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에서 퍼온 글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 부정하는 <교원 성비위 처리 매뉴얼’>
=========================================
성 관련 비위혐의로 곤욕을 치르는 교사들이 늘고 있다. 교원에게는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성 관련 비위를 저지른 교원에게는 더 엄한 처벌을 가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더욱이 그 대상이 미성년 학생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요즘 문제가 되는 사례들은 이것과는 결이 좀 다르다. 성 관련 혐의로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는 순간, 죄가 있는 없든 그 교원은 절벽 끝에 내몰리게 된다. 교육부가 지난 2018년 4월에 만든 『교직원 성 관련 비위처리 대응 매뉴얼』(이하 ‘매뉴얼’) 때문이다. 이 매뉴얼에 따르면, 성 비위 신고가 들어오면 그 교원을 피해학생과 분리하기 위해 수업배제‧연가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하고,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면 즉시 직위해제 조치를 해야 한다.
직위해제는 형사기소 등 직위를 계속 유지하기 어려울 때 별도의 절차 없이 일시적으로 직위를 박탈하여 직무에 종사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다. 직위해제 조치는 징계위원회도 열 필요 없이 인사권자의 직권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직위해제 처분을 받으면 승급과 보수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고 각종 포창‧포상에서도 제외된다. 명예퇴직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직위해제 자체는 징계가 아니지만 징계 못잖은 불이익 효과를 갖는 징벌적 조치다.
더 심각한 것은 그 교원의 명예와 신뢰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준다는 점이다. 도덕성과 신뢰가 생명과도 같은 교원에게, 성 관련 비위로 직위해제를 당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다. 나중에 무고함이 밝혀져도 이미 훼손된 그 교원의 명예는 회복할 길이 없다. 유죄가 확정되기도 전에 사형선고를 받는 셈이다. 누구도 그 교원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모함‧오인 등 유죄 여부가 의심스러운 경우에도 그 교사는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없다. 실제로 성 관련 비위로 재판까지 갔다가 무죄를 선고받은 교사들도 적지 않다. 자녀의 일방적인 말만 믿고, 또는 소수의 악동들이 담합해서 특정 교사를 물 먹인 것이 드러나 누명을 벗었지만, 그 교사가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고소한 사람을 혼내줄 수도 없다. 아니면 말고… 교사는 피멍을 안고 다시 교단에 서야 한다. 교육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이 매뉴얼은 헌법이 정한 ‘무죄추정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 우리 헌법 제27조 제4항은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형사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단지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심만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 원칙은 형법의 대 전제로서, 하위규범인 법률이나 명령‧규칙‧훈령으로 부정하거나 제약할 수 없는 최상위 규범이다. 그러나 교육부의 매뉴얼은 교원이 단지 성 관련 비위로 경찰의 수사나 조사를 받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교원을 즉시 직위해제 하도록 했다. 경찰의 수사는 혐의사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절차일 뿐, 유죄 확정이 아니다. 그러나 이 헌법 조항은 학교현장에서 무용지물이다.
직위해제에 관해 규정한 국가공무원법 제73조의 3에서는 직위해제의 요건을 다음과 같이 엄격히 정하고 있다.
“금품비위, 성범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비위행위로 인하여 감사원 및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조사나 수사 중인 자로서 비위의 정도가 중대하고 이로 인하여 정상적인 업무수행을 기대하기 현저히 어려운 자”
다시 말하면, 성범죄로 수사기관이 수사 중인 사람이라도 ‘비위의 정도가 중대’한 경우에만 직위해제를 할 수 있다. 법조항 어디를 보아도 ‘수사 시작과 동시에 직위해제’ 하라는 내용은 없다. 교육부의 매뉴얼이 상위법인 국가공무원법과 헌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부의 매뉴얼은 비위 정도와 업무수행 지장 여부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 직위해제 조치부터 내리도록 했다. 또 경미한 사안이나 진위를 다투는 사안에 대해 교육감 등 인사권자의 재량적 판단의 여지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법을 잘못 해석한 자신의 책임을 해당 교원에게 전가하여 과도한 징벌로 덮으려는 것이다.
무고나 오인의 가능성이 예측되어 쌍방이 유‧무죄를 다투는 상황에서, 교원에게 직위해제 조치는 일방의 손을 들어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또, 동료교원과 학생‧학부모들에게 유죄의 심증을 강화하거나 징계를 기정사실화하는 심리적 효과를 부여한다. 따라서 해당 교원은 유죄가 확정되기도 전에 ‘범죄자’ 낙인이 찍히게 된다.
설령 성 관련 비위가 의심되는 교원을 긴급히 피해학생과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직위해제가 아닌 연가‧학급교체 등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구태여 직위해제를 의무화할 이유가 없다. 법이 지키고자 하는 법익을 실현할 다른 방법이 있다면,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사람의 권리와 방어권 행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무죄추정의 취지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비위의 정도를 살펴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채, 모든 대상자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직위해제 조치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것은 결국 정부가 ‘교원 성폭력 근절’ 의지를 과시하기 위해 전체 교원을 속죄양으로 삼는 꼴이다.
참고로, 지난 2017년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이 성범죄 관련 수사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는 교원을 즉각 직위해제하는 내용의 교육공무원법‧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적이 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교육부의 매뉴얼과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법조계로부터 ‘무죄추정의 원칙 위배’, ‘위헌소송 패소 가능성’이 지적되면서, 박 의원은 자신이 대표발의한 개정안을 스스로 철회했다. 심각한 문제점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그 뒤 상식적으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박경미 의원이 스스로 폐기한 법 개정안을 교육부가 그대로 들고 와서 매뉴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직원 성 관련 비위처리 대응 매뉴얼』이다. 매뉴얼은 법도 시행령도 아니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행정지침에 불과하다. 위헌시비를 피하기 위해 꼼수를 쓴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현행법에 근거가 없다면 법부터 먼저 개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맞다. 헌법정신에 비추어 그런 내용의 법 개정이 불가능하다면, 현행법의 취지에 맞게 직위해제 조치의 무분별한 남발을 막아야 한다. 교육부는 당장 매뉴얼을 폐기하거나, 대폭 수정하기 바란다.
첫댓글 이건 제가 보기에도 매우 심각 사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기 정책협의회나 교섭 시, 주요 안건으로 다뤄 자기변호권을 확보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