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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타성씨 스크랩 [족보이야기] 안동김씨(安東金氏, 구)
咸李사랑 추천 0 조회 106 14.05.25 16: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족보이야기] 안동김씨(安東金氏, 구)

김방경은 처음으로 왕과 같은 시호인 충렬

[출처] 디트뉴스24 2011-09-30 [김진우의 족보이야기]

[글] 김진우 한국성씨연구소

 

뿌리공원에 조성된 안동김씨 조형물. 전면/대전 중구

(작품명 : 웅비-비상/ 조각가 : 천종권)

 

뿌리공원에 조성된 안동김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에 새겨진 안동김씨 유래>

우리 안동김씨는 계림대보 김알지공(鷄林大輔 金閼智公)의 먼 자손이다. 미추왕(味鄒王)에 이르러 신라왕족이 되고, 박ㆍ석ㆍ김(朴ㆍ昔ㆍ金) 오십육 왕 중 삼십칠 왕의 王統을 이은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敬順王의 아드님은 대안군 은열(大安君 殷說)이요 그 아드님 평장사 숙승공(平章事叔承公)이 비로소 안동에 봉군되고 관향을 삼았으니 우리의 시조이시다.


후손 兵部尙書 孝印公은 문장과 글씨로 뛰어나 王命으로 쓴 글씨가 여러 곳에 남아있다. 아드님 金方慶은 고려 조정이 안팎으로 시련을 겪을 때 高宗, 元宗, 忠烈王 세임금을 섬기면서 재상으로 도원수로 외교관으로 나라를 지켜온 위인이며 상락군(上洛君)개국공(開國公)에 봉해졌다.


死後 崇義殿에 배향되고 역사 이래 처음으로 君臣間의 같은 시호인 忠烈이 내려졌으니 곧 우리의 중시조 이시다.


현손 이십 宗班은 모두 학덕이 높아 혹은 정승 혹은 문장가로 일시의 명류를 이루었고 지금의 파조 이시다. 조선조 개국 이래에도 名公臣卿과 忠臣烈士와 節義志士가 잇달아 배출되어 나라가 평화로울 때는 문화발전에 기여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살신성인으로 목숨을 초개처럼 버려 나라를 지켰다.


상해임시정부 주석 白凡 金九 선생은 충렬공 후손으로 나라위해 평생을 몸바친 애국지사요 정치지도자로 겨레의 스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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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해설>


안동김씨(安東金氏, 구안동)

김방경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군신간(君臣間) 같은 시호인 충렬(忠烈)

조선조에 10명의 장원급제자, 백범 김구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의 둘째 아들로 고려 때 공부시랑(工部侍郞ㆍ정4품 차관)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ㆍ내사문하성ㆍ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를 지낸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받든다.


김숙승의 후손을 세칭 구안동(舊安東)김씨라 하며 고려때 태사(太師ㆍ정1품)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받드는 안동김씨를 신안동(新安東)김씨라 한다.


신ㆍ구 두 안동김씨를 합하면 조선시대에 정승 19명, 대제학(大提學ㆍ홍문관ㆍ예문관의 정2품 문형)을 6명이나 배출했으며, 과거시험에서는 10명의 장원급제자와 3명의 왕비도 배출하였다.


안동김씨(安東金氏, 구)의 시조 김숙승은 고려조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ㆍ문하시중 다음의 자리로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정2품)를 지냈으며 그의 후손 김방경(金方慶ㆍ충렬공)을 중흥1세조(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중시조 김방경(金方慶)은 경순왕의 9세손이며 고려 원종때의 명장으로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왜구를 섬멸하여 정란정국공신(靖亂靖國功臣ㆍ난리를 평정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내리는 훈호)에 책록되었으며,


벼슬이 시중(侍中ㆍ고려때 종1품 정승으로 정사를 총찰하던 대신)에 올랐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ㆍ정1품 문관 품계)으로 첨의중찬(僉議中贊ㆍ도첨의부에 속한 종1품 벼슬로 1275년(충렬왕1년) 기존의 문하시중을 고친 직제),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ㆍ정3품), 도원수(都元帥ㆍ전쟁이 났을때 군무를 통할하던 임시 무관직)를 지내고 세자사(世子師ㆍ고려때 세자의 스승 정1품)에 이르러 치사(致仕ㆍ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여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김방경의 향사(제사)는 음력10월 9일이다.

 

고려후기에 활동한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의 묘-<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김방경은 1270년(고려 원종 11년) 삼별초난(三別抄亂)을 토벌하고, 원종 15년(1274년)과 충렬왕 7년(1281)에 려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고려국 총사령관으로 일본정벌에 참가하여 분전하였던 상락군 개국공(上洛君 開國公)이다. 김방경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충렬왕과 함께 군신간(君臣間) 같은 시호인 충렬(忠烈)이다.


<고려사> 권 제 104, 24장에는....유명으로 안동에 돌아가 장례하였다. 때에 권력을 잡은 자가 그를 미워하여 마침내 예장이 저지되었으나 뒤에 임금이 후회하였다. 충선왕이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였으며 명하여 신도비를 세우게 하였다. .. 遺命歸葬安東 時用事者惡之遂沮禮葬後王悔之 忠宣贈宣忠協謀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諡忠烈 命立神道碑 <고려사 권제104, 24장 앞쪽, 열전 17 김방경>

 

충렬공 김방경의 묘 전면


묘는 1300년 9월(고려 충렬왕 26)에 조성된 후 약 100년동안 실전되어 찾지 못하였는데, 이때 <광산김씨 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안동 예안파> 입향조 김효로의 묘를 썼으며, 서기 1594년 봄 김효로의 묘 앞에 증손인 근시재 김해(1593년 사망)의 묘를 조성하던 중 "고려충렬공 김방경지묘"라는 지석(誌石)이 출토되어 안동김씨 문중에 이 사실을 알렸고 김해의 묘는 다른곳에 썼다고 한다.


이 묘는 국내에 몇 안되는 고려 중기 묘소이다. 오른쪽 묘비는 1602년 김방경의 외손 이시발이 비문을 쓴 것이다.


현재도 광산김씨에서는 입향조 김효로에 제를 지낼때는 김방경 묘에 먼저 예를 올린다고 하며 양 집안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명문(名門) 안동김씨(구)는 대체로 고려 말엽에서 조선중기 인조 때까지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


중시조 김방경(金方慶)의 현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중 13파가 현존하며,13파 중에서도 김영후(金永煦)의 손자들인 김익달(金益澾)의 제학공파(提學公派)와 김사렴(金士廉)의 안렴공파(按廉公派), 김사형(金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가 안동김씨 인구의 약 65~70%를 차지하여,통칭 제안익3파(提按翼三派)로 불리우며, 군사공파(郡事公派)ㆍ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ㆍ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등 3파도 버금간다.


충효의 전통을 이어온 안동김씨의 인물로는 고려사에 찬연한 발자취를 남긴 중시조 김방경(金方慶)을 비롯한 그의 다섯 아들과 손자들이 가문의 중흥을 일으켜 명문세도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김방경의 장남 김선(金?)은 원충단력안사보정공신(元忠端力安社保定功臣)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ㆍ고려때 형옥에 관항일을 맡아보던 전법사(典法司)의 정3품)를 거쳐, 상호군(上護軍ㆍ정3품 상장군의 바뀐 직명)에 이르렀고, 둘째 김흔(金?)은 삼중대광(三重大匡ㆍ정1품 품계)으로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ㆍ재신반열)를 지냈다.


셋째 아들 김순(金恂)도 삼중대광(三重大匡ㆍ정1품 품계)으로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져 상장군(上將軍ㆍ고려시대에 중앙군의 최고지휘관 정3품)을 지낸 동생 김론과 함께 명문의 대를 이었고, 김선(金?)의 아들 김승용(金承用)은 대제학(大提學ㆍ고려때 보문각, 진현관, 예문관의 2품)을 지내 유명하였으며, 김승택(金承澤)과 김순(金恂)의 아들 김영돈(金永暾). 김영후(金永煦)등도 모두 명신(名臣)으로 명성을 날렸다.


조선 전기에 세력을 떨쳐 사실상 <구 안동>의 주축이 된 우의정(右議政ㆍ정1품 정승) 김영후(金永煦)의 후손 중에는 고려 말의 충신 김사렴(金士廉)이유명했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등과 함께 바른말을 잘하는 직간(直諫)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고려가 망하자 청주(淸州)에 은거하여 수 차에 걸친 태조 이성계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절신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한양쪽을 향해 앉지도 않았으며 죽음에 임하여는 '고려의 신하로서 군왕을 보필하여 나라를 보존치 못했을 뿐 아니라 신순(身殉ㆍ죽음으로 나라를 지키는것)하지도 못한 죄인이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선왕을 뵐것인가,내가 죽은 뒤 심심산중에 묻어 봉토(封土)하지 말며 돌을 세우지 말라'는유언을 남겼으며 후손들은 벼슬에 나가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김사렴의 묘소와 <영모재>-충북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김사렴은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였으며, 공민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按廉使)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1328~1396)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함께 직간(直諫)으로 이름이 높았다.


1365년(공민왕 14) 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신돈에게 벽상삼한삼중대광 집현전 대학사를 더하고 공신의 호를 내리자, 김사렴은 그가 고려의 사직을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고 탄핵하였다. 조야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김사렴이 홀로 탄핵을 한 것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여 청주에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수차례에 걸쳐 불렀으나 거절하고 도산(陶山)으로 옮겨 두문불출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고려의 구신이 고려와 함께 순국하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죽어 선왕과 선인들을 대하리오. 내가 죽거든 심산에 묻고 봉분을 하지 말고 평무덤으로 하라"고 유언하였다.


김사렴의 묘는 그가 죽은지 273년만인 1678년(숙종4년)에 후손들에 의해 석곽 중의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즉시 봉분을 만들어 시향지내기를 계속하였다.묘는 오창면 모정리 도산 자좌의 언덕이다.


<영모재>는 1678년 김사렴의 학문도덕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강학의 도장으로 세웠으며 김사렴 묘소의 재궁으로 쓰여오고 있다.


숙종은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일편도산 만고수양(一片陶山 萬古首陽)이라는 과제(課題)로 과거 응시생들에게 과거(科擧)를 보였고, 우암 송시열은 충병일월 절고산악 일편도산 만고수양(忠昞日月 節高山岳 一片陶山 萬古首陽)이라고 그를 칭찬했다.


김사렴(金士廉)의 동생 김사형(金士衡)은 좌의정(左議政ㆍ정1품 정승)으로 치사(致仕ㆍ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할 때까지 한번도 탄핵을 받은 일이 없었으며, 증손 김질은 세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ㆍ사서를 편찬하던 정6품)을 거쳐 세조때 우의정(右議政ㆍ정1품 정승)에 이르러 가문을 크게 빛냈다.


김질의 아우인 김무는 중종때 공조판서(工曹判書ㆍ정2품 장관으로 사도공이라고 했음)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ㆍ청렴 결백한 벼슬아치)에 녹선되었다.


중종때 영의정(領議政ㆍ정1품 정승)을 지낸 김수동(金壽童)은 김사형(金士衡)의 현손(玄孫ㆍ손자의 손자, 고손자)이며, 김질의 조카로 성품이 원만하여 연산군의 폭정에도 화(禍)를 면했을 뿐 아니라 많은 문신(文臣)들을 감싸주어 무사하게 했다고 한다.


그의 동생 김수경(金壽卿)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3등공신(靖國三等功臣)에 올라 영양군(永陽君)에 봉해져 안동김씨를 빛냈다.


그러나 안동김씨(구)는 인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김자점(金自點)이 탄핵을 받아 처형되면서 부터 정치적 몰락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종때 내ㆍ외직을 역임하고 문장(文章)과 초서(草書)로 이름을 날린 김주(金澍)는 예조참판(禮祖參判ㆍ종2품 차관)을 지낸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ㆍ태조의 기록이 명나라의 기록에 잘못되어져 있는것을 바로잡기 위해 파견한 사신)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마치고 죽었으므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으며 병자호란 때 성천부사(成川府使ㆍ정3품 외관직)로 순절(殉節)한 김언(金言)은 김사렴(金士廉)의 후손이다.


그 밖에 임진왜란때 충의가문(忠義家門)의 명예를 더욱 빛낸 인물 중에 김제갑(金悌甲)과 그의 조카 김시민(金時敏)ㆍ김시약(金時若) 형제가 유명했다.


김제갑(金悌甲)은 임진왜란때 원주목사(牧使ㆍ정3품)로 원주성을 사수하다가 부인과 작은 아들 김시백(金時伯)이 함께 최후를 마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6년 강원도민에 의해 원주역전 광장에 그의 충열비(忠烈碑)가 세워졌다.


김시민(金時敏)은 김제갑(金悌甲)의 형 김충갑(金忠甲)의 아들로 1578년(선조11)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판관(判官ㆍ훈련원은 병사들의 무예와 병서를 강의하던 곳이며 종5품)으로 있을 때 군사(軍事)에 관한 일로 병조판서(兵曹判書ㆍ정2품 국방장관)에게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고 하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牧使ㆍ정3품)가 되어 사천ㆍ고성ㆍ진해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節度使ㆍ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에 올라 금산에서 적을 대파했다.


그해 10월 진주성이 적의 대군에서 포위되자 3천8백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 끝에 3만여명의 적을 사상(死傷)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여, 선무2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녹훈되고 영의정(領議政)및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우 김시약(金時若)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선봉장으로 활약했고 정유재란때도 전공을 세웠다.또 김시민(金時敏)의 아들 김치(金緻) 경상도관찰사(종2품 감사ㆍ도지사)를 지냈으며, 그는 천문(天文)과 역학(易學)에 뛰어나 인조반정으로 능양대군(綾陽大君)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비안현감 김인갑(金仁甲)의 아들인 김시양(金時讓)은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벼슬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아들 김휘(金徽)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이밖에 숙종 때의 시인으로 참판(參判ㆍ종2품 6조의 차관)을 지낸 김득신, 영의정으로 추증된 김응하와 훈련대장 김응해 형제가 안동김씨를 더욱 빛냈다.


근대에는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안동김씨(구)가 배출 한 거목이다. 그는 15세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고 18세 때 동학(東學)에 들어가 일찍부터 민권투쟁(民權鬪爭)의 선봉이 되었으며, 일본군 중위(中尉)를 때려죽인 죄로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탈옥하여 한때 중이 되기도 하였다.


그후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암살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되었고, 3·1 운동 후 상해로 망명한 그는 임시정부의 경무국장ㆍ내무총장ㆍ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한국독립당을 조직, 2년 뒤인 1930년 1월 이봉창(李奉昌)ㆍ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으며 주범으로 현상이 붙어 상해(上海)를 탈출하여 남경(南京)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국인 대일전투 방책을 협의하였다.


1940년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의 주석(主席)이 되어 광복군을 조직하고 항일전을 전개했으며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한독당(韓獨黨) 당수로 있다가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여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명문(名門) 구 안동 김씨는 훌륭한 인물을 대거 배출해왔으며 현대에도 명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백범 김구의 아들 김신(金信)은 공군참모총장을 지냈고, 손자 김양은 국가보훈처장을 역임했다.


또한 충남도지사를 역임한 김학응, 전두환의 경제교사로 5공화국 경제정책 입안에 공을 세우고 아웅산에서 사망한 김재익 청와대경제수석, 서예가로 이름 높은 김사달 박사,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 등이 현대인물 이다.

 

<삼소재>-안동시 풍산읍 소산리257번지에 있는 선안동김씨 종택 삼소재

사랑채,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며, 앞면에 반칸의 툇마루를 두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6호>


안동토성 안동김씨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시조 김숙승(金叔承)의 6세손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을 중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득성조 이래 계속하여 안동에 살면서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두 김씨 중의 하나로 고려 개국공신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안동김씨(安東金氏)와 구별되며 상락김씨(上洛金氏)로도 불리며 안동 풍산에 세거해왔다.


김숙승은 신라 경순왕의 손자로서 대안군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이며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김방경은 병부상서를 지낸 김효인(金孝印)의 아들로서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에 살았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원종 때 삼별초의 난과 왜구를 토평한 명장으로 상락군(上洛君 : 상락은 현 경상북도 상주의 옛지명)에 봉해졌다. 김방경의 후손들이 김숙승을 시조로 김방경을 중시조로 하고 안동을 본관으로 하여 세거하였다.


입향경위

김방경의 장자 김선(金?)은 전법판서를 지냈고, 차자 김흔(金?, 1251~1309)은 도첨의사사를 거쳐 삼중대광에 올라서 아버지를 이어 상락군에 습봉되었다. 셋째 아들 김순(金恂, 1258~1321)은 1279년(충열왕 5)에 문과에 급제하여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문한학사를 끝으로 은퇴한 후 중대광 상락군에 봉해져서 아버지의 작위와 식읍을 이어받았고 문영(文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김순의 아들 김영돈(金永旽)은 좌정승에 올랐고, 영돈의 동생 김영후(金永煦)는 우정승을 지내고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김영후의 손자 낙포(洛圃) 김사형(金士衡, 1333-1407)은 좌정승과 우정승을 역임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었으며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김사형의 아들 김돈(金墩)은 문과에 올라 이조판서를 지냈고, 김돈의 아우 김승(金陞)은 밀직사사를 지냈다.


단종복위 거사를 도모하던 동료를 고변하여 사육신의 한을 남기고 뒤에 정승에 까지 오른 쌍곡(雙谷) 김질(金?, 1422-1478)은 김승의 손자이다. 또 김방경의 장자 김선의 손자 김묘(金昴)의 아들 김구용(金九容, 1338~1384), 김제안(金齊顔), 김구덕(金九德)은 모두 과거를 거쳐 각각 평장사, 추밀원사, 돈녕부사에 오르는 등 상락김씨는 여말선초에도 이름 있는 이들이 많았다.

 

상락김씨는 김방경의 현손 때에 여러 계파로 갈라지는데 안동 일원에는 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와 익원공파(翼元公派)가 많이 살고 있다. 김묘의 동생 김면(金冕)의 손자 김자담(金子膽) 때 의성 사촌으로 이거한 도평의공파는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등 명현을 배출하였다.

 

김사형을 파조로 하는 익원공파는 현재 풍산읍 소산리, 와룡면 주계리 용두골, 남후면 개곡리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풍산읍 회곡리에 김방경의 옛 집터에 유허비가 남아있으며, 평소 자연을 즐기던 회곡리낙동강가의 경승인 상락대(上洛臺)가 있다. 김방경의 묘소, 재사, 신도비가 녹전면 죽송리에 있고, 풍산읍 소산리에 상락김씨 종택 삼소재(三素齋)가 있다.


충남 논산시 상월면 산성리에 있는 <안동김씨공재실모선기적비>


안동김씨 충민 기념비로 안동김씨 세거지에 세워져 있다.


충남 논산시 지역에 입향한 안동김씨는 경순왕의 9세손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하여 후대를 잇고 있다. 안동김씨김방경 이후 가문이 번성하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과 손자가 계속 재상의 지위에 올라 고려 후기에 최고 가문의 지위를 누렸다. 김방경의 현손인 김사형조선 개국 1등 공신이 되고 태종 때 좌의정에 오름으로써 조선시대에도 가문의 세력을 유지·발전시킬 수 있었다.


현재 안동김씨논산읍에 60가구, 연무읍에 42가구, 광석면에 24가구, 상월면에 2가구 등 총 265가구가 논산시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안동김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ㆍ대과)에 319명, 무과(武科ㆍ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61명, 사마시(司馬試ㆍ생원, 진사를 뽑던 시험)에 716명, 역과에 10명, 율과에 6명, 음양과에 2명, 주학에 1명 등 모두 1,120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급제자수는 다른 계통과 구분이 안된 것임>


안동김씨(구)는 2005년 인구조사에서 136,000여가구에 425,000여명이었다. <신안동김씨는 다음에..>


김진우(金鎭宇)-금석문(金石文)에 관심이 많아 각종 비문(碑文 : 지석ㆍ신도비ㆍ묘갈명 등) 연구

* 족보전문가ㆍ민족문제연구소회원ㆍ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연구위원ㆍ지방자치실무연구소회원

* 지은책 : "한국인의 역사"(교과서에 없는 역사책으로 수록한 한국인 교양서.도서출판 춘추필법(春秋筆法)펴냄).

* 공주고ㆍ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한국과학기술원(KAIST) 수료.

* 한국성씨연구소는 삼성의료원과 함께 2009년 "대한민국 성공기업" 선정

* 2010년 MBC드라마넷 한가위특집 출연, KBS국제방송 2010년 10월~11월 방송(2009년 올해를 빛낸 '장한한국인상' (문화)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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