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연구-1.전쟁 그리고 피난민
최환철
포항과 울산은 '산업단지' 및 공단이 있다.
하지만 '부산'에는 공업단지가 없다.
왜냐하면 해상 무역을 위한 항만 시설은 좋지만, 공업단지가
들어서기 위한 평야가 부족하다.
포항과 울산을 가 보면 평지가 많고, 그래서 길도 '계획도시'답다.
하지만 부산 도시에 가장 큰 활용가치는 '임시 수도'가 첫째요.
둘째는 일본과 가까운 항구.
그래서 배로 수출하기 위한 지리상 중요 요청지다.
좀 평야가 많았으면 좋았으련만 아쉽게도 부산은 그렇지 않다.
해안길을 따라서 난 길게 형성된 도시,
그리고 (피난으로 인하여 억지로 만든 ) 가파른 산비탈에 지은 집.
그러다보니 길이 반듯할 리가 없고, 도로는 늘 막힌다.
오늘은 1950년 6.25 전쟁 이후에 있던 일들 그리고, 임시 정부시절
이야기를 공부해 보자.
1950년
06.25 한국전쟁 발발
07.02 이승만 대통령 부산 도착 / 07.17 부산극장에서 '국회 개최'
08.18 한국에 모든 정부기구가 부산으로 이전 완료
09.28 국군이 서울을 수복해서 북한쪽으로 진격.
하지만 10.25 중공군이 참전함.
1951년.
01.03 정부는 전쟁이 길어질 것으로 판단하여 '부산'을 임시수도로 결정
1952년.
08.05 대통령 직선제도에 의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
1953년.
07.27 휴전협정 조인
08.15 부산임시정부를 접고, 서울로 환도.
한국 땅 위에서 남과 북이 전쟁을 한지도 70여년이 흘렀다.
우리 후손들 대부분이 그날의 일들을 기억하기 힘들고,
학습하기도 쉽지 않다.
'부산'을 여행하면서 가장 먼저 마음에 담아야 하는 '역사공부'는
그곳이 70여년전.. 대한민국 임시 수도였다는 것.
전쟁이 나자마자 1주일도 안 되서, 부산은 피란민 40만명으로 북적였다.
정부와 부산시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을 수용하기 위하여 극장,
공장, 여관 등을 활용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피란민 스스로 주거지를 해결해야 했다.
(아래 사진은 부산 임시정부 전시관에 모습을 찍은 것)
우리는 '판자집'이라는 말만 들었지. 직접 보거나 체험한 적이 없다.
전쟁으로 인하여 얼기설기 대충 지은 집..
보일러(온돌시설), 전기, 수도, 외부의 침입 등과 무관하게 임시로 지은 집.
종이상자, 나무판자, 거적데기 등으로 대충 지은집.
물을 떠 나르기 위하여 멀리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퍼 날라야 했다.
이런 모양의 판자집이 부산 도심, 부두, 대형 시장 주변
(용두산, 복병산,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보수천, 영도 바닷가 주변)
을 빼곡히 채워졌다.
소방시설이 전무한 이런 시설에서는 '화재'는 수시로 발생했다.
결국 도시 미관을 해치는 판자집은 강제 철거하게 된다.
피란시절 가장 큰 문제는 '배고픔'이다.
위 사진은 UN에서 식량을 내려주고 있고 있고, 그것을 나르는 모습.
부산의 대표음식은 돼지국밥과 밀면 이다.
이 두가지 음식은 그날의 가난한 형편을 대변한다.
마땅히 먹을 것이 없던 그 시절에 미군부대에서 나온 깡통 쏘세지와
육류들을 이것저것 혼합해서 끓인 '잡탕'이 바로 돼지국밥이다.
냉면은 원래 메일, 고구마/감자 전분으로 만든다.
하지만 전쟁통에 이런 재료가 없자.. 남는 것은 '밀가루' 뿐이고,
밀가루로 '냉면'을 흉내 낸 것이 바로 '밀변'이다.
전쟁으로 인하여 새로운 음식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밀면은 냉면에 비하여 양념이 많이 들어가고, 경상도 입맛에
적합하게 훨씬 매콤하고 달고 짜게 진화되었다.
당시 밀면으로 유명했던 '밀면 식당' 모습
그 역시 판자집이다.
턱없이 의복이 부족했던 그 시절.. 입었던 옷
부산역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국제시장'이 나온다.
지금은 관광도시답게 밤에도 화려한 조명으로 반짝이지만, 당시는
'도떼기시장'이라고 불렀다.
국제시장은 (1945년) 해방이후 귀환 동포들이 생계를 위해 노점을 차리고,
일본인들이 남겨둔 가재도구를 거래하면서 출발했다.
1948년에 그곳에 목조건축물이 들어섰고, 미군물자가 흘러 들어와서 통조림,
기계부속, 청과, 양과, 잡화 등이 거래 되었다.
1950년 전쟁이후에는 피란민들이 생계유지를 위하여 자신의 가재도구를
매매하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원조물자, 구호품,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품, 밀수품 등을
매매하던 곳.
단속반과 상인들이 거칠게 몸싸움을 하던 곳.
그야말로 '도떼기 시장' 그 자체였다.
< 계속 >
부산연구-2.대통령 임시관사
최환철
죽을 운명에 처해 있던 한국을 구원하기 위한 단체들이 들어왔다.
=KCAC(한국민사 원조 사령부 The Korean Civil Assistance Command)
=UNKRA(유엔한국재건단 The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 FOA(미국의 대외원조기관인 대외활동본부
(ForeignOperationsAdministraion)
한국민사원조사령부는 식료, 의류품, 의료기구, 비료 등의 수입 그리고 병원
피란민수용소 건립 주택 제공. 고아원 원조 등을 맡았다.
나머지 기관에서도 한국의 건설, 벽돌, 각종 공장 설립 , 물자 원조
등 한국 정부의 재건에 참여했다.
사실상 당시 한국의 현실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고,
곧바로 공산당 손아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이리가 올챙이 시절을 생각 못 하더라도..
교육을 통해서 늘 과거에 도움 받은 은혜를 떠 올리고, 교만에 정신을
단속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후 2개월만인 1950.08.18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고, 경상남도 지사가 살던 '관사'를 대통령 관저로 사용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정부는 1950.10.27 서울로 환도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상황은 역전되었고,
1951년 1월에 부산을 다시 임시수도로 정했다.
위 사진 대통령 관사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1,023일 동안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다.
위 건물은 1926년(일제강점기)에 도지사 관사로 건립된 일본풍 건물이다.
경상남도 지사의 관사.. 건물의 외벽은 벽돌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건물 내부는 일본식의 목구조가 가미되었다.
집무실 모습. 이승만 밀랍인형이 그럴듯하게 앉아 있다.
세월이 흐르면 어쩌면.. AI로봇이 이승만 대통령을 대신할 날도 올 것이다.
그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 관사는 2층 규모, 지하실, 부속 건물 등 연건평이 109평이나 된다.
아래 사진: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응접실 겸 식당
생각보다 넓었다. 나무로 된 바닥이 인상적이다.
중간 중간에 미닫이문이 있었다.
2층에 올라가 보면, 1층에 있는 이 정도 넓이의 공간이 나온다.
거의 교실 한개 크기에 광장(?)이 있다.
지하 공간도 있겠지만 열람이 불가능해서 그냥 넘어갔다.
(아래) 건물 맨 좌측에 주방/응접실 옆에 위치한 샤워실 겸 빨래방.
요즘 시설로 보자면 별것도 없지만. 1926년에 지은 건물로서 이 정도
시설을 갖췄다는 것은 아무리 도지사 관사라도 해도, 대단히 진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생각없이 보면 별것도 없는 사진이지만,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있어서
올려 본다.
하여간 이승만 대통령은 여기 관사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와 생활을 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과 미군, 국군 장군들에게 각종의 훈장을 수여하고,
그들을 접견하기도 했다.(위 관사에서...)
그리고 이곳에서 국내외 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 회견을 가졌으며,
대한민국의 수반으로서 외국 사절단, 외교관, 정치인들의 예상을 수시로 받았다.
휴전이 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로 복귀한 후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는
서울의 경무대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남남도 지사의 관사로 사용하다가, 1983년 7월 1일 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위 건물은 부산시에서 인수하여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전쟁 상황에서도 '한국'의 교육은 멈추지 않았다.
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원조 텐트 안에서 수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했다.
위 사진은 부산에서 사용했던 임시 학교 막사를 재현한 것.
그 당시 사용하던 교과서, 통지표, 주판 등
아래 사진은 '부산박물관'에 들러서 찍은 사진이다.
피난 시절. 영도다리 밑에서 점을 봐주고 돈을 받았던 모습.
선진국이 되고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면 '점'을 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앞길이 깜깜하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점을 보면서 다가오는 미래를 상담했을 것이다.
< 계속 >
부산 연구-3. 재림교회 이야기
최환철
부산은 '한국재림교회'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비록 서울에서 가장 멀고, 또한 재림교회가 처음에 뿌리를 내린 장소인.
북한 진남포 내지 평양에서 가까운 '순안'에서 보면 더 멀게 느껴지는 부산.
손흥조와 임기반의 요청으로 인하여 '쿠니야히데 당시 전도사'는
1905년 11월 하순에 또다시 조선을 방문한다.
1905년 11월 말에 쿠니야는 고베항을 떠나서 12월 1일에 부산 수영만에 도착했다.
그 당시 '손흥조'의 영접을 받았다.
(위에 날짜는 다른 인터넷 기록이나 '동래교회'의 주장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음)
하여간 동래교회는 1905년을 설립일로 기준하고 있으며,
올해 2024년은 선교 119주년으로 삼고 있다.)
세계 2차 대전 및 전쟁 등 어수선한 시기로 인하여 선교의 흐름이 단절되기도
했지만, 남한 전체에서 보자면, 서울보다 부산에서 '재림교회'가 먼저
흔적을 뿌린 것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부산에서 손흥조와 함께 2일동안 3차례나 전도회를 했다.
약 25~30명이 전도를 받아 결심을 했고, 훨씬 많은 성도들이 신앙인이 되었다.
놀라운 것은 손흥조씨가 1904년 여름에.. 혼자 전도해서 부산에 100여명의
성도가 구성되었다고 보고를 했고, 이것을 보고 쿠니야 전도사는 부산에 선교단체를
조직하는 것에 대해서 제안을 했다.
하지만.. 임기반이 있는 북한 진남포와 부산 사이는 너무 멀었고,
'선교사'가 충분하지도 않았던 그 시절에.. '부산'을 챙기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스미스 선교사 가족이 18일간의 거친 항해를 거쳐서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날이
1905년 10월 7일.
그리고 10월18일 수요일에 필드 목사와 '동경'을 떠나서 19일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고, 12시간 배멀미를 통과하여
대마도를 지나서 10월 20일에 부산. 도착했다.
그리고 스미스 선교사 가족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05년 10월22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스미스 선교사 가족은 부산에 도착은 했지만, 부산에서
전도회를 하거나 재림성도들과 어떤 교재를 한 흔적은 없다.
스미스 목사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에, '손흥조'를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만약에 만났다면 부산이 재림교회 선교지로 더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04년에 재림교회 역사의 주도권은 북한 지역에 '임기반(임형주)' 장로에게 있었다.
손흥조는 평신도로서 북한에 있는 재림교회 본부와 연락이 되는 것도 아니고,
혼자 경상도 지역(경산, 대구, 부산 등등)을 월급도 없이 전도해야 했다.
반대로 임기반을 중심으로 한 진남포에 초창기 재림교회 기관 사역자는
당시 조선 상황으로 보자면 상당히 큰 액수에 급여를 받았다.
1910년 후반쯤 손흥조는 실의에 빠졌다.
1920년대 중반 경상도 선교를 위해서 '왕아시'선교사가 손흥조를 찾아가서
1927년 여름에 재침례를 받고 열심으로 전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노환으로 인하여 1928년 04월 25일 대구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는 신학과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지식이 높지도 않았다.
집도 가난했다.
그에 아내와 자녀가 있지만 손흥조를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손흥조의 유족을 '대구중앙교회'에서 발견은 하였지만,
그들이 사는 주거지가 재건축이 되면서 그들과 소식이 끊어졌고,
아직까지도 손흥조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본인이 추측하자면.. 손흥조 무덤은 대구 어딘가..
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동래교회 앞 마당에 있는 추모비 모습.
직접 가서 찍은 것은 아니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사진이다.
동래교회를 꼭 한번 방문하고 싶었지만, 일행이 있었고, 방문한 그날이
일요일이라서.. 성도들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부산 동래구 주변에 있는 온천과 역사 유적지를 방문했다.
'부산'이 재림교회 역사에 중요한 이유는 역시 1950년 6.25 전쟁이
큰 역할을 했다.
1950년 초반.. 부산으로 피난시절.. 먹는것 다음으로 시급한 문제가
바로 '의료(치료)'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든 상황에 출산하는 여인들, 각종 전염병 등이 창궐했다.
이 문제를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냈던 류제한 박사에게
부탁을 했다. 부산위생병원은 그렇게 시작했다.
(윗사진) 무료 진료를 하고 있는 모습.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1953.03.15 부산분원개설 2주년 기념사진.
본격적으로 건물을 지은 것은 아니고, 임대해서 병원을 운영한것 같다.
당시는 직원도 최소 인원이다.
부산병원 준공식 1955.04.14
전쟁이 끝나고 얼마되지 않다보니, 건물 준공식에 미국인이 많이 보인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 의료인이 부족하다보니 외국인 의료선교사들
도움이 컸을 것이다.
부산에 병원을 세우면서 남부지역에 선교를 본격적으로 할 수가 있었다.
무료 진료를 통하여 봉사와 선교를 동시에 할 수가 있었다.
여수특별대전도 1952.11.01
해방이 되었을 당시.. 남한과 북한에 있는 재림성도들의 규모를 보자면,
북한 쪽에 80%, 남한 쪽에 20% 정도 추산된다.
어쩌면 그만큼 북한 사람들이 유전적으로 신앙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하여 수많은 재림성도들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 현실은
너무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하지만 전쟁 그리고 피난으로 인하여 재림성도들은 남한 전국으로 퍼져서
선교의 불씨를 뿌릴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제주도 피난으로 인하여 성산포 교회를 중심으로 오늘날에 제주대회.
그리고 부산 피난으로 인하여 부산병원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 단체가
(반강제적으로) 선교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한반도에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멘~
안타까운 것은 '부산'에 재림교회 역사의 흔적이 훨씬 많을텐데.. 그것을 모두
추적하지 못했고, 다 기록하지 못함이다.
나중에 또다시 부산을 방문 할 계획이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