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3. 13 사순절 두 번째 주일
https://cafe.daum.net/znzdkzkepal/1qvN/777 김진성
https://cafe.daum.net/rnjstlgur/9oZ8/98 권시혁
예배로 부름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틀 찬양할 것이라(시 63:1-3)
예배 기원
자비로우신 주님!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이 오직 십자가 은혜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뵈러 성전으로 올라왔습니다. 사순절 기간을 지내고 있사오니, 저희의 영의 눈을 더욱 밝히 열어주셔서 죄인들을 위해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발자취를 저희도 띠르게 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저희도 지게 하여 주옵소서.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예배가 되기를 원하오며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다 찬양하여라(21장) / 내 죄 속해 주신 주께(215장) /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290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341장) / 비바람이 칠 때와(388장) /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405장)
고백의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찬미하기 전에 부정한 우리의 입술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진흥 같은 죄를 제거하셔서 걸림이 없이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며 살라고 배웠지만, 형제를 미워했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고난을 견디라 들었지만, 재물과 권력에 기대어 살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저희는 절망하며 탄식함으로 믿음 없음을 드러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외면한 채 이기적인 욕심에 이끌려 육체의 소욕을 따라 한 주간을 살았습니다. 주여, 이 모든 악을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민 14:19-20)
0313 성도는 세 가지 삶을 살 때 보호받습니다. 빌 4:4-7
☞ 마음 문을 열고
지역사회와 성도들을 아름답게 섬기기 위해 3개의 카페를 운영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각 카페의 이름은 카페 테라(Terra, 좋은 땅), 카페 시드(Seed, 좋은 씨앗), 카페 에레즈(Erez, 향기 나는 나무)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성도란 좋은 마음 밭에 하나님의 말씀인 좋은 씨앗이 심겨지고 이후에 장성한 나무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히브리어 에레즈는 백향목입니다. 이 백향목은 만년설로 뒤덮인 북쪽의 추운 레바논 산맥에서만 나는 일종의 거대한 침엽수로 약 40m까지 자라납니다. 나무 굵기는 보통 2.5m에 달하고, 매우 단단한 재질과 은은한 향을 지니고 있어 벌레가 접근하지 못하며, 분비되는 진액은 피부 상처를 치료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고대로부터 최고의 건축자재가 되어왔으며 고대 페니키아 지역의 궁전들이나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주재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1000년 이상의 수명을 지닌 백향목은 벌목 (伐木)을 해도 백 년 이상 향기가 계속 남아있고, 곤충과 병충해에도 저항력이 강해 외부의 어떤 추위나 공격에도 강한 생명력을 지닌 나무입니다.
시편 92:12은 백향목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에 비유합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성도는 백향목과 같이 강건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성도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빌립보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빌립보서 4장은 신학적이고, 논쟁적인 이야기를 마무리한 후, 마지막으로 빌립보교회를 향해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
“주 안에서 선다”는 말씀은 이 땅에서“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1.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바울은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이 말의 더 정확한 의미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빌립보 성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은 기뻐하고 싶어도 전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세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있었습니다. 먼저 빌립보교회는 외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빌립보서 1:28에서 바울은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은 우상숭배와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빌립보 도시의 정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당시 빌립보는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식민지 도시였고, 로마 군대에서 은퇴한 퇴역 군인들이 많이 정착한 군사도시였습니다.
따라서 빌립보는 일찍부터 황제숭배가 횡행해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의 ‘점을 치는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 여종은 ‘아폴로 신을 숭배하는 자’였습니다. 당시 아폴로 신 숭배는 황제숭배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기에 귀신 들린 여종 사건은 정치적 문제와 관련되어, 결국 바울은 빌립보 관원들에게 끌려가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30에서 “지금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라고 말합니다. 즉, 지금 빌립보 성도들도 예전의 바울과 같이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태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핍박을 겪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국가권력에 의한 박해는 개인의 권력보다 더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겪었던 것과 동일한 고난을 겪는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교회의 두 번째 어려움은 교회 안의 대적자들입니다. 당시 ‘할례당’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잘못된 가르침과 유언비어를 퍼뜨려 교인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할례당들은 유대인들로서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계속해서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율법과 할례를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3:18에서 바울은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빌립보 성도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할례당들을 따라 회당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안의 남은 성도들은 상처와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상처 입은 성도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교회의 세 번째 어려움은 분열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다’는 말처럼 그나마 빌립보교회에 남아 있던 교인들은 두 패로 갈라져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4:2에서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향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이 두 여인은 당시 빌립보교회의 여성 지도자들이었으며, 그들이 서로 같은 마음을 품지 않았기에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교회가 분열되어 싸우기 시작하면 어떤 모습으로 변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식어지고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게 됩니다. 성도들의 마음은 강퍅해져 예배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교회의 사명은 희미해지며 하나님의 은혜는 찾아 볼 수 없게 됩니다. 정말 힘든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가 분열된 상황에서 바울은‘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빌립보서를 쓰는 바울이나 그 편지를 받은 빌립보의 성도들은 이성적으로 기뻐할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이 기뻐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이유는 외부적 상황이나 개인의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쁨의 이유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외부의 박해나 경제적 가난이나 내부의 분열이 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기에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거한다면 성도들은 언제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박해받은 상당수의 교인이 유대인 회당으로 떠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유오디아 파, 순두게 파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라.”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교회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아무리 외부의 박해가 거셀지라도, 내부의 분열과 혼란이 가중되더라도 주 안에 있다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이 땅에 세우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반드시 보호하고 지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예수님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2.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5절). 여기서 ‘모든 사람들’의 범주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우리를 핍박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관대함을 보여야 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관대함은 구체적으로는 자선 행위, 구제, 식사 제공 등을 의미합니다. 지금 울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은 상황인데, 하나님은 웃으면서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도우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이 명령들 후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 짧은 신앙고백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고,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하는 근거’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시간적이며 공간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먼저 시간적으로는, 주께서 곧 재림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공간적인 의미로는, 주님은 높고 먼 하늘에 계시지 않고 고난당하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돕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화해와 연합보다는 편 가르기와 반목이 일상화된 세태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염려하지 말라.
빌립보 성도들은 교회의 어려운 상황들로 인해 염려했습니다. 우리는 모양과 정도는 다를지라도 모두 염려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심리학자는 “염려는 느린 형태의 자살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염려가 얼마나 몸과 마음에 해가 되는지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독일어로 ‘염려’는 ‘뷔어겐(wurgen)’이라는 단어로, “짐승이 목을 물어 질식시키다, 목을 조르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사자가 큰 물소를 사냥할 때는 가장 빠른 속도로 물소의 엉덩이 위로 올라탑니다. 그러면 물소는 빠져나가려고 뒷발질을 하며 계속 뛰다가 결국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바로 그때, 사자가 물소의 목을 물어 질식시켜 죽게 합니다.
‘염려’도 이와 같습니다. 물소에게 사자가 올라타듯이 우리의 삶에 들어온 염려는 우리가 빠져나가려고 애를 쓸수록 우리를 옭매어 힘을 빼앗고, 결국은 영혼이 숨을 쉴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바울은 6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에서 자유 할 수 있는 방법은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우리 아버지’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알려드려야 할 정도로 우리의 삶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가 끊임없이 설득하고 부탁해야 할 만큼 매정한 분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알고 계시는데, 성경은 왜 계속해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실까요? 그 이유에 대해 존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알리거나, 그분이 의무를 행하도록 자극하거나, 그분을 강권할 목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자신을 일깨워 하나님을 찾기 위해, 하나님을 묵상하기 위해, 자신의 염려를 주님의 품에 쏟아부음으로써 염려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한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설득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기도로 깊이 들어가면 당면한 문제는 사라지고 ‘나 자신’이 보이게 됩니다. 나의 어리석은 모습이 보이고, 잘못 가고 있는 내가 보이고, 쓸데없이 염려하는 내가 보입니다.
그 순간에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었구나’ 하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쓸데없는 염려를 멈추십시오. 우리의 모든 염려는 이미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질 때 우리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몰려오게 됩니다.
오늘 내가 경험하는 모든 사건에 대해 기도와 간구로 나아가십시오. 특별히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이 사용한 ‘감사’라는 단어는 ‘유카리스티아’라는 헬라어로 ‘매우’란 뜻의 ‘유’와 ‘은혜’라는 뜻의 ‘카리스’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큰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내게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분명한 확신이 감사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감사를 할 수도 없고, 감사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잘 아는 사도 바울은 항상 기도를 드릴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고, 본문에서도 ‘감사기도’를 권면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로 기도드릴 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보호받게 됩니다. 빌립보서 4:7은 ‘마음’과 ‘생각’이란 말이 함께 나옵니다. ‘마음’이라는 헬라어 ‘카르디아’는 ‘인간의 깊은 내면에 자리한 모든 감정’을 지칭합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 인간의 연약한 마음은 상처를 받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생각’은 우리의 행동과 감정을 조절하는 사령탑입니다.
그래서 같은 상황에서도 이쪽에서 생각하면 걱정스럽지만,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주 좋은 여건에서도 원망과 불평을 할 수 있고, 남들 보기에는 비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국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달라져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닐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주십니다.
빌립보교회처럼 사방이 꽉 막힌 상황에 처해 있을 지라도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를 버리고 오직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인도와 보호가 천국 가는 날까지 우리 삶에 영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