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9JW8ijjz9sU?si=4fiuAxqIQINssLIM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13868.html#ace04ou
<용어정리>
- banality : 따분함, 시시한 말(일), 평범함
=> 해당 주제를 다루기에 앞서, 나는 사상가가 주장한 ‘Banality of evil’에서 banality의 용어를 ‘평범’으로 정의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추잡함’ 따위의 개념과는 엄연히 구별됨을 우선적으로 밝힌다.
<기사요약>
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책 읽어 드립니다
: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아이히만의 행동적 기질을 직접적으로 관찰하고, 이에 대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자신의 사상과 더불어 서술한다. 그의 비인간적 행위를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함과 동시에, 인간은 누구나 ‘악’을 내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범 재판에서의 내용을 사실적으로 서술하여 홀로코스트의 잔혹함을 묘사한다.
2. 미궁의 어둠 헤쳐 나간 아렌트 ‘사유 모험’ - 한나 아렌트의 ‘난간 없이 사유하기’: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잔혹함과 대비되는 평범성을 근거로, 인간의 사유능력을 강조한다. 사유능력의 무지는 아이히만의 행동, 홀로코스트의 잔혹함, 결국에는 전체주의의 사상적 기반에 기여했음을 밝히며, 각자 내재된 ‘악’의 존재가 거시적으로 발현되면 폭력을 초래하고, 폭력이 극한에 다다르면 권력의 종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설명한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은 난간 없이 오르는 ‘사유의 모험’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나의 생각>
- 최근 한나 아렌트의 사고 방식과 그러한 그녀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사상은 나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사상적 배경을 3가지 질문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우리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악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인간 존재의 악함의 원천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어떻게 발현되는가? -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악의 평범성’, ‘사유능력의 무지’라는 답변으로 스스로 자문자답한다. 그녀의 사상에 따르면, 우리 존재 자체는 모두 선한 것처럼 보임과 동시에, 모두가 선천적으로 시시한 수준의 미약한 ‘악’을 내재한다. 우리 속에 내재된 ‘악’의 존재가 발현되면 아이히만과 같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잔혹함을 보일 수 있으며, 행위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무지로 인해 악한 존재로 바뀌어간다는 것이 아렌트의 사상이다. 결국, 우리의 악함은 ‘사유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이히만을 예로 들어, 그의 잔혹함을 고려할 때, 그는 자신의 잔혹함과 무지가 불러 일으킬 결과를 스스로도, 타인의 입장에서도 ‘사유’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를 ‘악인’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 사유의 여부는 행위의 결과로 확인한다 -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외의 저서에서도 ‘이해’하고 ‘사유’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실제로 아렌트는 스스로도 사유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음을 밝혔다.)
나는 아렌트의 사상에 입각해, ‘난간 없이 사유하기’라는 그녀의 비유를 현대적 관점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아이히만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미약하지만 거대해질 수 있는 ‘악’을 내재한 존재이기 때문에 늘 ‘사유’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평범한 존재에서 악한 존재로, 악한 존재에서 평범한 존재로 이행할 수 있고, 평범한 존재이지만 악을 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banality of evil’, 악의 평범성을 일컫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악이 평범하기에 평범한 존재도 악행을 저지를 수 있고, 악한 존재가 평범한 외형을 갖춘다고 주장하는 것에 반해, 나는 추가적으로 악이 ‘평범’하기 때문에 악한 존재도 사유를 통해 평범한 존재로 재이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유’는 더욱 더 중요하다. 악함을 순화하고 절제할 수 있는 힘이 ‘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든지 단순히 ‘사유해라’ 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어려운 일이다. - 또한, 단순한 사유는 무가치하다 - 누구나 사유의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자유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또 사유의 자유를 통해 어떠한 존재로 나아가야 하는지 우리에게 주어진 정답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악함을 볼 때, 우리는 그 해답을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적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서의 사유에 이어, 타인의 입장에서의 사유가 필요하다. 타인의 입장에서의 사유는 ‘이해’와 ‘배려’ 또한 포함된다. 아렌트에 의해 현재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유의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틀은 이것 뿐이다. 우리에게는 정확한 깊이도, 정도도 알지 못하는 ‘악’을 절제하기 위한 사유가 필요한 것인데, 강제적이고 순응적인 방식으로 일반화된 사회의 기준만을 따르는 아이히만과 같은 사유는 아렌트가 정의하는 사유가 아님은 분명하다. 이에 더해 타자화로부터 비롯된 사유는 더욱 더 무쓸모하고, 오히려 해가 될 것이다. 아렌트가 정의하는 ‘사유’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면서도 이타적인 것이다. 만약 아렌트가 정의하는 사유를 현대인들이 할 수 있었다면, 잔혹함이 만연하는 사회구조가 조금이나마 바뀔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구조로 인해 강제적으로 요구되는 무의미한 사유보다, 스스로 내재된 악을 절제하고 감정과 욕구를 조절할 수 있게 하는 사유를 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지금보다 더 다채롭게 할 것이다.
우리 사회를 가치있게 만들어줄 사유에 대해,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악’을 제거해야 한다는 잘못된 관념일 것이다. 우리에게 내재된 악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했더라면, 과거의 우리가 저지른 행위는 모두 ‘악의 제거’의 반례로서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는 ‘악’의 제거를 시도함과 동시에,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관념과 행위의 모순 그 자체이다. -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는 사회구조 내에서 발생한 인종적 편견으로 비유대인 속에 내재된 ‘유대인 증오’라는 악(=혐오의 감정)을 제거하기 위해 대학살이라는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의 제거’와 ‘대학살’은 서로 상충한다. - 그저 악을 절제하고 속에서 잠재우는 것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만들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가 언급했듯이, 우리에게는 난간 없이 자유롭게 사유해야 한다. 즉, 어두컴컴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우리의 해답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 ‘지성적 사유’, 그것만이 우리의 사회를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이자, 우리의 내재력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사유’를 위해 지평을 넓혀 발돋움하고, ‘사유’를 통해 더 나은 사회로 변혁시킬 수 있는 주체적이고 지적인 존재가 되길 소망한다.
<확장탐구>
'악을 자기실현을 통한 개성화로 해소 -> 악의 완벽한 제거 X'
융이 무의식은 '자기'의 실현을 목표로 발전해 나간다는 점을 언급
무의식은 사유하지 않는 상태인가?
그렇다면 융이 언급한 무의식은 사유하는 것에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
-> 융의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 우리 자신의 내면의 낯선 것, 알 수 없는 것들이 우리의 경험이나 마음의 변화, 꿈 등과 같이 떠오르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경험들을 의미한다.
융;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이 나타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유다.
경험에 따른 무의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사유하지 않는 본능적인 과정임
의식의 영역은 순간적 시각에 의해 제한되지만, 무의식의 영역은 무한하고 항상 지속적이다
-> 사람들은 무의식의 상태로 살아가고, 의식의 영역으로 존재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무의식 상태로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사회적 법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사유하지 않아서 보편적으로 여기는 것들의 윤리적 타당성을 고려조차 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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