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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성삼문
五峰 추천 0 조회 93 16.12.15 23: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번맺은 인연은  영원하라

 

성삼문


오늘 목마르지 않다 하여...
우물에 돌을 던지지 마라
오늘 필요하지 않다 하여
친구를 팔꿈치로 떠밀지 마라

한번 맺은 인연은....
소중히 간직하여 오래도록
필요한 사람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다.

내가 등을 돌리면
상대방은 마음을 돌려 버리고
내가 은혜를 져버리면
상대방은 관심을 져버리며
내가 배신하면....
상대방은 아예 무시하는
태도로 맞서 버린다.

만남의 인연은 소중하게

만남은 소중해야 하고
인연은 아름다워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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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개설]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 개성유후(開城留后)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달생(成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는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하였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했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와 1446년 9월 29일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고는 그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 그가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후 아버지 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兪應孚)·허조(許?)·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는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 회의를 열고 그의 아버지 승과 유응부·박쟁(朴?) 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와 윤사로(尹師路)·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를, 병조정랑 윤영손(尹鈴孫)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질(金?)에게는 그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어 거사는 일단 중지되었다. 이에 거사는 세조가 친히 거둥하는 관가(觀稼: 임금이 봄에 권농하기 위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던 행사) 때로 미루어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 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姜希顔)을 변호해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 달 8일 아버지 승과 이개·하위지(河緯地)·박중림·김문기(金文起)·유응부·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다. 그 때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해 혈손이 끊겼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그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節臣 : 절개를 지킨 신하)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특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그의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에서 대의를 위해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의를 기록, 후세에 전하였다.

[상훈과 추모]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 있다.

장릉(莊陵: 端宗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홍주성선생유허비(洪州成先生遺墟碑)」와 「연산성선생유허비(連山成先生遺墟碑)」가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 『매죽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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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의 절명시(絶命詩)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북은 울려 이 내 명을 재촉하는데

 

회수일욕사(回首日欲斜)

머리돌려 바라보니 해는 서산에 걸렸어라

 

황천무일점(黃天無一店)

황천 길에 주막집 하나 없다 하거늘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자고 갈거나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 실패하여 처형당한 사육신의 한 명인 성삼문이

형장으로 가는 수레에 실릴때 남긴 절명시(絶命詩)다.

 

조선 제일의 충의(忠義)를 지킨 인물,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목숨을 바쳐 신하

의리를 지킨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한번 옳다고 여긴 신념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키려고 했던 산봉우리의 낙락장송(落落長松) 성삼문. 그의 곧고 맑은 지조야말로 조선 선비들의 의리 정신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닐 수 없다.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 노은동(현재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이며, 매화나 대나무와 같은 강직한 군자의 기질을 흠모하여 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다. 본관은 창녕이며, 부친은 도총관을 지낸 성승(成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의 딸이다. 그가 태어난 홍주 노은동은 고려 말의 명장이었던 최영 장군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영웅이 탄생할 때 흔히 갖춰지는 탄생설화가 있듯이 성삼문도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 하는 세 번의 소리가 있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이름인 ‘삼문(三問)’의 유래이기도 한데, 문헌으로 전하는 내용은 아니고 구전 설화에 가깝다.

성삼문은 1435년 18살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3년 뒤인 21살 때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었다. 안평대군을 통해 그의 학문과 인품 됨됨이를 전해 들은 세종이 직접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다. 이때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발탁된 인물은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이석형(李石亨) 등이다. 성삼문은 이들과 함께 집현전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수찬(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관직이 올라갔다.

5살 때에는 박팽년, 신숙주, 이개,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 휴가를 받아 독서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이를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는데, 집현전 학사들에게 준 특별한 혜택이었다. 집현전 시절 성삼문은 세종의 명을 받고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1443년(세종 25)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과 더불어 성삼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성삼문은 1445년(세종 27) 신숙주와 함께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학자 황찬(黃瓚)으로부터 음운학을 배워왔다. 1447년 그의 나이 30살 때에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강희안 등과 함께 한국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는데, 수차례에 걸친 요동방문의 결과물이었다. 안평대군과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 간의 교류 또한 유명한데, 성삼문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안평대군의 정원에 있는 진풍경을 시제로 하여 <비해당 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과 그 서문을 짓기도 했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성삼문은 성리학적 정치윤리에 충실하여 어린 임금을 보필하였다. 그러나 1453년(단종 원년) 왕위를 탐내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아울러 집현전 신하들에게는 정난공신의 칭호를 내려 주었다. 공신의 칭호를 성삼문은 부끄럽게 여기고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수양대군이 정치적 야심을 키우는 사이 성삼문은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 자리에 올라 단종을 가까이서 보필하였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다시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단종은 위협에 못 이겨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는 임무는 예방승지로 있었던 성삼문이 맡았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은 옥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세조가 울고 있는 그를 한참 동안이나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의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년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오른팔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본말 중에서)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단종 복위계획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김질을 통해 진상을 파악한 세조는 성삼문을 불러들여 결박하였다. 성삼문의 뒤를 이어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박정 등이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을 뿐이다.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나의 군주가 폐위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나으리가 평소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지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삼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대동야승] 중에서

성삼문의 말에 화가 난 세조는 “지난 번 옥새를 가져올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다그쳤다. 성삼문은 “때를 기다려 뒤를 기다렸을 뿐이다.”고 답했다

성삼문은 부당하게 폐위된 단종의 왕위를 다시 찾고자 했다.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는 단종의 신하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아니 하였는가? 녹을 먹고도 배반을 하였으므로 명분은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상왕께서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고 하십니까?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으니, 만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 가산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 (남효온, ?육신전? 중에서)

성삼문의 당찬 말에 화가 치민 세조는 쇠를 달구어 다리를 뚫게 하고 팔을 자르게 했다.

극심한 고문에도 성삼문은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다시 달구어 오게 하라.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독하다.”고 태연히 말할 뿐이었다.

성삼문은 세조, 즉 수양대군을 자신의 군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녹봉으로 받은 것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였으며, 세조를 향해 나으리라는 호칭으로 군신관계가 결코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에게 있어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불의한 인간이자 역모자일뿐이었다. 실제로도 그가 죽은 뒤에 가산을 빼앗아 보니 1455년 즉 세조 즉위년부터 받은 녹봉을 별도로 한 곳에 쌓아두고 ‘어느 달의 녹’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집안에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거적자리만 있을 뿐이었다고 전한다

성삼문이 한창 고문을 받고 있을 때 오랜 벗이자 동료였던 신숙주가 세조 옆에 있었다. 그를 본 성삼문이 노려보며 말했다

“옛날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세종의 능호)께서 원손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세월이 흐른 뒤에 너희들이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는 당부가 아직 귓전에 남았는데,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호통을 들은 세조는 신숙주를 피신시켰다. 성삼문은 거사를 앞두고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비록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좋은 벗이었지만, 세종의 당부를 잊었을 뿐 아니라 불의의 편에 선 신숙주의 처세는 신의를 져 버린 것이므로 성삼문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세조의 불의를 꾸짖고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을 향한 신하의 충성을 지킨 성삼문. 세조가 성삼문에게 함께 공모한 자를 물었을 때 그는 “박팽년 등과 우리 아버지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세조가 공모한 자를 재차 물으니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때 제학 강희안(姜希顔)이 관련되어 고문을 받고 있자, 성삼문이 “나으리가 선대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그는 이 사건을 모의하지 않았으니 남겨 두어서 쓰게 하시오. 이 사람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하여 강희안은 석방되었다 성삼문이 죽으러 나갈 때 좌우에 있던 옛 동료들을 돌아다 보며,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하라. 이 성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수레에 실릴 때 위와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당시 그에게는 대여섯 살쯤 되는 딸이 있었는데, 수레를 따르며 울며 뛰었다. 성삼문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라며 달랬다. 집안의 종이 울며 술을 올리자 몸을 굽혀서 마시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임이 주신 밥을 먹고 임 주신 옷을 입었으니

일평생 한 마음이 어길 줄 있었으랴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으니

현릉(顯陵)의 송백(松柏)이 꿈속에 아련하네

위의 시는 성승이 지은 시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모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하였다. 성삼문을 비롯하여 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을 당하였고, 뒤에 온 몸을 찢어서 죽이는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고, 그의 아들 5형제와 아우 삼고, 삼빙, 삼성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는 멸문지화를 겪었다. 가산은 몰수되고, 처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朴從愚)의 노비가 되었다. 후손으로는 딸 효옥 외에 박림경에게 시집간 맏딸과 유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 엄씨에게 시집간 딸 등이 유일하게 살아남았을 뿐이다.

성삼문은 흔히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와 비견되곤 한다. 정몽주는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이었다. 정몽주가 절개를 지키는 마음을 담은 단심가를 지었다면, 성삼문은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절의가(絶義歌) 한편을 남겼다.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 성삼문, <청구영언>

성삼문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서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에 발탁된 문신으로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에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죽음을 택한 절개를 기록에 남겼다

성삼문은 2백년이 지난 뒤인 숙종 때가 되어서야 역모의 혐의가 풀렸다. 사육신(死六臣)의 무덤이 수축(修築)되고 묘지 위에 사당을 세우게 되었고, 삭탈된 관직이 회복되었다. 또 영조 때에는 그에게 이조판서의 관직이 추증되었고, 충문의 시호가 주어졌다. 그의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에도 있다. 저서로 [매죽헌집(梅竹軒集)]이 있다.[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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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출생1418년
조선 충청남도 홍주 (현 홍성군)
사망1456년 6월 8일
조선 한성부
사인사형(거열형)
거주지조선 충청남도 홍주한성부
국적조선
별칭자는 근보, 눌옹, 호는 매죽헌
학력1447년 중시에 장원
직업문신, 유학자, 한글학자, 정치인
종교유교(성리학)
배우자신씨, 김씨
자녀맹첨, 맹평, 맹종, 헌, 택
부모성승 / 죽산 박씨
친척형제 삼빙, 삼고, 삼성, 조카 성한, 사돈 유자미, 유성원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그는 세종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회나 찾아가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를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생육신인 성담수, 성담년은 그와 6촌간이며 이기, 이행 등은 외종질이다. 그의 남계 친족은 모두 몰살당했고, 외손 박호의 후손, 외손 엄찬의 후손과 유자미[1]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의 후손만이 현전한다. 성종 때부터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숙종 때 가서 복권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추앙받게 된다. 충청남도 출신.


생애

1418년 성삼문은 충청남도 홍주(洪州, 현재의 홍성군) 홍북면 노은동(魯恩洞)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를 막 낳으려고 할 때에 공중에서 하늘이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으므로 하늘이 세번 물었다 하여 그의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형제인 삼빙, 삼고, 삼성이 있는데, 이 중 성삼빙은 성삼문의 형인지 동생인지 여부는 다소 불확실하다.[2]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 이후 관직에 올라 집현전의 학사의 한사람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이때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가 그의 과거 급제 동기생이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찬을 지냈다.

관료생활 초기, 그는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신숙주와 함께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했다.[3] 이 과정에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신숙주와 함께 13 차례나 요동에 다녀오기도 했다[3].

집현전 학사 시절

집현전과 훈민 정음

귀국 후 집현전수찬을 거쳐 직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한양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어 세종대왕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이개(李塏), 최항 등과 함께 참여했다. 가장 공이 컸는데 세종의 명으로 당시 성균관 주부로 재직 중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과 함께 마침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 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게 된다.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또한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는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학자들을 만나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와 이를 보고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1446년 안견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1447년 중시(重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관료 생활

1447년 경연시강관(侍講官), 사간원 우사간,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는데 참여하였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학문을 강론하였다.

세종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 성삼문과 박팽년·신숙주·최항·이개 등을 항상 대동하고 고문으로 삼았다.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 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3] 이후 예조 참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와 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세종은 병약한 세자(문종)도 오래살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을 불러서 어린 원손 홍위(후일의 단종)를 부탁한다는 유지를 여러 번 남겼다. 성삼문 역시 집현전 학사로 그의 유지를 받들게 되었다.

정치 활동

1453년(단종 1)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를 사살하고 집현전 여러 신하들에게 정난 공신(靖難功臣)에 책록한다.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36명과 함께 그를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直宿)한 공이 있다고 하여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성삼문은 수치로 여기고 혼자만이 연회를 베푸는데 참여하지 않았다.

1453년(단종 1년) 사간원좌사간, 1454년 집현전부제학,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1455년 여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단종의 양위 직후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양위로 즉위하자 그는 이를 찬탈로 규정했다. 왕위에 오르니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하였다. 성삼문은 "국새(國璽)는 옮겨졌지만 주상(主上)이 아직 계시고 우리가 있으니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며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후 받은 녹봉은 월별로 표시하여 취하지 않고 집 근처의 곡간에 별도로 쌓아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할 때 신숙주에게 참여를 요청하였지만 신숙주는 비현실적이라며 참여를 거절한다.

한편 신숙주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절친한 벗이었지만, 성삼문은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긴 하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4] 그러나 신숙주는 자신을 위협할 세력을 보낼 것을 미리 감지하고 은신해 있었다.

세조와의 갈등

수양대군의 집권과 권력 장악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양대군의 특별 배려로 그는 집현전의 다른 학사들과 함께 등용되고 그의 자문역할로서 배려를 받았지만 그는 수양대군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단종의 복위를 역설했고 집현전 학사들과 조정의 신하들 중 일부는 그의 결의에 동조했다.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이 복위운동에 나섰던 것은, 단종에 대해 충절을 지킨다는 유교적 명분이 있었지만, 그는 세조의 독단에 반대했고 관료지배체제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았기에 세조의 독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세조가 즉위 직후부터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조치를 취하자 집현전 출신 유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거사와 최후

단종 복위 운동[

단종 복위 운동은 그를 포함하여 집현전 출신 관료들과 그 주변 무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세조 부자를 죽이거나 거병을 하면 각지에서 호응할 계획도 세워놓았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朴仲林), 박팽년, 유응부, 권자신(權自愼), 금성대군, 이개, 유성원, 윤영손(尹鈴孫), 김질(金?)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세조의 반정에 반대하여 외부로 나가거나 사퇴한 전직 관료들과도 연락하였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명나라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 바로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기로 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기회로 삼아, 왕의 운검(雲劒, 큰 칼을 들고 왕을 시위하는 것)을 맡은 성승유응부로 하여금 세조와 의경세자 부자 및 그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누군가에 의해 한명회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사 당일 이들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본 한명회신숙주의 권고로 세자와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성삼문은 거사를 중지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에 갑자기 차질이 생기자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한 김질은 전부터 이를 알고 있던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권고와 회유로 이를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였다. 바로 성삼문은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의금부에 체포, 투옥되었다.

단종 복위 실패와 투옥

아버지 성승·박팽년 등과 같이 상왕(上王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에 착오가 생겨 세조의 직접 심문과 가혹한 고문 끝에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와 함께 군기시(軍器寺)(지금의 태평로 근처)에서 처형되었으니 이를 사육신이라 한다.

사형에 임하여 그는 죽기 전에 시 한수를 지었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굶주려 죽을진들 채미를 먹는 건가
비록에 부새엣것인들 그 뉘 땅에서 났다니

처음에 그들은 명(明)나라의 사신이 왔다가 돌아가는 송별연회 석상에서 세조를 죽이고 이어서 한명회·정인지·권남 등 일파를 없애버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연회 당일, 세조는 갑자기 자리가 좁으니 운검(雲劍)은 그만두라고 지시하였다. 이 운검은 임금이 정좌한 앞에 큰 칼을 들고 서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도총관으로 있던 성승(成勝: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가 운검으로 내정되어 그 자리에서 처치하기로 한 것이었다. 유응부는 그대로 하려고 주장하였으나 성삼문이 극구 말려서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에 같이 모의하던 김질이 성사가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사실을 밀고하니 그들은 체포되었다.

형문과 최후

6월 체포된 다음 날 달군 쇠로 다리의 살을 뚫고 팔을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를 배신자, 반역자라며 꾸짖고 고집을 꺾지 않는 기개를 보였다. 6월 8일 그는 성승,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박중림, 김문기, 박쟁(朴?) 등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이일로 인해 성삼문은 처형되고 성삼문의 일가는 멸족을 당했는데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을 비롯해 동생 성삼빙, 성삼고, 성삼성과 아들 성맹첨(孟瞻), 성맹년(孟年), 성맹종(孟終) 등 남자는 모조리 살해당해 혈손이 끊기고 조부 성달생의 묘는 훼손되었으며[5], 그의 아내와 딸은 박종우의 집 노비로 분배[6]되었고 다른 딸들은 관비가 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미 박씨와 엄씨 집으로 시집 간 두 딸만이 화를 모면하였다. 그 외에 그의 가까운 일족으로 당숙 성희 등은 유배되었다.

사후

거열형에 처해진 그의 시신은 조선 8도에 조리돌림되었고, 그의 시신과 그의 일가족의 시신 일부를 김시습 등이 수습하여 노량진에 매장하였다. 이 묘는 후에 누군가 비석을 세워 성씨지묘 라 하였다. 한편 팔도로 보내진 시신 중 한쪽 다리 부분은 충청남도 연산군 은진 양촌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에 안장되었다. 이후 비석이 없던 논산의 묘소는 숙종 때 가서 비석과 신도비가 세워지고 사당이 세워져 제향되었다.

또한 그의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그의 부모 묘소 근처에도 성삼문의 유품을 동리 선비들이 묻고 제사를 지내던 가묘가 전한다. 그의 유품을 모신 묘소 근처에는 1668년(현종 9년) 송시열의 문인이자 관찰사로 왔던 민유중이 추모표를 세우고, 뒤이어 숙종때 우암 송시열이 묘소의 실전을 막기 위해서 친필로 쓴 유허비가 세워졌다.[7]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혹형, 처형, 유배 등을 당했고 그 관련자 500여 명도 처형당했으며 부녀자들은 관비나 기생, 공신의 여종, 첩으로 분배되었다. 그 중 성삼문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형 성삼고(成三顧), 동생 성삼빙(成三聘), 성삼성(成三省)과 조카들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어 일가족은 몰살당하고 만다.

복권

성삼문은 대역죄인으로 처형을 당했으나 그의 충절을 기리는 움직임은 사림 집권후 계속되었다. 김종직, 조광조, 홍섬, 이이, 김집, 송시열 등이 그의 충절을 논했으며, 사육신의 복권 여론을 주청했으나 실패했다. 남효온(南孝溫)은 자신의 저서 〈추강집 秋江集〉에서 그를 비롯하여 단종복위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명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성종 때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복권 여론이 나타났다. 그 뒤 중종조광조 등 사림이 집권하면서 다시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기묘사화로 사림이 몰살당하면서 다시 수그러들었다. 이후 숙종 때 다시 노론 계열에 의해 복권 여론이 나타났다.

1691년(숙종 17년)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될 때 관작이 복구되었고, 노량진 사당에는 민절(愍節)이라는 사액을 내려졌다.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은 녹운서원(綠雲書院)이 되었다. 영조 조에 들어서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문(忠文)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노량진 민절서원, 의절사(義節祠),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홍주 노은서원, 논산의 사당,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 충곡서원(忠谷書院), 충청남도 공주의 동학사 숙모전(東鶴寺 肅慕殿) 등에 6신 및 단종 때의 순절신들과 함께 배향되었다.

현대

흥선대원군홍성군의 노은서원이 헐리자, 후일 홍성의 유림들은 위패를 근처에 묻고 노은단을 세워서 계속 제사하고 있다.

1910년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사육신은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져왔고 성삼문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받았다. 1960년대에 이르러 노량진의 사육신 묘소가 현창되었고, 1970년대에 와서는 충청남도 홍성군에 있는 본부인의 묘소와 아버지 성승과 생모의 묘소가 모두 성역화되었다.

논산군에 있는 시신 일부를 매장한 묘소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1호로 지정되었다.

저서

  • 《성근보집 (成謹甫集)》
  • 《매죽헌집 (梅竹軒集)》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성담수, 성종때의 학자 성담년 등은 그의 6촌 형제간이다. 아내 차산과 미혼의 딸 효옥은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석방 시점은 알 수 없으며[출처 필요] 차산(연안김씨)은 성삼문의 위패를 만들어서 제사지냈다 한다. 김씨부인이 죽은 후 성삼문의 제사는 장녀의 둘째 아들 박호가 승계했으나 후손이 없고, 임란에 인왕산에 성삼문과 그 외손 내외의 신주를 묻었는데 1672년 사태난 골짜기에서 신주 3위가 발견되어 송시열 등이 다시 묻지않고 홍주로 이봉하였다.

성삼문 일가가 처형당할 무렵 박임경에게 시집간 그의 장녀는 연좌되지 않았다. 둘째아들 맹년의 딸은 유성원의 일족인 서산공 유자미가 비밀리에 피신시켜 길러서 자신의 일곱째 며느리(柳輯 부인)로 삼았다 한다.

  • 조부 : 성달생(成達生)
  • 조모 : 풍양조씨(趙氏), 조운개(趙云价)의 딸
    • 아버지 : 성승(成勝, ? - 1456년)
    • 어머니 : 죽산박씨, 박첨의 딸
      • 형님 : 성삼빙(成三聘, ? - 1456년)
      • 형수 : 의정(義貞),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권개(權愷)의 노비가 되었다.[8]
      • 동생 : 성삼고(成三顧, ? - 1456년)
      • 제수 : 김씨(金氏[9], 한림(翰林) 김수손(金首孫)과 재혼하였다.), 이름은 사금(四今.[8])
      • 동생 : 성삼성(成三省, ? - 1456년)
      • 제수 : 명수(命守), 홍달손(洪達孫)의 노비가 되었다.[8]
    • 계모 : 미치(未致), 계림군(?林君) 이흥상(李興商)의 노비가 되었다.[8]
    • 서모 : 이름 미상
      • 이복 여동생 : 성금(性今), 신숙주(申叔舟)의 노비가 되었다.[10]
      • 이복 여동생 : 옥동(玉童), 박원형(朴元亨)의 노비가 되었다.[10]
      • 본처 : 신씨
      • 후처 : 연안김씨(延安金氏, 연안 김잉(仍)의 딸, 차산(次山, 박종우의 노속에서 성삼문 제사를 지냄.
        • 장남 : 성맹첨(成孟瞻, ? - 1456년)
        • 자부 : 현비(現非), 전균(田畇)의 노비가 되었다.[8]
        • 차남 : 성맹년(成孟年, ? - 1456년)
        • 삼남 : 성맹종(成孟終, ? - 1456년)
        • 장녀 : 효옥(사육신 처형 당시 미혼으로, 노비가 됨)
        • 차녀 : 성씨(成氏, 1439 ~ 1489)
        • 사위 : 박림경(朴臨卿 1436 ~ 1485)
        • 삼녀 : 성씨(成氏, ? ~ ?)
        • 사위 : 엄정구(嚴鼎耉)
      • 사돈 : 한명회(韓明澮)
      • 사돈 : 유자미(柳自湄, 사육신의 한사람인 유성원의 친척)



성삼문의 부인

조선왕조실록에 성삼문의 처로서 노비로 분배된 차산(김씨)은 1456년 9월 7일 딸 효옥과 함께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의 노비로 끌려갔고[11], 뒤에 석방되었으나 다시 성종 때인 1475년 5월 7일 딸 효옥과 함께 다시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12]

이후 차산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죽은 후 성삼문 신주는 외손 박호가로 갔으나 후손이 없어 인왕산에 묻혔다. 한편 성삼문의 부인 연안김씨의 묘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성승장군 묘 앞산에 있다. 뒤에 숙종송시열, 민유중 등이 성삼문 유허지를 정비할 때 연안김씨 부인의 묘소도 단장, 정비하였다. 1668년 송시열이 지은 성삼문유허비는 1744년 홍주목사 이기진의 청으로 윤봉구가 음기를 추가하여 비로소 늦게 큰 비석하나로 세워졌다.

약력

평가

긍정적 평가

후일 남효온사육신전 등을 통해 그는 충절, 절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를 절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시각은 중종조광조 일파가 집권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숙종 때의 송시열, 김수항 등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충절과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계속되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작가인 이광수단종애사 등은 널리 읽히는 소설이었고 이는 한국의 광복 이후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단종애사의 유행 역시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는데 '단종애사(端宗哀史)를 읽으며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훌쩍거린 적도 있다. 특히 ‘단종애사’는 어린 시절 깊은 감동과 함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단종애사를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다. 독자들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절의(節義)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반면 수양대군과 그의 추종자였던 신숙주(申叔舟)에 분노한다.[14]'는 것이다.

기타

집현전 학자로서 글씨를 잘 썼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세종에게 앞날을 축복받았고, 일찍 신숙주 등과 같이 정음청에서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여하였다. 그와 함께 단종 복위에 가담한 하위지는 당시 최만리, 정창손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후손으로는 딸 효옥, 박림경에게 시집간 딸과 류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 등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맏딸은 무안박씨 박림경에게 시집갔고 이후 성삼문의 제사는 둘째 외손자 박호에 의해 봉사되었다. 다른 딸 효옥은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둘째아들 성맹년의 어린 딸은 사육신의 다른 한사람이기도 한 유성원의 일족인 은사 유자미가 구출하여 몰래 먼 곳에서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 길렀으며 뒤에 자신의 며느리로 삼았다.

생육신성담수, 성담년은 그의 6촌 동생들로 아버지 성승의 사촌 형제인 성희의 아들들이었다.[15] 뒤에 성종 때 6촌 동생 성담년이 관직에 다시 출사하게 된다.

성삼문의 글

다음과 같은 시조가 전한다.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 성삼문, 《청구영언
영해당(詠海棠[16]

子固不能詩(자고불능시) / 그대는 본래 시를 짓지 못하나니
不能亦何傷(불능역하상) / 짓지 못하니 어찌 마음 아프겠는가
我愛柳中?(아애유중영) / 나는 유중영을 좋아하니
夜不喜薰香(야불희훈향) / 밤에도 향기를 기뻐하지 않노라
 
? 성삼문,

신숙주와의 비교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고, 성삼문은 이상이 중요한 것이고 남는 것은 대의라고 생각했다 성삼문의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갈 길을 갔다..현실이 중요하다고, 조카의 보험금을 삼촌이 가로채는 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과 바꿀려고 해서 바꾼것이 아니라 실패해서 바꾸어 진 것일 뿐이다. 올바른 현실을 위해서.잘못된 현실은 현실로 보지 않았다

신숙주와 달리 성삼문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학문적이며 유교적인 성향을 더 짙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경륜은 그리 중요할 것이 없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충군과 절의, 그리고 학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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