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6:1-5, 성도에게는 자신이 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범죄한 일이 드러나면 교회는 어떻게 하는가? 흔하게는 제일 먼저는 교회는 숨깁니다. 요즘은 까발리기도 하지만 보통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덮어 줍니다. 그것이 교회의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몰라도 교회는 그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과연 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지요?
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위하여 기본적인 교훈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시고 있습니다. 1-5절에 있는 말씀들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기다립니다. 받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형제를 바로 세우는 자는 신령하고 온유한 자여야 합니다.
1절에 보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에서 ‘범죄한 일’‘파랍토마티’는 ‘걸림, 실책, 범죄, 허물, 넘어짐, 곁에 넘어짐, 발을 헛디딤’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어는 본문에서 ‘진리와 정도에서 벗어나 넘어짐’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또한 윤리적인 부분도 간과하지 않고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종합해 보면 성령과 동행하지 않는 삶, 성령을 거스리는 여러 가지 육체의 일, 혹은 무슨 범죄든지 모두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프롤렘프데’는 ‘미리 준비하다, 미리 취하다’ 수동태의 의미로 ‘갑자기 기습을 당하다, 압도되다, 유혹되다, 함정에 빠지다’ 수동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됨을 말하고 있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어쩔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됨으로 자신도 모르게 부지중에 범죄를 범하였을 때 혹은 유혹을 받았을 때, ‘신령한 너희는’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에게 바울이 교훈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신령한 너희는’ 이 말은 어떤 은사의 신비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쫓아 행하는 성도, 혹은 성령 충만해서’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범죄한 자들을 잡아주고 세워주는 일은 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하십니다. 범죄한 형제를 바로 잡아 주는 일, ‘바로잡고’‘카타르티제테’의 의미는 ‘그 이전 상태로 회복시키다’‘완전케하다’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잡아주는 일, 회복시키는 일, 완전케 세워주는 일’을 하는 자는 성령이 충만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온유한자는 어떤걸까요?
‘온유한’‘프라우테토스’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겸손한 마음을 의미합니다(갈5:23) 혹은 철저히 말씀으로 다듬어진 자 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범죄했다고 해서 인간적인 잣대로 즉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징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죄하지도 멀리하지 말고 늘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돌보아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의 능력, 즉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이단어는 현재 능동태 명령 분사 단수입니다. 단순히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의를 집중하여 보는’‘자세히 조사하다, 관찰하다, 주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비난하고 책망하고 다그치며 몰아세우기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죄성을 가진 죄인이고 단지 밖으로 들어나지 않았을 뿐 내면을 들여다보면 더 죄악이 클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8장에서 예수님앞에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정죄한 유대인이 바로 그러한 모습의 대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쳐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주위에 혹은 교회 내에 범죄하여 시험에 빠진 자가 있다면 정죄하지 말고 그 형제를 사랑으로 교정해 주고, 또한 그의미가 ‘자세히 관찰하고 조사하여’ 라는 의미인 것처럼 그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자신의 신앙과 삶을 자세히 살피고 자신에게 적용하여 그러한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혹은 그러한 범죄에 시험, 유혹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말씀이 벧후2:6절에서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또한 고전10: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2절을 직역하면 “서로 짐을 져서 예수아 마쉬아흐(그리스도)의 토라를 이루십시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서로 협력하고 보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빌2:2-4절을 함축했다고 볼수 있는데,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다음으로 ‘짐’은 ‘바레’로서 ‘짐, 수고, 중한 것’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짐은 무얼까요? 그것은 1절에서 언급하신 것, 신령한 일을 방해하고 있는 시험거리, 그래서 성도들을 근심케하는 요소들입니다. 혼자는 감당할 수없어 그짐에 눌리게 되고 헤어나오지 못하지만 그것을 성도들이 함께 나누어 지므로 쉽게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라’는 능동태로 되어 있어 한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교회는 이러한 일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이일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교만은 스스로를 속이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3절입니다. “참으로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엇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직역입니다. 여기서 ‘속인다’‘프레나파타’는 ‘지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있는 마음’‘지혜’를 의미하는 ‘프레’와 ‘속이다’의 ‘아파타오’의 합성어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단어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 착각과 기만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으로 자신은 살피지 않고 끊임없이 상대방의 허물과 실수를 문제 삼아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런 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외식주의자인 것입니다.
현재 우리 자신은 어떠합니까?
우리 역시 영적으로 뒤틀려 있는 그래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축자가 버린 돌같은 존재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전에는 우리도 쓸모없는 흙덩어리에 불과 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므로 이제 멸망받을 죄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후사로, 자녀로 세워진 것을 바르게 인지했다면 우리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주님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또 요일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성도는 자긍심은 있어야 하나 자만심은 버려야 합니다.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가 주유소에 갔다가 우연히 힐러리의 옛 남자 친구를 만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클린턴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저 남자와 혼인했으면 지금 주유소 사장 부인이 돼 있겠지?" 그러자 힐러리가 말했습니다."아니, 바로 저 남자가 미국 대통령이 되어 있을 거야." -자기 교만은 피해야 하지만 자기에 대한 자긍심과 신뢰는 높아야 합니다.
4절 직역성경“각자 자기 자신의 일을 시험하십시오 그러면 자랑할 것이 자기 자신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없을 것입니다” 개역개정 ‘살피라’‘도키마제토’는 ‘분별하다, 시험하다, 증명하다, 불로 연단하다’의 현재 명령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모습과 행위를 불로 연단하듯이 시험해보고 분별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랑거리가 자기 자신에게서만 있고 타인과 비교해서 더 잘났다고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자신이 인정해 주는 자긍심만 있어야지, 남과 견주어 스스로를 뽐내는 것은 자만심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만심은 자기만 잘났고 자기만 옳고 그래서 남은 무시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16:18절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 했습니다. 좋은 예가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왕입니다. 단4:30절에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왕의 자만의 찬 말이 채끝나기도 전에 32절“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녀라는 자긍심은 있어야 하지만 자만은 버려야 합니다. 사5:21절“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할렐루야~~
성도에게는 자신이 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5절, 직역성경 “참으로 각자 자신의 짐을 져야 합니다” 단어 ‘짐’‘포르티온’은 공동으로 나누어지는 짐이 아니라 자기에게 부과된 짐, 책임을 의미합니다. 성도라면 하나님 앞에서 짊어져야 할 의무, 혹은 책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지는 삶말입니다. 예를들어 살펴보면 믿음에 충실한다든지, 겸손, 희생, 온유, 친절하여야 하는 일등등,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하셨으니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어야 합니다. 성도는 그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의무이고 책임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성령충만하므로 무장하여 연약한 성도들을 세워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된 온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자신의 거울로 삼아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성도는 자긍심은 가져야 하나 자만심은 버려야하며 자신의 짐을 져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고 책임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잘 감당했을 때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섰을 때 그리스도예수로부터 잘했다 칭찬받고 상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