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혜 선생님
어른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닌, 또한 어떤 면에서는 이미 어른이고, 동시에 아직 아이이기도 한 청
소년 여러분들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아이다운 글부터 어른스러운 글까지
다양한 편차가 있는 글들이었습니다.
글 중에서도 독후감은 말 그대로 책을 읽은 뒤의 느낌을 쓰는 글입니다. 어디까지나 ‘느낌’이
가장 중요합니다. 독후감은 보통의 수필과는 달리 읽은 책과 관련하여 생각을 펼쳐야 한다는 한계
가 있습니다. 그래도 ‘느낌’이 가장 중요하고, 그 ‘느낌’은 자기만의 빛깔을 가질수록 빛이
납니다. 서툴더라도 자신만의 느낌이 생생하고 솔직하게 잘 드러날 때 그 글을 좋은 독후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문장이 매우 능숙한 점은 놀라웠습니다. 책을 많이 읽은 게 아니라면 글을 쓰는
훈련을 강하게 받은 흔적이 드러납니다. 어른의 손질이 더해진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글조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능숙하기는 한데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진부하고 낡은 경우는 오히려
이 나이만이 가질 수 있는 생생함의 매력을 잃은 경우라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습니다.
글의 생명력이라고 할까요?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의 느낌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어 하는 열정이 느껴지는 글, 혹은 책
을 매개로 자기만의 생각을 깊이 펼쳐나간 경험이 깃든 글, 그런 글들이 가진 생명력은 읽는 사람
의 마음을 잡아당깁니다. 능숙하고 매끄러운데 생명력이 없는 글은 가장 위험한 글입니다. 더군다
나 지금의 나이에 그런 얄팍한 글재주를 익힌다면 그 사람은 삶의 귀한 재미 하나를 잃어버린 것
입니다. 삶의 귀한 재미, 그것은 자기 속의 목소리를 솔직하게 쏟아놓는 재미라고 할 수 있지 않
을까요?
그러니까 청소년 여러분들은 ‘그럴듯하게’ 글을 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기 마음에서 우
러나오는 소리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서툴더라도 솔직하게 써내기를 바랍니다. 그런 글만이 읽는
사람의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은 그렇게 마음에 다가오는 글들을 순서대로 뽑았습
니다.
그런 점에서 대상 작품은 남다른 독후감이었습니다. 형식이나 문장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자기 생
각과 열정이 생생하게 잘 드러난 점에서 남다른 글이었습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이 작품을 가
장 인상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다른 의견 없이 쉽게 대상으로 뽑을 수 있었습니다.
상을 탄 여러분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상을 타지 못한 여러분들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냅
니다. 사실 한 편의 독후감을 신나게 쓴 것, 무엇보다 그것이 가장 멋진 추억이 아니겠어요?
혹시 위로가 될까 얘기하지만 놀랍게도 실제 작가들 중에는 글쓰기 대회에서 입선 한 번 못 해본
사람들이 아주 많답니다.
단지 이 일을 계기로 여러분들이 책을 더 좋아하고, 책에서 받은 감동을 글로 적어보는 습관을 가
지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서미선 선생님
우리 학교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신문 이름은 <책과 나>입니다. 이름에 많은 것이 들어있지요. 책
은 저 혼자 고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저자의 만남이라는 점, 책을 읽은 독자가 책과
맺은 지적인 혹은 감성적인 관계를 강조한 이름입니다.
비룡소 독후감 대회에 응모한 글을 한 편 한 편 읽으면서 즐거웠습니다. 책을 친한 벗으로 삼아
궁리하고 모색하고 감동한 글이 많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동행중에서 몇몇 작품에 상을 주기는 했
지만, 부지런하게 책을 읽고 생각을 모으고 글을 써 보낸 학생들 모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저는 학교에서 책 읽고 글쓰기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잘 쓴 학생 글을 자주 읽힙니다. 또래가 쓴
글을 보면서 얻어 배우는 게 많다고 생각해서지요. 글쓴이에게 다가온 문제의식이나 감동이 잘 나
타난 글을 읽다보면 자신이 받아들인 책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물론 독후감은 책이 요구하는 형식에 따라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저 마음에 와 닿는 부분에 밑줄
을 치거나, 이해하며 잘 읽기, 혹은 읽은 내용을 요약하며 말하기, 더 나아가 자신의 삶과 연관 지
어 독후감 쓰기까지 이 모두가 책을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내 것으로 소화하
려면 결국 ‘책 읽고 글쓰기’로 이어져야 합니다. 세르반테스가 말했다지요. ‘글은 글 쓴 사람
의 영혼을 보여준다’구요. 좋은 독후감은 독자가 주인인 글입니다.
책을 읽어라, 얘기하면서 내게 묻곤 합니다.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책은 세상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기도 하지만, 내 마음을 지키게도 합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도록 책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를 지
켜봐준다고 생각하니까요. 여러분에게는 이런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것도 역시 책을 읽다가 옮
겨놓은 문장입니다.
대상은 비룡소 홍보책자에서 옮겼습니다.
비룡소 제1회 청소년 독서 감상문 대회 수장작 소개
태양
- <운하의 소녀>를 읽고
대상 박지수 한국삼육중학교 2학년
매일같이 기억의 문을 닫아도 내일 혹은 언젠가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릴 때쯤 다시
빠끔히 고개를 치켜드는 기억. 한동안 잊고 있던 낯선 기억은 기억의 밤 곳곳을 돌아다
니며 슬픈 기억, 아픈 기억이라는 친구들을 끄집어 낸다.
괴롭다. 자신이 눈 밖에 깜박거리지 못하는 인형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괴롭다. 괴로워하면서도 즐기고 있는 자기 자신의 양면을 발견했을 때.
그런 기억들을 다 태워 버리려, 없애 버리려 눈물이란 불을 지펴도 그 기억의 잔해는
이리저리 떠돌다가 어느 한 구석에 눌러 앉아 다시금 기억의 뿌리를 내리곤 한다. 가슴
이 아파 오기 시작하면 이미 기억의 뿌리는 다시 이곳저곳에 깊게 자리 잡아 있는 것이
다. 길고 장황하고 아름답게 상황을 묘사한 문장보다 짧고 간결한 문장 하나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가슴속에 남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이 훔친 거야."
아마 선생님은 사라의 상처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 미묘한 감정의 떨림, 이리저리 나 있는 감정의 생치기…….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 괴롭고 다시 되살아난 자신의 기억에서 벗
어나려 발버둥 쳤을 것이다.
처음에 선생님은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는 기억의 뿌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괴롭
고 싶지 않아서 철저하게 무시하려 했다. 사라가 20년 전의 사진 속 자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그날의 흔적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일에서 도망치고만 있
는 자신을 직시했다. 그 기억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으면서 사라에게는 그 힘든
일을 시키려고 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그녀는 망설였지만,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저버리
지 않았고 그 기억을 끌어안았다.
기억은 그녀에게 남겠지만, 그녀는 이제 기억으로 인해 아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른다.'
사라의 어머니는 어떻게 그녀의 딸을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다. 항상 다그치고 훈계하는
것만이 사라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사랑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무조건 그녀를 탓할
수만은 없다. 그녀가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은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대되게, 사라의 아버지는 그 마음속에 담겨진 자신의 상처를 알고 자신이 이래
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알았지만 계속해서 망설였다. 자신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가족의
모습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가장
마지막에 가서 딸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사랑한다."
아마 그 말은 사라가 아버지에게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말이었을 것이다.
이번엔 사라로 넘어가 보자.
이 소설의 주제는 요즘 대두되고 있는 '청소년 성범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
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단순히 표면적이고 얄팍한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의 상처도 품지 않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란 없다.
가슴 속을 저며 오는 슬픔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그 상처를 깨닫고 어떻게 그것에 대
처하는 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은 항상 그대에게 미소 짓지 않는다.
친구 한 명이 옆에서 이 이야기를 읽으며 '불쌍하다.'고 말한다.
불쌍하다. 불쌍하다. 불쌍하다.
그 이야기에 맞장구까지 쳤으면서 글을 쓰는 내 머릿속에는 자꾸 그 단어가 맴돈다.
'그 사람이 네 몸을 훔친 거야.'라며 사라에게 중얼거리던 선생님의 그 말처럼. 이 일을
불쌍해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덮고 넘어가야 하는 걸까? 나는 아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아니, 내가 판단해야 할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이 책에서 느끼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그것이 이 책에 미묘한 감정의 굴곡을 수없이 심어
놓은 작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그 소녀였다면 아마 난 평생 그 사실을 기억의 골방에 밀어 넣으려 애만 썼
을 것이다. 사라는 운하의 끝에 할머니가 있고, 태양이 있다고 말했다.
사라의 가슴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흐릿하게 남아 있고 운하는 흐른다.
감정을 다 이해할 순 없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해서도 안 된다.
끝 장면에 소녀는 배 부분이 까맣게 타 버린 인형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운다.
어떤 의미의 눈물이었을까?
후회? 아니면 용서?
이번엔 책을 다 읽은 그 친구가 내게 말한다.
"지수야, 이거 슬프다."
그 말에 대해 난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까?
그저 난 웃고 말았다. 난 이야기의 끝이 그렇게 슬프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소녀는 울었지만 그 다음날 운하의 물은 다시 흐를 것이기에.
참고로 알라딘 리뷰 몇 편까지 포함해서 자료에 올렸습니다.
첫댓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경혜 선생님 심사평 말 "독후감은 책을 읽고 느낀 것을 쓰는 것"이라는데 대상을 받은 아이의 느낌은 무엇일까? 그 아이도 책을 읽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그 책에서 느끼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것이 작가에 대한 예의라고. 이 이야기 끝이 슬프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운하의 물은 다시 흐를 것이기에. 이것이 이 책을 읽고 느낀 것일까? 느낀 것이 무엇인데 대상까지 받았을까? 참 궁금하네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내일, 운하의 물은 다시 흐를 것이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