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서울아시안게임은 중국과 관련하여 획기적인 기록을 하나 세웠습니다.
무엇인지 짐작하시겠습니까?
6․25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숫자의 중국인들이 한국 땅을 밟았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중국은 미수교국가였습니다.
미수교국가일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적성국가’였습니다.
따라서 한국 국민이 중국을 방문하는 일도 거의 없었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83년 5월에 중국민항기 납치 사건이 발생해서 승객과 승무원 등 105명의 중국인이 한국땅을 밟은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돌발사건이었습니다.
중국의 선투(沈圖) 중국민항 총국장 일행이 서울에 와서 외무부 당국과 회담을 가졌는데, 신라호텔에서 회담이 진행될 때 관계당국에서는 승객 일행을 서울 시내의 여러 곳으로 안내했습니다.
그 때 방송기관에 재직하고 있던 저는 취재를 하기 위해 다른 기자들과 함께 중국인 일행을 쫓아 다녔는데 그들이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화곡동에 있었던 새마을운동본부를 비롯해서, 방산시장 등 여러 곳을 다녔는데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중국인들이 단체로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정식으로 입국한 것은 1986 서울아시안게임이 최초였는데 그때는 중국을 부르는 이름은 ‘중공’이어서 신문에서 1986 서울아시안게임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면 모두 ‘중공’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86 서울아시안게임에 중국은 20개 종목에 520명의 선수가 참가했습니다.
임원과 보도진, 관계인원들을 포함하면 훨씬 많은 인원이 서울 땅을 밟은 것입니다.
종합성적 1위는 당연히(?) 중국이었습니다.
중국 선수가 메달을 딸 때마다 오성홍기가 게양되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묘한 감정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갖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아시안게임의 종합우승국을 살펴보면 1951년의 제1회 뉴델리대회에서 1978년의 제8회 방콕대회까지는 일본이 계속해서 종합우승을 했고, 그 이후는 중국이 도맡아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종합우승이 중국으로 정해져 있다시피하기 때문에 아시안게임이 재미가 적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한국은 2위, 3위를 들락이다가 1998년 제13회 방콕대회부터는 부동의 2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선교현장에서 ‘그들’을 최초로 대면하다
1986 서울아시안게임은 중국선교와 관련해서도 기억할만한 기록을 하나 세웠습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중국인들을 선교현장에서 직접 대면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올림픽의 선수촌 안에는 다른 시설들과 함께 종교관이 반드시 설치되게 되어 있습니다.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아시아선수촌아파트가 바로 1986서울아시안게임의 선수촌이었고, 그 안에 있는 아주초등학교 건물이 종교관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개신교관의 운영요원(채플린) 가운데 하나였는데 개신교관 운영요원들이 궁금하게 여겼던 것 가운데 하나가 ‘중공 선수들이 개신교관에 올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은 비관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오기 어려울 것이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왔습니다!
그때 개신교관에서는 ‘멀티 슬라이드’를 자주 상영했습니다.
12개의 스크린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인데 그때는 퍽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중공선수단은 처음에는 이것을 상영하는 시간에 맞춰 몇 명씩 왔습니다.
와서는 ‘우리는 슬라이드를 보러 왔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은 다른데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이 예배에도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설교를 맡은 분이 펑크를 내서 제가 땜질설교를 했습니다.
갑자기 설교를 하게 되어 정신이 없었는데, 예배가 끝난 다음에 안내 담당이 “‘그들’이 와서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말없이 빠져 나갔어요.”하고 알려 주었습니다.
어찌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뒤에 이 일을 가지고 “축복 받은 땜질”이라는 수필을 써서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뒤에는 종종 왔는데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들이 오기는 했어도 설교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할 때 언어소통이 아주 큰 문제였는데, 처음에는 영어를 사용하면 될 줄 알고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분들이 설교를 주로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참석자들이 모두 영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어서, 얼마 뒤부터는 설교를 두 세 개 언어로 통역을 하곤했습니다.
이것이 너무 번거롭고 비효율적이어서 나중에는 참석자들을 언어별로 앉게 하고 통역이 앉아서 소근소근 낮은 목소리로 통역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예배 분위기가 웅성웅성, 경건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때 중국어 통역은 아예 배치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중국 선수나 임원들도 예배에 가봐야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애써 참석하려 했는지 궁금합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그런 감동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86 서울아시안게임 때 대만선교사 한 분이 종교관에서 일했는데 이 분이 중국어에 아주 능해서 종교관 일보다 다른 중국어 통역들의 자문에 응하느라고 더 바빴습니다.
중국 선수들도 이 분을 제일 많이 찾았습니다.
규정상 직접적인 전도는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다른 것을 느끼게 해 주었고, 그것이 이 분을 많이 찾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2년 뒤에 88서울올림픽 종교관을 운영할 때는 언어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체험을 살려서 언어별 예배실을 마련했는데 이 때도 중국어 예배실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88서울올림픽 때는 중국선수단의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지고 여유가 있었습니다.
88서울올림픽 때 개신교관을 찾은 중국 선수와 임원은 모두 244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Y라는 축구선수는 1986아시안게임 때 성경을 여러 권 가지고 갔는데 친척들이 서로 달라고 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하면서, 이번에는 더 많은 성경을 가지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주님이 자기의 앞길을 친히 인도해 주실 것과 중국 안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씨는 뿌리면 적건, 많건 간에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리우올림픽의 개신교관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중국선수나 임원들이 얼마나 많이 개신교관를 찾고 있는지, 중국선수나 응원단을 위한 별도의 선교계획이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궁금합니다.
그러면서 30년 전의 일이 새삼스럽게 그리워지는 가운데, 리우올림픽이 중국선교에도 좋은 기회가 되게 해 달라고 「중주」가족 여러분께 부탁을 드리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