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대표적 변란 - 광양란과 이필제의 난
광양란
오늘날 우리들은 광양이라는 이름으로는 광양제철소를 떠올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산업구조에 있어 가장 경쟁력을 갖춘 것은 제철과 반도체 부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제철소가 위치한 광양은 우리 국민에게 적잖은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곳으로 기억할 수 있다. 그런데 130여 년 전 이 광양에서는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민중들의 저항, 즉 변란이 일어났다. 이때 광양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당시 수없이 많이 기도된 변란 모의 가운데 처음으로 거사에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변란의 전개과정에 나타난 조직성과 연계성으로 이후 우리 민중운동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누차 강조되었듯이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는 극에 달한 봉건왕조의 모순에 최대 피해자인 민중들이 그들의 권리를 찾고자 맹렬한 반봉건투쟁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용어이다.
물론 처음부터 농민들의 투쟁이 과격했던 것은 아니었다. 항조운동과 같은 온건한 방법으로 관권에 맞섰다. 그러나 이것이 관철되지 않자, 농민들은 1811년의 홍경래난에서 보여지듯이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전면적인 농민봉기를 전개하였다. 이를 기해 농촌의 농민과 도시의 영세상공인들은 새로운 변혁의 가능성을 점치고 조직적인 저항운동도 전개하였다. 아울러 곳곳에 흉서, 괘서가 나돌고, 양반이나 세도가 집에 돌팔매질을 하거나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을 계몽하고 봉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명분을 가지고 민중들을 규합하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곧 '직업적 봉기꾼들'이라 부르는 저항적 지식인들의 변란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투쟁 방략은 민란이 아닌 병란으로 지칭되고 있듯이 농민반란과 달리 조직적으로 무장을 하며, 지도부들의 성격도 특정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지역간의 연계를 갖는 응집력을 보이고 있다. 그 선구적인 모델이 바로 1869년(고종6) 3월 전라도 광양현에서 발생한 광양란이다.
1869년 3월 24일 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른 난민 70여 명이 총을 쏘아대며 성안으로 돌진하였다. 종전 민란처럼 몽둥이와 쇠창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총을 소지한 이들은 군기고와 창고를 열어 무기와 사창곡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현감 윤연신을 잡아 항복문서를 바치도록 위협하면서 관인(수령임명장과 군사지휘권)을 뺏으려 하였다. 이들은 성문을 굳게 지키고 군부에 따라 시간마다 군졸을 점호하였다. 성 안을 완전 점령한 것이다. 물론 갇혀 있던 죄수를 모두 풀어주고 백성들 중에서 건장한 사람을 뽑아 군복을 입혀 같은 패로 감아 세를 불리었다. 그러나 읍민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위로하는 격문을 적어 곳곳에 붙여놓았다. 이상이 광양란 발생 첫날 밤 모습이다. 반군에 관청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현감 윤영신을 파직하고, 영광군수 남정용을 안핵사로 임명하여 즉시 현장으로 파견하고 동시에 정라병영과 5진영으로 하여금 정예의 장요와 나졸을 보내 난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강진은 비바람과 함께 날아가고
사실 이 광양란 거사에 앞서 주모자 민회행, 전찬문, 강명좌, 이재문, 김학원 등 일당 25명 동지들은 강진에서 난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이들은 거사를 위해 장례식을 위장하고 거짓 상여에 무기를 숨겼다. 이러한 방법은 당시 민중들이 관청의 눈을 속이기 위해 흔히 쓰는 위장술이었다. 즉 1868년(고종 5년) 9월 민회행은 전찬문, 강명재, 이재문, 권학녀 등과 함께 장흥에서 장례식을 핑계삼아 25명을 동원하여 위장한 상여에 무기를 숨겨 강진병영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침 그날은 날씨가 놓지 않았다. 이들이 강진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주막에 이르렀을 때 난데없이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자 좋지 않은 징조로 여기고 섣달 그믐날 다시 거사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흩어졌다.
신사적인 난군과 책임을 다한 현감
이리하여 다시 후일을 기약한 것이 이 광양란이다. 원래 광양란은 하동장시 모임에서 비롯되었다. 장흥에서 거사에 실패한 민회행은 진주민란을 본받아 민란을 일으켜 읍폐를 바로잡는 데 그 명분을 두고, 이재문, 최두윤 형제, 금호도의 백내흥 등 14명과 결당하고 변란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필요한 전곡과 화약을 마련한 다음 3월 18일 하동으로 갔다. 18일 30여 인이 하동에서 일단 모여 배에 올라 장사꾼을 가장하고 섬진강을 왕래하다가 그 무리가 70여 명으로 늘어나자 우손도로 직행하였다. 당시 광양란에 대한 정부측 보고로 전라감사 서상정의 보고와 통제사 이현직의 보고가 있는데, 그 내용에 차이가 있었다. 서상정의 보고에 따르면, 이들은 3월 21일 밤 흰 수건을 두른 백건적 100여 명(사실은 70명)이 2척의 범선에 나눠타고 순천부 하적면에 위치한 우손도에 침입하였다. 당시 그 섬에는 최영길한 집만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최씨 집에 있는 각종 농기구를 탈취하고, 호주 최영길과 품삯군 김총각, 낚시를 하려고 섬에 들어와 있던 하적동의 주민 2명 등을 협박해 갑옷과 죽창, 깃발 등을 만들었다. 거사에 앞서 이들은 산에 올라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낸 다음 우손도를 떠났다고 하였다.
이들은 21일 배를 타고 초남포에 도착하였고, 광양관아를 공격한 것은 2일 뒤인 3월 23일 밤으로 하루의 차이가 있다. 반군은 군부를 점열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관아를 공격, 군기를 탈취하여 화살과 총으로 무장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현감 윤영신이 갖고 있던 인부를 탈취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통제사 이현직의 보고는 보다 자세하였다. 흰 수건을 두르고 죽창을 든 반란군 70여 명이 총을 쏘며 동문으로 난입하여 군기고를 탈취, 활과 총을 뺏었다는 사실까지는 마찬가지이나, 수령임명권과 군사지휘권을 상징하는 인부를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에 관한 기록이 보다 생생하였다. 당시 반군 가운데 장수급은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졸병들은 활과 총을 나누어 가진 후 수령이 있는 동헌으로 달려가 현감을 잡아 온갖 공갈로 협박하여 인부를 탈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감 윤영신은 자기 몸에 인부를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목을 자르는 한이 있어도 내어줄 수 없다고 버티어서 끝내 이를 빼앗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날 난리로 민가 25호가 불타버렸고, 신체가 건장한 사람 300명을 뽑아 강제로 반군에 가담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난군 두목은 그 휘하 사람들에게 만약 백성들을 살해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호령하였기 때문에 난리통에도 한 사람의 평민도 살해된 자가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난도들은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춘궁기에 진휼해야 한다며 사창으로 되돌리고 창고문을 잠갔다고 한다. 그리고 동헌으로 돌아가 소를 잡고 밥을 지어 포식을 한 후 흰 띠와 죽창을 버리고 혹은 검은 옷, 혹은 사령옷으로 갈아입고 성문을 굳게 지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야밤을 틈타 짧은 시간 내 조직적으로 성을 점령했던 광양 거사였지만, 그 패배 또한 순식간에 이루어져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곤욕을 치른 다음 몰래 관아를 빠져나갔던 현감 윤영신이 이끌고 온 관군의 공격을 받아 25일 밤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틈을 타서 적지에서 탈출한 현감 윤영신은 25일 밤 수천 명을 이끌고 반란군에 반격하여 성을 수복하고 반란군 수십명을 잡아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반란군에 쫓겼던 윤영신에 의해 난군이 진압된 것이다. 이로써 윤은 오히려 벼슬이 높아졌다.
40대와 20대
주모자 민회행은 당시 44세로 전라도 광양에서 출생하였는데, 직업은 의술이고 천문지리에 밝았다고 한다. 그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남다른 뜻을 품고 영남과 호남 일대를 두루 다니며 뜻을 함께하는 동지를 규합했는데, 이때 만난 사람이 전찬문과 이재문이었다. 이들은 민회행의 충실항 동지가 되어 1년 전인 1868년(고종5)에도 강진 변란에 뜻을 같이하였다. 전찬문 역시 44세로 전라도 태인 사람이나 살기는 구례에서 터전을 잡았다 한다. 그 역시 전국을 돌아다니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분주하게 전국을 누빈 전찬문은 강명좌 집에 모여 무기를 들고 난동을 일으키자고 하였으며, 강명좌와 함께 하동장시에서 민회행과 합류한 후 광양민란에서는 스스로 군무총찰이라 부르면서 난군을 지휘하였다. 이재문은 다른 사람보다 나이가 어린 27세로 광양 사람이다. 하동장시때부터 민회행과 행동을 같이하여 광양민란에서는 현감에 욕을 보이고 죄수들을 풀어주고 군기를 탈취하는 등의 행동대장 역할을 하였다.
23세의 권학녀는 남원 사람이다. 민회행의 오른팔이 되어 거사에 앞서 제사를 지내는 일부터 분위기 조성과 반란군의 대열정비 등 주장하지 않은 일이 없고 간섭하지 않은 일이 없다. 23일에 육지로 나올 때 군부를 점열하여 편대를 만들어 광양성으로 직행하였다. 강명좌는 41살로 강진에서 태어났고 생활근거지는 구례였다. 강진거사 때부터 하동장시에 모이는 일, 우손도에 가서 군비 마련하는 일 등을 민회행과 함께하였다. 민란이 진압되자 주모자 민회행, 전찬문, 이재문, 권학녀와 강명좌, 김문도 등 6인이 한양의 의금부로 잡혀갔다. 그리고 바로 네사람은 모반대역죄로 무교동 대로에 설치한 형장에서 능지처참의 형에 처해졌고, 그 가족들은 적몰하여 노비로 전락하였다. 당연히 광양은 읍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김문도는 49살로 강진 태생의 향리인데, 난도들과 함께 장흥취회와 광양난 거사에 부화뇌동했다 하여 불고지죄로 서소문 밖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광양현에 잡혀 감금되었던 한경삼 등 44명의 난민들은 죄수영으로 압송되어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김학수 등 2인은 섬으로 유배하고 그외 추종자들은 석방하여 난의 처리를 마무리지었다. 물론 이들과 달리 백성들을 불러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진사 유병오는 벼슬길에 올라 팔자를 고쳤다.
민란과 변란의 다리
이상이 고종 6년 3월 23일에 일어나 25일에 끝난 광양란의 전말이다. 시정 혁폐를 관철시키고자 무력으로 관아를 점령한 병란이었다. 그 주모자들의 출신을 보면 전라도 각지의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다. 장차 난리가 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동모자를 규합한 민회행 등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국을 돌며 동지들을 규합해왔다. 그들은 향촌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농민층이 아니라 '잔반파락호'로서 한결같이 천문지리나 술수에 능통한 이들이 전국적 거사를 의도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단순 농민반란이 아니라 변란인 것이다. 그러나 광양란은 전주민란을 본받아 읍폐를 시정하려 하였으며, 왕조를 무너뜨리려 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민란적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다. 한마디로 변란과 민란의 교량적 위치에 선 광양란은 이로써 막을 내리고, 이필제란의 지향점을 제시해주었다고 하겠다.
이필제의 난
100여 년 전 그때 그 시절, 우리네 젊은이들 역시 눈앞에 전개되는 부조리를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나 보다. 무능한 왕권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부패한 세도가들의 매관매직과 가렴주구... 말세로 치닫는 조선왕조와 이에 기생하는 관료집단들에 대해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민중들은 조선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당시 경제구조의 모순을 가장 무겁게, 가장 아프게 느끼고 있는 신분계층은 일반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나설 엄두는 못 내었다. 대신 모순덩어리 사회구조 속에서 뜻을 펴지 못한 소외된 한유와 빈사들은 저항적 지식인이 되어 전국을 유람하며 농민들을 각성시키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규합, 사회구조를 그 토대부터 흔들어 놓는 '조선식 민주화투쟁'을 전개하였다. 더구나 19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서양세력의 침입이라는 전대미문의 양상을 보임으로써 조선사회는 언젠가 닥쳐올 서양 오랑캐의 침공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국내의 봉건적 모순의 심화와 양이침공에 대한 불안감은 현실도피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는 정감록 사상을 전국적으로 번지게 하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전국을 무대로 민중들과 소외된 지식인들의 한에 불을 지폈던 '직업적 봉기꾼' 이필제의 구호와 행동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며 내일을 준비하다 좌절해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이필제란이라고 하면 1871년(고종 8) 3월 10일 이필제가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과 함께 경북 영해에서 봉기한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는 1869년부터 1871년 말 체포되어 처형당하기까지 3년간 진천, 진주, 영해, 문경 등지에서 4회에 걸쳐 연속적으로 반정부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필제가 처음 반정부 구호를 내걸고 거사한 것은 1869년 진천작변이었다. 하지만 첫 거사부터 내부 밀고자에 의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밀고자는 김병립이었다. 그러나 첫 거사 실패에 좌절할 이필제가 아니었다. 그는 이듬해 다시 진주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 모의에서 이필제 외에도 정만식, 성하첨, 양영렬 등 직업적 봉기꾼들도 함께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조용주 형제의 투서와 전낙운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세 번째 이필제는 1871년 3월 영해에서 궐기하였다. 드디어 거사에 성공, 전 조정 관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특히 이 거사에서 이필제가 종전과는 다른 지도력과 조직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순교일인 3월 10일을 거사일로 잡고, 교조신원을 기치로 동학교도를 조직적으로 끌어들여 거사에 성공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운동사에서 이 영해란에 대한 평가는 바로 농민봉기의 맹아적 성격을 지닌 거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난을 통해 반정부 인사의 주자로서의 자신감을 얻은 이필제는 다시 조령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 되어주지를 않았다. 네 번째 거사 실패로 2년간 4회에 걸친 이필제의 반정부 투쟁은 형장의 이슬과 함께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이 바로 이필제난의 자취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필제를 직업적 봉기꾼 내지 전문 반란지도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4회에 걸친 반란 가운데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1871년 영해봉기이므로, 이필제의 난을 영해봉기로 달리 부르기도 한다. 이필제는 1824년(순조24) 충남 홍주에서 태어나 1871년(고종8) 조령거사 실패로 체포,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이규묵이다. 태어난 곳은 홍주이나 성장기 대부분을 충북 진천에서 지냈다. 스스로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자랐다"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신분은 잔반계층으로 이해하고 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이근수였으나 필제로 고쳤으며, 급제 후에는 이홍으로, 다시 주지문으로 성명을 바꾸었다. 진천작변에서는 김창정 또는 김창석, 진주와 거창에서는 주성칠, 주성필로, 영해에서는 이제발로, 문경에서는 진명숙 등의 가명을 쓰며 수색의 그물을 빠져나갔다.
진천에서 중원으로 – 진천작변
이필제의 첫 번째 반정부 거사는 1869년(고종 6) 4월 자신이 살았던 충북 진천을 무대로 일어났다. 하지만 그와 함께 난을 모의한 사람은 진천 사람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필제는 목천에 사는 김낙균, 공주 사람 심홍택 부자와 양주동 등 충남의 인사들과 함께 제세안민을 위해 군사를 일으켜, 북으로 중원(중국)을 정벌한다는 기치 아래 거사하였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단순한 개인의 영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보존을 위한 의병으로 자임하고 있었다. 진천거사의 명분이 단순한 조선왕조의 전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원정벌까지 외치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예전과 다르다는 대외적인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1861년(철종11) 영불연합군은 텐진조약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는 구실을 붙여 중국에 쳐들어왔다. 그런데 외침을 받은 중국은 무력하게 북경을 내주고 황제는 열하까지 피난가야 했다. 양이침공에 어이없이 무너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소식은 조선사회 전체에 엄청난 위기의식과 혼란을 가져왔다. 이필제 역시 이 소식을 듣고 중국을 침략한 서양 오랑캐가 곧 조선 땅에도 쳐들어올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거사명분은 봉건 조선정부의 타도만이 아니라, 서양세력의 퇴치를 통해 제세안민에 두어져야 했다. 이처럼 그들의 봉기는 야심과 명분이 뚜렷한 거사였다.
여기에 19세기 중엽 이후 대외적인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던만큼 정감록이 그 어느 때보다 민중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당시 팽배했던 피난사상 가운데에는 병란이 일어났을 때 보신을 위한 피난처로서 산에도 이롭지 않고 물에도 이롭지 않은 궁궁이 가장 좋다고 하고, 그 곳은 병화나 흉년도 들지 않는 보신지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편승하여 이필제 역시 임진송송지설을 내세웠다. "궁이 2번 들어가니 피난처로 가장 좋은 곳을 뜻하는 궁궁이고, 필제가 태어난 해가 을유년으로 을을을 말하니(이필제의 운명은) 임진란 때의 이여송과 같다"는 논리로, 서양세력이 연합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한다면 당연히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같은 존재로 자신을 자처하고 있었다. 요컨대 진천작변은 정감록의 피병설과 서양오랑캐의 침공이라는 대외적 위기의식이 결부되어 동모자들과 함께 반정부 투쟁 내지는 신 왕국 건설을 실현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더구나 중원정벌이라는 기치는 조선인의 자부심을 고취시킨 것으로, 운동자금 마련에 더없는 명분이 되었다.
이들은 인척이나 평소 친분관계를 이용하여 동지를 포섭하였고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유층을 끌어들였다. 이필제에 대한 말을 전해듣고 진천까지 찾아온 공주 진사 심홍택은 상당한 재력가였는데, 이필제의 수려한 외모와 청중을 압도하는 언변에 반하여 이필제를 위해서는 천금도 아까워하지 않는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서양세력의 침입이라는 국가 위기를 이용, 국가 보전과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던 진천작변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철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동지 김낙균의 당숙 김병립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었다. 결국 심홍택과 양주동은 포도청에서 심문받다가 죽었으며, 이필제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작금의 국가정세는 산 넘어 산이다 – 진주작변
진천에서 시도한 변란이 사전에 발각되어 도망한 이필제는 그해 12월 진주 일대를 무대로 두 번째 변란을 기도하였다. 주성칠 또는 주성필로 이름을 바꾼 이필제는 거창으로 가서, 전부터 알고 있던 양영렬과 그의 소개로 정만식, 성하첨 등을 만나 일단 남해에서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남해거사는 자금부족과 동모자의 비협조로 중도에 포기하였다. 진천작변 이후 도망하게 된 이필제는 그해 여름 선산을 거쳐 거창으로 가서 김영구 집에 머물다 그 지방의 양영렬을 만나 진주작변을 다시 준비하게 되었다. 양영렬은 정만식과 성하첨에 대해 자신은 이들과 일찍부터 알고지내는 사이로 두 사람은 병법에 능하며 만약에 일이 있으면 기꺼이 창의할 것이며, 두 사람이 사는 동네에는 함께 일을 꾀할 사람이 많다고 소개하였다. 따라서 양영렬 등은 이필제가 오기 전에 거사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양영렬은 의병장의 후예로 알려졌다. 원래 평양에 살았으나 1852-1853년 북경에 난리가 났다는 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남쪽으로 내려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진주작변에서 그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이필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명을 쓰며 격문을 써 돌리고 동조자를 불러들였다.
정만식은 서울 사람으로 병법에 능하고 왕가의 종실 선춘군을 사칭하였다. 병인양요 후 피난차 고령으로 이사한 그는 이미 고종2년 무렵부터 만민을 구하기 위해 제주와 울릉도 등에서 큰일을 일으키려는 야심을 가진 반정부 인사가 되어버렸다. 창년 사람 성하첨 역시 병법과 술수에 능통하며 관운장에 비견될 담력의 소유자이다. 진주에서 정만식, 성하첨 등과 합세한 이필제는 기왕의 민란들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며 거사에 완전을 기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성하첨은 이필제에게 진주민란이 실패한 이유로 난군이 쉽게 모이고 쉽게 흩어지는 등 굳은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으며, 고종6년 3월 광양란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 내에 3-4개 읍을 공략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으며, 8월의 통영민란에 대해서는 주사와 군병이 모두 장교의 수중에 있어서 실패하였다고 분석하였다. 나아가 계획을 보다 조직적으로 지도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이들의 거사 모의에는 (고산자 비기), (상주신도록 비기) 등의 비기가 인용되었다.
이필제는 당시 서구 자본주의 열강이 침탈과 일본의 침략성, 중국 농민란으로 인한 불안 등의 국제정세와 당시 국내 빈발한 명화적 등 대내외적 봉건 조선왕조의 취약성을 파악하고 의리와 명분으로 창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장차 조선이 동서남북 4개의 제후국으로 나누어질 것인바, 자신은 정만식의 얼굴빛이 예사롭지 않고 손바닥에 신비한 무늬(점)가 있다는 사실에 그를 정진인으로 내세웠다. "지금의 시세는 양요가 자주 있고 북쪽이 소요하여 강을 건너올 우려가 있으며, 왜구가 엿보는 조짐이 있고 해도에는 또한 도적이 많으니 나라의 형편이 산 넘어 산이다. ... 만약 지금 한 곳에서 병사를 일으키면 사방에서 봉기하고 곳곳에 전쟁의 기운이 있어서 온 나라가 삼분사열되어 북요를 막기 어렵고, 군정(여러 명의 정진인)이 함께 나타나는 것 역시 저지하기 어려우므로, 나는 의병을 일으켜 해도로 들어가 안정을 도모하여 집과 나라를 함께 건지는 것이다." 진주거사에 필요한 병력은 평소 자신의 문명을 이용하거나 넉넉한 삯을 준다는 소문을 퍼뜨려 짐꾼을 모았다. 자금은 성하첨이 밭을 팔아 마련한 170냥으로 충당하였고, 남해로 들어가기 직전 부족한 배값을 충당하기 위해 명화적을 위장하여 인근 김부자 집의 재물을 탈취하려고도 했다.
이들이 거사에 착수한 것은 12월 11일이었다. 먼저 남해현에서 어사출두 형식으로 재물과 무기를 모으고 섬사람들을 동원하여 통영, 고성, 김해를 거쳐 육지로 나가 성을 공격하고 곧장 서울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모군한 사람 가운데에는 약속한 돈을 주지 않는다거나, 혹은 어사로 가장하여 남해에 들어가 재물을 빼앗는다는 계획에 실망하고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또 남해 죽도로 가려 했으나 장교 하나가 함께 배에 오르자 그들의 계획이 탄로날 것이 염려되어 중도에 포기하고 모두 배에서 내렸다. 결국 이번 거사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남해거사에서 실패한 이필제 등은 다음해 2월 28일 또 다시 덕산에서 변란을 시도하였고, 그들은 나무꾼들을 모아 관청으로 들어가 관장을 둘러메고 읍촌을 돌아다니면 군정들이 모여들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를 위해 선산, 진주, 거창 등지에 서찰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다니며 정감록의 내용이나 혹은 사회모순을 거론하여 동지를 포섭하고 자금과 장정들을 모으고자 했다. 그러나 동모자로 포섭한 조용주의 투서와 홍종선, 전낙운의 고발로 실패하였다.
내부 동지에 의한 밀고로 진주거사 역시 불발로 끝나고 이들은 진주병영에 수감되었다. 조정에서는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주모자를 비롯하여 더불어 모의하거나 적어도 거사계획을 사전에 알았던 사람들까지 반란세력으로 규정하고 많을 사람들을 잡아 서울로 압송하여 신문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우두머리인 주성칠이 도망하여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종용이나 협박에 의하여 음모에 가담한 종범들을 문책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덕분에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없었다. 대신 정만식은 추자도, 양영렬은 흑산도, 양성중은 신지도, 성하첨은 김갑도, 박만원은 지도, 양경노는 임자도, 정재영은 사도, 정홍철은 위도, 어치원은 녹도, 최봉의는 여도, 박사원은 마도, 장경노는 고금도 등등 수많은 남해의 여러 섬에 흩어 유배되었다. 진주병영에 수감되어 있던 또다른 죄수들은 그 지방에서 재량권을 갖고, 죄의 경중에 따라 처리하게 하였다. 한편, 전 정언 김희국이 민란에 가담했다 하여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곧 혐의가 벗겨져 풀려나고 정언에 재임되었다.
교조 이름을 내걸어 거사에 성공하였는가? - 영해작변
이팰제가 세 번째로 기도한 영해작변은 1871년 3월 10일 동학교조 신원운동을 가탁하여 영해지방의 동학의 조직을 이용, 거사하였다. 특히 4차례 변란 가운데 유일하게 거사를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진주거사에서 실패한 이필제가 고종 3년(1866)부터 알고 지낸 영해의 이수용과 남두병을 찾아간 것은 고종 7년 10월 전후한 무렵이었다. 당시 이필제는 스스로 동학교도로 자처하며 영해지역의 동하교도들을 포섭한 다음, 최시형에게 사람을 보내 교조신원운동을 가탁하여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필제는 참여를 거부하던 최시형에게 최시형의 측근이던 이인언, 박사헌등을 여러 차례 보내 설득한 끝에 드디어 고종 8년 2월 최시형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최시형을 만난 이필제는 자신은 민족의 시조 단군의 영령으로서 이 세상에 나온 전지전능한 인물이라고 소개하고 거사의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한편으로는 교조의 치욕을 씻고, 한편으로는 민중을 온갖 재앙에서 구원하려는 뜻에서 중국에서 신왕국을 건설하려 한다는 의도를 전하였다.
"내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고, 조정에서도 알기 때문에 5영이 모두 감응하고 6조가 머리를 돌린다. 이 어찌 천운이 아니겠는가. 그대들이 만약 기꺼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렸으니 따르고 안 따르고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폐일언하고 선생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날이 3월 10일이다. 그날로 정하였으니 다른 말은 하지 말고 따르라." 아주 담대하고 구체적인 말로써 당시 동학교도의 최고의 어른으로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던 최시형조차 압도되었다. 이필제의 수려한 외모와 언변뿐만 아니라, 이필제가 취제우의 신원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최시형은 그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여진다. 한편 이들은 세상이 어지러워 곧 왜선 수천 척이 쳐들어와 난리가 날것이니, 의병을 불러모은 연후에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퍼뜨려 민심을 동요시켰다. 그리고 이필제가 동해의 섬에 있는 정진인 혹은 이인이라는 말로 사람을 끌어들였고, 거사에 성공하면 관직을 주겠다는 말로 군량을 조달하려 하였다. 이러한 모의과정에서 맹활약한 것은 정치겸과 동학교도인 강수(다른 이름은 강사원 또는 강시원) 그리고 남두병이었다. 정치겸은 가장 많은 사람들을 합류시켰고, 강수는 친인척 등을 통해 5백 명을 모았다.
역시 동학교도인 정인철은 이미 오래 전부터 거사를 준비해왔다고 취시형에게 밝히면서 3월 10일의 거사를 다짐받고 있었다. 또 1866년부터 이필제와 교류가 있었던 남두병은 자기가 거느린 300여명을 이끌고 동참하기로 하였다. 거사일인 3월 10일, 1차 집결지인 우정동 박영관의 집에 모인 150명의 일행은 먼저 도록을 만들고, 중군, 별무사, 집사 등의 직책을 정하였다. 또한 성 안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염탐꾼을 파견하였다. 황혼 무렵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낸 다음, 조총과 죽창, 칼 등으로 무장하고 관아에 쳐들어간 것은 밤 열시경이었다. 관아에 쳐들어갈 때 그 수는 5600명으로 늘어났다. 광양란과 마찬가지로 난군은 먼저 무기 창고를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부사를 죽인 다음 격문을 내걸었다. 격문에는 "이 거사는 다만 본관(영해부사)의 탐학이 극심하기에 그 죄를 성토하는 거시고, 읍민들을 해칠 마음은 없다"고 썼다. 이필제는 영해를 떠나 영양으로 가는 길에도 인근의 동민들을 모아놓고 위무하는 글을 써보내기도 했다. 또 격문과 함께 탈취한 돈 150냥을 다섯 동네의 우두머리를 통해 동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필제는 그날 밤 여세를 몰아 영덕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모자들의 반대로 미수에 그쳤다. 원래 영해를 공격하고 서울로 직향하고자 다음날 일찍 영해 관청을 떠났다. 이필제는 영양으로 가는 도중 인근 동민들을 위무하였다. 주변의 주민들을 잡아다가 병사로 삼자는 주장도 반대하며 절대로 주민들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하였으며, 부하들이 민가에 방화하자 명령을 듣지 않는다며 처벌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민인들의 힘을 얻어야 거사에 성공할 수 있다'는 이전 변란 시도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리 냉담하였다. 더욱이 인근 고을의 관군이 몰려오자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일월산 쪽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영해란에는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했다. 체포된 자들 중에는 동학교도가 많았다. 또 거사 당일에도 참가자들의 복장을 청색과 홍색으로 표시하여 동학교도와 평민을 구분하였다. 이런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영해란의 기본 성격을 "교조신원원동" 또는 "동학란"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은 기본적으로 동학교도의 입장에서 교조신원운동에 자원 참가한 것뿐이다. 따라서 영해란은 기본적으로 진천에서부터 남해와 진주 등 이필제가 주도한 일련의 거사의 연장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영해란 이후 이필제는 교조신원 등 동학과 관련한 어떤 주장이나 행동도 취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교조신원은 한갓 이필제 거사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이필제가 최시형을 만났을 때 자신은 천명을 받은 사람으로 뜻하는 바는 중국에서의 창업이라는 표현에서 확인된다고 한다. 물론 동학교도들도 이필제가 그들과 다른 뜻이 있었음도 알고 있었다. 당시 동학교도의 우두머리는 최시형이었지만, 박사헌, 이인언, 전동규들은 최시형에게 "우리가 그 무리에 들어가는 것은 사리에 가깝지 않고, 이필제가 교조신원이 아닌 다른 듯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교조신원을 주장하기 때문에 따른다"고 하여 최시형이 동참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한편 이필제의 변란에 가담한 동학교도 가운데는 신향세력이 많다. 이것은 종교적 입장보다는 향권을 둘러싼 구향과의 대립에 동학교단의 힘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이필제는 동학교도만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진주거사 실패로 영해에 온 이필제는 진천이나 진주에서와 같이 그 지역 변란세력과의 담합을 꾀하였다. 대쵸적인 인물이 바로 남두병이다. 남두병은 경전에도 밝고 실무에도 능하였다. 1866년부터 이필제와 교류가 있었고, 휘하에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변란에 동참한 실력가이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변란에 끌어들였고, 영해 관아를 빠져나갈 때도 이필제와 함께 가마를 타고 갔다는 정치겸이나 점술에 밝고, 자칭 모사라고 한 이군협도 영해 일대를 근거로 한 반정부세력이라 할 수 있다. 드디어 1871년 3월 10일 수백 명이 영해부의 관문으로 난입하여 부사를 살해하고 인부를 강제로 빼앗았다. 부사 이정이 항의 질책하다가 피살되었다. 난 발생 보고에 접하자 조정에서는 즉시 부사과 이정필을 영해부사로 파견하는 동시에 안동부사 박재관을 안핵사로 파견하였다. 난의 진압을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여 부호군 한치림을 영해부사와 접하고 있는 영덕현령으로 파견하고 전 부사 이정을 이조판서로 승진시켰다. 안핵사의 보다 자세한 보고에 의하면, 반란군은 100여 명으로 그 가운데에는 자칭 모사가 있고 또한 정탐꾼이 있어 동정을 사찰하기도 하였으며, 행동시에는 각각 대를 나누어 몇 사람이 이들을 통솔하고 허리에는 백기를 꽂은 자가 향도가 되었다. 난도들은 관문으로 돌입하자 먼저 무기를 탈취하고 이어서 옥문을 열어 죄수를 석방하고 부사를 살해한 후 인부를 탈취하고, 소를 잡아 무리에게 나누어주고 난도들의 일부는 철창을 들고 관문 밖을 감시하였다고 한다.
이상으로 볼 때 영해란도 광양란과 같은 성격의 변란이다. 무기를 탈취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배포해주는 등으로 볼 대 그렇다. 하지만 광양란의 경우 난군들이 성을 점거하고 있다가 현감을 이끌고 온 창솔군에게 소멸되었지만, 영해란의 난민들은 스스로 흩어졌다. 난민들의 그후 행동은 자세하지 않으나, 일부는 영양을 거쳐 조령관에 집결하여 변란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은 사정들을 고려할 때, 영해란이란 진천, 진주작변과 마찬가지로 정감록을 이념적 무기로 한 변란이다. 다만 영해에는 오래 된 신향과 구향의 갈등, 이것과 깊은 관련을 가진 동학교도 조직 등 변란에 이용할 만한 좋은 자원이 있었고, 이필제는 이러한 자원을 잘 이용함으로써 거사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영해란은 동학이 변혁의 무기로 활용될 수 있는 좋은 자원을 확인해 주었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영해민란의 주모자는 이제발, 즉 이필제, 김운균, 강사원, 남두병, 박영관 등 5명이었는에, 일부는 도망가고 일부는 죽임을 당하였다. 조정에서는 안핵사의 보고에 따라 자진해서 참여한 김인철 난민들과 부화뇌동한 장성진, 모사를 자칭한 이군협, 스스로 염탐꾼이 되어 동정을 사찰한 박기준 난민의 심복이었던 박한용, 흉록에 이름이 들어 있는 권석중, 약속을 들어준 이병권, 분대를 지휘 감독한 정덕창, 정창학 한상엽, 군기를 탈취한 김천석, 이기수, 남기환, 동헌에 들어가 창호를 파괴한 신화범, 포도청으로 달려가 동정을 살핀 권두석, 철창을 들고 문 밖을 살핀 이재관, 허리에 백기를 꽂고 향도 역할을 한 최기락, 연환을 지고 다닌 황억대, 소를 잡아 동지들에게 나누어준 허성언, 부자, 형제가 함께 참여한 취준이, 박영빈, 불을 들고 선구가 되었으며 죽창을 들고 후원이 되기도 한 김창복, 박명관, 임영작, 손경석, 최영화, 김정환, 박한대, 박춘집, 김일언, 임욱이, 반군에 내응한 박영수 등32명은 관찰사로 하여금 군민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효수하게 하였다. 또 민란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명부에 그 이름이 올라와 있던 전제옥, 전종이 2인을 비롯하여 20여 명을 먼 외딴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정백원 이하 10명의 죄수와 김순록 이하 19명 죄수는 수령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마지막 불꽃이 타다 – 조령작변
이필제의 4번재 시도는 고종8년(1871) 8월 문경의 정기현과 도모한 조령작변이다. 이때 이필제는 진명숙이라는 또다른 가명으로 난을 주도하였다. 조령작변의 명분 역시 "동정서벌하여 제세안민한다"는 것이었다. 이 난의 원래 계획은 "전라. 충청, 경상의 3도 사람들을 모아 사원철폐에 대한 반대집회를 열어 이를 기회로 조관을 빼앗고, 이러 문경, 연풍을 차례로 공략하여 마침내 태원성을 파한 후 서쪽으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역시 거사계획은 광양란을 모델로 하여 서울 진격을 그 최종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필제는 영해란 이후 영남인 권성거와 함께 그해 3월 정기현의 집으로 가서, 진천작변 때 동모했던 괴산 사람 임덕우와 최응규를 불렀다. 이들 두 사람은 이필제의 연락을 받고 정기현의 집으로 와서 정기현에게, 이필제는 권성인이 아니라 홍주에 사는 이홍임을 밝히고, 그에게 영웅호걸의 재주가 있고 손바닥에는 천문이 있으며 그의 뜻은 북벌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먼저 조선을 정기현에게 주고, 이필제와 김낙균, 초응규등은 정기현으로부터 많은 병력을 얻어 중원을 정벌하기로 약속하고 난을 구체적으로 준비하였다. 요컨대 이필제는 진천작변과 마찬가지로 정감록을 이씨의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하면서 이미 정감록을 이용하여 난을 계획하고 있던 세력과 제휴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은 정씨가 아니므로 자신의 목표는 조선 타도가 아니라 북벌에 있다고 하였다. 이필제는 정기현에게 "서호주인은 정가로서 조선을 경영하고, 동산주인은 권가로서 남경을 도모한다"는 참서를 들며 원대한 자신의 계획을 정당화시키고 사람들을 모았다. 동모자들에게는 조선은 정기현에게 맡기고, 그에게 병력을 빌려 전횡도를 거쳐 등주와 채주로 들어가 중원을 취하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영해에서 동학을 이용하여 거사에 성공항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지지집단을 찾았다. 그런데 마침 당시 대원군의 실정과 서원철폐령으로 전국 유림들이 집단 상소와 상경을 하고 있었다. 이에 이필제는 백성들의 고통이 오늘과 같은 때가 없었다고 천명하고, 다시 서원철폐의 최대 피해자인 유림들을 그의 지지자로 보고 서원철폐 반대 집회를 이용, 민중을 모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필제는 선비된 자의 도리고서 어찌 입을 다물고만 있겠는가 하며, 초곡에 유림들이 모여 복합상소를 하여야 한다는 조령유회의 통문을 돌려 변란을 꾀하고자 했다.
정기현은 이 통문을 권응일에게 전하여 내응을 약속받았고, 정기현의 심복으로서 경기 음죽에서 단양 산내로 이사한 최해진은 음죽 사람들을 모으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필제, 김낙균, 최응규 등은 충주, 괴산, 연풍 등지의 일을 담당하였다. 특히, 김낙균은 5,6년 전 토호사로 정배당한 적이 있는 연풍에 사는 정해청을 동지로 설득하면서 정감록의 참설을 인용하며 조선왕조의 국운이 이미 쇠하였음을 논하고 은근히 새로운 사회를 위한 거사라고 부추겼다. 또 이들은 "요즈음 영남의 선비들이 치송도회라고 일컫는 것도 실은 이런 심정을 표한 것이며 영남 전체가 모두 한마음으로 서로 약속되었다"거나 "밖으로는 서양 오랑캐가 8월에 다시 오기로 약속되었다"는 말로 유림세력을 끌어모았다. 풍기의 권응일, 충주의 송회철, 상주와 김공선 등은 각기 백여 명씩 동원하기로 하였는데, 그 방법은 모두 유회를 가탁한 것이었다. 거사일을 8월 2일로 잡혔다. 원래 7월 29일을 거사일로 택하였으나, 한양 사람들을 동원하려던 계획이 늦어져 연기하였다.
일단 조령에 모여 먼저 문경읍을 탈취한 다음, 한패는 괴산, 연풍으로 직향하고, 또 한편은 충주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권응일은 대원수, 정기현은 진인, 정해창은 모사, 김원명은 선봉 등 각기 직책을 맡아 거사를 진해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은 어이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김태일이라고 가명을 쓴 정기현이 동네사람에게 붙잡혀 거사계획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8월 2일 50-60명이 조령 주막에서 머물렀는데, 조령 별장이 군사를 풀어 군기고를 지키게 하였던 바, 야반에 이들이 주막을 출발하여 일제히 고성을 지르며 군기고에 난입하였다는 것이 보고된 이후 이들의 동정은 이미 관에서 주목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주막에 있었던 김태일이 술에 취해 다리에 떨어지는 바람에 모든 것이 탄로난 것이다. 그런데 공초에서 정기현은 당초 수천 명이 모의하고, 조령에서 군기를 탈취하여 병란을 야기코자 계획한 지 오래 되었으며 군기탈취를 위하여 매복하고 있는 자들이 천여 명이라고 허풍을 떨었다. 결국 이들은 경상감사의 주관하에 상주진과 안동진에 나누어 수감되고, 주모자들인 정기현, 정옥현, 진명숙 등 3인은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정기현은 35세로서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충청도 단양으로 이사하였는데, 그는 정몽주의 후예로서 유업에 종사하였다. 태백산의 요승 초운을 지나치게 믿어 남다른 야망을 갖고 이를 실현코자 300일 산중에서 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이필제를 만나 의기투합하여 작변을 꾀하고자 많은 무리를 모았던 사람이다. 정옥현은 38세로 정기현의 형이다. 동생 기현과 요승 초운의 감언이설을 믿고 이필제의 언번에 감명받아 조령 초곡에 참여하여 조령관 무기를 정탐하는 데 활약하였다. 김태일, 아니 정기현의 실수로 사전에 발각된 조령작변의 실패로 이필제는 더 이상의 변신을 할 수 없었다. 조령에서 이필제는 12월 23일 모반대역부도죄로 군기시 앞, 오늘날 무교동 길에 설치된 형장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정기현은 모반대역죄로, 정옥현을 사실을 알고서 고발하지 않았다 하여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형에 처해지고 동시에 가산이 적몰되었다. 또 최응규는 이미 포도청에서 심문 도중 사망했으며, 그외 각 영에 나누어 수감되어 있던 난민들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효수되거나 유배되었고, 석방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진천작변부터 이필제와 함께 행동했던 김낙균을 도망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필제는 진천에서 이홍, 진주에서는 주성칠로, 영해의 이제발로, 그리고 조령의 진명숙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여러 민란을 조도하며 모순덩어리 조선왕조를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진주나 조렬란의 목적이 금병도를 거쳐 중국으로 직향하려는 북벌계획에 있었다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데서 이것이 증명된다. 이를 위해 이필제 등은 도참설을 이용하여 인심을 선동, 무리들을 불러모았다. 그러나 반봉건투쟁과 양이침입에 대항해 중국북벌론을 펼쳤던 이필제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후 동학교도들은 정부의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관헌의 추적은 경상도뿐 아니라 강원도, 충청도, 나아가 경기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기왕의 연구자들이 밝혔듯이 동일한 사람에 의한 연속적인 반정부투쟁이라는 점, 홍경래란 이후 임술민란을 거치면서 분산적 고립적이었던 민중운동이 비로소 그 괴리를 좁히고 그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이필제의 난은 조선후기 민중운동사의 분명한 이정표임에 틀림없다.<글 박한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