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속정신과 저항정신
나이답지 않게 나는 진보파다. 그것도 골수 진보에 속한다.
전두환 정권시절 일억 불 수출탑상을 받은바 있는, 나하고 네 살 터울인 작은형님은 보수파 중에서도 수구골통보수에 속한다. 그 상을 받을 때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같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기념촬영한 사진을 마치 가보와 같이 집안에서 제일 좋은 위치에 걸어 두고 오가는 사람이 잘 볼 수 있게 걸어 놓았다. 그래서 나와 열두 살 터울인 큰형님과 내가 합동으로 저 사진좀 치우라며 주걱턱사모님의 흉을 보노라면 사진으로 보기엔 그렇게 보여도 실물은 무척 예쁠 뿐만 아니라 귀염상도 있다며 작은형수의 눈총에 아랑곳 않고 주걱턱 옹호에 열 올리곤 했다. 지금은 작은형님과 나는 서울과 대구에 각각 떨어져 살고 가는 세월 따라 어머니,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게다가 부모님 돌아가신 후 우리집안의 지주 역활을 해 오셨던 큰형님마저 작년가을 돌아가신 관계로 작은형님과 빈번하게 만나지는 못하지만 가을철 추석과 봄철 한식 때는 분당 근처에 있는 산소로 성묘를 가서 만나면 퇴주술에 권커니 자커니하고 그러다보면 결국엔 정치 이야기로 비약 돼게 마련인지라 묘 앞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곤 한다. 어려서부터 싸움도 많이 하며 자란 덕인지 우리 둘은 유별나게 우의가 두터워서, 몇 년 전 솔잎을 먹어야하는 내가 어쩌다 떡갈나뭇닢을 잘못 먹어 가산을 탕진하고 깊은 실의에 빠져 허우적 거리다 주변상황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절박하여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의 심정을 제일 먼저 간파한 것도 그 형이었고 무조건적이고 무한대적으로 나를 도와준 것도 그 형이었다. 그렇지만 우의는 우의이고 논쟁은 논쟁이라 이때만은 어찌하면 상대를 더 약 올릴 수 있을까 해서 모든 상식과 지혜를 동원하며 때론 맘에 없는 소리로 결정타를 먹여보려고 기를 쓰곤 하지만 여기에 악의는 추호도 없음은 물론이다. 옆에서 듣고 있는 조카와 형수들, 그리고 우리 마누라와 애들은 내가 말하면 내편이고, 형이 말하면 형 말이 맞는가보다 할 뿐이지 어느 누구의 편을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논쟁을 마치 코미디 보듯이 웃으며 즐거워한다. 그래서 항상 무승부로 끝난다.
그동안 내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노짱께서 경재를 엉망으로 만든 관계로 지난 5년 동안 내가 다소 수세에 몰렸었지만, 이번 추석 성묘 때는 확연한 역전이 예상 된다. '부패가 굶는 것 보다는 났다.'는 정말로 해괴망칙하여 행여 외국인들 귀에 들어갈까 망신스러운 기치를 들고 정권장악에 성공한자들에 의해서 돌아가는 지금의 나라 꼬라지를 보아서도 국민 거의 모두가 다 나의 편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구골통 우리형님은 나의 유리한 전세를 방어할 어떤 방안이 있을까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 나는 물론이고, 대학에 다니고 있는 나의 두 딸놈들 까지도 무척 기대 되는가 보다.
이 글을 쓰고자 하는 진정한 이유는, 지금까지의 지극히 개인적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언제부터 그리고 왜 유신이니 군사독재니 혹은 그들과 야합한 당시 우리나라의 굵직한 야당인물들 까지도 함께 싸잡아서 싫어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학창시절에는 한일문제가 사회적 최대 이슈였고 그에 따라서 학원 내에서도 그것이 최대 이슈였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자들이 그들의 불법행위를 위장하고 국민을 달랠 수 있으며 나아가 정당성을 인정받기 가장 좋은 방법이란 것이 예나 지금이나 하기 좋은 말이 경제재건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본이 필요했고 그것을 조달하기 가장 쉬운 곳이 일본이었다. 대일청구권이란 것이 쉽게 말하자면 삼십 년간 우리를 수탈해간 대가를 지불하란 대의명분이었지만 내용을 보면 지금의 쇠고기협상 보다 더 속 뒤집어지는 것이 많았다. 징용, 징병, 위안부, 학도병들이 흘린 피의 대가와 35년간 수탈해간 우리의 국가적 민족적 보물들의 포기 그리고 평화선의 포기와 12해리 전관수역으로 그들의 발전된 기선저인망으로 우리의 바닷속을 싹쓰리해가는 대가로 받은 것이 3억불이었다. 5억불이 더 있기는 했지만 그건 정부차관과 상업차관이었다. 아시다시피 차관이란 이자 내 가면서 갚아야할 돈이다.
그런데 다른 동남아 국가들도 당시 일본으로부터 그 정도의 돈을 받았는데 그들은 우리의 그것과 같이 포기협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독립축하금이란 명목으로 받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것과 우리의 그것은 비교의 대상조차도 못되는 굴욕이었다.
하여간 그래서 학창시절 당시의 야당 최고 인사였던 박순천여사와 윤보선 전 대통령 등과 함께 신촌일대와 서울역광장 혹은 광화문네거리로 머리띠 두르고 나섰지만 솔직히 말해서 국가적 사명감이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재미있어서 했고 친구들에게 말빨 밀리기 싫어서 했으며 어쩌다 조금이라도 부상당하면 여학생들로부터 치료 받는 것이 좋아서 했다. 그 정도로 적극성이 없던 데모였지만, 국가니 민족이니 이런 쓰잘때기 없는 것 보다는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막내아들의 안위가 더 걱정이셨던 우리 어머니랑 아버지가 아시면 큰 날벼락이 떨어질 것을 각오한 내 나름대로는 큰일이었음은 물론이다. 한번은 곤봉으로 팔꿈치를 맞았는데 어찌나 아팠던지 눈물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요즘 티브이로 촛불시위현장을 보노라면 방패의 날로 머리를 내리 찍히는 장면을 볼 때 나도 오금이 저려오는 듯 한 고통을 느낀다. 아~ 내가 어떤 계기로 인해서 보수파를 싫어하는가를 얘기하려다 자꾸 다른 길로 들어서네.
유신정권 때이다. 술 먹다가도 이상한 이야기하면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흠신 나게 두드려 맞고 나왔고 게다가 빨갱이로 몰려서 직장도 하루아침에 잘려 나갈 때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공포정치였지만 한두해 해보는 장사도 아니었기에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일상적 평범한 일이 되어버렸고 우리 국민 모두가 무관심 속에서 거기에 길들여져 갔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유신을 하던 독재를 하던 나에게 직접적 피해만 없으면 그만이고 내 배만 채워주면 그만이었다. 명동성당에 모여서 타도유신을 외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정권야욕이 있어서 하는 것이고, 어차피 정치와 상관없는 나로서는 강 건너 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이런 무책임한 사상관을 완전히 뒤바꿔주는 사건이 있었다.
대구백화점 옆에 금강재화점이 있었는데 마침 구두가 다 되어 구두 한 켤레를 사러갔다. 그런데 가격표를 보니 그 당시 내 월급의 반 정도의 비싼 가격이었다. 우리 마누라와는 달리 지금이나 그때나 비싼 것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 비싼 가격표를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고 나 혼자서 하는 탄식의 소리로 ‘원 세상이 어찌 되려고 구두 한 켤레 값이 이리도 비싸담’하고 중얼거렸는데 옆에서 손님인 나를 써빙 하던, 아직 군에도 안 갔을 법한 종업원 놈이 이 소리를 듣고 대뜸 한다는 소리가 ‘비싸면 안사면 되지 왜 세상 탓을 합니까? 경찰에 신고할까요?’한다. 이 소리 한마디에 나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신고? 신고해 봐라 이새끼야!’하고 소리치고 주먹으로 아구통을 한대 먹여 싶었지만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서 나오는 나의 뒤통수에는 그놈의 야유와 비웃음 소리만 울렸을 뿐이었다.
아직도 내 뇌리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때를 생각하면 분해서 치가 떨린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아무와도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싫었다. 살아남기 위하여 비굴해야만 했던 내가 제일 싫었다. 초등학교 육 학년 때 학급 반장이었던 나를 뚜렷한 이유도 없이 슬리퍼로 그 어린 나의 뺨을 무수히 때렸던 그 담임선생으로 부터도 어른들의 도움 없이 순전히 나의 힘으로 그의 사과를 받아 내었던 당찬 나였다. 그런 내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구둣방의 종업원 놈의 놀림감이 되었다는 것에 거의 미칠 것만 같았다. 몇날 며칠을 생각한 끝에 얻은 결론은 공포정치를 할 수 밖에 없는 독재자에 의한 통치는 안된다였다. 굶어 죽어 자빠질 망정 할 말을 하면서 사는 세상이 배부른 돼지들의 삶보다는 백번 났다는 결론이었다. 나에게 직접적 피해가 없다고 비틀린 세상을 방관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그 치욕적 사건이 크나큰 전환점이 되는 계기였다. 그래도 다니던 회사를 잘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나의 비굴함은 계속 되었던 것 같았지만 그것은 생계형 비굴함이라 표면적이었고 내부적으로는 때를 만나기만을 호시탐탐 기다리며 부글거리는 가슴을 억제하고 있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입후보한 수많은 후보중 어느놈을 찍는다 해도 결국에는 장충체육관에 가서 유일후보인 박정희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 뻔한 그 선거는 단 한번도 투표해 본 적이 없었다. 투표율 높이려고 아흔이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산간벽지에서 모셔오고 외딴 섬에까지 찾아가 악착 같이 참여를 유도했으며 투표율이 그지역 공무원들 능력의 척도로 삼아 백프로의 투표율을 자랑으로 여겼고 그것을 방송국마다 지역별 넷트워크로 연결하여 앞다투어 방영했던 그 암흑기에도 나는 단 한번도 투표하지 않았다.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백년간의 세도를 약속 받았을 것 같던 그가 그토록 신임하던 부하의 총탄에 재거 됐어도 할말 못하는 세상은 한동안 계속 되었고 기다리던 세상이 오니 나는 이미 늙은 고목이 되어 있었다.
내가 수입쇠고기를 먹어서 만에 하나 광우병에 걸린다 해도 잠복기가 길어서 삼베옷 한 벌 얻어 입고 한 평 땅속에 묻힌 연후에나 발병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한우 값이 너무 비싸고 그에 따라 호주산도 덩달아 비싸서 축산업과 전혀 상관없는 나로선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와서 가격 부담 없이 먹었으면 하는 바람도 한켠 없지 않은 바이다. 다만 지난 몇 년 동안 애써서 세워 놓은 미국에 대한 자존심을 송두리체 내어주는 현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촛불행사를 강행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여기에 보수진영이라면서 상이용사들이 왜 나오느냐 이것이 큰 문제다. 그 옛날 혐오스런 그자들이 상용수법으로 사용한 것이 상이용사 아니었던가. 그 당시의 망령들이 되 살아나는 것을 보니 확실히 현 정부가 보수는 보수인가보다. 이번 촛불행사만해도 처음의 순수함이 변색 되었다는 여론으로 시들해졌었다. 그때 그냥 다수여론의 힘으로 소멸 되기를 기다렸으면 조용히 끝날 문제였다. 그러나 돌대가리들의 특별한 발상이 튀어 나왔다. 소멸 되어가는 촛불임에도 아직까지도 촛불을 끄지 않은 사람들을 골수분자로 분류했고 여론이 유리한 이 마당에 기회다 싶어 '타도 골수분자'를 외치며 뿌리를 뽑겠다는 생각과 그동안의 고생을 앙가품 하려고 과격진압에 나섰던 것이다. 그것이 돌대가리다. 따지고 보면 정권야욕에 눈이 멀었다하더라도 해야 할 것과 못할 것이 있는 법인데 그래 그토록 할 짓이 없어서 군부정권과 야합했던 그들 자체가 돌대가리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군 시절 한번 탈영한 사람은 계속 탈영한다. 그것이 인내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100m를 10초도 못되어 주파하는 사람이 있고 16초에도 겨우 통과하는 사람이 있듯이 사람마다 다 똑 같을 수는 없다. 그것을 획일적인 군 생활에 잡아 가두니 인내가 짧은 녀석은 탈영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개조하려면 뼈를 깎는 듯 한 내부적 고통의 노력이 있어야하든가 아니면 심장이 멎는 듯 한 외부적 충격요법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고칠 수가 없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것을 어쩌겠는가? 현실 적응을 재바르게 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적응을 잘하고, 구속받기 싫어하고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어딜 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라고 내 몰리는 사람을 정말로 빨갱이나라에 가서 살게 하면 더 큰 빨갱이가 될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빨갱이들의 모순점이 발견 되는 순간에 저항할 것이고 그 순간부터 파랭이로 바뀐다. 역으로 파랭이나라에서 파랭이를 빨갱이나라로 보내면 빨갱이들과 저항하며 싸울까? 천만에다 그는 곧바로 빨갱이로 동화 되서 파랭이를 죽이려 든다. 어쩔 수 없다 유전인자가 그렇게 태어난 것을 어쩌란 말인가? 일제에 적극 가담하여 순응하며 호강한자들은 어떤 세상에서도 그렇게 살고 그의 유전인자를 전해 받은 자손들도 큰 나무에 빌붙어서 물질적으로 호강하며 그렇게 산다. 일제에 저항하며 독립을 외친사람들은 어딜 가도 불의에 저항할 것이고 그 유전인자를 계승한 자손들도 역시 독재에 항거하며 싸운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비열한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한 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언론장악이고 경찰의 최대한 활용이다. 그런 비열한 정권 속에서 아부하고 협력하며 살아온 자들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궁리를 하여도 배운 것이 도둑질이니 어쩌겠나? 그릇의 크기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지금의 세태를 보노라니 마치 군사정부시절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 당시의 그 인물들이 다시 해쳐모여서 현 정부를 좌지우지하더라도 그때의 그 돌대가리 머리로 국정을 본다면 반만 년 역사의 우리 민족의 앞날에 큰일 중에 큰일이다. 그들이 뼈를 깎는 내부적 노력이 없다면 다른 한 가지 수단인 심장이 멎을 만큼의 외부적 충경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중 바람직 한 것은 전자의 것임은 아무리 돌머리라 할지라도 알 수 있는 바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떠들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서 그러하셨듯이 나 역시 우리 딸들은 촛불에 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것도 그분들의 유전인자를 계승 받았기 때문인가 모르겠다. 작은 딸은 대구에서 학교를 다녀서 다행인데 혹시 큰딸이 다니는 학교 근처인 동숭동 대학로에서 촛불행사가 있지나 않는지 걱정이 태산이라 매일 전화해 안부를 묻곤한다. ‘애야 아빠가 맞아 보아서 아는데 그 경찰 곤봉으로 맞으면 무지무지하게 아프단다. 넌 절대로 촛불에 나가지 말거라.’란 나의 말에 ‘거기에 가란 말씀 같이 들리는데요’라는 딸애의 대답에 가슴이 철렁거린다. 애비를 다 닮아도 좋은데 그 저항정신만은 닮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어본다. 내 자식들 만은 독립군이 되지 말거라 자손대대로 빌어먹는다. -끝-
첫댓글 며칠 전, 통근차 안에서 이런 전화 내용을 들은 적 있습니다. (야, 너 촛불집회에 가 있는 거 아니지? 공무원 시험에 불이익 당할 수 있으니까 절대로 가지마라!) 공무원 시험대비로 고시촌에 들어가 있는 아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득수님 말이 맞습니다. 그냥...현실은 나 죽었소. 가 편하지요. 절대적인 야당 외삼촌 때문에 우린 너무 잘 알거든요. 너무 강하니 부러지더라구요...^^
Clean Area님 늘 경려해 주셔서 감사함니다. 님의 카페(//cafe.daum.net/batterybox)에 들려 마음의 정화를 자주 해야함에도 먹고 살기 바빠 자주 들리지 못함을 용서하서소.
특별한 분야에 특출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인정 받아선 안되고, 義를 중시하는 사람도 인정 받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만...세상은 역시 세상이군요..
지기 싫은데 한계를 느껴 너무나 어이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