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예루살렘교회의 구제와 하나님의 종말 계획
사도행전 20:1-16; 로마서 15:14-33
오늘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들려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한 사도 바울의 여행 행로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특별히 왜 이런 길을 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낭독한 사도행전 20:1에서는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라고 기록하여서 마치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은장색 업자인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일어난 소동이 그쳤을 때 에베소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Luke)는 3년여의 에베소에서의 사역이 마쳐질 무렵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한 번 더 방문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기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서신서들을 보면 분명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한 번 더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문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2:1-5에서 ‘눈물의 방문’ 혹은 ‘혹독한 방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 계획
에베소에 머물고 있던 사도 바울의 계획은 사도행전 19:21과 로마서 15:22-28에서 볼 수 있듯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로 가서 로마 교회로부터 약간의 영적, 재정적 도움을 받아서 로마를 중심으로 당시 로마 제국의 서반부에 해당하는 스페인을 시작으로 그 서반부에 위치한 곳에 가서, 즉 서유럽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에 복음을 전하면 그것으로 자신의 사역이 다 끝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서 15장의 사도 바울의 언어(言語)의 행각(行脚)을 잘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틀림없이 북부 아프리카와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자신이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과 관련하여 가지고 있던 복음 사역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바울 자신이 세우지도 않았고, 그래서 로마교회의 성도들도 사도 바울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지만, 그들의 영적, 재정적 도움을 받아서 더 정확히 말하면 사도 바울이 이제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에서는 복음을 다 전하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야겠는데 지금까지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 선교에서는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선교의 모(母) 교회로서 후원을 하여 주었지만 이제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수리아 안디옥교회는 거리상 너무 멀기 때문에 로마교회가 서쪽 지역 선교에 있어서 모(母) 교회가 되어 달라고, 후원하는 교회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면서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대해서 논증(論證)해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이것이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합니다.
고린도교회와 고린도서(書)의 문제
사도 바울이 이러한 계획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베소로부터 출발하여 예루살렘을 보고 로마와 스페인으로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머물면서 고린도교회의 대표 세 사람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방문한 이유는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을 써서 보냈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이 고린도전서를 디모데와 에라스도 편에 보냈는지 아니면 디모데와 에라스도는 먼저 떠나고 다른 사람의 편에 보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고린도전서를 써서 디모데 편에 보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을 보낸 것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평정하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후에 고린도를 떠나 다른 곳에 있을 때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기 때문에 그 헌금을 독려하고 가져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디모데와 에라스도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평정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헌금을 거두라고 한 것에 대해 고린도교회 성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사기꾼으로 몰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사역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자신이 직접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에 대한 두 번째 방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직접 나서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큰 슬픔 가운데 에베소로 귀환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 자신이 나섰음에 불구하고 선동적인 고린도교회의 몇 사람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다시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그 내용, 그 심정이 고린도후서 2:1-5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때의 방문을 ‘쓰라린 방문’, ‘슬픈 방문’, ‘고통스러운 방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헌금을 거두는 이 일에 대해서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입니다. 이처럼 쓰라린 마음을 가지고 에베소로 다시 돌아온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아주 강경한 어조로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내면서 디도에게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평정하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게 보내는 이 세 번째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 역시 고린도후서 2:1-5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 번째 편지를 ‘눈물의 편지’ 또는 ‘혹독의 편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편지를 썼다는 것을 고린도후서 2:1-5에서 분명히 알 수 있지만 첫 번째 편지처럼 없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 번째 편지를 디도 편에 보내면서 고린도교회를 평정하라고 하였지만, 그래도 고린도교회의 심각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도를 속히 만나서 고린도 교회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하여 고린도로부터 뱃길로 돌아오는 디도를 하루빨리 만나러 드로아로 갔습니다. 하지만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드로아에 복음을 전할 기회가 활짝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많은 힘을 기울이지 못하고 디도가 뱃길이 아니라 육로로 오는 줄 알고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고린도후서 2:12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은 그곳에서 디도를 만납니다.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났을 때 디도는 사도 바울의 ‘혹독한 편지’ 그러니까 지금은 없어졌지만, 고린도에 보낸 세 번째 편지가 효과가 있어서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의 권위에 대적하고 반란하도록 주모한 사람을 정죄(定罪)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고후 2:6 이하 참조). 그래서 디도를 만나서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사도 바울은 네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를 써놓았는데 거기에다가 덧붙여서 고린도교회로 보냈습니다. 이 네 번째, 다섯 번째 편지가 합해진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린도후서입니다.
이 과정을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 번째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고린도교회로 보냈지만, 고린도교회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인지 안심할 수 없었서 디로를 만나러 드로아로 갔다가 만나지 못해서 마게도냐로 갔다가 빌립보에서 디로를 만났습니다. 빌립보에서 디도를 만나서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네 번째 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네 번째 내용이 바로 고린도후서 1-9장까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9장의 내용은 예전에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교회 형제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달라고 하였기 때문에(고전 16장 참조) 사도 바울은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권한과 영광을 생생히 그려 표현하였습니다(고후 3-6장).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헌금의 문제가 커져서 더는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린도교회가 평정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다시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헌금을 할 것을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어떻게 헌금을 해야 하며, 자신이 어떻게 그 헌금을 걷으러 갈 것인가를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 1-9장까지의 내용을 보내려고 할 때 또다른 문제가 고린도 교회에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고린도교회의 외부로부터 침투한 거짓 선생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사도직의 권위와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걷는 헌금에 대해서 또 오해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사도직(使徒職)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사도 바울과 예루살렘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 헌금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고 바울의 사악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들 한번 생각해 보라. 바울이 당신들과 함께 있을 때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하라고 하지 않다가 당신들을 떠난 후에 헌금하라고 하는 것은 의심해 볼 만한 일이 아니냐? 그것은 바울 자신이 착복하여 자기 배를 불리려는 일이다. 그러니 바울은 사기꾼이다’고 하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네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 1-9장까지를 막 보내려고 하는데 거짓 선생들이 침투해서 사도 바울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빌립보에 머무는 사도 바울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앞에 쓴 고린도후서 1-9장에다가 10-13장까지를 덧붙여서 고린도교회에 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정면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는 1-9장과 10-13장이 내용적으로나 그 글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어조(語調)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교회들의 헌금과 대규모 헌금단의 예루살렘(시온) 방문의 신학적 의미
제가 여러분에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편 고린도전후서의 배경에 대해 장황하게 말씀을 드린 이유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고린도전후서의 배경과 관련하여 장황하게 말씀을 드렸는데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꼈습니까? 사도 바울이 헌금을 걷는 일을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헌금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2년 동안이나 준비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헌금을 가지고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쓰려고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헌금을 걷는 일에 이렇게 집착을 보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이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헌금을 걷는 일은 구원사적(救援史的)으로나 종말론적(終末論的)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방 교회들 역시 생활이 넉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 8:1-5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도 이방 교회의 형제들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이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세운 모든 교회에 반드시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헌금을 하도록 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사도 바울이 이방 교회들로부터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걷는 이유는 구원사적이고 종말론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헌금에다가 종말론적 구원사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로마서 15장에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14-33에서 앞으로 있을 자기의 여행 계획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페인에 가서 선교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먼저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거기에서 약간의 재정적, 영적인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우지도 않았고, 그래서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로마서는 고린도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고 고린도에서 헌금을 거두는 일도 순조롭게 잘 되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앞으로의 자신의 선교 사업에 대해서 구상을 하면서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은 사도 바울의 신앙과 신학, 즉 그의 복음을 논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논증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불과 얼마 전에 고린도교회가 평정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빌립보에서 고린도후서 가운데 10-13장을 써서 보낼 때 고린도교회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거짓 선생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갈라디아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서 교회를 세운 곳이면 다 그러한 문제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 이런 곳에서의 사도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에 대해서 시비가 많이 붙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3장을 보면 빌립보에서도 바울의 신학에 대해서 시비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이었기 때문에 혹 로마교회도 사도 바울에 대해서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신학과 사도직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리를 소문으로 들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같으면 바울 신학은 너무 자유주의라고 했을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처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다 성취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구약적으로 지키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오해해서 ‘바울은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유주의다’ 하는 이런 소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도 들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자신의 복음을 정확히 설명하는 편지를 쓰게 된 것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정확히 알아야 로마서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로마서 15장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하기 위하여 로마교회가 후원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두로 행한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빙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편만하게”라는 말은 ‘가득차다’, ‘완수하다’, ‘성취하다’라는 말로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부터 빙 돌아서 그러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에는 복음을 다 전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동쪽 지역에서는 일할 곳이 더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아직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일할 것이지만, 남의 터 위에서는 일하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도 바울로서는 이제는 로마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인 스페인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AD. 57년에 고린도에서 자기의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에서 선교 사업을 결론짓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5:22 이후부터 보시면 그러면은 여러 번 자기가 로마에 가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길이 막혔는데 이제 드디어 갈 수가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무엇이 막혔느냐 하면, 아마도 가장 어려운 것이 고린도교회의 반란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약 3년 동안 머물면서 고린도교회의 반란의 문제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린도교회에 적어도 네 번 혹은 다섯 번의 편지를 보내면서 디모데를 보내고, 디도를 보내고, 그래도 되지 않자 스스로 방문하고 해 가면서 그 문제를 평정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제는 로마에 가고자 했던 길이 열리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에서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회와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듯이 그 문제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헌금 문제요,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의 사도직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헌금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을 위하여서는 교회에서 헌금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교회에 침투해서 사도 바울이 없는 사이에 ‘바울은 엉터리 사도다.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도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분들과 같이 여러분들 가운데서 목회할 때 차마 여러분들에게 헌금을 하라고 하지 못하고, 사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천막 짓는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해 놓고는 다른 곳으로 떠난 뒤에 편지로 디모데를 보낼 테니까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하여 모아놓아라.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느냐? 바울은 순전히 사기꾼이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헌금 걷는 일을 하다가 고린도교회에서 사기꾼으로 몰린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6:1-4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헌금을 다 거두어 놓으라고 하면서 말썽이 없이 각 교회의 대표단을 구성해서 그들의 손에 헌금을 맡겨서 예루살렘교회에 보내고, 자기는 예루살렘교회에 보낼 편지만 써서 그 대표들에게 주어서 보내겠다. 그리고 내가 꼭 한다면 그때 나도 같이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낼 때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에 갈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다 해결이 되어서 드디어 고린도교회에서도 헌금을 다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고린도전서 16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각 교회의 대표로 구성된 헌금단에게 헌금과 자기 편지를 쥐어서 예루살렘으로 보내고 자기는 그동안 그렇게 가고자 했던 로마와 서유럽에 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서 15:25에서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각 교회의 대표단으로 구성된 거대한 헌금 단을 대동해서 예루살렘에 간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에 로마로 가서 스페인으로 갈 것이라고 로마서 15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15:30-32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두 가지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첫째, 유대의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서, 즉 믿지 않는 자들의 손에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출해 주도록 기도하고 둘째,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우리 헌금을 받아 주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기도 제목을 통해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까? 첫째는 이 여행이 아주 위험한 여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쩌면 붙잡혀서 유대인들의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르는 아주 위험한 여행이었습니다. 둘째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이 이방 교회들의 헌금을 받아 줄 것인지 받아 주지 않을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이방 교회들의 헌금을 어쩌면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둘째 기도 제목에서‘ 이 당시 사도 바울과 예루살렘교회 또는 사도 바울의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교회가 원만한 관계가 아니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교회가 어쩌면 사도 바울이 세운 이방의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에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다 인정한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예루살렘에 어떤 변화가 생겼고, 예루살렘교회에도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 로마서 15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변화된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당시 유대의 전체 분위기는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을 잡아서 죽일 수 있는 아주 삼엄한 분위기였다는 것입니다. 이때가 언제냐 하면 AD. 66-70년에 일어나는 유대 전쟁 바로 직전입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가 당시 열열당들의 주도로 아주 극단의 민족주의와 특수주의가 일어나는 시기였습니다. 이 열열당들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백성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절대로 교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선민(選民)인 유대들이 이방인들과 교류하거나 이방인들과 상대를 하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의 순결을 더럽히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열열당들은 율법과 언약과 이스라엘의 순결에 대해서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눈에 볼 때는 하나님의 백성이 로마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가이사를 왕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제1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우상 숭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제1차 투쟁 목표는 로마 제국주의와 싸워서 그들로부터 민족을 해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유대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윗 왕국을 재건하여서 하나님께서 택한 다윗 자손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고, 이스라엘 내에 정치적으로 자유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의가 이루어지는 그런 사회를 이루는 것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 특수주의 그래서 이방인들과 교류를 막고 이스라엘의 순결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 교회의 대표들로 구성된 헌금단을 대동하고 예루살렘을 방문하려고 하는 시기가 바로 이러한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이 열열당들에게는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제1차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왜냐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 모세를 일으키고 다윗을 일으킨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다고 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돌아다니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 곧 교회라고 부르면서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돌아다니는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이 열열당의 사람들에게 제1차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로마서 15장을 보면 유대 땅이 이러한 형편에 놓인 것을 사도 바울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자기 혼자 가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예루살렘교회에 보내서 전달하고 오면 그만인데도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 등의 교회 대표들로 구성된 대규모 헌금단을 구성하여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사도 바울의 행동은 바로 유대인들에게 유대 민족주의자들에게 보란 듯이 시위(示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사도 바울이 노출되는 일로서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 것은 유대인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담아서 시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행위들을 구원사적 종말론적 행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종말에는 이방인들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예언서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구원자라는 믿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당시의 예루살렘교회의 형편은 어떠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분명히 로마서 15장에서 예루살렘교회가 이방 교회의 헌금을 받아 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을 감지하였는데 왜 그렇겠습니까? 과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사도들과 유력한 자들을 만나서 선교지 분할도 상의하고, 이방인 교회와 이스라엘교회가 한 성령에 의하여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다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방 교회의 헌금을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느냐는 말입니다.
이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열열당의 압력으로 계속 보수적으로 돌아서고 있었고, 사도 바울의 신학적 견해를 점점 세상적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시대적 상황이 사도 바울이 전도하여 세운 이방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지 않을 상황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교회가 이방 교회의 헌금을 받아 줄 것인지 받아 주지 않을 것인가를 확실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세운 이방 교회에 예루살렘에서 사도들로부터 신임장을 가지고 왔다고 하는 거짓 선생들이 많이 나서서 사도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일이 빈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의 복음은 구약의 할례를 요구하지 않으니까 잘못된 복음이다. 모세의 율법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잘못된 복음이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추천장이 없으니까 사도가 아니다.’ 이렇게 주장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사도 바울을 괴롭혀서 어려움을 당한 것을 보아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이방 교회의 헌금을 헌금 단과 함께 마치 시위(示威)하는 것과 같이 왜 위험한 여행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는 이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즉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교회가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확인하려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에서의 선교를 마치면서 서쪽 지역으로 선교의 장(場)을 옮겨가면서 지금까지 자기의 선교의 뒷받침한 교회는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교회였는데, 이제 사도 바울이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안디옥교회는 거리상 너무 멀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로마를 자기의 모(母) 교회로 삼아서 로마교회로부터 자기의 재정적, 영적 지원을 받고자 하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금까지의 자기의 선교에 대해서 예루살렘교회가 인정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바울 자신의 선교가 더는 인정이 안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교회의 하나 됨이 파괴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여기 예루살렘의 시온에서 시작하고 하나님의 선택된 땅 시온에서 시작한 이 복음의 역사의 정통성의 역사의 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여는 이 시점에서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즉 이방의 교회와 유대의 교회가 하나 됨을 확인하고자 이런 시위를 하는 것이고, 이방 교회로부터 헌금을 거두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사도 바울이 직접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에 의하면 분명히 자신이 직접 갈지 안 갈지 모른다고 했는데 왜 직접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로마교회에게 부탁한 이 두 번째 기도 제목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자기의 교회를 인정 것인지 인정하지 않을 것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을 안 받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과 같다고 했습니까? 바울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을 인정할 것인지 인정하지 않을 것인지를 모른다는 말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언어가 전부 제사장적 언어, 제사 언어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을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이방인들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제사장적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내려오는 그리고 신구약 중간사 시대에 묵시 문학에서도 전승되는 이 이방인들의 시온에 대한 종말론적 순례 사상이 지금 사도 바울을 움직이는 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구약의 이사야, 미가 선지자 이래로 대대로 선지자들이 무엇을 예언하느냐 하면 종말에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나면, 종말에 하나님께서 시온에 오시면, 그 영광의 빛이 온 세상에 비춰서 그 시온에 나타나신 하나님 영광의 빛에 의해서 온 세상의 모든 민족이 곧 이방인들이 여호와를 알게 된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물이 바다를 덮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그렇게 되면 이방인들이 지금까지 지기들이 신(神)이라고 섬겼던 우상들이 실제로는 한 조각의 나무 조각, 돌 조각에 불과한 줄 알고 그들의 우상들을 다 버리고 살아 계신 유일하신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예루살렘 시온에 순례를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가르침입니다. 보수주의 유대 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좀 너그러운 유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구원에 참여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유대 신학자들에 의하면 구원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시온에 와서 이스라엘의 종노릇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선지자들과 묵시 문학의 사상에 의하면 이방인들이 종말에 시온에 순례를 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오느냐 하면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언제 말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나면, 그 영광의 빛이 온 세상에 비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 찼을 때 모든 이방인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신(神)들은 다 나무 조각, 돌 조각에 불과한 우상임을 알고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러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이러한 사상이 사도 바울의 헌금을 걷는 것의 중심 사상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어려움을 겪으면서까지 자신이 세운 교회들로부터 헌금을 거두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도 생각했듯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방문하려고 하였던 것이 바로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간다고 했습니다. 이것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종말에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서 헌금을 거두어서 교회의 대표들로 구성된 큰 헌금단을 대동하고 아주 위험한 예루살렘을 여행하는 이유가 바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로서, 지금 사도 바울은 아까 이야기한 대로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에서의 자기의 선교를 내 비취면서 일단 각 교회에서 거둔 헌금을 대표들이 가지고 와서 그들로 구성된 헌금단이 구제 헌금을 시온에 바침으로 그 헌금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그 헌금과 더불어 그 헌금을 낸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 순례 와서 자기들을 바치는 것입니다. 무엇과 누구를 통해서 이방인 교인들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까? 각 교회에서 거두어들인 헌금과 각 교회의 대표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말에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위험을 무릎 쓰고 대표단을 모아서 예루살렘 올라가는 이유입니다. 이방 교회들이 헌금을 거두어서 헌금 단의 손에 쥐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한 것에 대해서 사도행전 24:17-18에 보면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여기서 말하는 “제물”은 바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바친다’라는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사도 바울이 이 대표단을 모아서 자신의 편지와 함께 보내려고 하였지만, 이제 자기가 직접 가는 이유는 가서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만나서 자기의 복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틀림없는 주(主)의 복음(福音)인 것을 확인시키고 다시는 시비가 없도록 하고, 그래서 서방 선교에서 이방 교회의 충분한 인정이 이루어지도록 하려고 자신이 직접 간 것입니다.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 교회들로부터 헌금을 거두어서 각 교회의 대표들로 헌금단을 구성하고 예루살렘으로 보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약 선지자들과 묵시 문학에서 말하는 종말에 하나님의 빛이 시온에 비췰 때 이방인들이 그 빛을 받고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러 옴으로서 구원이 완성된다는 사상을 성취하려고 보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신약의 성도의 위치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시온을 스스로 계시(啓示)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통치의 선포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사랑과 하나님의 창조주로서 권능이 계시(啓示)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시온에 나타난 그 하나님 영광의 빛을 지금 누가 이방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선포하고 있습니까? 바울 자신입니다. 그래서 시온에 나타난 하나님 영광의 복음에 의해서 이방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9-10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 선포로 일어난 결과를 한마디로 무어라고 하였느냐면 데살로니가인들이 우상을 버리고 우상에서 돌아서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섰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복음을 선포한 결과입니다.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그의 아들을 일으키신 그 하나님,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시온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의 죽음과 인류를 위한 대속(代贖)의 죽음 곧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사랑을 나타내는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 곧 하나님의 창조주 되시는 생명의 주되시는 창조주의 능력을 나타내는 그의 부활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복음을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까지 전해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진정한 하나님께로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그들 교회의 대표단을 통해서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헌금을 전함으로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진정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방인들의 시온에 대한 종말론적인 순례 사상, 구약의 선지자들이 여러 곳에서 예언한 사상을 성취하기 위하여 지금 이 헌금들을 여러 교회에서 거두어서 헌금단을 모아서 예루살렘에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헌금단을 데리고 떠나기에 앞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로마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러한 내용을 넣은 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거두어들인 헌금이 바로 하나님께 이방인들을 제물로 드린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가져다주고는 기쁨으로 자기가 로마에 가서 거기서 로마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스페인에 가서 선교하고 또 거기서 교회를 많이 세웠으면 거기 교회들의 헌금을 거두어서 또 헌금단을 조직해서 예루살렘교회를 또 방문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사도직이며, 하나님에게서 받은 자신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러고 나면 사도 바울은 자기 선교 사업을 다 마치었다고 생각했겠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로마서 15장에 사도 바울의 언어의 행간을 자세히 보면 사도 바울은 틀림없이 북부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 전하고 또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후에 동일한 방법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당시 자기에게 알려진 온 세상 전체를 돌면서 복음을 선포해서 모든 이방인이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시온을 순례하고 헌금을 바침으로 결국 자신들을 바침으로 이 세상이 샬롬, 즉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때 구원이 완성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때의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완성될 것으로 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의 각 교회에서 거둔 헌금은 이와 같은 종말론적이고 구원사적인 의미가 있기에 사도 바울은 많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헌금 거두는 일을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에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11:13-14은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라고 되어 있지만, 이 말은 “내가 이방인의 사도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만든다”, “나의 이방인의 사도 된 것을 일부러 자랑한다”라는 그런 말입니다. 무슨 목적을 위해서 말입니까? 14절을 보시면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25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구원 비밀에 대한 이해 때문에 자기가 이렇게 온 세상을 다 돌아서 복음을 다 선포해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數)가 하나님 나라에 다 들어올 때 비로소 유대인의 심장의 완악함이 풀리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에 이를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구원은 이방인들이 다 구원되어서 종말에 일어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그 마음이 무척 바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에는 복음을 다 전했습니다. 그래서 동쪽 지역에서는 더는 복음을 전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에 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그들을 다 구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유대인들의 심장의 완악함이 풀리고,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그때 온 세상에 샬롬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즉 구원이 완성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로마서 11:13 말씀에 종말 전에 지금은 그러니까 자기가 꿈에도 잊지 못하는 자기 골육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니까 이방인의 구원에 집중하지만 사도 바울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유대인들의 구원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대인들의 구원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지금이라도 다는 아니더라도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말입니까? 이 유대인들은 복음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고 오히려 반감만 가지고 있어서 어떻게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기가 나게 해서라도 그렇게 하여야겠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기가 나게 합니까? 자신의 이방인의 사도직을 자랑함으로써 지금 이 큰 헌금단을 조직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의 사도직을 자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자, 보아라. 이방들의 시온에 나타나는 것을 보아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 영광의 빛을 보고, 그들이 자신들의 우상을 다 버리고, 시온에 와서 여호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여호와를 섬기로 오지 않았느냐!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그들이 보화를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사(救援史)가 성취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랑을 해서 유대인들에게 ‘자기들은 지금 구원 못 받고 도리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있구나! 이것은 옛 선지자들이 예언에 따라 이렇게 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해서, 즉 시기케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게 하려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생각입니다. 이것이 큰 헌금단을 구성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또 하나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번에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려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교회의 하나됨과 동족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생각해 본 것입니다. 이런 의미가 있어서 사도 바울은 그의 이방 사역의 초기부터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헌금을 거두는 것에 열성을 가졌던 것입니다. 헌금에는 단순히 구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의 사귐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깊은 종말론적이고 구원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멘.
(*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는 분들은 김세윤 교수의 「바울 신학」 강의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