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 장에서 구한 책들 : 《인생잡기》와 《줄장미》
횡성 둔내 근처에 전원주택을 지은 지는 2년 반이 됐고, 본격적으로 아주 주소를 이리로 옮겨 산지는 한 일년 즈음 된다. 뉴욕에서 10년 동안 살았던 아내가 귀국하면 번화한 서울보다는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원하기도 하였고, 또 내가 갑작스레 몇 년전 비교적 큰 수술도 하여 요양차 해발 6백미터의 산중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시골에 살면 5일장 보는 것이 큰 재미이다. 내가 사는 근처의 둔내 장은 0․ 5일이 장인데 규모가 작아 큰 재미가 없어서 오늘은 1 ․ 6일인 횡성 장으로 갔다. 내 고향인 양양 장도 굉장히 큰데, 횡성장은 규모가 대단하다. 아내와 함께 둘러보면서 보니 막걸리를 파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한 사발씩 들기에 나도 가서 주인장에게 무엇으로 만든 것이나 물어 보니 조껍데기가 아니고 조 알갱이로 만든 동동주란다. 한 잔에 1,000씩 주고 아내와 낮술을 즐겼다. 고구마 한 상자, 사과 한 상자를 사고, 수수전병과 백설기 등을 사서 먹으며 다니는데, 요즈음 종편에서 한창 건강프로에서 소개하는 노루궁뎅이 버섯과 참나무 꼭데기에 나는 겨우살이가 있어서 각각 1만원어치를 샀다.
옛날 화로, 요강, 도자기 등 만물을 노상에 펼쳐 놓고 파는데 한 귀퉁이에 보니 오래된 고서들이 있다. 그 중에 내가 학창시절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 원로 언론인인 김을한 저서의 《인생잡기》가 있다. 마침 아내가 다른 것을 보러 간 사이기에 5,000원에 얼른 샀다. 아내는 내가 헌책을 집에 사오는데 질려 책 사오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새 책도 아니고 냄새나는 헌책을 사오니 그럴 만도 하다. 그 옆에 보니 조병화 시인이 추천서를 쓴《줄장미》란 시집이 있기에 3,000원에 구입했다. 시집은 수집품목이 아닌데 나이를 먹으니 한편의 시에 감동과 공감을 하게 된다. 그런데 왠일인지 아내는 내가 산 책을 보고도 아무 소리를 안한다. 아마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 좋은 반찬거리들을 싸게 사서 기분이 업된 상태라 묵인하는 것 같다.
즐겁게 장날 구경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횡성온천이 있어서 들어가려고 하니 그곳이 어답산 등산로 입구이다. 장에서 주점부리로 과식을 해서 소화를 시킬 겸 500여 미터 등산을 했다. 제법 가파르다. 御踏山 유래를 보니 진한의 태기왕을 잡으려 신라의 박혁거세가 이 산을 밟아서 이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박혁거세는 내 성의 시조가 아닌가. 다음번에는 정상 2.5키로라고 하니 제대로 등산을 해야겠다.
횡성온천은 중알칼리 성분의 온천인데 시설은 동네 목욕탕과 같으나, 사람들이 분비지도 않고 수질은 비교적 좋다. 한 시간 피로를 풀고 나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동네 사람이라 목욕료도 1,000원 깍아 준다.
집에 돌아 와 구입한 《인생잡기》를 잠깐 보니 1956년에 일조각에서 출간하였다. 나와 나이가 같다. 일조각은 십 여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최고가는 인문학 출판사로 아무나 쉽게 출판을 못하던 곳이었다. 내 지도교수인 김용덕교수님이 80년대 중반에 《한국제도사연구》란 책을 이곳에서 출판하게 되어 내가 대학원생으로 심부름을 여러 번 간 적이 있다.
잠시 읽어보니 재미가 있어서 계속 읽게 된다. 일제시대때 부터 기자생활을 하신 분이라 3.1절 이야기, 6.25전쟁시 겪은 사연 등등 이 시대에 대한 또 다른 역사증언이다. 재미있는 내요 한토막을 소개하면 1927년에 함경도 장진에 취재를 하러 가야하는데 추운 곳이라 기자가 내복을 입고 가야 하는데 신문사가 경비가 없어서 당시 조선일보 주필인 그 유명한 민세 안재홍선생이 기자를 자기 집에 데려가 당신이 입던 내복을 주어서 입고 갔다고 한다. 식민지시기에 참으로 우리가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김을한선생에 대한 것을 알고자 인터넷 검색을 하니 아래의 기사가 뜬다. 윤성근이란 작가인데 책을 수집도 하면서 글도 쓰고, 서점도 하는 매니아인 모양이다. 나도 책수집벽이 심한편인데, 세상에 高手가 참 많다. 그 글을 아래에 소개한다.
<줄 장미>는 시간이 없어 아직 안 읽어 다음에 소개하고자 한다.
시골의 오늘 하루가 길었다. 논문 마감 기한이 지나 마음은 급한데 잡문에 빠지다니...
《주역》으로 오늘의 일진을 풀면 “靜中動”이다.
2014년 2월 21일
농월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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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람들》, 김을한, 삼중당, 1961년
덕혜옹주를 찾아간 신문 기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야기’에 빠져있는 사람이 많다. 책이라는 건 어쨌든 무언가에 대해서 풀어서 이야기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귀로 듣는 것도 좋지만 천천히 눈으로 글자를 보면서 책 속 내용을 상상해보는 재미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책 속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흥미진진하다면 밤을 새워서 읽고 또 읽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게 그런 사람들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로 사람들 관심을 끄는 건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아마 책이라는 물건이 생긴 이후로 계속 그래왔지 않았을까? 호메로스 같은 사람이 쓴 방대한 서사시를 생각해보면 당시에도 얼마나 사람들이 ‘이야기’라는 것에 끌렸는지 이해가 된다. 지금 보면 조금 지루하기도 한 그런 모험담이 그때는 굉장한 베스트셀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모험담이라고 하는 것이 대개 사소한 사실을 부풀려서 멋있게 보이도록 썼기 때문에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더구나 그렇게 오래 전이라면 TV나 신문 같은 보도 매체도 없었기 때문에 모험담이나 영웅 서사시 같은 경우 더욱 황당하게 꾸며낸 이야기를 썼을 가능성도 있다. 작가가 책에 쓰기를, “오디세우스가 바다에서 포세이돈을 만났다.” 라고 하면 그게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신과 인간이 겁 없이 맞장을 떴다는 얘기인데, 이게 진짜라면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확인할 수 없는 일일수록 더 큰 허세를 부리는 모양이다. 하긴 남자들이 간혹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 하는 것도 어는 정도는 허세가 아닌가.
때로 사람들은 그런 얘기가 허풍인줄 알면서도 좋아한다. 그래서 잘 만든 무협지나 로맨스 소설은 시간이 가도 인기가 식지 않는가보다. 아니면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남의 얘기 엿듣는 걸 좋아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사람들이 책에 빠져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믿는다. 더구나 그게 유명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궁금증은 더욱 커지는 법이다.
언론인 김을한(金乙漢, 1905-1992)은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잘 알고 있었던 걸까? 일제강점기시절 조선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으로 매일신보사, 서울신문(지금의 서울신문과는 다른 신문사)이사까지 지낸 그는 후에 출판사를 만들어 유명한 인물들에 대한 전기를 여러 권 펴냈다.
당시에 기자라고 하면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엘리트’들이었던 것이다. 국운이 기울고 일본이 우리 주권에 노골적으로 간섭하던 시절 기자는 아무나 될 수 없는 직업이었다. 가슴 아픈 역사가 시작되려는 1900년대 초 서울에서 태어난 김을한은 고등학교까지 서울에서 다니다가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으로 유학한 후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학업을 포기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와 이듬해 조선일보사 사회부 기자가 된다. 이렇게 시작한 언론인 생활은 1960년대 중반 일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계속 된다.
이런 김을한이 지금 사람들 입에 다시 오르내리는 이유가 있다. 얼마 전 서점에 나온 후 크게 인기를 얻은 《덕혜옹주》(다산책방, 권비영, 2009)가 기자 김을한과 적지 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와 신문기자 김을한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당시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다. 이건 조금 있다가 정리해서 말하기로 하고 우선은 김을한이 쓴 책 이야기를 해보자.
앞서 말했듯이 김을한은 사람들 심리를 잘 알았던 탓인지 유명한 사람에 대한 전기나 뒷이야기 담은 책을 몇 권 펴내 재미를 봤다. 그 중에서도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1850-1927) 선생의 일화를 엮어 만든《월남선생일화집(月南先生逸話集)》(대한민주여론협회大韓民主與論協會, 1956), 해방의 감격에서 환국에 이르는 영친왕(英親王, 1897-1970)의 슬픈 역사를 엮은 《인간 이은(李垠)》(한국일보사, 1971) 등은 꽤 널리 읽혔다. 하지만 책을 펴낸 당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건 역시 《그리운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운 사람들》은 4.19 이전 연합신문에 연재했던 토막글을 모은 것으로 앞부분 몇 편은 1950년 한국 전쟁을 전후해서 납북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뒤쪽은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예술인과 독립 운동가를 소개하고 있다. (1)아름다운 책 표지 그림은 김기창(金基昶, 1913-2001) 화백의 솜씨이며 장정은 역시 화가이며 김기창 화백의 아내인 박내현(朴崍賢, 1920-1976) 여사가 했다.
책을 펴낸 당시가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만 10년이 되는 터라 아직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북으로 간 인사들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있을 때다. 더구나 김을한은 기자생활을 하면서 이런 사람들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꽤 자세하게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양념처럼 들어가 있는, 유명인들의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을 읽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책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 이름을 보자면 누구든지 읽어보고 싶은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다.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1883-1950) 선생을 시작으로, 우리에게는 홍난파(洪蘭坡)로 잘 알려진 작곡가 홍영후(永厚, 1898-1941, ‘난파’는 그의 호다.), 일평생을 아린아이와 함께 한 (2)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육당 (3)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박사 등등……. 오랫동안 기자 생활로 다듬은 글 솜씨에 이런 분들의 다양한 일화를 읽고 있으면 과연 이 책이 1960년대에 나온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내가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한다. 고당 조만식 선생은 어렸을 때 동네에서 소문난 싸움패 대장일만큼 행실이 걸걸했다고 한다. 커서도 역시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늘 술과 노래를 달고 살았는데 어느 날 기독교를 믿으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우리나라에서 숭실학교(崇實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明治大學)에서 공부했지만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에 대해서는 끝까지 반감을 가지고 살았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일본에서 학교를 다닐 때조차 교복을 거의 입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에 올 일이 있으면 부산에서 배를 내리자마자 교복을 벗어 보자기에 싸고 무명 두루마기에 갓을 썼다. 이런 복장은 선생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전혀 바뀌지 않았다.
정주(定州)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장으로 있을 때 하루는 평안북도 지사(知事)인 일본인 이꾸다(生田)가 학교 시찰을 온다고 하여 사람들은 조만식 선생에게 양복을 차려입고 마중 나갈 것을 권했다. 그런데 선생은 두루마기만 입었기 때문에 양복이 없었다. 선생은 사람들이 하는 말에 이렇게 답하며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없는 양복을 입을 수도 없거니와 지사가 온다고 고읍까지 마중 나갈 거야 없지 않습니까?” 이 일 때문에 숭실학교는 이꾸다에게 잘못 보여 고등보통학교로 인가가 나지 않았다. 선생은 이 일 때문에 사표까지 내게 되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숭실학교 학생들이 ‘고등보통학교가 되지 않아도 좋으나 조만식 선생님이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우리 모두 등교를 하지 않겠다.’ 라고 하면서 함께 동맹휴학을 했던 일이 있다.
선생은 유언으로 말하기를 묘비에 아무것도 쓰지 말고 다만 커다란 눈 두 개만 새겨 달라고 부탁한 것도 유명하다. 한 눈으로는 일본이 망하는 것을 봐야하고 다른 눈으로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것을 보겠다는 의미였다.
유명한 가곡 <봉선화>의 작곡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인 홍난파에게는 가슴 아픈 첫사랑 이야기가 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홍난파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열정적으로 연주활동을 했다. 그 즈음 K라는 여인을 만나서 앞날을 약속하게 되는데 이 분은 이화학당 출신의 피아니스트이며 음악과장의 수양딸이었다. K양의 어머니는 홍난파가 술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고 급기야 어머니와 딸이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K양을 잊지 못한 홍난파는 얼마 후 한국과 일본에서의 모든 활동을 접고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당연히 많이 준비하지 못한 미국 유학은 그에게 시련만 안겨 주었다. 결국엔 미국에서 사고를 당해 늑막염에 걸리게 되는데 이것이 후에 천재적인 음악인을 마흔 넷 젊은 나이로 생을 달리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미국 유학을 마친 뒤 한국에 돌아온 홍난파는 숨을 거두기 전까지 일본을 찬양하는 음악을 만들고 친일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등 인생에 씻기 힘든 오점을 남겼지만 여전히 위대한 음악가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점이다.
소파 방정환은 그 일생이 너무도 짧아 서른 세 해 밖에 되지 않았지만 평생 동안 어린이를 위해 일했던 사람이다. 생이 짧은 만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추진력으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을한이 소파에 대해 책에 쓴 것을 보면, 이미 열 살 때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소년 조직을 만들어 함께 토론하고 연설도 했다고 한다. 그가 동경 유학을 하던 시절, 불과 스물 네 살 나이에 ‘색동회’를 만들어 어린이 잡지를 펴냈고 우리나라 최초 동화집인 《사랑의 선물》을 발표했다.
김을한은 방정환이 (4)<어린이>, (5)<별건곤> 등 잡지를 만들 때 자주 원고청탁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 김을한은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기사를 써서 넘기면 방정환이 이것저것 조언을 해줄 정도로 감각이 뛰어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김을한이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맺은 관계는 무척 다양하지만 그 모든 걸 아우를 정도로 중요한 건 앞서 잠시 말했던 덕혜옹주에 관한 것이다.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질 일이지만 그동안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 얼마 전 나온 《덕혜옹주》 책을 통해서, 그리고 여러 가지 기사를 통해서 알려졌다시피 김을한은 일본의 한 정신병원에 있던 덕혜옹주를 발견해 한국으로 데려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때로부터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건 단순히 기자 한명이 우연히 하게 된 일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의 딸로 태어나 갖은 사랑을 다 받으며 자랐다. 궁 안에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을 정도다. 일본은 영친왕 이은(李垠)에게 그랬던 것처럼 옹주를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가서 일본식 교육을 시키고 일본 사람과 결혼 시키려했다. 이것을 염려한 고종은 황실의 시종인 김황진에게 은밀히 옹주의 신랑감을 찾아오라고 했다. 김황진은 얼마 후 자신의 조카인 김장한(金章漢)을 데려왔으나 일본은 이를 막아섰다. 결국 김황진은 덕수궁에 드나들지 못하게 됐고 고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승하하게 됐다.
이 때 옹주와 긴밀히 약혼을 추진하려했던 김장한이 바로 김을한의 동생이다. 그 역시 뼈아픈 역사에 한쪽 몸을 기대고 있던 것이다. 덕혜옹주는 일본의 뜻대로 일본으로 거처를 옮겼고 거기서 일본 남자와 결혼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아는 대로다. 한 나라의 황녀, 옹주로써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고 처절한 삶을 살다가 조발성치매증, 즉 정신분열증으로 종국엔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일에 이른다.
김을한은 광복이후 우리 기억에서 사라진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서 발견하여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에게 귀국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시 이승만은 이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덕혜옹주의 귀국은 시간이 흘러 박정희 정권 때 가능해졌다. 1962년 실로 오랜 세월을 기다려 덕혜옹주가 우리나라 땅을 밟았고 이듬해에는 역시 김을한의 노력으로 영친왕 이은도 우리나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기자였던 김을한과 황녀인 덕혜옹주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일본에서 옹주를 발견하기 전 김을한과 결혼한 민덕임은 바로 옹주와 함께 덕수궁 유치원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였다. 일본으로 덕혜옹주를 찾으러 갔을 때 정신병원에서 만난 옹주는 이미 병세가 심해서 민덕임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역사의 주체는 사람 일 수밖에 없다. 태어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집을 짓듯이, 성을 쌓듯이 하나하나 쌓아올려 커다란 역사를 이룬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즐겁게, 또 어떤 사람은 슬프게 살다가 간다. 어떤 경우는 덕혜옹주처럼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역사의 물결에 휘말려 자기 역사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찾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 또한 사람이 할 일이다.
김을한은 책에서 그저 ‘그리운 사람들’이라는 소박한 표현을 썼지만 사실 그들 모두는 우리가 지금까지 달려온 역사를 만든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독립 운동가도 있고 변절한 지식인도 있지만 그 역시 우리 역사다. 역사는 좋은 것만 기억하면 안 되고, 나쁜 것이라고 해서 지워도 안 된다. 그 모두를 알고, 배우고, 느끼고, 때로는 반성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최근 정부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근현대사를 선택과목으로 하기로 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든다.
< 이 글의 각주 >
(1) 이 책을 내가 발견했을 때 과연 1961년 초판인 것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깨끗한 상태였다. 김기창 화백의 표지그림과 박내현 여사의 꼼꼼한 장정은 50년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 갖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한 모습이었다. 표지그림과 장정에 들어간 정성 때문인지 책 가격은 1961년 당시 1,500원으로 조금은 부담스러운 돈이다.
(2) 소파(小波)는 방정환이 일본 유학시절 영향을 받은 아동 문학가인 이와야 사자나미(岩谷小波)에서 딴 것이다.
(3) 우리나라 최초 잡지인 <소년>을 만들었다.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썼고 기미독립선언문 초안 작업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만세운동 후 체포되어 1921년에 가석방 된 다음 변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학과 역사 연구 등 많은 부분에서 업적이 있지만 이광수, 윤치호 등과 함께 변절한 친일 지식인이라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붙어있다.
(4) 방정환이 1923년 3월에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 1934년까지 나왔다. 처음엔 천도교 소년회가 중심이 되어 내용이 꾸며졌으나 나중엔 여러곳에서 널리 읽혔다. 그는 이 잡지에서 ‘소파’ 외에도 ‘몽견초’, ‘몽견인’, ‘ㅈㅎ생’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는데 이는 일본의 언론 검열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5) 別乾坤. 1926년에 창간하여 1934년까지 나왔다. 1920년부터 나오던 <개벽>의 뒤를 잇는 잡지였는데 그 내용은 <개벽>과는 많이 다른 대중잡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창간호 머리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가벼운 내용은 아니었다. 넓게 보면 대중 계몽운동 성격이 짙은 잡지였다.
Author's Profile ★ 윤성근 작가
▷글 쓴 사람 윤성근은, 존 레논을 좋아하지만 오노 요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닉 드레이크와 커트 코베인을 좋아하지만 빨리 죽는 건 별로다. 굵고 길게 사는 방법에 관심이 많다. 오랫동안 IT 업계에서 죽도록 일했다. 하지만 책 읽고 글 쓰는 게 컴퓨터 보다 좋았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잘 나가던 회사를 관두고 출판사와 헌책방 일을 두리번 거렸다. 지금은 응암동 골목길에 간판도 없이 <이상한나라의헌책방>을 운영하면서 글쓰기, 책읽기에 빠져있다.
작가 윤성식
-2005년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에세이 문예]를 통해 수필 등단
-2007년
《건조한 손》으로 [신문예]를 통해 소설 등단
-2004 ~ 현재까지
해마다 열리는 국제 도서전에 작품을 내고 있다
첫댓글 수강때 들었지만 글로 읽으니 더 재미있네요.감사합니다.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