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朴寅煥) 시인
1926년 8월 15일 ~ 1956년 3월 20일
강원도 인제출생 1946년 '국제신보' 등단
학력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력 : 1952년 대한해운공사 입사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읊은 후기 모더니즘의 기수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광선(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939년 서울 덕수초등학교를 마쳤다. 이어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했다. 서울로 와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여러 시인들과 사귀었고, 서점을 그만두고는 〈자유신문〉·〈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하고 피난지 부산에서 김규동·이봉래 등과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5년 대한해운공사에서 일하면서 미국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심장마비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발표해 문단에 나온 뒤 〈남풍〉(신천지, 1947. 7)·〈지하실〉(민성, 1948. 3) 등을 발표하고, 1949년 김수영·김경린·양병식 등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합동 시집을 펴냈다. 모더니즘 시를 지향했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 〈검은 강〉·〈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했는데, 이들 시는 8·15해방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황폐함을 겪으면서 느꼈던 도시문명의 불안과 시대의 고뇌를 감성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특히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되는 〈목마와 숙녀〉는 그의 시의 특색을 잘 보여주면서도 참신하고 감각적 면모와 지적 절제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1955년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생전에 〈박인환 시선집〉(1955)이 나왔고, 이어 〈목마와 숙녀〉(1976) 등이 발행되었다. 죽기 1주일 전에 지었다는 〈세월이 가면〉은 뒤에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고 있다.
-----------------------------------------------------------------------------------
박용래
(1925~ 1980)
충남 논산 강경읍 출생. 1943년 강경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은행 취직.
해방후 1946년에 호서중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1973년고혈압 때문에 사임하기까지 교사로 일했다.
1980년 7월에 교통사고로 3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가, 그해 11월 21일 오후 1시,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별세했다. 충남문인협회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고, 대전 보문산 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눈물을 하도 많이 흘려서 평소 시인과 가까이 지내던 소설가 이문구는 시전집《먼 바다》에 실린
〈박용래 약전〉에서 시인을 '눈물의 시인', '정한의 시인'이라고 명했다.
[평가]
최동호는 박용래의 서정시가 김소월, 김영랑, 박목월로 이어지는 서정시의 계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을 끝없이 소거시켰다는 점, 그리고 정지용,김광균의 모더니즘적 기법도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시작법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면을 갖고 있는 서정시인이라고 평가했다.
최승호는 박용래가 근대에의 거부를 통해 궁핍의 미학과 제유의 수사학을 시작 방법으로 썼음을 밝히며 그런 염결의식으로 자존심을 지키고 근대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것이 하나의 위대한 거부이자, 예술적 승리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것이 미약한 대안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제유의 수사학으로는 근대의 폭력에 적극적으로 맞설 수가 없으므로 뒷 시대인 1970년대의 민중적 서정시가 지니는 은유의 수사학에 길을 비켜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계를 명확히 밝혔다.
박용래 문학상은
1999년, 시인 박용래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대전일보》가 제정한 문학상이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는 주최측 사정 때문에 시행되지 않았고, 2005년 7회 수상자를 낸 이후에
다시 시행되지 않고 있다.
수상년도 |
수상작 |
저자 |
1999년 1회 |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
허만하 |
2000년 2회 |
《슬픔에 손목 잡혀》 |
나태주 |
2001년 3회 |
《봄 파르티잔》 |
서정춘 |
2005년 7회 |
《말랑말랑한 힘》 함민복 |
|
----------------------------------------------------------------------
조태일(趙泰一)
1941. 9. 30 ~1999. 9. 7
시인·교육자. 곡성 태안사 출생. 죽형(竹兄)
1970년대 유신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시를 발표하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러 '저항시인'으로 불렸다.
1962년 광주고등학교, 1966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들어 만학의 길에 나서 경희대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학위(1985), '김현승 연구'로 박사학위(1991)를 받았다.
196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며 1964년에는 시 〈아침선박〉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69년 월간 시 전문지 〈시인〉을 창간해 김지하·양성우·김준태 등을 등단시켰다.
그러나 〈시인〉은 창간 1년여 만에 당국의 압력으로 폐간되었다. 1974년에는 고은·백낙청 및 신경림·염무웅·박태순·황석영·조해일 등과 함께 민족문학운동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을 주도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87년 9월 17일 창립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모체가 되었다. 1974~89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간사, 1994~98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부회장, 1998년 이후로는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교육자로서도 역량을 발휘해 1989년 이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1994~99년 예술대학장을 역임했다.1999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주에 밥을 말아 먹는 시인'으로 불릴 만큼 술을 즐겼던 그는 호탕한 성격만큼이나 남성적이고 힘있는 시를 남겼다. 등단 이후 시집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연가〉(1985), 〈자유가 시인더러〉(1987), 〈산속에서 꽃속에서〉(1991) 등을 펴냈는데, 특히 〈국토〉는 민족주의와 민중의식을 고취시키는 작품을 실어 1970년대말~80년대초 판매 금지되는 수난을 겪었다.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1995)로 제10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남성적인 시 세계는 8번째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1999)에서 어린시절의 자연과 그 속에 깃들인 어머니의 기억, 동심 등을 반복해서 노래해 변화한 면모를 보여주어 주목을 받았다. 그밖의 저서로 〈시 창작을 위한 시론〉(1994), 〈시인은 밤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1995), 〈알기 쉬운 시 창작 강의〉(1999), 〈김현승 시정신 연구〉(1998) 등이 있다.
1991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2년 편운문학상, 1993년 성옥문화상, 1995년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사후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평가]
이승하는 1970년대의 한국 시문학사를 정리하면서 〈산업화시대 시의 모색과 발전〉이라는 제목 아래, 사회의식을 토로하는 현실 참여의 시를 중요한 흐름으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조태일이 이성부와
더불어 남성적인 톤으로 치열한 사회의식과 국토에 대한 끈질긴 애착을 표출한 시인이라고 평했다. 비록 운문적 감수성보다 끈질긴 저항의지를 취하여 산문적이라 세련미를 찾기 어려운 시를 쓰기도 했지만 독재라는 상황의 벽에 대항한 줄기찬 부정의 정신이나 국토를 이루고 있는 만물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는 이 시대 민중시의 한 모범으로 삼아도 좋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