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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 글은 2007년도에 티베트에 다녀와서우리고교 카페에 올렸 던 글입니다
세상은 많이 변해서 돈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수 있다. 다만 같은 나라인데 북한만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세상이다. 그 다음에 마음대로 갈수 없는 곳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고산증세가 나타나는 곳은 정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곳이다. 텔레비전 광고에 ‘집 나오면 개고생 이다’라고 하던데 고산증이 나 타나면 개고생, 헛돈 들이고 쌩 고생이다. 옛날 국민학교 시절 지리책에서 본 티베트란 나라(그 당시는 독립국)는 그 저 파미르 고원 같이 하늘 아래 첫째 나라로 생각하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텔레비전에서 티베트에 관한 얘기가 나오고 칭창열차 얘기가 나오고 티베트 국민들의 불교에 대한 열정 등을 보면서 한번 가보고 싶은 마 음이 생겼다. 2007년 1월 19일 전문 여행사를 따라 여행을 떠났다. 나름대로 인터넷과 도서관을 이용하여 티베트 공부를 했지만,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일행 9명과 함께 중국 국제항공을 타고 대련, 북경, 서안 상공을 거쳐서 예정 시간보다 늦게 성도에 도착했다. 중국 항공기는 10여 차례 타 보았지만 전에는 서비스가 형편 없었는데, 상 당히 향상된 것 같았다. 기내식도 인천에서 출발하니 우리나라에서 만든 음 식이라 괜찮았다. 저녁 식사후 성도 변두리 호텔에 투숙, 새벽 5시30분에 기
라싸공항-해발 3,500m
상, 호텔에서 준비한 간식(카스테라 비스켓만한 것 두 쪽, 소세지 1개, 작은 사과 1개, 삶은 계란 1개)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항공기가 8시에 이륙 예정이나 별다른 설명 없이 계속 대기 중이다. 12시 가 되어도 밥 먹으라는 소리는 일체 없다. 우리 다음 비행기 손님만 도시락 을 분배 하고 있는데, 일단의 중국 승객들이 떼를 지어 항공사 직원에게 거 칠게 항의하자 20원에 도시락을 판매하는 것을 보고 아직도 후진국 행태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느꼈으나, 군중들이 떼지어 항의하는 것을 보니 말로만 사회주의이지 언권이 무척 신장 된 것 같았다. 비행기는 오후1시반이 되어서야 탑승을 시작 45분이 지나서 이륙 하였다. 도중에 기상이 불안정하여 기체가 요동치며 하강 하는 등 내 일생에 비행기 여행 중 최장시간 동안 공포를 맛보았다. 4~5분 동안 한번에 30~40초 가 량 기체가 요동치니 기겁을 했다. 여기서 이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싸구려 단체여행객은 꼬리 부문에 앉으니 더 욱 심하다. 정신을 차리고 밑을 보니 구름 위로 히말라야 산맥의 봉우리들이 우후죽순처럼 뾰죽뾰죽 올라와 있다. 비행기가 상당히 높이 뜬 것 같았다. 4시35분경 라사 ‘공가’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고도가 3500 미터라 벌써 고 산증세가 나타났다. 공항은 새로 지은 것인데 상당히 크다. 티베트인의 조상
마니카
은 원숭이이고, 인구는 260만, 국토는 120만 평방킬로미터, “체”라는 말이 들어가는 지명은 동네라는 뜻이고, 라사는 ‘신의 땅’이란 뜻으로 3개시 91개 현, 도시인구는 40만이라고 한다. 모두 가이드의 설명이므로 그저 그런가 보 다 생각하면 될 것이다. 티베트의 보물이 다섯 개 있는데, 첫째 야크, 둘째 천주, 셋째 탱화, 넷째 는 생초(동충하초), 다섯 재는 천주라는 보석이다 야크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단다. 고기는 식용, 가죽, 털은 카펫, 뼈는 공 예품, 그래서 그런지 시내 로타리에 황금빛 야크 동상이 있고, 국가지보(국가 의 보물)라고 씌어 있다.
있는 곳이란 뜻이란다. 티베트인들이 손에 들고 다니면서 돌리는 마니카는 속에 경전이 들어있어서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걸 손으로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다고 한다. 라마교는 왼쪽으로 돌리고 번교는 오른쪽으로 돌리는데, 번교는 자생불교 의 일종이란다. 티베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수(물)장, 조(새)장, 탑장, 화장, 토장(흙)등을 한다고 한다. 토장이 제일 나쁜 것으로 여기며, 이는 다시 환생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 기후가 건조하여 시체가 썩지 않고 미이라가 되기 때문이란다. 아침에 포탈라 궁에 가기 위하여 길을 나섰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 크를 쓰고 다닌다. 아마 황사가 심하여 그런 것 같았다. 어제 비행기가 연착 한 것도 황사로 인한 것임을 늦게 알았는데 비행장에 내려 보니 그 위력을 알만 하였다. 코앞도 안 보일 정도로 황사가 일고 바람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떼 지어 가다가 맨바닥 길에 엎드려 그 유명 한 오체투지를 포탈라 궁을 향하여 실시한다. 궁 입구에서 입장권을 사는데 자국민은 1원, 외래인은 100원인가 한단다. 중국 서안에 갔을 때 입장료를 차별해서 화가 난 나만 안 들어 간 적이 있 다. 사회주의 국가란 걸 몰라서 그랬다. 비수기인데도 비싸다. 일일 입장객 수를 1100명으로 제한하고 1시간 안에 구경을 끝내야 한단다. 성수기에는 최소 1주 전에 예약해야 입장이 가능한데, 우리는 비수기에 추운 겨울에 갔 으니 덕을 보았다고 할까. 라사는 고도가 3800미터다. 우리는 쌍 지팡이를 짚고 시내를 천천히 걸어 야 했다. 밤에 자는데 머리가 아파 진통제를 먹고 한국에서 사가지고 간 산 소 녹인 물(한 캔에 2000원짜리 한 박스 4만원에 구입해 가져감) 2캔 정도 먹었 는데도 영 안 좋다. 저녁에는 한식을 먹었는데, 일행 중 여자 분이 식사 중 갑자기 구토를 할 정도라서 나도 속이 메스꺼워 밖으로 나왔다. 그 정도로 고산증이 심했다. 우리 가이드도 에베레스트 8400미터까지 올라갔던 친구 인데도 어지럽다며 내가 사간 물을 좀 달라고 해서 5캔 정도 희사할 정도였 으니 그 고통은 알만하다. 매표소인 도로로부터 궁 입구까지 100미터인데 몇 번을 쉬고 갈지자로 한 걸음 한 걸음 표를 검사하는 곳까지 이르니, 공항검색대 같은 것을 통과하는 데 철저히 검색하며 인화물질은 별도 보관하고 있었다. 목조건물로 몇 년 전 화재가 나서 혼이 났다고 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궁으로 입장한다. 어두컴컴한 복도 계단 길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한참 가니 다라이 라마의 집무실, 접견실, 침실, 법당 등 곳곳 에 부처가 있고 모든 것이 검소하다. 우리가 말하는 용상도 엉성하다. 방이 모두 1000개라는데, 관람시간이 한 시간으로 한정되어 있고, 사진 촬영 금 지구역이고, 군데군데 경찰과 관리인이 있다. 좁은 통로는 관람객으로 발 디 딜 틈이 없다. 온 국민이 몰려나온 듯하다. 티베트 사람들의 행색은 한 마디로 꾀죄죄하다. 옷은 언제 빨아 입었는지 목욕은 언제 했는지 거무튀튀하고 기름기가 번질번질하다. 야크 기름으로 추운 날씨에 피부가 트는 것을 방지한다고 한다. 냄새도 상당히 심하다. 한 마디로 우리 노숙자를 연상케 한다. 티베트 국민을 비하 하려는 게 아니니 오해 마시기를
포탈라궁, 내부사진촬영금지, 1일 입장객 1,100명으로 제한.
어둡고 좁은 통로를 밀려 나가는데, 옛날에는 전기도 없었다는 복도 군데 군데 촉수 낮은 형광등을 켜놓았으나 희미하다. 포탈라 궁은 백궁과 홍궁으로 분리되어 백궁은 사람이 살고 홍궁은 시신 을 모셨다. 역대 달라이 라마의 시신이다. 홍궁에 높이 안치된 역대 달라이 라마의 큰 관들은 모두 순금이란다. 탑장이란다. 어마어마한 탑장이다. 미이 라 탑장은 부자나 높은 사람만 하는 장례인 것 같았다. 그중에는 어려서 암 살당한 12살 달라이 라마의 관도 있다. 제정일치 국가이므로 권력싸움에 희 생된 것 같다. 이 나라 국민은 가난하지만 곳곳에 불전을 놓는다. 달라이 라마 집무실에 도 불상에도 불전함이 있고 때 묻은 꾀죄죄한 돈을 놓는 걸 보면 정성이 지 극함을 알 수 있다. 또 떨어진 돈을 줍지 않고 그냥 지나가고 간혹 큰 불전을 내고 거슬러 가는 것도 보았다. 어디서나 합장하고 중얼중얼 거린다. 포탈라 궁은 겨울궁전으로 우리나라 청와대 같은 곳이다. 특히 포탈라 궁 의 벽이나 건물의 벽은 돌과 싸리나무 묶음을 차곡차곡 쌓아서 지은 것이란 다. 벽을 만져보니 싸리 묶음이 확실하다. 신기한 생각이 든다. 이곳 사람들 은 포탈라 궁을 신성한 곳으로 생각하여 참배한다고 한다. 포탈라 궁은 라사 한 가운데 있는 산에 지은 일종의 요새로서 내성과 외성 으로 되어 있고, 앞면에서 보면 큰 산 전면에 모자이크처럼 아름답다. 들어 가 보면 영 아닌데, 멀리서 보는 것이 더 낫다. 다른 나라 궁처럼 호사스러움 도 편리한 시설도 없는 불편 투성이의 건물이다. 이걸 보려고 고생하며 여기 까지 왔나 싶은 아쉬움도 있다. 포탈라 궁을 나와 달라이 라마의 여름궁전인 노브랑카 궁전을 가보니 제 법 나무도 많고 연못도 있다. 일명 보석공원이라고 한다. 궁 입구는 라사의 호텔이나 기타 건물처럼 입구가 두꺼운 양탄자로 무대 장막처럼 가려 놔서 입구를 찾기 어렵다. 바람과 황사를 막기 위한 것이란다. 입구를 찾아 들어 가니 벽시계가 9시를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바로 이 시간에 달라이 라마14 세가 중국의 눈을 피해 망명길에 올랐단다. 그래서 이 시계는 이 시간에 영 원히 정지상태라고 했다.
달라이라마의 여름궁전, 내부촬영금지, 망명하기전 거처.
달라이 라마의 집무실에는 그가 앉았던 책상, 걸상, 가방 등 모든 것이 고 스란히 놓여 있다. 단지 옥좌는 겨울 궁과 달리 보석이 박혀 있었다. 침실도 좁고 침대도 소파 정도로 작고 좁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선생은 밖에서 다라이 라마는 위쪽 유리로 막힌 방에서 강의를 듣는데, 가운데 유리 한 장이 없다. 소리를 듣도록 하기위해서다. 제정 통합의 우두 머리로 왕이나 마찬가지지만 상당히 수수하다. 절에 가면 주지승이 앉아있 는 의자 정도이다. 다른 방에 가보니 역대 달라이 라마의 좌상이 있고, 특히 숑첸 갬프의 좌상도 있다. 한 곳에는 숑첸 캠프와 문성공주의 상이 있다. 숑 첸 캠프는 티베트를 세운 왕이며, 문성공주는 당태종의 수양딸로 볼모로 시 집와서 죠캉 사원을 세우고, 불교의 중흥에 힘쓴 왕비이다. 티베트는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 토번이라고 하는 나라다. 당나라 장안까 지 쳐들어가서 문성공주를 데리고 왔는데, 공주가 시집오면서 눈물을 흘리 는 그림을 본 것 같았다. 대법당등 모든 것이 수수하다. 포탈라 궁보다 규모 는 작지만 정원이 넓다. 두 곳 모두 난방 장치가 없다. 추운 겨울을 어떻게 지냈을까 의문이 간다. 여기서도 예외 없이 이곳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 책상 에도 좌상에도 합장하고 돈을 놓는다. 보이는 것 모두가 종교이다. 못 살고 못 먹고 못 입지만 불전을 내는 사람들, 종교는 무서운 것이란 생각과 함께 경외감 마저 든다. 배운 것 없고 못 살지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절을 하고 돈을 놓고 하는 것은 현세보다 내세를 중요시하는 티베트 사람들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존경스럽기도 하고 가여운 생각도 든다. “눈동자에 욕심이 없었는데 중국이 지배하면서 서서히 돈맛을 알게 되어 차차 눈빛이 흐려진다”고 조선 족 가이 드가 안타까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물욕에 찌든 눈동자가 아닌 것 같았다. 라사는 점점 중국화 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중국의 어느 도시처럼 넓은 도로에 건물 들이 즐비하다. 신도시와 구도시로 구분되어 있고, 사람들 이 분주하게 다닌다. 하지만 모두 초라하고 시커멓다. 옷이라도 변변히 입은 사람은 우리가 못 살 때 먹던 보리밥이나 쌀 구경 정도나 할까. 유명한 죠캉 사원에 가보니 일요일이라 입장이 불가하단다. 문 앞에는 죠 캉 사원을 향해 침구 보따리를 옆에 놓고 요 비슷한 것을 깔고 계속 오체투 지를 하는 사람, 고단해서 쪼그리고 조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다. 불경을 외 고 마니카를 돌리면서 절 담 밖을 도는 사람, 오체투지를 하면서 죠캉 사원 을 왼쪽으로 도는 사람, 담 밖을 걷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린단다. 손에는 게다 짝처럼 생긴 걸 끼고 엎드렸다 일어나고 무릎이 다 까지고 피가 나도록 한 다. 남녀가 따로 없다. 젊은 아낙이 계속 오체투지를 한다. 내가 서 있으니 힐끔힐끔 보면서...애처롭다. 절에서 108배를 해도 힘이 들어 못하는데...많 이 못 배워도 종교에 무조건 귀의하는 태도는 무엇이라 표현할까, 현실은 노 력해도 좋아질 수 없으니 종교에 의지해서 내세라도 좀 나아지고 싶은 욕망 이 믿음으로 변한 건 아닌지...그러나 내세는 아무도 모르니 안타깝다. 일생을 통해 라사의 죠캉 사원의 참배를 위해 수백리 길을 오체투지로 죠 캉 사원을 참배하고, 이를 위해 가족들은 먹을 것과 이불 등을 지고 동행한 다고 하니 이보다 무서운 종교의 힘이 있을까? 사원 앞 마르코 거리는 시장이다. 8갈래 방사선으로 된 시장이다 조잡한
당나라 문성공주가 세웠다는 죠캉사원, 평소에도 순례, 아침부터 오체투지를 한다.
물건들을 판다.살 것이 없다. 야시장 같다. 안녕을 기원할 때나 환영할 때 목 에 거는 비단수건 같은 것이 주종을 이룬다. 점심은 야크 스테이크를 하는 집으로 갔다. 난 맛이 없는데 일행은 맛이 있단다. 죠캉 사원대신 박물관을 가보니 빈약하다. 맨 불상, 탱화, 옥새(도 장) 등이다. 몽골 박물관 건물이 엉성해서 흉을 본 적이 있는데, 이곳 건물은 번듯하지 만 진열품이 불교 일색이다. 티베트의 3대 사원의 하나인 드레풍 사원은 전성 기에는 8000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모두 절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시험에 합격하면 중으로 아니면 잡일꾼으로 살았다니 사회 공동체 일 은 누가하는지, 그래서 후진국이 되고 결국은 중국 지배하의 자치주가 된 것 이 아닌지. 절은 무슨 병영 막사같이 벽돌로 된 네모난 건물이다. 산중턱에 있어 몇 번이나 쉬면서 올라가니 커다란 취사장이 나온다. 솥은 옛날 군대용 같은 큰 가마솥인데, 상당히 크고 나무는 어디서 났는지 장작이 아궁이에 있다. 위생 상태 완전제로 지저분하다. 법당에 들어서니 300-400명쯤 되는 승려들이 어두컴컴한 불빛 아래서 경 전을 외우고 있고 어떤 승려는 생각에 잠겨 있다. 경전은 옆으로 기다랗게 종이에 등사된 티베트어로, 얼굴도 못 알아 볼 정도로 어두운 곳에서 잘도 읽는다. 드문드문 달려있는 형광등은 조도가 낮다. 변두리에 앉은 사람은 얼굴만 알아 볼 정도로 희미하다. 밝으면 탱화가 바랠까보아서 그렇게 한단다. 사 람이 중요한지 탱화가 중요한지 헷갈린다. 한 바퀴 도는 데 예외 없이 촛불 향, 기타 냄새, 사람 냄새로 골치가 아프다. 얼른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이 곳 사람들은 불상만 보면 절하거나 합장이다. 어디 가나 초파일이다. 정말 종교의 나라다. 벽에는 갑옷이 걸려 있다 옛날에는 사원 별로 군대를 보유 한 증거란다. 다음 방문한 세라(色拉)사원도 사람이 참 많았다. 한참을 올라가니 법당이 나온다. 사원의 승려들이 300~400명은 되는 것 같다. 공양시간인지 어둠 컴컴한 곳에서 국그릇과 밥그릇을 놓고 마주앉아 합창 대처럼 뭐라고 큰 소리로 읊는다. 우리 식으로 ‘잘 먹겠습니다’ 그런 소리 같 다. 국은 고기국인 듯 고기 냄새가 난다. 황모파는 머리에 누런 고깔을 쓴단다. 결혼은 할 수 없고 독신이란다. 홍 모파는 결혼을 할 수 있단다. 우리로 말하면 대처승과 비구승 이런 거 아닌 가 한다. 하여튼 침침한 곳에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손 으로 집어 먹는다. 대변을 보고 밑을 닦지 않고 그냥 말린단다. 그래서 그런 지 손으로 먹는다. 손 씻는 곳도 없다. 여기도 탱화며 무사의 갑옷들이 걸려 있고, 둘레 양쪽 방에는 불상들이 있 다. 그 불상을 참배 하는 데는 5원인가 승려에게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칸 막이 속 불상에 참배하거나, 다른 칸막이 불상에 참배한다. 한 곳에서는 무엇인지 머리를 조아려 이마를 물건에 대고 합장도 한다. 뒷 쪽으로 한 바퀴 도는데 불상이 과거불, 현대불(석가모니), 미래불(관음보살) 등 많은 불상들이 있고, 참배객들로 길이 막혀 요리 조리 좁은 틈을 비집고 계단을 내려 올때 역시 난간에는 야크 기름이 묻어 있어 미끌미끌 하다. 촛 스님들이 토론하는 장소, 방석도 보임. (토론시간이 맞지 않아 빈장소만 촬영)
불 냄새, 사람냄새, 음식냄새 어둠 침침한 분위기. 원래는 승려들이 토의하는 것 을 보고자 하였는데, 6시가 되어야 한다기에 할 수 없이 토론장으로 가보니 야외 자갈밭에 여기저기 스펀지를 넣은 조그만방석들이 흩어져있고, 중앙 상 석에 방석이 깔려있고, 좌우로 돌 의자가 4개씩인가 배열되어 있었다. 돌 의자에 한 번 앉았다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아래로 내려오니 늙은 부부 가 마니카를 돌리면서 탑 같이 생긴 건물을 좌로 돌면서 무엇인지 간절히 읊 조리고 있었다. 종무소 앞인가 본데, 젊은 승려가 젊은 여자와 디카를 들고 무엇인가를 이 야기 하는데, 비교적 깔끔하고 지적이라 알고 보니 이 절의 주지란다. 실권 이 있으니 신발부터 깔끔하다. 지난 번 사찰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승려들이 벗어 놓은 신발이 난장판이고 신발도 가지각색 슬리퍼, 운동화, 구두, 이것 이 티베트의 현실인 것 같았다. 옛말에 우리나라에서는 빚쟁이가 집안의 벗 어 놓은 신발 정돈 상태를 보고 돈을 빌려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길을 가다보면 무조건 건너고 무조건 진행한다. 이상하게 신호등이 사각 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고산증세는 참기 힘든 것이다. 첫 날부터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가기 전 기행문을 읽고, 산소 첨가물인 산소수를 먹어 보았지만 별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진통제를 먹고 자고, 아침에는 이뇨제를 먹고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민속 공예점에 천주(天珠, 이곳에서 유명한 보석으로 비싸다)를 보러 간다기 에 2층 몇 계단 오르니, 어찔어찔해서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다가 간신히 일 어나 돌아왔다. 이튿날도 쌍 지팡이를 짚고 포탈라 궁을 천천히 올랐는 데도 힘이 들었다. 둘째 날 저녁은 조금 나아졌으나 역시 기분은 좋지 않다. 샤워와 머리 감는 것은 고산증에 금물이다. 손발만 씻고 잤다. 다음 날 저녁은 샤브샤브, 식당은 비교적 크고 전통음악과 춤이 조그마한 무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 식으로 커다란 통에 시커먼 육수(기름)가 들어 있었다. 맛살, 소시지, 양의 밥통,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버섯 메기, 당근, 오이, 배추 등 많은 종류가 푸짐하게 제공 되었지만, 기름에 찍어 먹는 게 도저히 비위에 맞지 않는다. 밥 한 공기에 김을 싸서 먹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냄새가 역해서 도 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일부는 발 맛사지를 받으러 가고 나는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셋째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빵과 계란 프라이, 몇 가지 소시지 볶음, 과일로 때우고 약 2시간 반 거리에 있는 암트랙쵸(4488미 터)를 트레킹 하러 출발했다. 아침 길이라 차가 별로 없다. 가끔 가다 사람들 이 지나가면 운전사는 계속 경적을 눌러댄다. 아무 곳이나 길을 건너는 사고 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겨울이기는 하지만 나무 한 그루 없는 밋밋한 꽤 높은 산들이 펼쳐 있다. 나무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두께 10센티 정도의 풀이 죽어 있는 땅속은 모래다. 그래서 황사가 일어나는가 보다. 벌판에도 예외는 아니다. 겨울의 티베트 여행은 달나라 여행 같다고 누가 표현했다는데, 사람하고 집만 없으면 딱 맞는 말이다. 도로는 2차선으로 최근에 포장한 것 같았다. 한참을 가노라니 비행장 가는 갈림 길이 나오고 라사강이 나오고 다리가 나오는데 다리 건너에 군인이 보 초를 서고 있다. 사연인즉, 다라이 라마 14세가 이 길을 통해 망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길이 옛날에는 공항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는데 새로 공항까지 고속도로가 생겨서 1시간가량 단축 되었다고 한다. 계속 황량한 벌판 군데군데 마을을 지나 한참을 가니 커다란 산이 나온다. 구절양장이다. 꾸불꾸불한 길 옆 보니 정말 아찔한 낭떠러지다. 용케도 길을 만들었다. 좌우 산은 나무 한 그 루 없는 마른 풀밭이다. 그런데 그렇게 높고 경사진 곳곳에 밭뙈기가 있다. 무엇을 타고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궁금했다. 산비탈에 야크들이 마른 풀을 뜯고 있다. 야크는 앞에서 말했듯이 3000 미 터 이상에서만 활동한다고 한다. 아찔한 낭떠러지를 끼고 고개를 한 시간 가 량 오르니 해발 4990 미터인 카일라스 고개에 도착하여 아래를 보니 푸른 호수가 있다. 물이 쪽빛이다. 저 멀리 카놀라(7000미터) 빙산이 보이고 그 옆에도 많은 빙산을 이고 있 는 산봉우리가 보인다. 암트랙쵸는 깊이가 70미터, 길이가 70키로 되는 빙 하 녹은 물로 이루어진 호수다. 여기서 쵸는 호수를 뜻한다. 고개 마루에는 어김없이 돌무더기와 나무장대가 있고 여러 색깔의 천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티벳인의 유일한 땔감, 야크 배설물로 벽돌모양을 만들어 말린다.
차를 타고 조금 내려가다가 우리는 걸어서 지름길로 호수로 내려갔다. 마을에는 집집마다 담 위에 보도 블럭 같이 만든 야 크 똥을 말리고 있다. 이곳 사람들의 유일한 땔감이란다. 호수는 문자 그대로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다. 4480미터 꼭 대기에 이런 호수가 있다니 신비롭다. 배가 두어 척 있다. 앞에 있는 섬에 사 는 사람들을 운반하기 위함이란다. 고기는 많은데 잡지를 않는단다. 수장을 지내기 때문에 물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란다. 다시 하차지점 까지 올라 가 야하는데 만만치 않았다. 두개의 지팡이에 의지해서 쉬고 또 쉬고 간신히 올라 왔다. 모두가 힘이 드는 모양이다. 고산증과 고산지대에서의 행동은 힘이 든다. 사전 연습 없이 차를 타고 올라와서 더욱 그렇다. 돌아오는 길에 휴대한 도시락(빵, 귤, 사과, 콩)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빵 한 개씩만 먹고 나머지는 모두 모아 야크 목동에게 주었다. 생전 파는 빵을 먹어 본 적이 있을까 싶다. 이는 언제 닦았는지, 얼굴은 까맣고 복장은 언제 빨아 입었는지 측은한 생각이 든다. 해방당시 미군이 찍은 사진들을 보면, 우리도 미국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한식으로 저녁 을 들고 관광회사 사장이 낮에 도시락이 부실해서 미안하다고 맥주3병을 선 사해서 처음 맥주 한 잔씩을 마셨다. 숙소로 오는 길에 1600위안을 내고 발 맛사지를 했는데, 각질까지 깨끗이 제거해 주어서 편안히 잘 잤다. 라사에는 중국군대가 많다. 반란에 대비해서란다. 그리고 이곳 국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어 일부 국민은 지금이 살기 좋다고 한단 다. 새로운 건물도 많이 짓고 도로도 많이 만들고 있단다. 정치문제는 민감해서 논의 안 하는 것이 상책이다. 한 동안은 비자를 받아 도 티베트를 방문하려면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칭짱 열차도 티 베트 국민 통제용이라고 한다. 오늘 갔던 암트랙쵸 가는 도로 건설도 용이한 문제가 아니다. 건설에 1키 로당 1명은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가는 길에 경운기 한 대가 불을 키고, 앞 에 조화를 달고 무언가 싣고 오더니 우리 일행이 방금 건넌 강가 여울물이 수장하는 곳.
깊은 낭떠러지로 간다. 물어보니 수장을 지내러가는 것이란다. 돌아오는 길 에 보니 관도 없이 시신을 싣고 와서 여울진 깊은 곳에 물고기가 먹기 좋게 토막 내어 버린다. 마침 갈비 한 쪽이 남아 있어 사진에 담았는데, 기회가 있 으면 올리려고 한다. 옷은 그 자리에서 태워버리고 빵 한쪽으로 제사를 지낸 것 같았다. 그곳이 동네 수장지내는 곳인지 곳곳에 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은 어린아이의 장사날인 것 같았다. 장의사는 돈은 잘 버는 데, 자손들 은 시집 장가 가기가 쉽지 않단다.
티베트에서의 마지막 밤을 지내고 아침 6시 열차를 타기위해 라사 역으로 이동했다. 아침이라 한가한 줄 알았는데 차량 행렬이 이어졌다. 한참을 가니 벌판 가운데 인적이 드문 곳 같은데, 새 역사가 전통 티베트 양식으로 상당 히 크게 지어졌다. 티베트 국민의 마음을 달래기위한 정책의 일환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항도 최근시설이고 새로 지은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사람들이 명절 날 서울역처럼 북적인다. 기다랗게 줄을 서서 개찰을 받고 지하 통로를 거쳐 성도행 칭짱 열차에 올랐다. 여기서도 새치기를 하려는 중국인으로 넘친다. 현재 라사에는 60%이상의 중국인이 상권을 잡고 있다고 한다. 서서히 중국 화 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량은 모두 15칸인데 4인승 침대칸 2칸, 6인승 침대칸 8량, 의자 4개가 한 식탁인 식당칸 1량 등인데, 4인승은 문도 있고 괜찮지만 6인승은 문도 없 고 커튼이 쳐져있다. 일반석은 의자가 3개 또는 2개로 되어 있는데, 의자와 의자 사이에 탁자가 하나 있어 식사를 하라고 만든 것 같았다. 기차는 48시간동안 라사에서 성도까지 가는데 기관차 2량이 앞에서 끈다. 비행기와 같이 가압장치가 되어 있어 임의로 문을 여닫을 수가 없고, 라사에 서 거얼무까지는 산소호흡기가 침대 마다 달려 있어서 수시로 사용가능하다. 도중에 5072미터의 당골라 산을 넘게 되고, 보통은 3641미터부터 2828
육교 철로
미터 간을 계속 오르다 당골라 산을 넘으면 조금씩 고도가 낮아진 다. 황량한 넓은 벌판에 가끔 집 몇 채있는 마을 좌우에는 수천 미 터의 빙산 봉우리의 연속이다. 벌판에는 야크떼. 양떼가 있고 야생 동물인 고라니도 보인다고 하나, 나는 잠자느라 못 보았다. 가다 보면 차창 밖으로 커다란 호수, 빙하가 있는 산, 긴 철교(맨땅위에 놓 은 다리)를 달려도 달려도 차창 밖은 변화가 없어서 지루하다. 거얼무에서 산소 호흡기를 회수한다. 이제까지는 금연이었으나, 여기서부 터는 화장실에서만 가능하다. 아무 곳에서나 담배를 피어대니 밀폐된 공간 이라 견디기 힘들다. 경제적으로는 발전 되었다고 하나 공중도덕은 우리나 라 6.25때 수준이다. 3등 칸은 그야말로 피난열차다. 외국인은 달랑 우리 9명뿐이다. 3등 칸에 가보니 앉아서 자야하고 짐 보따리며 음식물 냄새가 진동한다. 어딜 가나 돈 이 있어야 대접 받고 행세한다. 복도에 있는 전광판엔 우리나라 전철같이 계 속 자막이 나오는데 한자, 그것도 간자이기에 알아보기 힘들다. 간혹 시간 날짜, 속도, 외부온도 등이 영어로 나올 뿐이다. 기차는 낙뢰방지를 위해 알루미늄으로 제작 되었고 공기압 유지, 자외선 차단, 화장실도 유압식이다. 하여튼 잘 만들어졌다. 고산지대라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하다. 기차밖 기온은 상당히 낮다. 48시간동안 기차에 앉아 식당에서 밥만 사먹 고 황량한 들판만 보고 여행 하는 것은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거얼무를 지나니 중국전통 농촌도 보이고 간혹 도시도 보인다. 아직도 많 은 발전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성도에 가까울수록 산에 나무도 있고 밭에는 푸른 채소도 보인다. ‘중국은 넓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사람도 많고 땅도 넓다. 다만 이번 여행이 티베트 위주이고 칭짱 열차는 그 과정의 부산물이나 중국의 힘 은 무섭다. 중국은 티베트를 아우르고 민심을 잡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라사 역사도 어울리지 않게 크고, 공항도 너무 크고 외따로 떨어져 있다. 라사시내 도로도 넓다, 현대식 건물도 꽤 있다. 하지만 농촌은 아직도 전 근대적인 생활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불교에 모든 것이 귀일되고 있어 발전 을 기대할 수 있을는지. 최근 티베트 관광 붐으로 돈에 눈을 뜬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미 지수, 관광수입도 중국인 손에 다 들어가니까. 달라이 라마는 아마 돌아오기 힘들 것 같다고 한다. 티베트 국민은 아직도 그를 흠모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티베트는 영원히 중국의 한 개 주로 남게 되고, 티베트 국민은 현상태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여겨진다. 특히 군부대가 눈에 많이 띈다. 물론 국제관계도 있겠지만 티베트 사태를 대비한 것으로 보 인다. 그래서 칭짱 열차도 만들고 비행장도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루한 48시간의 열차여행은 1시간 늦게 성도 역에 도착 대단원 의 막을 내렸다. 짧은 기간 남의 나라를 관광하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우습지만, 주워들은 얘기를 바탕으로 나의 생각을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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