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포럼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1월 25일 상영작 <바람불어 좋은 날>(1980).
아주 오래 전, TV에서 우연히 중간부터 본 후 좋아했었다.
비디오 테이프를 구하기가 어려워 맘 속 한 켠에만 담아 두고 있었는데
훌륭한 기회가 생겨 필름 상영으로 처음부터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다시 보니 초호화 캐스팅 영화였다. 안성기, 유지인은 물론이고 지금도 활동중인 중견 배우들, 최불암, 김희라, 김보연, 박원숙, 김영애, 김인문, 임예진 등. 당시에는 모두 평범한 배우였기 때문에 한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것인지, 제작 단계에서 캐스팅에 특히 신경을 쓴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이런 배우들이 다시 모여 영화를 찍을 일은 다다음 생애에도 없으리라는 점 한 가지는 확실하다.
유지인, 김보연, 임예진의 미모는 요새 한 미모 한다는 젊은 여자 배우들 뺨친다. "짜장면 시켰니?"라는 길이 남을 명대사를 남긴 부잣집 여인 유지인씨는 말할 것도 없고, 근래 <형사>에서도 '뇌살적' 매력을 보여준 이발소 직원 김보연 누님도 몹시 섹시하다. 특히 요새 TV에서 깨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임예진 아줌마는 초절정 순수+귀염+지지리 궁상 그 자체다. 갓 스물이나 넘었을까. 오빠(이영호)를 찾아 서울로 상경해 몰래 구로공단에 취직한 억척스런 경상도 소녀. <진짜진짜 잊지마>, <진짜진짜 미안해> 시리즈에서 보던 부잣집 딸내미 이미지를 확 뒤엎는다.
한국 영화사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위상은 널리 알려졌다시피 높다. 80년대의 페르소나 안성기의 본격 성인 데뷔작(개봉 당시 이 영화 카피는 "성기 완전 노출 영화"였다고 한다. 아역으로 이미지가 각인된 안성기가 성인으로서 완전히 노출시켰기 때문이라나..)으로서도. 이후 <바보선언>으로 이어게 되는 이장호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의 발현작으로서도.
이 영화도 나름대로 당시 주류 시스템에서 주류 스탭과 주류 배우를 데리고 만든 건데. 요새 주류 시스템에서 주류 스탭과 주류 배우를 데리고 만든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신선함과 진중함이 있다. 낡았지만 새로운 비틀즈의 노래처럼. 때깔 좋고 완성도 높은 요즘 웬만한 영화와 계급장 떼고 붙어도 절대 밀리지 않을 신선도다. 또한 별 볼 일 없는 세 청년과 주변 서민들의 일상을 때론 코믹하게 때론 슬프게 다루는 통속적인 이야기이지만, 바탕에는 이 나라의 급조된 근대성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짙게 깔려 있다.
덕배(안성기), 춘식(이영호), 길남(故 김성찬)
주연배우 이영호, 안성기 씨, 관객과의 대화.
세월이 흐르고 젊던 배우들의 얼굴에도 주름이..
몇 년 전 말라리아 감염으로 별세한 김성찬 씨는 함께 자리하지 못했다.
이장호 감독의 동생이기도 한 이영호 씨는 70년대 말 당대의 꽃미남 스타였다. 우리 세대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영호 씨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많이 오갔다. 그는 이장호 감독이 그의 대학 등록금으로 <별들의 고향> 판권을 사버리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못한 아픔이 있었다. 그래서 이장호 감독이 미안함 때문에 자신의 영화에 캐스팅을 하면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훗날 영화를 제대로 공부해보고자 NYU에서 수학했으나 도중 불의의 질병으로 실명을 하면서 꿈을 접게 됐다. 이영호 씨는 달변으로 시종 좌중을 휘어잡아 많은 젊은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멋있는 아저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