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야구의 심장, 고시엔구장엔 해마다 봄과 여름이면 고교야구를 보려는 야구팬로 인산인해를 이룬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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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의 젖줄은 고교야구다. 그러나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젖줄은 메말랐다. 프로야구가 흥행 가도를 달리는 사이 고교야구 인기는 끝을 모르고 떨어졌으며, 고교야구팀은 갈수록 줄었다. 이제 전국 고교야구팀은 53개교만 남았다. 언제부터인가 ‘이대로 가다간 아마추어 야구도, 프로야구도 공멸하고 말 것’이란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고 있다.
바로 이때. 고교야구가 조용한 변혁에 들어갔다. 아마추어 야구를 관장하는 대한야구협회가 내년부터 학기 중 평일에 개최하는 전국 규모대회를 폐지하고, 토·일요일, 공휴일, 방학기간에 경기를 치르는 ‘주말 리그제’로 전면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학생 선수에게 학습권을 보장하고 동시에 경기력도 향상시켜 학원 스포츠를 정상화하고 야구를 ‘즐기는 스포츠’로 정착하겠다는 협회의 비전은 이제 한국야구의 거대한 목표가 됐다.
<스포츠춘추>에서 1년여 기획 취재로 ‘어째서 고교야구 정상화가 야구계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화두’인지 집중조명했다. <이제는 고교야구 정상화 시대>시리즈는 [1] 프로 진출이 진로의 끝은 아니다. [2] 선수만 있고, 학생은 없다 [3] 일본 고교야구 명문 PL학원고를 가다 [4] 일본야구의 신화, 고시엔대회 [5] Thinking Baseball로 이뤄질 예정이다.
<3편에 이어> PL학원고 3년생 요시카와 다이케. 일본에서 꽤 유명한 야구 유망주다. 야구와 공부를 병행해 마침내 성공한 야구소년이기도 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PL학원고 3년생 요시카와 다이케는 팀의 중심타자다. 175cm의 아담한 키지만, 힘이 좋아 홈런타자로 통한다. 실제로 요시카와는 지난해 2학년생의 신분으로 여름 고시엔대회 오사카지역 예선에서 홈런 5개를 몰아쳤다. 이 기록은 ‘괴물 타자’로 불렸던 나카타 쇼(니혼햄)와 올 시즌 퍼시픽리그 홈런왕 오카다 다카히로(오릭스)가 고교시절 기록한 홈런과 같은 숫자다.
하지만, 요시카와는 나카타와 오카다엔 없는 장점이 있다. 주력이다. 요시카와는 홈부터 1루까지 4.3초에 도달하는 빠른 발을 타고났다. 주루도 적극적이라, 중학시절부터 ‘홈런과 도루를 겸비한 호타준족’으로 꼽혔다.
무엇보다 요시카와의 장점은 수비다. 2학년 때까지 중견수를 맡았던 그는 3학년이 되면서 유격수를 맡았다. 부드러운 포구와 반 박자 빠른 속구는 그가 ‘과연 유격수를 맡은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선수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PL학원고 코치에게 “야구부를 대표할 선수를 소개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두말하지 않고 요시카와를 데려온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4살 때 2살 터울의 형과 캐치볼을 하면서 처음 야구를 접한 요시카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야구부에 입단했다. “좋아하는 야구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다”는 게 요시카와가 야구부에 든 이유였다. 어린 요시카와는 야구복을 입고 나서 마음속으로 두 가지 목표를 정했단다. 그때부터 그의 새해 각오는 1월 1일 훈련을 시작해 12월 31일에는 더 나은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18살 고교생 요시카와가 털어놓은 첫 번째 꿈은 바로 “고시엔대회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고시엔구장을 밟는 건 모든 일본 야구소년들의 꿈이에요. 특히나 저처럼 고교 때까지 야구하는 학생들은 예외 없이 고시엔대회 본선무대 진출을 목표로 합니다. 적당한 설명일지 모르지만, 고시엔대회는 일본 학생야구가 존재하는 목적이고, 일본 학생선수들이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시엔대회를 빼놓고 일본 고교야구를 이야기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시카와는 짐짓 점잖은 말투로 이야기하다가 “지난해 봄, 여름 고시엔대회에서 모두 오사카지역 예선을 통과하며 꿈에 그리던 고시엔구장을 밟았다”며 “우승은 차지하지 못했어도 각각 2, 3회전까지 통과했다”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고시엔 신화’의 시작 세상에 다시 올 수 없는, 그래서 그리운 이름이 있다. '청춘'이다. 고교시절은 청춘 가운데서도 백미다. 많은 일본인은 자신의 청춘을 되새기고자 고시엔구장을 찾는다. 시간이 흘러도 '돌아올 구장'이 있고, '되새길 추억'이 있는 일본은 그래서 야구가 스포츠가 아니라 문화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지금껏 한국야구를 지배한 3가지 신화가 있다. 미 메이저리그와 쿠바야구, 일본 고교야구가 그것이다. 그간 국내 야구인들 사이에서 메이저리그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꿈의 리그로, 쿠바야구는 아마추어 최강의 벽 그리고 일본 고교야구는 수천 개 야구부를 자랑하는 학원야구의 천국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1994년 박찬호가 LA 다저스에 입단하며 메이저리그는 신화가 아닌 현실이 됐고 2008년 8월 23일 올림픽 결승전에서 한국이 쿠바를 3대 2로 꺾으며 영원할 것만 같던 ‘아마추어 최강의 벽’도 무너졌다. 그렇다면 일본 고교야구는 어떨까. 일본 고교야구의 신화를 분석하려면 고시엔대회의 정체를 밝히는 게 우선이다.
우리가 ‘고시엔대회’로 부르는 일본 고교야구대회의 정식 명칭은 선발 고교야구대회와 전국고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다. 흔히 전자를 ‘봄 고시엔’, 후자를 ‘여름 고시엔’이라고 부른다. 봄, 여름으로 나눠 부르는 건 대회가 열리는 시기 때문이다. 봄 고시엔은 해마다 3월 하순이나 4월 초에 개최한다. 이에 반해 여름 고시엔은 늘 8월에 열린다.
대회가 열리는 계절만큼이나 주최사도 다르다. 봄 고시엔은 마이니치신문사, 여름 고시엔은 아사히신문사가 주최한다. 역사는 여름 고시엔이 더 깊다. 1915년 첫 대회가 열렸다. 일본야구평론가 하세가와 쇼이치는 여름 고시엔이 탄생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에 야구가 전해진 건 메이지유신 초기인 1870년대였다.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야구팀이 생기며 이웃의 야구팀들과 친선경기를 벌였다. 지역마다 작은 대회들이 열리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러다 차츰 전국대회의 필요성이 대두했다. 왜냐? ‘어느 팀이 일본 최고의 야구팀인가’란 원초적인 의문이 든 까닭이었다. 이때 신문 부수 확장을 고민하던 아사히신문사에서 이런 원초적인 의문을 가장 먼저 상업적으로 이용할 방법을 찾아냈다. 당시 아사히신문사는 ‘전국규모의 야구대회를 만들면 야구팬의 관심이 신문으로 쏠려 신문사 인지도가 오르고, 마침내 부수도 확장될 것’이라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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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교야구대회는 신문사의 수익증대를 위해 탄생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단일신문사 주최대회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동아일보사의 황금사자대회는 1926년 4구락 연맹전이 전신이다. 이 대회는 동아일보사가 일제강점기 민족의식과 항일투쟁 의지를 고취하려고 창설한 대회였다. 일본 고교대회가 더 체계적으로 발전한 것도 처음부터 상업성에 기반을 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진은 제1회 전국중등학생 야구선수권대회의 시구를 하는 아사히신문사 사주 무라야마 료헤이. 일본의 침략전쟁에 제동을 걸었던 아사히신문의 논조 탓에 무라야마는 극우파로부터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고시엔의 노래'는 반전 가사가 주류를 이룬다. 요미우리신문이 고시엔대회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사진=고시엔 박물관)
1879년 오사카를 기반으로 창간한 아사히신문은 1888년 <도쿄 아사히>를 창간하며 영향력을 간토(관동)지방까지 넓혔다. 그러나 부수 확장은 더뎠고, 경쟁지 요미우리의 성장은 무서웠다. 오사카를 넘어 명실 공히 전국구 신문이 되려면 전 일본인들이 아사히신문을 펼쳐볼 수 있는 전국적인 대형 이벤트가 필요했다. 이윽고, 아사히신문사는….
“1915년 아사히신문사 주최로 오사카 도요나카 운동장에서 제1회 전국중등학교 야구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가 바로 전국고등학교선수권대회, 즉 여름 고시엔의 전신이다.”
아사히신문사는 ‘철저한 준비’를 자신했지만, 신문에 공고를 잘못 내는 통에 예선엔 73교밖에 참가하지 못했다. 다행히 결승전에서 교토2중이 연장 13회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아키타중을 2대 1로 꺾고 우승하며 전 일본인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2회 대회 때부터 출전교와 관중이 증가하자 아사히신문사는 3회 대회부터 효고현 니시노미야 나루오 운동장으로 대회장을 변경해 9회 대회까지 진행했다. 일본야구의 성지로 불리는 고시엔구장을 대회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건 10회 대회부터였다.
고시엔구장은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자라는 곳
초대 여름 고시엔대회가 열린 오사카 도요나카 운동장. 대형 운동장에 새끼줄을 쳐 야구장으로 사용했다(사진=고시엔 박물관)
고시엔구장은 일본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스의 홈구장이다. 그러나 한신이 사용하기 이전부터 고시엔구장은 일본 고교야구의 메카였다.
한국에서 ‘갑자원(甲子園)구장’으로 불리는 이 구장은 오사카의 ‘랜드 마크’이자 일본야구의 ‘성지(聖地)’이며 일본 최고의 ‘매머드 야구장’이다. 그도 그럴 게 수용인원 4만 6천233명의 옥외 야구장은 일본에선 유일하다. 그것도 지은 지 86년이 된 야구장이라면 미 메이저리그에서도 흔치 않다.
한신 타이거스의 광보부(홍보부) 나가요시 도모야 씨는 구장 명에 얽힌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1924년은 십간, 십이지의 각각 첫 번째라 할 수 있는 ‘갑(甲)’과 ‘子(자)’가 60년 만에 만나는 ‘갑자년’이었다. 일본에서 이 같은 조합은 행운을 상징한다. 이해 야구장이 완성되자 사람들은 무사고와 행운을 비는 마음으로 구장 일대를 ‘고시엔’이라 불렀고 야구장 역시 ‘고시엔구장’으로 이름 붙였다.”
1922년 한신전철은 효고현 폐천 부지를 싸게 구매하고서 곧장 전철 레일을 깔았다.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해 막대한 개발이익을 챙길 심산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입주를 하겠다는 이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주택단지와 전철만 완벽하게 갖추면 입주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리라 예상했던 한신전철은 결국 입주자들의 관심을 끌려면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한신전철이 주목한 ‘무언가’가 야구장이다. ‘당시 붐이 일던 야구를 주택가 근처, 그것도 교통이 편리한 곳에서 볼 수 있게 한다면 입주자들이 늘지 않을까’하는 게 한신전철의 계산이었다. 아사히신문사가 “운동장이 비좁아 전국중등학교선수권대회를 제대로 치를 수 없다”며 “새 구장을 지어주면 그곳에 고교야구대회를 유치하겠다”고 유혹하자 한신전철은 곧바로 미 메이저리그 뉴욕 자이언츠의 홈구장 폴로그라운드를 본떠 대규모 옥외 구장을 짓기에 이르렀다. 그곳이 지금의 고시엔구장이다.
![]() 1924년 개장한 고시엔야구장. 수백번의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까지 일본 야구팬을 반기고 있다. 한 일본야구팬은 고시엔구장을 가리켜 "마음의 고향"이라고 했다(사진=고시엔 박물관) |
1924년부터 고시엔구장에서 전국중등학생선수권대회를 치르며 대회명도 자연스럽게 ‘고시엔대회’로 바뀌었다. 1946년 28회 대회를 제외하고 고시엔대회는 모두 고시엔구장에서 열렸다. 이 때문에 고시엔구장을 홈으로 쓰는 한신은 하계방학 때 열리는 여름 고시엔대회 기간엔 1달가량 장기 원정을 떠나야 했다. 과거 한신이 정규시즌 초반 좋은 성적을 내고도 여름에 급격하게 성적이 떨어져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한 것도 장기 원정 탓이 컸다.
그러나 한신은 일체 고시엔대회를 원망하지 않았다. 한신 팬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간명했다. 고시엔구장의 원래 주인은 고교야구고, 고교야구의 번성 없이 프로야구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때 한신은 고시엔구장 철거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지은 지 80년이 지나면서 구장이 낡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같은 자리에 최신식 구장을 지으면 수익이 많이 증가할 것’이란 연구결과가 나온 까닭이었다. 그러나 결국 보수공사에 그쳤다. 한신 관계자는 “일본야구의 상징이자 아마추어야구의 성지를 철거할 수 없다는 여론에 밀렸다"고 털어놨다.
이에 한신은 고시엔대회 장소를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한창 관중이 몰리는 8월에 1달 가까이 구장을 비우는 건 막대한 손해였다. 그러나 이 역시 “아이들이 일본 최고의 구장에서 뛸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 어른들이 할 일”이라는 목소리에 밀려 검토안을 전면 폐기했다.
![]() 고시엔구장의 리모델링 장면. 고시엔구장 주변엔 주차장이 없다. 구장 뒤는 주택가다. 주차장이 없어도 야구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야구장이 공원이자, 박물관이고, 쉼터이기 때문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고시엔대회에서 탈락한 팀의 학생선수들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고시엔구장의 흙을 퍼서 유리병에 담는다. 고교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미에서 손톱에 까만 흙이 스며들도록 정성스레 흙을 푸고 또 푼다. 그걸 보는 어른들은 자신의 고교시절을 회상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언젠가 고시엔구장에서 꼭 흙을 퍼야지 하는 꿈에 부푼다. 어쩌면 학생선수들이 담는 건 흙이 아니라, 패배가 주는 교훈과 살아갈 날의 희망일지 모른다. 어른들이 고시엔구장을 철거하지 않은 것도 아이들의 교훈과 희망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반면 한국은 반대였다. 서울시는 한국야구의 역사와 상징이었던 동대문야구장을 헐면서 대체구장 7곳을 약속했다. 야구계는 극렬반대했지만, 결국 대체구장 약속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유리병에 담을 수 있는 흙이 없다. 죄다 인조잔디다. 아이들이 교훈과 꿈을 담는 걸 지켜볼 제대로 된 스탠드조차 없다. 대체구장은 구장이 아니라 운동장에 불과하다.
460억 원을 들여 동대문야구장을 완벽하게 대체하겠다던 고척구장 역시 2010년 3월 개장이 목표였지만, 굴착기의 엔진 소리는 멈춘 지 오래다. 일본의 고시엔대회와 고시엔구장이 아직도 신화로 존재하는 것은 출전교가 많아서, 관중석이 커서가 아니다. 그저 어른들이 야구역사를 제대로 보존했고,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도심의 멋진 건물과 눈에 보이는 휘황찬란한 조명만이 디자인의 전부라고 믿는 이들이 정작 아이들의 꿈을 디자인하려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100년이 넘는 한국야구가 지금처럼 후세에게 아무것도 보여줄 게 빈털터리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한국야구가 전통과 역사를 간과하는 이상, 고시엔구장은 언제까지고 우리에겐 신화로만 남을 것이다.
'기회의 봄 고시엔', '숙명의 여름 고시엔'
여름 고시엔대회 결승전과 시상식이 끝나자 관중이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있다. 고시엔대회를 보려고 오키나와에서까지 야구팬이 몰리고, 어른들은 아이의 손을 잡고 고시엔구장을 찾는다. 그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역사의 전달법이라 믿기 때문이다(동영상=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여름 고시엔은 열리지 않았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대회는 1946년 패전 1년 만에 다시 열렸다. 이해부터 전국중등학교 야구연맹(전국고등학교 야구연맹의 전신)이 아사히신문사와 함께 공동 주최자가 됐다. 1948년 일본의 학제개혁으로 대회명도 지금의 전국고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로 변경했다. 여름 고시엔대회는 올해로 92회째를 맞았다.
‘봄 고시엔’으로 불리는 선발 고교야구대회는 1924년부터 열렸다. 아사히신문사처럼 부수확장을 노린 마이니치신문사가 주최했다. 그러나 같은 ‘고시엔대회’지만 봄과 여름 고시엔은 엄격한 차이가 있다. 먼저 대회 참가팀 규모와 본선진출 방식이다.
올해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여름 고시엔은 전국 4천28개교가 참가해 47개 광역자치단체별로 예선을 치렀다. 경기는 예선부터 무조건 토너먼트제. 이 중 본선 카드가 2장씩 주어지는 도쿄와 홋카이도를 포함해 49개 학교만 본선에 진출했다. 경쟁률이 무려 100대 1에 달한 셈이었다.
도쿄와 홋카이도만 본선 카드 2장이 주어진 건 두 지역의 고교야구팀 수가 200개교를 넘기 때문이었다. 여름 고시엔은 지역 내 200개교 이상의 야구부가 있을 땐 그 지방에 한해 본선카드를 1장 더 준다. 달리 말하면 야구부가 199개가 있는 지방이나 50개가 있는 지방이나 본선카드는 1장뿐이라는 것이다.
여름 고시엔에 출전한 선수들이 본선만 올라도 ‘가문의 영광’으로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선에 진출하려면 최소 50대 1, 평균적으로 100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 내 야구부가 많으면 유능한 학생선수들이 야구부가 적은 다른 지역으로 야구 유학을 떠나는 것도 ‘고시엔 본선에 조금이라도 쉽게 오르려는 욕심’ 탓이다.
고시엔대회 결승전에 앞서 많은 야구팬이 고시엔구장 안으로 입장하려고 줄을 서고 있다. 동영상 가운데 버스가 떠나고,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드는 장면은 준결승전에서 떨어진 고교 팀의 지역 주민들이 전세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떠나가는 걸 오사카에 남은 이들이 환송하는 것이다(동영상=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이에 반해 봄 고시엔은 예선부터 토너먼트제를 시행하는 여름 대회와는 달리 전국을 10개 블록으로 나눠 지역대회 성적에 따라 출전교를 정한다. 대개 28개교가 지역대회 성적으로 결정되고 나머지 4팀은 ‘선발위원회’가 지역 안배를 고려하거나 ‘21세기 범위’라 하여 봉사정신이 투철한 학교, 지역사회에 공헌도가 높은 학교를 본선 진출팀으로 결정한다.
봄 고시엔대회의 정식명칭이 ‘선발 고교야구대회’인 것도 ‘선발위원회’가 사실상 본선 진출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같은 고시엔대회임에도 여름 대회가 비중이 높고, 야구팬의 관심도 많은 게 사실이다. 학생선수들도 여름 고시엔대회를 통해 고시엔구장을 밟는 걸 더 영광으로 친다.
그렇다면 고시엔대회가 일본에서 전국민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시엔의 인기비결, 전통의 야구장+투혼+자부심+감동+재미 중년의 고교야구팬이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고 전광판을 찍고 있다. 이 사내는 "30년 전부터 해마다 여름 고시엔대회 결승전을 봤다"며 "결승전 스코어가 적힌 전광판을 찍는 건 나만의 전통"이라며 웃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고시엔대회 인기는 프로야구를 능가한다. 공영방송 NHK는 전 경기를 생중계하고, 민영방송사들은 저녁마다 하이라이트를 내보낸다. 서점에는 고시엔대회 관련 서적으로 가득하다. 주요 신문사도 앞다퉈 대회 소식을 1면에 배치한다. 아사히신문의 맞수인 요미우리신문만 예외다. 경기보다 사건, 사고에 집중한다. 배가 아프기 때문이다.
학교와 지역사회의 응원도 대단하다. 학교는 본선에만 진출해도 1년 내내 교문에 현수막을 내건다. 학생들을 대거 동원해 고시엔구장으로 공수하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지역 주민들 역시 버스를 전세 내 원정 응원을 떠난다. 이토록 고시엔 열기가 뜨거운 건 평균 100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본선까지 진출했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 (사진 시계방향으로) 모교를 응원하러 온 오사카 토인고 학생, 오사카 토인고 취주악단을 이끄는 교사, 아사히신문사 고시엔야구 담당기자, 오사카 토인고 학부모. 학생과 학부모, 학교와 언론이 힘을 합쳤기에 고시엔대회는 프로야구만큼이나 탄탄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다 이들은 일본고교야구의 건전한 비판자 역할을 하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2008년 여름 고시엔대회를 취재하러 갔을 때 우승팀 오사카 토인고의 한 학부모는 일가친척을 10명이나 대동하고 고시엔구장을 찾았다. 그는 “일본에서 고시엔대회 본선무대를 밟는다는 건 대단한 영광”이라며 “4천 개교 가운데 오직 49개교만이 진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우리 아이들이 평균 100대 1의 경쟁을 뚫는다면 사회에서도 이보다 더한 경쟁을 용기 있게 헤쳐나갈 수 있다는 뜻”이라며 “아들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감격해했다.
야구평론가 하세가와 쇼이치 씨는 “간사이와 간토 지방의 지역감정을 제외하면 지역구도 대결이 드문 일본에서 고시엔대회는 ‘우리 고장의 우월감과 자부심’을 확인하는 거의 유일한 무대”라며 “지역주민들이 버스를 전세 내 고시엔구장을 찾는 것도 이러한 우월감과 자부심을 눈치 보지 않고 발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세가와 씨는 이와 함께 “일본의 산업화 이후 고향을 떠난 일본인이 급증한 것도 고시엔대회 인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고시엔대회가 처음 생긴 이래 지금까지 관중석에 앉거나 TV 앞에서 시청하는 이들 대부분은 고향팀을 응원하는 실향민들이다. 고시엔대회엔 어쨌거나 고향팀이 한팀은 나오게 마련이니까. 프로팀은 엄밀히 말해 고향팀이라기보다 자신이 취향에 따라 응원하는 선호팀에 불과하다. 고향 고교 팀의 경기를 보며 과거의 추억에 빠지는 건 일본인에겐 소중한 순간이다.”
![]() 고시엔구장에서 맛볼 수 있는 '고시엔 카레'. 이 카레를 먹으려고 일부러 고시엔대회를 찾는 이들도 많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고교야구 열성팬인 무라야마 히로키 씨는 자신이 고시엔대회에 흠뻑 빠진 이유를 ‘감동’으로 꼽았다.
“프로보다 확실히 고교선수들의 플레이는 미숙하다. 투수도, 타자도, 수비수도, 주자도 하나같이 완성된 플레이가 없다. 하지만, 승패에 관계없이 열심히 땀 흘리고, 져도 환하게 웃은 선수들의 얼굴을 보면 감동이 느껴진다. 프로야구에선 볼 수 없는 풋풋한 감동을 고교야구에선 느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무라야마 씨는 한발 더 나아가 “일본은 지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야구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어차피 고시엔대회의 우승팀은 한팀이다. 나머지 팀들은 모두 지고 만다. 그러나 우승팀은 승리의 기쁨만 알지만, 지는 팀은 패배의 고통과 내일의 교훈을 동시에 경험한다. 인생을 살면서 나침반이 되는 것은 결국 성공보다 실패다. 고시엔대회가 우승팀에만 조명을 맞추는 게 아니라 지는 팀도 조명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재일교포 윤노박 씨도 “고시엔대회를 보고 있으면 심장이 뛰는 감동을 한다”고 했다. “‘목숨 걸고 열심히 하는 일들이 점점 줄어드는 나이가 됐을 때 고시엔대회에서 패하고서 우는 아이들을 보면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윤 씨의 진심이다.
고시엔대회 자체의 재미도 인기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나 응원이다. 아사히신문 나카이 고지 기자는 “여름 고시엔대회에 출전하는 49개교의 응원이 모두 제각각”이라며 “응원전이야말로 고시엔의 백미”라고 강조했다.
사실이다. 고시엔대회의 응원전만을 분석 평가하는 책이 있고, 단순히 응원전을 보려고 고시엔구장을 찾는 이들도 많다.
고시엔대회의 가장 큰 볼거리는 응원이다. 과거에는 학생들을 억지로 동원하거나, 취주악단에게 연습을 강요했지만, 2000년 이후엔 조금씩 자취를 감췄다(동영상=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2008년 여름 고시엔대회 결승에 진출한 오사카 토인고는 응원단만 5백 명 가까이 됐다. 전교생이 1천 명임을 고려하면 절반이 응원하러 구장을 찾은 꼴이었다. 그러나 구장에서 만난 오사카 토인고의 한 학생은 “자매 중학교에서도 응원을 나왔다”며 “중3과 고1 학생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응원단은 주로 알프스 석이라고 불리는 가파른 내야 관중석에 앉아 목이 터지라 응원전을 펼쳤다. 이 응원을 주도하는 이들은 학교 취주악단이었다. 100명가량 되는 오사카 토인고의 취주악단은 트럼펫과 북 등을 치며 학생들의 응원을 독려했다. 응원단 양편으로 나란히 선 치어리더도 쉴 새 없이 응원도구를 흔들며 응원전에 가세했다.
따지고 보면 한국 고교야구대회도 결승만 되면 양교 응원전이 펼쳐진다. 동문까지 합세하면 한국의 응원전도 꽤 볼만하다. 하지만, 다소 다른 게 있다. 그게 뭘까. 고시엔대회의 응원전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오사카 토인고의 학생들은 “야구를 좋아하지 않으면 응원전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입을 모았다. 취주악단의 학생들도 “야구부 응원을 위해 주말에 이틀 정도 연습했다”며 “누가 시켜서라기보다 고생하는 친구들에게 멋진 음악을 들려주려고 자발적으로 손발을 맞췄다”고 말했다.
시상이 끝나고 교가가 울리는 가운데 고시엔구장을 길게 도는 게 여름 고시엔대회의 전통이다. 일본 고교야구는 전통을 긍정적으로 활용해 계속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동영상=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학생선수들의 청춘을 불사르는 투혼과 학교, 학부모, 동료 학생의 열띤 응원, 고교야구를 보며 추억을 되새기는 야구팬들의 성원으로 올해 여름 고시엔대회는 15일간 84만 4천 명의 관중을 끌어모았다. 하루마다 7만 명이 고시엔구장을 찾은 꼴이었다. 어째서 고시엔대회를 ‘꿈의 무대’라고 부르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시엔에 목숨을 걸면서도 수업 결손이 없는 이유 오사카 PL학원고 야구장 한편에 길게 누워있는 야구배트들. PL학원고 학생들이 이 배트를 연필처럼 생각한다. 왜냐? 야구도 공부의 일환이라고 보는 까닭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PL학원고 중심타자 요시카와의 두 번째 꿈은 프로진출이었다. 요시카와는 자신의 롤모델인 다쓰나미 가즈요시(니혼TV 해설가)처럼 뛰어난 실력과 훌륭한 인격을 갖춘 프로야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주니치에서만 22시즌을 뛰며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3개 포지션에서 골든글러브(유격수, 2루수, 3루수)를 수상한 다쓰나미는 PL학원고 출신이다.
요시카와는 “다쓰나미 선배도 고교시절 나처럼 PL학원고의 주장이었다”고 말하고서 “어느 팀이든 상관없이 지명만 해준다면 프로에서 꼭 뛰고 싶다”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고 싶은 팀이 있을 것 아니냐”는 질문엔 또래 고교생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만약 운이 따른다면 다쓰나미 선배가 입단했던 주니치 드래건스에 가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렇다고 요시카와가 프로진출을 위해 야구에만 올인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요시카와는 학급에서도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다. 어렸을 때부터 ‘야구와 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았기 때문이다.
“초교 때부터 ‘운동선수라도 공부는 꼭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컸다. PL학원고에 입학하고서도 훈련이 피곤해 졸 때마다 감독님은 ‘야구만 하면 안 된다. 미래를 봐서 공부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래야 다쓰나미 선배처럼 야구선수로 대성할 뿐만 아니라 훌륭한 사회인이 된다’고 하셨다. ‘혹여 부상으로 프로진출이 좌절됐을 때도 대학에 진학해 새로운 인생을 접할 수 있다’는 게 주변의 조언이었다. 그때마다 힘들긴 해도 다시 책상에 앉아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요시카와는 “예전엔 공부하지 않아도 야구만 잘하면 대학에 입학한다고 들었지만, 요즘엔 공부하지 않는 학생은 대학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며 “고시엔대회가 코앞에 닥쳐도 밤마다 교과서를 펼치고 공부해야 좋은 대학으로 진학한다”고 말했다.
![]() PL학원고 야구부의 연습장면. 단지 야구가 좋아서 야구부에 든 학생들도 많다. . PL학원고처럼 명문 야구고도 취미반 야구부원들을 수용한다. 4천개교 가운데 PL학원고처럼 정규연습을 하고 주전멤버가 있는 학교는 1천개교 정도다. 그러나 간혹 동호회 수준의 고교야구팀에서 프로야구 선수를 배출하기도 한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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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제아무리 야구를 잘해도 학업성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명문대에 진학할 수 없다.
<슈칸베이스보루(주간야구)> 야나모토 모토하루 편집부국장은 “게이오, 와세다, 간사이대 등 명문대학은 야구선수라도 내신성적과 작문실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입학할 수 없다”라며 “이들 학교의 학생선발기준은 ‘이 학생이 야구로 어느 정도 학교를 빛낼 것인가’가 아니라 ‘이 학생이 얼마나 강의에 잘 따라올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대학이 학교의 명예를 빛내는 일보다 학생 개인의 학업성취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명문대의 학생선수 선발기준이 명확하다 보니 ‘뒷돈 스카우트’나 ‘뇌물 수뇌’같은 학원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처럼 잘하는 선수를 입학시키는 조건으로 같은 학교의 그저 그런 선수를 받는 이른바 ‘끼워놓기’도 불가능하다.
야나모토 씨는 “고교야구 정상화는 고교가 아니라 결국, 대학의 공정성과 의지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고 강조했다.
사실 일본의 고교야구선수들은 공부할 환경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 일본 고교는 야구부원이라도 정규수업을 모두 받도록 한다. 평일 야구부 훈련은 정규수업 후다. ‘강훈’으로 유명했던 PL학원고도 지금은 하루 2시간 연습이 전부다. 밀린 훈련은 주말에 한다.
연맹도 학생선수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봄, 여름 고시엔대회를 방학기간에만 한다. 방학 이전에 열리는 예선전은 주말을 이용한다. PL학원고처럼 토요일까지 수업하는 학교는 주로 일요일에 경기한다. 연맹에선 이미 각 학교의 사정을 파악해 경기 배정을 연맹이 아닌 학교의 편의를 기준으로 해 짠다. 만약 평일 오전 경기를 치른다면 연맹 회장부터, 학교장, 감독까지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 PL학원고 야구부원들은 오후 3시30분 정규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숙사에서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5km나 떨어진 야구장으로 4시까지 도착해야 한다. 한 학생이 음료수 가방을 메고 바쁘게 야구장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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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제재가 없다손 쳐도 평일 오전 경기를 강행할 일본 고교야구 지도자는 없다. 지도자 대부분이 야구감독 이전에 교사이기 때문이다. 연맹의 다나베 가즈히로 상임이사는 “일본의 4천 개 고교야구부 감독 가운데 90%가 현직 교사”라고 밝혔다.
“90%에 달하는 고교야구 감독이 교원자격증을 보유한 현직 교사들이다. 학교에서 국어, 영어, 수학교사를 하면서 야구부 감독을 맡는 게 보통이다.”
현직 교사라고 하지만, 이들은 대개 학생 시절 선수로 뛰었던 이른바 ‘선출’들이다. 프로진출이 좌절되고 제2의 인생을 고민하는 대학시절 힘들게 교원자격증을 획득한 이들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10%의 감독은 누굴까.
다나베 상임이사는 “4%는 학교 교직원, 나머지 6%는 정말 야구만을 위해 학교로부터 영입된 지도자들”이라고 했다.
PL학원고의 고노 아리미쓰 감독은 4%에 해당하는 이다. PL학원고 출신으로 1980년부터 모교 코치로 일한 고노 감독은 학교재단에서 일하는 교직원이다. 코치 시절 기요하라 가즈히로, 구와타 마쓰미 두 이를 지도했던 고노 감독은 “고교시절 함께 운동했던 친구들 가운데 대학에 진학해 교원자격증이 딴 이가 많다”며 “‘평생 야구밖에 모르는 내가 뭘 하겠어’하며 자신과 세상을 원망하고 포기하는 건 야구를 잘못 배운 이들이나 하는 나약한 행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노 감독은 “냉정하게 말해”라는 단서를 달고서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 가운데 ‘난 야구밖에 모른다’고 말하는 이는 야구계에서 떠나야 한다”며 그 이유로 “야구밖에 모르는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니라 기능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야구밖에 모르는 기능인에게 아이들이 야구 말고 더 배울 게 뭐가 있느냐’는 소리다.
![]() PL학원고의 전용야구장 전경(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연맹 다나베 상임이사는 “고교 감독 가운데 야구를 못 가르치는 이가 있으면 새로운 감독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동문 야구인이 찾아와 감독 옆에서 후배들을 지도한다”며 “일본에서 고교야구 감독은 ‘야구 기능을 가르치는 기능인’ 이전에 아이들의 지덕체를 기르는 ‘선생님’이란 의식이 강하다”고 강조했다.
현직 교사의 야구부 감독 겸임으로 학생선수들의 학습권은 거의 완벽하게 보장된다. 또한, 현직 교사라, 고용과 급여가 안정되다 보니 성적에 구애받지 않고 ‘야구도 교육의 일환’이란 기본이념에 충실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일본은 교사나 교직원이 아니라 야구 지도만을 위해 감독을 맡은 이라도 학교가 정식 계약을 맺어 신분과 급여를 보장한다. 그래야 안정적으로 야구부를 이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 대다수 고교야구 감독은 교장과 이사장의 한마디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신세다. 감독과 코치 급여가 학부모들의 주머니에서 나오기 때문에 ‘야구도 공부의 일환’이라는 원칙은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오직 전국대회 우승횟수와 고3 선수들의 프로, 대학진학률에 따라 감독 수명이 결정될 뿐이다.
지금도 최저생계비는 고사하고 월 100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급여를 받고 아이들과 24시간 동고동락하는 코치들이 수두룩하다. 이 코치들에게서 아이들의 지덕체 성장을 책임질 선생님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른다.
한국 고교야구 실정을 잘 아는 다나베 상임이사는 뼈 있는 한마디를 했다. “허기를 느끼지 않는 고양이 앞엔 생선을 놓아도 무방하다. 고양이가 생선을 물어뜯는다고 비난하기 전에 고양이의 위장이 얼마나 차 있는지 살펴보는 게 먼저다.”
고교야구 정상화, 얻는 것과 잃는 것
![]() 고시엔대회는 주전선수만이 주인공이 아니다. 관중석에서 열띤 응원전을 펼치는 후보선수들도 주인공이다. 그라운드를 밟든 그렇지 않든 이들이 고시엔대회를 '꿈의 무대'로 생각하는 건 학창시절 가장 빛나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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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고시엔 동시 석권과 다수의 유명 야구선수를 배출하며 역대 최강의 고교야구팀으로 불리던 PL학원고는 2000년 ‘야구도 교육의 일환이라는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걸며 변혁에 들어갔다.
먼저 야구부 전용 합숙소를 없앴다. 훈련시간 연장을 위해 변법으로 운영하던 마지막 교시 ‘체육수업’도 일반수업으로 대체했다. 지방 중학교 선수에게 장학금을 주고 스카우트하는 관례도 과감히 포기했다. 대신 학생선수들과 일반 학생을 같은 기숙사에 묵게 했고, 체육반과 일반반을 합쳐 아이들이 한데 어울리도록 했다. 선수 수급도 주로 지역 내 중학교 선수를 대상으로 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변화는 성공을 거둔 듯했다. 학생선수 사이에서 벌어지던 폭력이 차츰 사라졌다. 학생선수들의 학업성적도 몰라보게 높아졌다. 일반학생과 어울리면서 교우관계도 넓어졌다. 지역 내 중학교 선수들의 유입으로 자부심도 더 강해졌다.
2000년 이후 PL학원고 고 3 학생선수의 명문대 진학률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지난해 PL학원고 야구부 졸업생은 100% 전원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빛의 이면엔 그림자도 존재한다. 먼저 현실적인 문제다.
PL학원고는 재단에서 야구장을 지어준 것 외에는 특별히 지원하는 게 없다. 지원을 해도 교내 10개 운동부를 평등하게 지원한다. 돈이 많이 드는 야구라고 예외는 아니다.
PL학원고 구사노 유키 야구부장은 “일본도 야구선수를 아들로 둔 학부모는 부담이 크다”며 “학부모의 부담을 최소화하려 노력하지만, 한계가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운영비를 동문과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후원회에서 지원받는다고.
문제는 후원회 지원이 주로 고시엔대회 전후로 몰린다는 것이다. “고시엔대회 본선에 진출하면 후원회에서 글러브며 배트 등 필요한 야구장비를 그때그때 지원해주지만, 본선 진출이 좌절되면 장비와 기부금을 받는 게 어렵다. 야구부 성적이 좋지 않은데 지원을 해달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고시엔대회 성적에 따라 지원규모가 바뀌는 건 큰 아쉬움이다.” 구사노 씨의 안타까움이다.
![]() PL학원고 학생 사이에서 야구부는 자긍심의 상징이다. 사진 속의 두 학생은 "야구부원이라고 친구들을 못 살게 굴거나 괴롭히는 경우는 없다"고 단언했다. 되레 "야구부원들이 더 공부도 열심히 한다"며 "그 친구들 때문에 부모님이 '너희도 야구하라'는 성화에 시달린다"며 멋쩍게 웃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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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구사노 씨의 근심은 야구부의 성적 하락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1999년 추계고교대회 우승과 봄 고시엔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던 PL학원고는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봄 고시엔 대회 지역예선에서 모두 떨어졌다. 여름 고시엔 대회는 2000년부터 올해까지 본선 무대에 진출해도 3회전 이상을 통과하지 못했다.
오사카를 넘어 전국 최고의 강팀이었던 PL학원고의 기백은 이제 찾을 수 없다. 구사노 씨는 “PL학원고의 전력약화는 비단 일개 고교야구부만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어디서 들은 소리였다. 그랬다. 일본 고교야구연맹을 방문했을 때다. 그곳에서 다나베 상임이사로부터 똑같은 소릴 들었다. 당시 다나베 상임이사는 “일본과 한국 고교야구 정상팀이 맞붙어 7경기를 치르면 2승5패 혹은 3승4패로 일본이 열세”라고 말했다. 그는 “두 나라 고교야구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10년 내 일본이 1승6패로 절대적 열세를 나타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이유는 간명했다.
“일본 고교야구의 경기력이 해마다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은 “갈수록 쓸만한 신인들이 줄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과거 같으면 고 1때 완성했을 기술을 지금은 3학년이 되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센트럴리그의 모 스카우트는 “고시엔대회 경기력도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예전엔 ‘괴물선수가 떴다’고 하면 프로에서도 즉시 전력감이었지만, 지금은 프로에 입단해도 2군에서 2, 3년은 보내야 겨우 1군에 오른다”며 “일본 고교야구의 질적 퇴행이 심각한 수준에 다다랐다”고 걱정했다.
![]() 고시엔구장 1층에 마련된 '일본고교야구 박물관'. 한국 아마추어 야구의 중요한 사진과 기록들은 목동야구장의 어두운 창고에서 가는 숨을 쉬고 있다. 야구를 기록의 스포츠라고 말하지만, 정작 한국야구에선 기록도 없고, 전통도 없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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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칸베이스보루(주간야구)> 야나모토 모토하루 편집부국장은 베이징 올림픽과 제2회 WBC에서 일본이 한국에 졌을 때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던 이다. 지금도 그의 견해는 달라지지 않았다.
“1990년대부터 일본 학원야구는 ‘야구도 교육의 일환’이라는 초심으로 돌아왔다. 훈련량은 갈수록 줄고, 학생선수들의 학습량은 많아졌다. 야구의 기본기가 완성되는 중학교는 야구부라기보다는 이젠 차라리 동호회에 가깝다. 무뎌진 정신력은 말할 것도 없다. 야구가 어느 정도 완성되는 시점인 중·고교시절에 충분히 몸을 만들고 기술을 연마하지 않아선지 프로에 가도 실력은 크게 늘지 않는다. 2000년 이후 빙하가 녹듯 일본프로야구의 저력과 실력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국 학원야구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지금도 한국에서 야구는 엘리트 스포츠다. 53개교 전체가 엘리트 야구부다. 소수정예 야구부원들은 오전 수업을 마치면 그라운드로 몰려나와 온종일 훈련한다. 평일 오전에도 대회가 열리고, 학생선수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야구에 매달린다.
이런 시스템이 계속 되는 한, 일본의 고교야구팀이 4천 개 이상이고, 한국 고교야구팀이 53개교라고 해도 일본은 절대 한국에 이길 수 없다. 역사적으로 다수의 오합지졸은 소수의 전사에게 지게 마련아닌가.”
하지만, 야나모토 편집부국장은 일본야구의 질적 하락을 우려할 뿐, 이러한 현상을 ‘잘못됐다’고 평가하진 않았다.
“엘리트 스포츠로서의 야구는 조금씩 실력이 떨어지고 있지만, 전 국민이 즐기는 사회체육으로서의 야구는 점점 강해지고 있다. 좋은 예로 2000년 일본 고교야구가 변화를 시도한 이후 2001년 처음으로 일본 고교야구연맹에 등록한 선수가 15만 명을 넘었다. 올해는 무려 16만 8천 명이 선수로 등록했다. 경식 야구부가 있는 고교야구팀도 올해 4천115개로 일본 고교야구 실력이 정점에 있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비해 100개 이상 늘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국가대항전에서 승리하면 전 국민에게 기쁨을 안길 수 있다. 그러나 전 국민이 보는 야구가 아니라 스스로 경기의 일원이 돼 그라운드에서 즐긴다면 날마다 기쁨을 느끼고 건강도 챙길 수 있다. 자, 무엇이 야구의 빛이고 그림자인가. 엘리트 야구가 빛이고, 사회체육이 그림자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 2008년 여름 고시엔 대회가 열렸을 때 대회본부실엔 날마다 관중수가 적혔다. 회계를 투명하게 하겠다는 일본고교야구연맹의 의지와 프로야구 못지 않은 인기를 과시하려는 두가지 목적이 숨어 있다. 8강이 아니라도 경기마다 4만명 넘게 관중석을 채우는 일본 고교야구의 열기는 부러움 이상이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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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PL학원고에서 윤리교사와 야구부장을 겸임한 구사노 씨는 과거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겼다.
“기요하라는 역동적인 선수였다. 책상에 앉아있기보다 밖에 나가서 뛰노는 걸 좋아했다. 하지 말라는 건 다하고 다녔지만, 야구할 때만은 ‘저 녀석이 기요하라인가’싶을 정도로 집중했고, 사회에 나가서는 듬직한 어른이 됐다. 후쿠도메 고스케도 학교 다닐 때는 못된 짓을 많이 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기요하라처럼 성인이 돼선 몰라보게 변했다. 마쓰이 가즈오는 늘 부상에 시달린 학생이었다. 고교시절 원체 야구실력이 좋아 ‘투수와 야수’ 사이에서 참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프로 입단 뒤 야수로 전향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가장 생각나는 선수는 구와타 마쓰미다. 구와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방과 후면 묵묵히 운동장을 돌았다. 늘 같은 시간에 늘 같은 양의 훈련을 하고서 합숙소에 들어가선 불을 켜놓고 책장을 넘겼다. 수업 때도 매우 열의가 높은 학생으로, 나보다 남을 먼저 위하는 학생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나보고 ‘대선수들을 키워서 좋겠다’며 ‘그 선수들이 학교를 찾아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 얼마나 뿌듯하겠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학생들은 따로 있다.”
그들이 누군지 궁금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PL학원고 출신의 대선수가 또 있단 말인가.
“유명선수가 되지 못했어도, 사회에서 낙오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충실히 사는 졸업생들이다. 그런 학생들을 만날 때면 ‘내가 아이들을 바로 가르쳤구나’하는 생각에 보람을 느낀다.”
![]() 요시카와 다이케는 손으로 심장을 쥐었다. '심장이 터질 때까지 야구를 하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지금 한국 고교야구에 필요한 건 아이들이 심장이 터지도록 야구할 수 있는 구장과 아이들의 심장을 아프게 하지 않을 어른들의 반성과 각오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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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노 씨는 낯선 외국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부 야구인은 일본야구의 질적 하락을 경고한다. 일본야구가 과거처럼 스파르타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야구는 야.구.인.의 것.이 아.니.다. PL학원고 야구부원 60명 가운데 프로에 진출하는 선수는 극소수다. 대부분의 선수는 19, 20살에 야구를 그만둔다. 현재 일본 사회는 취업도 힘들고, 난관을 헤쳐나가기에 어려움이 많다. 야구를 그만둔 아이들이 야구가 아니어도 먹고살 수 있는 기술과 지혜가 필요하다.
일본은 물론이려니와 이웃나라 한국도 왜 우리가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는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그 많은 스포츠 가운데 아이들에게 야구를 권유하는 건 야구가 머리를 써야 하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 종목이 아니라, 투수와 포수 혹은 야수와 타자가 일체감을 이뤄야 목적을 달성하는 팀워크의 스포츠인 까닭이다. 두뇌능력을 기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감을 고취하는 야구야말로 가장 사회적인 스포츠인 것이다.
그라운드에서 우리끼리 온종일 야구만 한다고 치자. 그것은 머리도 죽고, 인간관계도 끊기는 반(反)야구적인 발상이다. 야구로 애국을 달성하고 싶은 이들에게 묻고 싶다. ‘건강하고 영민하며 인간성 좋은 아이들을 키워내는 것 이상의 애국이 어디 있느냐’고 말이다."
- 취재가 끝난 뒤 PL학원고의 요시카와 다이케가 주니치 드래건스에 상위순번에 지명돼 프로에 입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부와 야구를 병행했던 요시카와는 프로선수로 뛰면서도 지금까지의 스텝처럼 공부를 함께 할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