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여행]남원의 자존심 남원 향교.........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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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남원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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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남원지방의 교육의 요람인 남원 향교를 찾아가는 길이다. 향교는 조선시대 남원도호부 내의
남원 유생들을 위한 국립 중등 교육 기관이다.먼저 유랑자는 홍살문을 만난다, 본시 홍살문은 홍전문
(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다시말해서 어떤 지역이 신성하거나 구격(具格)이 맞는 장소
임을 나타내기 위한 표지로 세우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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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붉은 이유는 동짓날의 팥과 같이 붉은 색이 양기를 띠어 귀신과 액운을 물리친다는 풍속적 의미
를 담고 있으며, 상단을 화살로 장식한 것은 잡귀를 화살로 쏴 없애버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고즈넉한 돌담의 아름다운 골목길은 왼지 정겨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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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 문이 붉은 이유는 동짓날의 팥과 같이 붉은 색이 양기를 띠어 귀신과 액운을 물리친다는 풍속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상단을 화살로 장식한 것은 잡귀를 화살로 쏴 없애버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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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야 콘크리트 담장이지만 옛날엔 모두가 돌담길 이었다. 돌담길은 유랑자의 어린시절을 떠 올
리게 만드는 마력같은 것이 존재한다, 아름다운 돌담길을 돌아나가니 그 이름도 당당한 진강루(振綱
樓)가 나타나는데 그 위용이 예사롭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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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유랑자는 전국의 수 많은 향교를 가 보았지만 이렇게 향교 입구의 루가 권위적이고도 화려한
것은 처음보는 진귀한 볼거리다. 남원의 역사만큼이나 권위도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 남원군은 종3
품이 수령인 남원도호부였으며, 1부 1군 9현( 담양·곡성·창평·구례·순창·임실·무주·진안·장수 등)을
관할한 큰 고을이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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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향교 진강루(振綱樓)는 꽤 권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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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향교 창건 6백 주년 기념비(南原鄕校創建六百周年紀念碑)
대소인부개하마비(大小人負皆下馬碑)--누구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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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이란 유학을 가르치는 곳, 즉 강학의 장소다. 명륜당 창문 너머로 유생들의 글 읽는 낭낭한 목
소리가 들리는것만 같은 엄숙한 분위기다. 본시 뜻으
로, [맹자] 등문공편(滕文公篇)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 한 데
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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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글을 배우고 익혔으며, 또한 지방 수령이 직접 유생들에게 강시(講試)한 곳
이기도 하다. 그런데 역시 진강루(振綱樓)와 명륜당(明倫堂)을 연결하는 다리 또한 예술 적이다. 어떻
게 저러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을까. 유랑자는 궁굼해서 핸폰을 꺼내 직접 자료를 찾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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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향교(南原鄕校)의 외삼문(外三門)
명륜당(明倫堂):‘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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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향교 의 초입에 있어서 대문의 역활을 하고 있는 거대한 진강루는 유랑자가 다른 향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누각이라고 앞서 밝혔다.그도 그럴것이 향교의 보편적인 구조에는 없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 향교에 누각이 있는 이상한 구조는 바로 진강루가 갖고있는 특이한 역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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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남원성의 종루로 이용되던 아름다운 환월루를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도시계획을 빙자해서 헐어
내려 하자, 남원의 유지들과 시민들이 나서서 모금운동을 했고, 환월루를 현찰 매입해서 해체한 뒤에
향교의 대문으로 옮겨 다시 조립하여 재탄생 하게 되었다는 글을 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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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강루(振綱樓): 인류의 강상을 진흥시킨다는 뜻이다. 진강루 처럼 이러한 구조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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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남원 시민들의 힘으로 우리 문화재를 지킨 위대한 문화재 사랑과 시민 정신이 서려있는
건물이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향교에서 볼 수없는 형태의 아름다운 누각인 진강루에를 볼수 있
었던 것이다. 어쩐지 저렇게 아름답고도 화려한 누각이 향교에 있을수 없는 건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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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강루(振綱樓)에대한 스토리텔링으로 설명을 곁들인 안내판을 따로 만들어서 비치해 놓
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냥 왔다간 사람들은 이러한 스토리텔링을 알 리가 만무했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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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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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 놓는다면 자연스럽게 남원 시민들의 자부심도 높아지고,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늘
어날 것이며, 관광객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귀감이 되고도 남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면 남원향교의 출입문격인 진강루로 재탄생시킨 일화는 남원향교의 중요성과 위상을 가늠케 해
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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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진강루는 뒷편의 명륜당과 연결되어 있는데, 진강루는 오르는 계단이 없기 때문에 명륜당을 통
하여 들어간 다음 긴 다리를 이용하여 진강루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이다. 유랑자도 진강루에 오르고
싶었지만 문이 잠겨있어 오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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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西齋):서민 자제들의 숙소다.
동재(東齋):양반 자제들의 숙소다. 앞에 중수비(重修碑)가 세워져 있다. 유생들이 거처하는 기숙사인 동재. 앞면
5칸의 큰 건물로 교육기능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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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향교(南原鄕校)의 내삼문(內三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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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강루(振綱樓)란-인류의 강상을 진흥시킨다는 뜻을 품고있다. 아마도 느낌이지만 진강루에 올라서
면 멀리는 지리산과 가까이는 광한루가 있는 남원성의 관아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지 않을까 하는
추론을 해 본다. 유랑자는 명륜당을 끼고 돌아 동재와 서재가 있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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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겠지만 동재(東齋):는 양반 자제들의 숙소이며 서재(西齋):서민 자제들의 숙소다. 숙소앞에는
빛바랜 중수비(重修碑)가 글씨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의 형태로 세워져 있다. 1410년 남원향교가 설립
된 당시 남원도호부에서는 70명, 남원 관할의 행정군에서는 50명, 행정현에서는 30명 정도를 선발하
여 교육을 시켰다. 최초 남원향교 건립지는 남원성에서 4㎞ 떨어진 대곡산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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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大成殿): 공부자의 위패를 비롯하여 4성(四聖: 안자, 증자, 자사, 맹자)5성(五聖),을 배향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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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우리나라에는 224개의 향교 와 400여 개의 서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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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西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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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향교에서 매년 치르는 큰 행사인 석전대제일이 되면 호랑이가 나타나 남원도호부의 부민들이
크게 놀라는 사건이 2~3년 지속되자, 1428년(세종 10)에 남원향교의 전교(남원향교의 최고 지도자) 등
의 지도부가 향교를 현재 남원시 춘향교 요천 너머의 남원 관광지가 위치한 덕음산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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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덕음산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큰 하천인 요천에 설치되어 있던 섶다리 등의 교각이
홍수 등에 취약해 많은 비가 내리는 날이면 향교로 가는 길목인 요천을 건너갈 수 없게 되는 일이 비
일비재(非一非再) 하게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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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東廡) 와 서무(西廡)에는 송나라 때의 승조 6현(六賢 :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 그리고 우리나라의
역대 18현(十八賢).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성혼, 이이, 조헌, 송시열,
송준길, 김장생, 김집,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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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재(司馬齋)--진사, 생원들의 강론 장소. 기둥엔 明倫學院(명륜학원)이란 주련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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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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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1443년(세종 25년)에 다시 남원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왕산(王山) 자락인 현재의 자리에 남
원향교를 다시 세웠다.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해 향교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당시 유명
한 유림 가문이었던 남원 부호 진사 유인옥이 1599년(선조 32)에 사재를 털어 향교의 가장 중요한 제
례 공간인 대성전을 재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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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광해군 1)에는 교육 강당인 명륜당 역시 재건되었다.그 후 역사적으로 남원향교의 시설은 많
은 변천을 거듭하였다. 특히 1748년(영조 24)에는 진사 한동섭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재건하
였고, 1772년(영조 48)에는 허관과 황건이 재실을 수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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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구청(禮具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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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구청(禮具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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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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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829년(순조 29)에는 사마재가 재건되었으며, 1850년(철종 1)에는 남원부사 김병교가 남원향교
를 크게 중창하였고, 1876년(고종 13)에는 화재로 전소된 명륜당 건물을 남원부사 오달선과 유림 대
표 72명이 모은 총 3,755량의 자금으로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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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인 1892년(고종 29)에는 다시 남원부사 민종열에 의해 남원향교 내의 대성전도 크게 중수되었
으며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대성전을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원향교의 현존 시설로는 정
문 시설인 진강루와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편에는 좌우의 동재와 서재를 비롯하여 유교 성현을
모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성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8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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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강루(振綱樓)는 명륜당(明倫堂)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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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강루(振綱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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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 왼쪽에는 사마재, 고직사, 교육관 등 부속 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전라
감사 윤안성 과 남원부사 성안의의 주도 하에 지역 유지인 박대옥과 유인옥의 도움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재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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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향교의 명륜당을 비롯한 서고에는 조선시대 남원 선비들의 교육 기관답게 많은 서책 보유량을 자
랑하고 있다. 비록 남원향교의 서고가 1876년(고종 13)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는 과정을 겪었지
만 현재 [사서삼경] 등을 포함한 귀중한 문집 등 600여권의 장서가 보존되어 남원 지방 사료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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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향교는 고을규모에 걸맞게 건물의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며 오랫동안 교육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북에 있는 향교 중 가장 많은 서적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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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간편한 갈비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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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1988년부터 남원향교 에서는 대중화를 위해 명륜학당(충효관)을 설치하여 남원 시민에게 생
활 예절과 한문, 서예 등의 무료 전통 문화 강좌를 강론하고 있다. 유랑자가 지지난해 광주 광역시 여
행당시 광주 향교에서나 들어봤음 직한 창문 넘머로 유생들의 글 읽는 낭낭한 목소리를 이곳 남원 향
교에서도 들을수 있다니 실로 대단한 향교가 아닐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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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1.000년의 남원 다운 역사를 지향하는 향교임을 입증하는 대목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전
국적으로 유례가 드문 남원향교만의 자랑이요, 자존심이자 특징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영호남을 잇
는 길목에 있는 남원향교가 동.서재와 별도로 왜 사마재라는 숙소를 갖고 있는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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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에서 나오면 점심은 이곳에서 먹어보는것도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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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cafe.daum.net/b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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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향교길 43
지번:향교동 512
연락처:063-633-7304 대표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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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원 향교 잘보고갑니다
감사 합니다.
그냥 향교하면 교육기관
이라고만 생각 하실줄 모르겠지만
남원의 역사가 깃든 곳이랍니다.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신축년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
아울러 님의 건강을 기원 합니다.
남원 향교는 제가 어릴때 공부하던 향교이고 옆에는 남원남고 남원중학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 향교에서 공부를 하신 분이신군요.
남원 향교를 가 보고서 전 진강루를 보고 깜짝 올랐습니다.
그 위세가 지금까지 전국의 수십군데의 향교를 가 보았습니다만
진강루처럼 당당한 외삼문을 본적이 없어서요.
암튼 남원향교 대단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