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가 묻고 교무가 답하다] 원망생활, 어떻게 감사생활로 돌리나요
김인서 교무
Q. 원불교에서는 ‘감사생활’을 하라고 합니다. 일상에서 감사한 일은 잘 찾아지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도 잘 가져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어떻게 원망을 감사로 돌릴 수 있나요?
A. 감사함은 잘 찾아지는데 원망심은 감사로 잘 돌려지지 않는 군요. 감사로 돌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왜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려야 하는지 스스로 납득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로 돌려야 하는가!’ 싶은 거죠. 밉고 화나고 꼴보기도 싫은데 어찌 감사할 수 있을까요?
감사하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은 모두 ‘나’에게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내 몸과 마음을 ‘좋음’의 상태로 이끕니다. 반대로 원망하는 마음은 나를 힘들게 합니다. 저도 ‘내가 느꼈던 원망심’이 그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잘못한 것은 상대이고 외부적 상황인데 내 몸과 마음이 상처를 입는 거죠. 그리고 그 상처는 고스란히 내 주위 인연에게 투사됩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쓴 책 <이기적 유전자>는 이타적 인간과 이기적 인간에 대해 다룹니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를 설명할 때,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까지 포함시켰습니다. 인간은 타인과 나, 용서와 미움, 원망과 감사 중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선택한다는 이론입니다. 즉 어머니의 희생도 결국에는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선택이라는 거죠.
우리는 상대적인 인연 관계의 표준을 ‘자리이타’를 말합니다. 나를 온전히 챙기는 것이 기초되지 않으면 이타의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원망을 감사로 돌려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린다는 것은 희생이나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이 먼저 상하기 마련입니다.
공자는 ‘중용’,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 부처님은 ‘자비’, 예수님은 ‘사랑’, 소태산 대종사님은 ‘은혜’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모든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행위의 목적은 행복을 위한 길입니다. 화내기, 싸우기, 큰소리치기, 혼내기, 때리기, 물건 던지기 등은 결국 자신을 해하는 행동입니다.
정산종사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감사생활만 하는 이는 늘 사은의 도움을 받게 되고, 원망생활만 하는 이는 늘 미물에게서도 해독을 받으리라.”
참으로 무섭지만 동시에 희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감사생활하는 사람에게는 늘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은 쉽지 않지만, 늘 감사할 일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반송교당
[2024년 6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