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영 : 장 줄리앙부터 피치스까지, 협업으로 창의성을 끌어내다
허재영 | K 2023.02.15
롱블랙 프렌즈 K
관객 22만 명을 동원하며 성황리에 끝난 <장 줄리앙 : 그러면, 거기> 전시부터, 자동차문화 브랜드 ‘피치스Peaches’, 패션 브랜드 ‘스테레오 바이널즈Stereo Vinyls’까지. 모두 한 사람이 디렉팅 했습니다. 허재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예요.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 공간 기획자, 전시 기획자, 작가 에이전트, 사업가, 디자이너… 이 모두가 허 디렉터 앞에 붙는 수식어죠. 어떻게 한 사람이 이토록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요?
허재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허재영 디렉터는 지금을 ‘협업이 중요한 시대’라고 정의해요. 이제는 어떤 분야든 전문가가 넘치잖아요. 전문가들을 어떤 주제로, 어떻게 조합할지 조율하는 기획자의 역할이 중요해졌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가 말하는 기획자의 경쟁력이 의아해요. ‘멋진 친구와 일하기Working with friends’. 학교 동창부터 지인 결혼식에서 만난 인연까지, 허 디렉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협업 파트너를 만듭니다. 그게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비결이라면서요. 이야길 더 들어봐야겠어요.
Chapter 1.
힙합 패션을 좋아한 소년, 그래픽 티셔츠에 눈뜨다
어린 허재영은 말수가 없었어요. 천주교 신자였던 부모님은, 그를 14살일 때부터 예비 신학교에 보냈죠. 허 디렉터는 크면 당연히 신부가 될 줄 알았대요.
신학교 선생님의 한마디가 허 디렉터의 길을 바꿨어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먼저 하고 와라, 그런 뒤에 신부가 되도 늦지 않아.” 이때 허 디렉터는 숨겨왔던 ‘패션’에 대한 열망을 떠올립니다.
“그 시절 저는 옷이나 그림으로 제 개성을 표현하곤 했어요. 학교가 끝나면 마을버스를 타고 문정동 옷 상설매장에 갔다가, 저녁엔 지하철 타고 이대 편집샵에 갔다가, 새벽엔 동대문 도매시장을 찍고 집에 오는 식이었어요. 이글거리는 불꽃 문양이 박힌 티셔츠를 입을 때마다 강해지는 기분이었죠. 에어조던 로고를 신발에 따라 그리기도 했어요.”
신부가 되기 전, 허 디렉터는 마지막으로 ‘취미의 정점’을 찍어보기로 했어요. 힙합 패션에 들어갈 그래픽을 그리고 싶어, 미대 입시에 도전했죠. 스무 살엔 경원대학교에서 순수미술을 배웠고, 일년 뒤엔 삼성디자인교육원(SADI)에 들어가 패션 디자인을 배웠어요.
수업은 혹독했어요. 3년간 색채와 명암, 원근법, 타이포그래피까지 압축적으로 배워나갔죠. 학기중 대부분을 연구실에서 먹고 자야 했어요. 모두가 지쳤을 때, 허 디렉터는 문득 주변 친구들을 둘러봅니다.
“문득 ‘난 운이 좋은데?’란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IMF 여파로 파슨스Parsons*에서 돌아온 유학파 친구들, 현업에서 돌아온 형, 누나들이 많았거든요. 이 친구들이 생각하는 방식, 태도, 전략을 24시간 달라붙어 배우는 것도 공부라고 생각했죠.”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사립 디자인 학교. 패션 분야에서 ‘최고 권위의 학교’로 평가받는다.
그곳에서 허 디렉터는 시야를 넓혔어요. 동기, 선배와 교류하며 그래픽 디자인, 웹 디자인과 개발에도 관심 가졌죠. 덕분에 그는 졸업 후 업계 최고라 평가받던 디지털 디자인 회사 ‘디스트릭트*’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웹 디자인, 그래픽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어요.
*국내 1세대 웹 디자이너 故 최은석이 2004년 설립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삼성전자의 다수 웹사이트를, 2010년대 이후 대규모 미디어아트와 설치물을 제작하고 있다.
롱블랙과 인터뷰하는 허재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그는 신학교 진학 계획을 접고, 평소 열망했던 미술과 패션 디자인을 배우러 떠났다. ⓒ롱블랙
Chapter 2.
‘뭘 표현했는가’보다 ‘왜 표현했는가’가 중요하다
회사 생활 3년 차에 허재영 디렉터는 영국으로 떠납니다. 학교에서 배운 패션, 현업에서 배운 시각 디자인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어요. 디자인 업계에서 ‘최고의 학교’로 쳐준다는 센트럴세인트마틴Central Saint Martin이 런던에 있단 말에, 곧바로 그래픽 디자인과에 지원했죠.
허 디렉터는 그곳에서 ‘협업의 매력’을 배웠대요. 수업은 간단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각자의 작업에 대해 토론하는 크리틱critic* 수업이었죠.
*타인의 작업, 예술 작품에 대해 비평, 토론하는 과정.
이때 친구를 만납니다. 스토리가 담긴 일러스트와 그래픽을 좋아하는 장 줄리앙, 건축물과 자연을 그리기 좋아하는 티보 에렘Thibaud Herem*이었어요. 셋은 공통점이 많았죠. 외국인 출신인 점, 영어가 서툴렀던 점, 친구들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단 점이었어요.
*프랑스의 일러스트레이터. 유럽의 주요 건축물을 그려 인지도를 쌓았다. 한국의 드라마 <그 해 우리는(2021)> 주인공 최웅(최우식 演)이 그린 그림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첫 프로젝트로 티셔츠 만들기를 했어요. 전 그래픽 툴을 다룰 줄 아니까, 옷에 찍을 그림을 마음껏 만들었죠. 수업 끝나고 담배를 피우는데, 장이 다가와서 ‘네 작업이 맘에 든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좋은 작업 파트너가 됐죠. 함께 만든 작업물을 옷에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내고, 함께 카탈로그 촬영을 했어요.”
문제는 허 디렉터가 ‘기술’에만 탁월했단 거예요. 결과물을 ‘왜’ 만들었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죠.
“전 디자이너보단 기술자에 가까웠어요. 교수님은 제 작품을 보고 뭔갈 예쁘게, 눈에 띄게eye catching 만드는 것만 잘하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셨죠. 그때부터 내가 ‘왜 만드는지’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다니던 시절의 허재영 디렉터와 장 줄리앙. 둘은 함께 협업을 하며 친해졌다. ⓒ허재영 제공
박물관에서 배운 ‘내러티브’의 중요성
졸업하고 들어간 회사에서, 허 디렉터는 ‘내러티브narrative*’의 매력을 배웁니다. 박물관 전시 기획 스튜디오 ‘클레이CLAY’에서 일하며 대영박물관, 런던자연사박물관,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에 프로젝션 매핑projection mapping**을 설치했어요.
*사건의 바탕이 되는 줄거리.
**표면에 2D, 3D 디지털 이미지 혹은 영상을 투사하는 기술.
“박물관 전시 기획에선 ‘접근성accessibility’ 설계가 가장 중요해요. 어린이나 노인도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죠. 가장 좋은 전시는 ‘언어 장벽’이 없는 전시예요. 영상과 소리만으로,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는 전시를 최고로 쳐요.”
예시를 묻자 허 디렉터는 런던자연사박물관을 미디어아트로 꾸몄을 때를 떠올렸어요. 지구온난화를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았어요. 복도에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를 설치했습니다. 사람이 없을 땐 푸른 초원과 하늘 영상이 그림을 채워요. 반면 사람이 자주 지나갈수록 해수면이 오르고 빙하가 녹는 영상이 송출됐죠.
“내러티브는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이야기가 명확할수록 타인이 공감하고 몰입하기 쉽죠. 제 아무리 멋진 아트art도 메시지가 불명확하면, 결코 감동을 일으키진 못합니다.”
허재영 디렉터는 박물관 전시 기획사 ‘클레이’에 들어가, 영국 주요 박물관의 미디어 아트 개발에 참여했다. ⓒ허재영 제공
Chapter 3.
옷은 취향을 드러내는 ‘미디어’다
허 디렉터가 만든 브랜드에도 내러티브 감각이 스며 있어요. 그는 2010년 런던과 서울에서 패션 브랜드 ‘모노로스MONOROS’를 론칭했어요. 일상복에 포인트 그래픽을 덧댄 게 매력이죠. 가디건 가슴팍 주머니를 까만 그랜드 피아노로 프린팅하거나, 바지 뒷주머니엔 살짝 삐져나온 색연필 꾸러미를 그리는 식으로요. 문득 거울에 비친 그래픽을 보고 기분이 환기되도록 디자인 했어요.
모노로스는 밀라노, 파리 패션위크에 소개됐어요. 국내에는 한섬의 편집숍 브랜드인 톰그레이하운드와 무신사를 통해 알려졌죠. 그때만 해도 허 디렉터는 클레이 소속의 직장인이었어요. 어떻게 브랜드를 운영했을까요?
전문가가 모이면 못할 게 없다
허 디렉터는 모든 일을 친구들과 함께 했어요. 동료 디자이너 친구들과 옷을 만들면, 룸메이트였던 일본인 사진가 친구가 화보를 찍었어요. 그럼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공장에 발주를 넣어 제품을 생산했어요.
“제게 협업은 ‘내가 아는 만큼’만 일하는 방식을 뜻해요. 남이 잘하는 분야까지 끼어들면, 필요 없는 잡음만 일어날 뿐이죠. 제 역할은 친구들의 장단점을 읽고, 각자 잘하는 일을 해나가도록 돕는 거였어요. 그렇게 하니까 친구들도 성취감을 얻고, 일에도 속도가 붙었죠.”
조금씩 국내 시장에서의 가능성이 보였어요. 글로벌 패션지 하입비스트Hypebeast가 허 디렉터를 ‘영국과 한국을 넘나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소개했고, 무신사나 힙합퍼 같은 국내 패션지도 허 디렉터를 인터뷰했죠.
2013년, 허 디렉터는 한국을 타깃한 패션 브랜드 ‘스테레오 바이널즈’를 론칭했어요. 한국 패션 시장에 ‘IP 콜라보레이션’으로 이름을 알립니다. 매 시즌 코카콜라, 디즈니, 심슨, 스누피 같은 다양한 IP를 활용해 새 컬렉션을 발매했어요.
“내 성향을 드러내기에 ‘캐릭터’ 만큼 직관적인 수단은 없어요. 바트 심슨Bart Simpson은 반항적인 느낌을, 코카콜라는 자유분방한 느낌을 주는 식이죠. 긴말하지 않아도, 옷으로 나만의 분위기를 전달한다는 점이 좋았어요.”
스테레오 바이널즈가 코카콜라와 협업해 만든 컬렉션. 허재영 디렉터는 색깔이 뚜렷한 브랜드를 패션에 접목해나갔다. ⓒStereoVinyls, 2015 Archive
Chapter 4.
누누 : 친구의 그림을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만들다
2016년 가을, 허 디렉터는 한국에 돌아오기로 결심합니다. 영국에서 인연을 맺은 아티스트, 디자이너들과 서울에서 활동하고 싶었거든요. 오랜 친구 장 줄리앙과의 협업으로 첫발을 뗍니다.
“장은 평범한 일상을 그려내는 일러스트레이터였어요. 퇴근하고 싶은 회사원, 카페에 모여 앉아 대화 없이 스마트폰만 보는 친구들을, 검정 펜으로 빠르게 그려나갔죠. 시트콤 같기도, 풍자적이기도 한 일러스트가 한국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을 거라 생각했어요.”
허 디렉터는 장의 그림을 라이프스타일 제품으로 만들 계획도 함께 세웁니다. 한 팬의 ‘싸인 요청’이 계기였어요. 장이 종종 그리던 눈, 코, 입을 팬의 티셔츠에 그려 넣었는데, 그게 꼭 ‘내 감정을 표현하는 패션’처럼 보인 거예요. 내가 어떤지 이야기할 때, ‘기분’만큼 직관적인 내러티브가 없으니까요.
“옷과 모자, 코트, 맨투맨, 휴대폰 케이스까지 장이 그린 얼굴 표정을 프린트해봤어요. 짙은 눈썹을 잔뜩 찡그리는 표정부터 눈물이 글썽이는 표정, 여유 가득한 표정까지 다양했죠. 마치 한국의 전통문화인 ‘탈’ 같더라고요. 연출하고 싶은 기분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좋았어요.”
허 디렉터는 한국에 장 줄리앙을 두 가지 방법으로 선보였어요. 하나는 한남동 갤러리의 <장 줄리앙 개인전>으로, 다른 하나는 편집숍 ‘비이커BEAKER’에서 판매하는 스테레오 바이널즈와 장 줄리앙의 협업 컬렉션으로.
“패션 아이템으로 작가의 그림을 ‘소유한다’는 개념을 만들고 싶었어요. 예전엔 사람들이 내 옷에 무슨 그래픽이 그려졌는지 그리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 내 티셔츠에 박힌 그림이, 한남동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있다면? 그때부턴 이건 그냥 티셔츠가 아니에요. 작품을 소유하는 새로운 방식이 되는 거죠.”
2018년 론칭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누누. 그래픽 아티스트 장 줄리앙의 그림을 옷과 모자, 와인잔, 스탠드 조명같은 물건에 입혔다. ⓒ허재영 제공
아티스트의 ‘고유함’이 브랜드를 만든다
장 줄리앙과 스테레오 바이널즈의 협업을 계기로, 2017년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누누*’가 출발합니다. ‘입을 수 있는 탈’을 모티브로 만든 스웨트셔츠, 모자가 큰 인기였어요. 그런데 얼마 안 가 사업을 멈춥니다.
*허재영 디렉터의 어린 딸이 장 줄리앙의 아들 루Lou를 ‘누누’라고 부른 것에서 착안했다.
“제품이 잘 팔린 만큼, 장의 고민도 깊어졌어요. 브랜드가 안정적으로 매출을 내려면 일 년에 20~30가지의 제품이 나와야 했거든요. 백화점이나 패션 브랜드의 협업 제안까지 받으니, 장은 본인이 아티스트인지 사업가인지 헷갈려했어요.”
허 디렉터는 2년 동안 브랜드 재정비에 들어갑니다. 장의 자유로운 창작을 위해 원칙을 세웠어요. 첫째, 정말 만들고 싶은 제품만 만든다. 둘째, 서울의 친구들과 디자인부터 생산까지 함께해야 한다.
2022년엔 장 줄리앙의 회고전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었어요. 허 디렉터는 대중에게 ‘작가’로서의 장을 각인시키고 싶었죠. 장이 이십대부터 그린 그림으로 600평 공간을 가득 채웠죠. 몰스킨 노트는 100여권, 드로잉과 스케치는 600여점에 달했어요.
모든 그림은 직관적이에요. ‘WEEKEND(주말)’ 표지판을 들고 히치하이킹 하는 사람, ‘MONDAY(월요일)’ 모양의 사다리를 눈물 글썽이며 올라가는 사람이 대표적이죠. 방문객 사이에선 ‘현대인의 애환을 담은 전시’라며 입소문을 타기도 했어요. 넉 달 동안 약 22만 명이 찾았고, DDP 전시 역사상 상품 매출 1위를 기록했습니다.
“전시의 핵심은 ‘인생을 기록하는 과정’이에요. 장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상과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했어요. 거기엔 현대인의 삶도 함께 녹아있죠. 관람객은 장의 삶을 따라가며 공감하고, 기뻐하고, 슬퍼해요. 어느새 장 줄리앙과 가까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죠.”
2023년 1월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장 줄리앙 회고전 <그러면, 거기> 속 풍경. 장 줄리앙이 20대 때부터 기록한 일기와 드로잉이 삼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허재영 제공
Chapter 5.
만능 재주꾼의 ‘내러티브 감각’을 사는 기업들
허재영 디렉터의 디렉팅 감각은 점차 대기업들 사이에도 알려졌어요. 첫 작업은 쉐이크쉑 고양점 인테리어였어요. 10m 길이의 벽을 수십 개의 캐릭터가 줄을 선 모습으로 채웠죠. 학생부터 노인, 스케이트 보더, 럭비 선수 등. 허 디렉터는 밤낮을 안 가리고 매장 앞에서 북적이던 사람들을 떠올렸대요.
“공간 기획의 시작은 ‘사람들이 이 브랜드를 어떻게 기억하고 경험하는지’ 찾는 거예요. 쉐이크쉑의 전 세계 매장 앞에, 다양한 사람이 줄서는 걸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처럼요. 브랜드를 이해하니까, 고객과 직원을 위한 굿즈와 캠페인 영상까지 기획할 기회를 얻었죠.”
허 디렉터의 협업 작업은 영역을 넘나듭니다. 자동차 문화 브랜드 피치스에서는, 오프라인 공간 도원을 디렉팅했어요. 특히 동선에 신경 썼어요. 반토막이 난 자동차와 나무가 어우러진 정원을 거쳐야만 건물에 들어설 수 있도록 했죠. 스포츠카를 구경하기 전, 브랜드가 전하려는 메시지*부터 경험하게 한 거예요.
*도원은 사자성어 '도원결의'에서 따왔다. 피치스가 8명의 크루들과 의기투합해 시작한 브랜드임을 의미한다.
2020년엔 F&B로 영역을 넓혔어요. 배스킨라빈스와 협업해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출시한 거예요. 당시 캐릭터 제품 일색이던 아이스크림 케이크 라인업을 본 허 디렉터는 새 콘셉트를 제안했어요.
“당시 매출 1위부터 10위까지의 아이스크림 케이크는 모두 캐릭터 상품이었어요. 카카오든 디즈니든, 일단 캐릭터를 넣고 봤죠. 저는 브랜드의 고유함이 캐릭터에 묻히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배스킨라빈스의 특장점은 다양한 맛에 있잖아요. 하나의 케이크 안에 모든 메뉴를 맛보는 ‘종합 선물’같은 케이크를 제안했죠.”
허 디렉터는 민트초콜릿칩, 아몬드봉봉, 체리쥬빌레, 엄마는외계인 등 27가지 대표맛 아이스크림을 네모난 큐브 모양으로 만들었어요. 그런 다음 한 단에 총 9개 맛씩 총 3단을 아이스크림 큐브를 쌓아 올렸죠. 그렇게 만든 ‘골라 먹는 27 큐브 케이크’는, 2020년 출시 첫 해 캐릭터 상품을 제치고 판매량 상위권에 올랐어요.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2017년 문을 연 쉐이크쉑 스타필드 고양점의 벽면, 2018년 열린 ‘뮤제 드 카카오프렌즈’ 전경, 2020년 출시한 배스킨라빈스 ‘골라 먹는 27 큐브 케이크, 2021년 문을 연 피치스 도원의 입구. ⓒ허재영 제공
Chapter 6.
창의적인 일의 시작은 ‘창의적인 사람’ 모으기
허재영 디렉터는 고백해요, ‘늘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순 없다’고. 아이디어가 막힐수록, 각 분야의 뛰어난 사람들을 만나라고 말하죠.
“모든 사람은 각자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는 분야가 있어요. 부동산 잘 보는 친구, 공간 잘 꾸미는 친구, 홍보 잘하는 친구를 한데 모으는 게 모든 일의 시작이에요. 그러면 ‘어떤 결과물이라도 나온다’고 보면 돼요.”
허 디렉터는 책이나 영화보다 ‘사람’으로부터 얻는 배움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사람마다 쌓은 수십 년의 경험과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단 거죠.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 내 힘으로 해보겠다는 분들이 간혹 보여요. 역설적으로 사람을 너무 믿고 의지했다가 실망했던 경험이 있을 가능성이 커요. 같이 일할 사람을 운명 공동체처럼 여기지 말고, 내가 못하는 부분만 채워줄 파트너처럼 모셔야 해요. 그것이 협업의 시작이자 핵심이에요.”
최근 허 디렉터는 미술 전문가 손상우 디렉터와 서울 한남동에 전시 플랫폼 워킹위드프렌드를 열었어요. 동료 작가들은 이곳에서 작업도 하고, 때론 작품을 전시해요.
“뉴욕에서 활동하는 미스치프라는 크리에이티브 그룹은 스스로를 규정짓지 않으면서, 운동화부터 아이스크림까지 만들어 팔잖아요. ‘새로운 일’을 꾸민다는 게 너무 무거운 도전이 아니었음 좋겠어요. 저부터 아티스트와 교류할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의 매력을 알리고 싶어요.”
‘토담’ 작가 전시의 한 장면. 건담, 세일러문 등 우리가 아는 캐릭터를 작가의 표현력으로 재현했다. 허재영, 손상우 디렉터가 전개하는 전시 플랫폼 ‘워킹위드프렌드’에서 한 달 간 전시했다. ⓒWW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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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영 디렉터의 아이디어는 ‘이해력’에서 나온다고 봐요. 브랜드 정체성을 이해하니까, 새로운 제안도 가능한 거겠죠. 저도 참신한 콘텐츠를 제안하려면, 브랜드와 인물의 A to Z를 파고드는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오늘 노트, 밑줄 치고 싶은 허 디렉터의 말을 적을게요.
1. 내러티브는 쉽게 말해 ‘하고 싶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명확할수록, 공감과 몰입이 쉬워진다.
2. 협업은 내가 아는 만큼만 일하는 방식을 뜻한다. 남이 잘하는 분야까지 끼어들면, 필요 없는 잡음만 일어난다.
3. 공간 기획의 시작은 ‘사람들이 이 브랜드를 어떻게 기억하고 경험하는지’ 찾는 것.
4. 같이 일할 사람을 운명공동체처럼 여기지 말고, 내가 못하는 부분만 채워줄 ‘파트너’처럼 모셔라.
롱블랙 피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업에 대한 궁금증이 좀 풀렸나요? 슬랙 커뮤니티에서 노트 후기를 공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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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블랙과 인터뷰하는 허재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그가 최근 전개하는 전시 플랫폼 ‘워킹위드프렌드’에서 이야기 나눴다. ⓒ롱블랙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다니던 시절의 허재영 디렉터(왼쪽 여섯 번째). ⓒ허재영 제공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다니던 시절의 허재영 디렉터와 장 줄리앙. 둘은 티셔츠를 함께 만들며 친해졌다. ⓒ허재영 제공
허재영 디렉터는 박물관 전시 기획사 ‘클레이’에 들어가, 영국 주요 박물관의 미디어 아트 개발에 참여했다. ⓒ허재영 제공
허재영 디렉터는 박물관 전시 기획사 ‘클레이’에 들어가, 영국 주요 박물관의 미디어 아트 개발에 참여했다. ⓒ허재영 제공
스테레오 바이널즈가 코카콜라와 협업해 만든 컬렉션. 허재영 디렉터는 색깔이 뚜렷한 브랜드를 패션에 접목해나갔다. ⓒStereoVinyls, 2015 Archive
스테레오 바이널즈와 장 줄리앙이 협업해 만든 컬렉션. ⓒ허재영 제공
허재영 디렉터는 장 줄리앙과 함께 2018년 ‘누누’를 론칭했다. 장 줄리앙의 그림을 이용해 와인잔, 스툴, 모자 같은 다양한 제품을 만들었다. ⓒ허재영 제공
허재영 디렉터는 자동차문화 브랜드 ‘피치스Peaches’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복합문화공간 ‘도원’을 비롯해 피치스의 영상, 패션, 캠페인 제작에 참여했다. ⓒ허재영 제공
2023년 1월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장 줄리앙 회고전 <그러면, 거기>의 포스터. 네 달 동안 약 22만 명이 방문했다. ⓒ허재영 제공
2023년 1월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장 줄리앙 회고전 <그러면, 거기> 속 풍경. 장 줄리앙이 20대 때부터 기록한 일기와 드로잉이 삼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허재영 제공
2023년 1월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장 줄리앙 회고전 <그러면, 거기>엔 장 줄리앙이 몰스킨 노트에 기록한 그림 일기가 전시돼 있다. ⓒ허재영 제공
2023년 1월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장 줄리앙 회고전 <그러면, 거기>의 전경. ⓒ허재영 제공
2023년 1월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장 줄리앙 회고전 <그러면, 거기>의 전경. ⓒ허재영 제공
2020년, 누누는 2년 간의 재정비를 마치고 돌아왔다. 구움과자 브랜드 콘디토리 오븐과 협업해 ‘까누누레’라는 팝업 브랜드도 전개 중이다. ⓒ허재영 제공
카카오, 대림미술관, 허재영 디렉터와 작가 5명이 함께 준비한 카카오프렌즈 전시 ‘뮤제 드 카카오프렌즈’. 고전 명화와 카카오프렌즈를 섞어 위트 있는 그림으로 재탄생시켰다. ⓒ허재영 제공
쉐이크쉑 스타필드 고양점의 전경. 허재영 디렉터가 기획에 참여했다. 햄버거를 먹으러 줄 선 전 세계 사람들을 벽면에 가득 채웠다. ⓒ허재영 제공
허재영 디렉터가 비알코리아와 함께 만든 아이스크림 케이크 ‘골라먹는 27 큐브 케이크’. ⓒ비알코리아
허재영 디렉터는 현재 전시 플랫폼 ‘워킹위드프렌드’를 통해 작가와 작품을 발굴, 소개하고 있다. ⓒ롱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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