그리고 해방되고 나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고침을 받고, 공부를 하고, 나중에 극동 방송을 맡으시면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그 모든 삶을 정리하시는 시간들을 가지셨는데, 평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는 삶, 복을 받는 삶을 살아낸 주광조 장로님의 간증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다. 우리에게 이미 넣어두신 것은 물질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이다. 그것을 오늘도 꺼내 쓰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한다.
한 우두머리를 세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는 삶, 이것이 민수기의 삶이다.
민1:4 각 지파의 각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 한 사람씩을 너희와 함께 하게 하라
계속 우두머리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가 너무너무 크셔서, 한 사람의 머리로 들지 않고, 12지파의 지휘관들이 나오면서 다 합치면 우리 주님의 신성의 머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머리를 들고, 쓰우 에트 로쉬를 하는데, 광야에서 하는 것이 20세 이상의 군대를 계수하라고 하신다. 결국 우리가 광야에서 할 일은 전쟁인데, 전쟁을 20세 이상으로 계수한다. 결코 어린 아이를 계수하지 않는다. 히5:12절에는 어린 아기 이야기가 나온다.
히5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말씀의 단계에 젖이 있고 단단한 음식이 있다라는 것을 주님이 지금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단단한 음식은 반드시 무엇을 사용해서 먹어야 하느냐? 14절에 지각을 사용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토라를 이해하고 잘 살게 되었다가 아니라,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라는 말이 나온다. 지각을 사용하는 이유가, 우리가 토라를 통해서 오늘도 승리하기를 원하는데, 지각을 사용해서 연단을 받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것이 정말 아이러니가 아닌가? 지각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을 어린 아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가 구강기, 항문기, 이 판을 세웠던 때가 다 어린 아이의 시절이다. 지각을 사용할 수 없을 때이다. 우리의 지각이 사용되지 않았을 때 일어난 일들이다. 그때는 젖이나 먹어야 할 처지였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우리에게 다시 가르쳐주신 이유는 너희가 지각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너희가 인천상륙작전 할 수 있다. 너희에게 다시 항문기의 수치심을 해결할 수 있다. 지각을 통해,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분을 어린 아이가 아닌, 군인으로 그 상륙작전을 우리 한번 같이 수행해보자고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그 작전을 수행하게 되시기를 축복한다.
수치심의 판이 건드려졌을 때, 이것이 아닌 나의 지각을 사용함으로, 이 지각은 김멜이다. 자유의지를 통해서 내가 이게 아닌, 저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 저 너머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 The other side라고 한다. 힐송에 이 표현이 많이 나온다. 아헤르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쉬 아헤르라고 한다. 저 너머의 사람이셨다. 나의 판이 아닌, 저 너머의 판으로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것을 지각이라고 한다.
스카펙이라는 철학자는 원죄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이 불순종, 교만 전에 생각의 게으름이라고 한다. 지각을 사용하지 않는 게으름, 이것이 원죄였다고 한다. 지각을 사용하지 않고, 어린 아이에 머무르려고 하는, 젖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아담과 하와의 죄였다. 뱀이, 진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 하고 음성을 들려주었을 때, 만약에 지각을 사용했다면, 지각은 나의 의지를 사용해서 생각을 깊이한다는 뜻인데, 정말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깊이 사고할 줄 알았다면 아마 아담과 하와는 뱀의 음성을 분별했을 것이다. 어린 아이에 머물고자 했던 아담과 하와의 사고, 생각, 지각의 게으름이 그 죄를 짓게 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지각을 한다는 것은 나의 엄청난 의지를 사용해야 하는 이야기이다.
고후10: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생각이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사로 잡을 수가 있다. 그것을 나의 김멜로 잡아서 그리스도 아래에 복종하게 배치시킬 수 있는 자를 장성한 자,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라고 한다.
히브리서에 보면 그는 아들이면서도 받으신 고난을 순종함으로 배웠다고 하신다.
히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베레쉬트, 아들이시면서도, 말씀을 시작하신 분이면서도 어떻게 하셨냐면,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연단 전에 지각을 사용함이 있었다. 우리 주님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고난을 받아 온전하게 순종하신 장성한 분량이시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 저 너머의 세상, 단단한 음식을 먹는 우리가 되기를 원한다.
광야에 가면 뭐가 보일까? 하야 표지 디자인에 자주 등장했던 그림이 있었다. 우리가 서초동 교회에서 매주 불렀던 마토부 오할레이카 야아코브, 너무 좋다, 감탄하신다. 광야에 저 진친 모습이 너무 좋다, 광야에 가면 고속도로를 보는 것이 아니다. 광야에 진친 모습을 마하네라고 한다. 마하네는 חן 헨이다. 내가 너희의 삶을 인도하는데, 신실하게 인도한다. 광야에 가면 길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영을 볼 수가 있다. 광야에 길이 없다. 광야에는 오직 그 리더만을 따라간다. 머리가 인도하는데대로. 리더의 머리 속에는 광야의 지도가 있다. 그런데 따라가는 자들의 머리 속, 눈에는 하나도 그 지도가 보이지 않는다. 광야에서는 길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머리를 들라, 너의 머리를 의지하라.
광야는 길이 없는 곳, 내 길이 사라지는 곳, 들어가자마자 내게 익숙했던 길이 다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죄란, 내 길이다. 저희 아버지가 칠순 잔치 때 저희 오빠에게 My way를 불러달라고 하셨는데, 문 권사님이 토라적이지 않다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가 불렀는데, 그 가사를 잘 모르지만 My way란, 내 길, 내 길은 너희들다 다르다는 이사야 말씀에 하나님의 길과 다른 길을 가진 것을 죄라고 한다. 그래서 유턴하라고 하신다. 그 길, 그 생각, 그 말이 아니야.
죄를 짓게되는 길들을 인카운터에서 많이 보았다.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죄의 길을 내게되는 4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 고의적인 죄이다. 우리는 죄를 사랑한다. 정원이가 지난 주에 간증을 했듯이 나는 부정적인 질문을 사랑했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내 길을 만든다. 두번째, 용서치 못함의 길이 있었다. 용서하면 큰일난다. 없던 것으로 하면 그 사람이 또 짓을 하니 큰일난다. 그래도 괜찮다는 것이 용서해주는 것인데, 그 길을 절대 내줄 수 없는 것이다. 세번째, 말로 짓는 죄의 길이 있다. 네번째로, 마음으로 짓는 죄가 있다. 이렇게가 인카운터에서 계속했던 죄의 길을 내는 4가지 방법이였다.
우리가 아보트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나한테는 이 길 밖에 없는데, 자꾸 새 길을 말씀해주시고,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가고 계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소망하는 것이다. 나도 새 길로 갈 수 있겠구나.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굉장히 어려워한다. 그리고 뭔지도 사실 잘 모른다. 이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한다. 자기 길로 가라고 그렇게 했는데, 나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했던, 이번 봄의 주인공이 있다. 바로 룻이다.
룻은 나오미라는 시어머니가 이제 내 인생에 길이 없다, 그러니 너는 너의 길을 찾아가라고 했는데, 아닙니다, 저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저는 머리되신 어머니만 쫓아가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며 그 광야의 인생, 마라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쓴 인생을 함께 쫓아갔던 여인이 룻이다.
길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정원이가 나는 부정적인 질문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하는 것이 죽을 것 같았다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새로운 길을 낸다는 것은 우리의 옛자아에게 정말 어려운 일,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는 새 길을 이야기하면 이 간증이 가장 저를 바꿔놓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 같다. 저는 저의 목사님이 가정에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길을 말로 짓는 죄, 마음으로 짓는 죄의 길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나 선명했고, 너무나 생생했다. 증거도 많았다. 그런데 제가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을 때, 나에게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신 유사모님의 한 마디가 있었다. 사모님 그것은 가정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의 길이 아니라, 참된 목자의 길입니다. 제가 왜 그랬었냐면, 목사님이 아픈 어떤 한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주님 저를 먼저 데려가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셨었다. 저 사람의 목숨말고 저를 먼저 취해주세요, 라는 기도를 제가 듣고 굉장히 열 받았던 때가 있었다. 우리 목사님을 나 개인의 남편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의 길을 걸어왔던 것 같다. 그때 유사모님이 내주신 새 길, 6년전에 알고나서 그 길을 걸어오면서 우리 남편이 내 남편, 개인이 아니라 전체라는 것을 보게되고, 전체의 리더, 아버지라는 것을 보게 되면서 제 인생에 광야에 꽃이 피는 시간들을 겪고 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맞다라고, 이것 외에는 길이 없다라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다. 반드시 그 길이 있다. 그 길을 하나님이 열어주실 것이다. 광야를 다 끝내고 나면 뒤를 돌아보면 그 길이 어떻게 될까? 고속도로처럼 절대 나있지 않는다. 그냥 내가 목자의 뒤를 따라왔던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광야는 다시 모래 바람이 덮이고 길이 없어져서 그냥 광야로 존재한다. 민수기의 마지막은 마토트-마쎄이로 마친다. 42개의 진, 목자를 쫓아 걸어온 그 길, 그것으로 광야에서의 시간이 마무리 된다. 열심히 오늘도 길을 내면서 살겠지만, 오늘 목자를 쫓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도마가 길이 없어졌다. 제자들이 주님과의 여정을 걸으면서, 도마는 의심이 굉장히 많았던, 이 길이 맞나?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걷지 않는 한 형제가 있는데, 이 길이 정말 맞나, 끊임없이 길에 대해서 목자, 머리에 대해서 의심했던 그가 이런 말을 한다.
요14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우리의 연약함도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위대한 이 말씀을, 도마의 의심이라는 돌 위에 쌓으신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우리가 길을 어찌 알겠사옵니까?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하니, 우리 주님이 길을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길이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길을 아니 나를 따라오라, 이게 아니라 내가 그냥 길이야 라고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길이란, 참 재미있는 것이 여러분들이 어떤 존재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지금 우리 교회 옆에 길이 나고 있다. 지하에 길을 뚫고, 지하철 공사를 하고 있다. 아무리 지하철의 길을 내도, 사람이 아닌 개미들은 이 길에 영향을 받질 않는다. 산에 가면 우리한테는 길이 없어도 호랑이한테는 길이 있다. 존재가 어떠냐에 따라서 그 길이 길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지 않기도 한다. 광야란, 죄인은 절대로 갈 수 없는 길을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말씀만으로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광야라는 시간은, 나의 에고, 옛판으로는 갈 수 없는 새판이다. 오직 진영을 건설하여 주님과 함께 살겠습니다, 당신의 은혜, 은총으로 살겠습니다,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을 광야의 길이라고 한다.
우리 제자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서 저는 저의 모습을 참 많이 보며 반성을 한다. 그런데 너무 쉽다. 우리의 성질을 돋굴 수 있는 방법이 말이다. 저 사람에게는 저 길만 살짝 내주면 반드시 그 길로 간다. 제 눈에도 보이는데, 하나님은 어찌하실 것이며, 머리 좋은 사탄은 얼마나 잘 알까? 얘는 이 부분만 건드리면 그 길로 반드시 가, 얘는 돈 문제만 건드리면 반드시 익숙한 길로, 그 말을 하며 죄를 지을거야. 우리는 얼마나 쉽게 그 길을 가는지, 사탄이 갖고 놀기 정말 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탄에게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자. 이것을 건드렸는데, 그 길로 안 가네? 이런 사람들을 이 땅을 나그네로 산다고 한다. 길이 없는 사람이다. 길이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붙어있을 수 밖에 없다. 나에게 길, 네비게이션이 있느냐가 아니라 나에게 머리가 있느냐? 내가 붙들고 갈 그 새 길을 내어주시는 우리 주님, 아보트가 있느냐? 이것이 여러분들의 존재를 설명할 것이다.
1. 머리
2. 진영
이 광야는 두 번째로 진영이 중요하다. 이 광야는 여러분 혼자를 못 가고, 아까 그림에서 봤듯이 진영을 쌓아야만 함께 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진영에서 떨어진 한 사람이 있었다. 아니, 두 사람이다. 진영을 이루어야만 쫓아갈 수 있는 길에서 떨어진, 이때는 주님이 부활하신 때이다. 그런데 이 부활의 소식이 의심과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미처 믿어지지 않았던 시간이다. 그 중 이 진영에서 떨어져 나간 두 사람이 나오고 있다.
눅24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예루살렘에서 굳이 25리가 되는, 엄청 먼 거리로 떨어져나가는 것이다. 굉장히 재미있는 표현이 엠마오의 뜻이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학자들은 이 엠마오라 하는 마을은 이 두 제자의 고향일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나에게 익숙했던 길, Comfort zone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물이 나오는 곳으로, 이 제자들은 나에게 익숙했던 길로 다시 걸어가고 있다. 내가 따른 스승이 무참히 죽은 줄로만 생각했던 그 절망과 실의가 얼마나 절망적이였을까? 이분이 나의 메시아, 우리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분이라고 새 길이라고 믿고 따르던 분이 죽었다. 그 절망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놓친 것이 하나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약속을 잃어버렸다. 이들이 가야되는 곳은 엠마오라 아니라 갈릴리였다. 그런데 갈릴리가 아닌 엉뚱한 서쪽 엠마오, 따뜻한 물, 나에게 익숙한 길로 지금 걸어가고 있다.
여러분의 잃어버린 약속, 그 한 문장,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 약속을 다시 찾게 되기를 원한다. 그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가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 내가 있어야 할 곳, 하나님은 이미 정해두셨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피해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이 둘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 글로바라는 이름이 어디에 또 나오냐면, 예수님의 십자가 그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던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나온다. 마리아를 설명할 때, 글로바의 아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길로 다시 전진하게 되어, 부활의 증인이 되었을 때, 초대 교회를 세우는 엄청난 교회의 기둥이 된 것을 하나님이 암식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 사람의 현재 상태는 이 머리를 들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 엠마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으로 11km가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새 희망이 사라지자, 자신들의 길로 갔던 그 사람들, 여기에 우리 주님이 나타나신다.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 길에 주님이 동행하신다.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시고 계시는가? 여러분들의 따뜻한 곳, Comfort zone, 너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 생각들로 갈 때, 주님은 반드시 동행하신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걷고 계신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 줄 알지 못하는데 있다.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우리의 길은 슬픔의 길, 자기 연민의 길, 절망의 길, 소망이 없는 낙담의 길이다. 그리고 쭉 이야기를 한다. 당신은 지금 온 나라를 들썩이고 있는 이 사건을 모르냐고 말이다.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이 사람들의 본심이 나오고 있다. 이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속량해주고 구원하고,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메시아로, 정치적 메시아로, 내가 원하는 예수님으로 설정을 해놨는데 이분이 죽은 것이다. 우리가 익숙했던 길을 갈 때, 우리에게는 내가 설정해놓은 하나님이 있다. 내가 설정해놓은 남편상이 있다. 당연히 이런 말을 해야되고, 당연히 책임지는 말을 해야하고, 당연히 내가 너를 돌봐줘야 한다는 말을 해야하는 남편의 상이 저에게 있다. 우리에게 따뜻한 물을 내어줄 수 있는 그 길은 나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길에는 내가 세워놓은 상들의 길들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었다고 이야기 한다.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는 믿음이 없는 우리들을 오늘 주님이 책망하시기를 기도한다.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우리 주님이 그 길 아니고, 다른 길이 있다고 자세히 토라의 언어를 설명해주시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지각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이제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미련하고 마음에 더딤이 있지 말고, 나와 함께 군대로 계수되자, 나와 함께 상륙작전을 시행해보자, 나와 함께 쿰, 일어나서 함께 가자. 우리 주님이 그렇게 이야기하시면서 자기에 관한 토라를 자세히 설명하신다.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오늘 우리에게 이 뜨거움이 회복되길 기도한다. 주님의 새 길, 그 언어를 배울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게 되기를 축복한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부활의 증인이 된다.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인생의 길, 이 여행, 광야의 여행에서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여행 갈 때 챙기는 가장 중요한 것이 뭐가 있는가? 여권은 필수고, 제가 중국에 갔는데 전혀 메뉴판을 봤는데 중국말을 모르니, 그리고 그림도 없다. 항상 가이드를 쫓아 다니다가 어느날은 가이드가 없이 둘이 중국 식당에 들어갔다. 그동안은 가이드가 해주는대로 시켜주는대로 맛있게 먹고, 입맛에 잘 맞았는데 가이드가 없으니 무슨 말인지 말도 안 통하고, 읽을 수도 없고, 그림도 없어서 아무것이나 찍은 것이다. 그래서 나온 음식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언어이다.
LA나, 미국, 옛날에 이민 가신 분들이 얼마나 고생하셨는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 세탁소에서 일하시고, 너무나 고생하면서 일을 하는 그분들에게 자식들은 미국의 언어를 가지고 그 문화, 그 광야에 잘 적응하며 살지만 언어를 배우지 못한 부모님 세대들은 얼마나 그 세계가 훨씬 더 좁아지고, 더 고생을 하고, 한국에 와도 이제는 한국이 낯설고, 미국도 낯선, 그런 삶의 여행에서 갈팡질팡하게 될 수 밖에 없는게 사실 굉장히 중요한게 언어이다. 우리가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몸이 굳어지고, 우리가 발산해야 할 에너지도 좁아지고, 자유가 없어지는 그런 기분들을 여러분들이 다 아실 것이다.
하늘 나라의 언어를 몰라서, 이 토라의 언어를 몰라서, 주님이 옆에서 동행하셔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 엠마오로 두 제자를 자세하게 토라의 언어를 풀어주셨다고 했고, 그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때 소망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를 알면 그 세상이 보이고, 그리고 그 세상을 소망할 수 있다. 꿈이 생기고, 희망이 생기고 자신이 생긴다. 그래서 담대하게 이 엠마오의 제자들은 담대한 부활의 증인이 되고, 초대교회의 기둥이 된 것이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계속해서 성경에 관하여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그 세상의 것들을 저 너머의 세상에 있는 것들을, 그 길과 진리와 생명에 있는 것들을 주님이 자세히 풀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 새로운 세상의 언어들을 가짐으로 우리의 모든 굳어진, 그리고 보이지 않는 눈들이 다 풀리고, 주님을 알아보고, 아들의 증거자가 되어서 새 길을 뒤에 오는 자들에게도 제시해줄 수 있는 목자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한다.
- 나의 가는 길
하나님,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그렇게 내가 바라는 하나님을 설정해놓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으로만 만족하며 따뜻한 물만을 원하며 나에게 익숙했던 그 길만을 가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너무나 쉽게 사탄이 나를 갖고 놀 수 있는 그 길, 너무나 쉽게 나의 혈기가 나의 성질이 돋구어질 수 있는 그 길, 그 생각, 그 죄들을 지으며 그 길을 내며 살아왔던 우리의 길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목자되신 우리 주님, 당신을 쫓아가겠습니다. 우리에게 그 새 길의 언어를 가르쳐주시는 주님, 우리가 그 새세상을 소망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 꿈으로, 그 소망으로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우리도 그 부활의 주님, 그 아들을 증거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 뒤에 쫓아오는 많은 길 잃은 무리들을 인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 기도
하나님, 우리도 장성한 분량에 이르길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 작전을 맡기실 수 있는, 군대로 계수하실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어린 아이에서 군대로, 그렇게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갈 수 있는 우리가 되겠습니다.
바미드바르 여섯째날 5월14일
바미드바르(광야에서), 다바르 속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며 불평 불만이 시작되나 그 속에서 그들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너가 나를 속였다는 의미다. 이들은 끊임없는 속임을 당하고 살았을 것이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광야는 살 수 없는 곳이다.
1. 광야는 영으로 살아야 하는 땅이다. 육의 감각을 멈추면 영이 열리고 육신의 가치가 아닌 보이지 않는 영의 삶을 살 수 있다.
2. 광야에 들어가면 진영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
1) 겸손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살 수 있는 곳, 내가 가진것이 어떤 것도 쓸모 없음을 고백하는 삶이다.
2) 겸손을 통해 진영을 이룰 때 빛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순종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겸손이 전체를 위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광야에서 진영을 이룰 수 있다. 광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온전한 순종을 할때만이 노래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지체인 우리들이 아보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것 만이 진영을 이룰 수 있다.
3)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되기 위해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
3. Love came down( 그 사랑이 내려온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2) 우리에게 생명이 없고 우리의 부정함을 고백하면 하나님이 모든것을 덮어주신다(카파르). 십자가의 은혜다. 속죄소의 어원은 카파르다. 카파르(속죄하다,덮다)
출25:20~21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여기서의 궤는 언약궤, 증거궤, 지성소에 있는것이다. 지성소는 신랑과 신부의 결합의 장소다. 신랑되신 완전하신 주님의 성품에 부정하고 죄인된 우리의 성품을 묶는 것이다. 주님의 성품에 우리의 성품을 결합하는것이 오메르 카운트다. 오메르 카운트는 나병환자이고 부정하고 창녀의 삶을 살았던 우리가 주님의 성품과 결합할 수 있는 날들을 허락한 것이다. 신랑의 성품과 한땀 한땀 결합해서 새로운 모판으로 살아가자고 하는 날들로 초청하신 날들이 오메르 카운트의 날들이다.
위에서 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에서 우리가 오메르 카운트를 할때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신다.
4. 다바르의 땅으로 들어간다.
다바르에 들어간다는 것은 육의 말, 불평 불평을 하지 않고 영의 눈을 뜨는것이다. 오직 존재 자체로 좋다고 하면서 결합 하는것이다.
다바르에 나의 손이라는 요드가 붙으면 디브리가 된다. 디브리는 본것, 사실만을 이야기 한다.
민13:28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민13:31~33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 말들에는 거짓이 없는 사실들이지만 나의 육신으로 본 육신의 말이기 때문에 거짓이다. 육신으로 본것이 너무 명확해서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결론이지만 영의 말을 하는 갈렙은 다르다.
민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갈렙은 육의 눈으로 보면 선명한 것을 보는것을 멈추고 영의 눈으로 보면 능히 이길 존재들이라고 한다.
망상은 거짓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팩트에서 나오는 감정적인 것이다. 확실히 보고 명확한 것은 다 육을 기반으로 나오는것이고 이게 영이 육을 섬기게 하는일들, 육신에서 비롯된 모든 말은 망상이다. 망상에 의한 말이 나의말, 디브리다. 육신의 망상에서 벗어나야 평안, 샬롬의 문이 열린다.
시136:16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는 광야를 통과해서 가나안에 도착한 결과를 감사하는게 아니라 육이 아니라 영이 너의 생명임을 가르친 광야의 삶에 감사하고 광야에 넣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해야한다.
드마마,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소리 디브리를 없애고 하나님의 말 다바르를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야겠다.
다비드리 목사
작성자 Daniel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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