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이화동 소재 이승만 기념관인 이화장의 마당에 있는 이승만 동상. 꽃 바구니 옆에 있는 석판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본문에서 이 글귀가 다시 언급될 것이다 ⓒ김종성
이승만의 독재가 절정을 이루던 자유당 말기 절세의 독립 운동가 심산 김창숙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 촉구 공개장>에서 ‘독부(獨夫) 이승만’이라 지적했다. ‘독부’란 “민심을 잃어서 남의 도움을 받을 곳이 없게 된 외로운 남자”를 말한다.
이승만은 독부였다. 자유당 말기뿐만 아니라 미국 망명기, 귀국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고 12년 1인 독재 권력을 유지할 때가 다르지 않았다.
독재ㆍ독부ㆍ독선ㆍ독점 등 그에게는 홀로 독(獨) 자가 유독히 많았다. 물론 ‘독’ 자에는 독립 운동도 포함된다.
이 기간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고, 많은 독서를 하면서 <독립정신>등을 저술하고 80여 편의 논설을 썼다.
출감하여 상동교회 부설 청년 상동 학원의 교장(3주)을 지냈다.
미국 미네소타 주의 미니에폴리스에서 열리는 기독교 국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그의 출국을 주선한 사람은 친일파로 소문난 미국인 감리교 감독 헤리스였다. 총독부가 발급해준 여권으로 고국을 떠났다.
이 때 민영환ㆍ한규설이 미국 정부에 보내는 밀지를 지참했다.
워싱턴에서 존 헤이 국무 장관을 만나 민영환ㆍ한규설의 밀서를 전하고 한ㆍ미 수호 조약의 이행을 촉구한데 이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했으나 루스벨트의 특사 테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 비밀 협정 체결로 한국 독립 보장의 성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면담,
독립 청원 등 미국 신문 보도가 국내에 전해지면서 ‘청년 지사’로 알려졌다.
당시 ‘일진회 대변인’이었다는 기사가 <뉴욕 데일리
트리분>(1905.8.4)에 게재됐다.
미국에 눌러 앉아 미 기독교계 인사들의 주선으로 조지 워싱턴대학에 입학했다.
인문 분야는 우수했으나 수학ㆍ경제학은 불량했다. 이어서 하버드대 입학, 미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 목적으로 그가 종교 지도자가 되길 원해 적극
지원했다.
프린스턴대학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으로 박사 학위, 1776년부터 1872년까지 미국이 국제법에 규정되어
있음에도 지켜지지 않았던 전시 중립을 다룬 내용.
하버드 재학 중 1908년 스티븐슨을 처단한 장인환 의사의 통역 의뢰를 받고
“예수인 신분으로 살인 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 교민들의 분노와 반이승만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후에도 이봉창ㆍ윤봉길 의사 등
의열 투쟁을 비판.
주한 미국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1910년 10월 5년만에 귀국, 한국은 이 해 8월 29일 일제에 병탄.
1912년 초까지 YMCA 학생부ㆍ종교부의 간사로 근무, 한국 체류 5년 동안 민족 문제, 독립 운동 관련은 외면, 오히려 “반일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들에게 자신의 유학을 통해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발언하는 등 반일보다 해외 유학을 권려했다.
총독부가
1912년 데라우찌 총독 암살 사건을 조작, 신민회 간부와 기독교 지도자 등 900여 명을 구속하고 이중 105명을 기소하는 등 ‘105인사건’의
와중에 미국인 친일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 때 많은 애국지사들이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고, 해외 망명을 택했다.
미국에 도착하여 옥 중에서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의 도움으로 네브라스카 주 체스팅스의 소년병 학교를 방문했다.
이 무렵
<워싱턴 포스트> 회견에서 “(병탄 이후) 불과 3년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고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1912년 후반까지 뉴저지 주 YMCA에서
있다가 박용만의 주선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했다.
당시 하와이에는 8천여 명의 교민이 살고 있었다.
교민들은 ‘105인 사건’은 피해왔다고 불만. 이승만은 <태평양 잡지>를 발행하고, 잡지와 선전 책자에서 독립 운동가들의 무력 항쟁과
의열 투쟁을 비판하여 교민들의 항의를 받았다.
교민 사회가 분열되고, 대한인국 민회의 주도권 싸움으로 대조선 국민 군병단의 박용만 축출, 이 때부터
무장 투쟁론과 외교론이 대결하게 되었다. 트러블 메이커로 알려졌다.
1919년 초 1차 대전 전승국들의 파리 강화 회의 참석을
시도했으나 좌절, 스승인 윌슨 대통령의 면담도 좌절, 강화 회의에는 상해 한국 독립당의 김규식이 참석했다.
정한경과
1919년 2월 25일 <위임 통치 청원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 “연합국 열강이 현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에
두는 조처를 해달라”는 내용.
측근 정한경은 국내의 3ㆍ1운동 뒤에도 미국 신문에 쓴 <한국의 호소>(뉴욕 타임즈)에서 일본 대신
미국의 통치를 요청했다.
국내의 3ㆍ1운동 소식 듣고 3월 14일~16일까지 서재필ㆍ윤병구 등과 필라델피아에서
독립 기념관까지 가두 시위, <미국 정부에 보내는 호소문> 등을 채택.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 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 한성 정부는 실체적 조직보다 ‘지상 정부’의 성격이었다. 소수인들이 모여 구성. 언론 보도로 과대 포장되었다.
여기서 그는 집정관 총재에 추대되었다. 이 때문에 한성 정부를 정통 정부로 인식했다. 이후 집정관 총재 직을 대통령으로 행세한다.
상해 임시 정부에서 국무 총리로 선출, 신채호ㆍ박용만 등
무장 투쟁론자들이 ‘위임 통치론’을 들어 반대했다. 그는 미국에서 여전히 대통령으로 행세, 임정에서 시정을 촉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1919년 8월
상해 임시 정부가 한성 정부, 블라디보스톡의 국민 의회 정부와 통합하면서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제로 개편할 때까지 미국에서 프레지던트로 불리며 행세했다.
1년반 만에 상해 임시 정부에 도착, 정부 운영 방안ㆍ항일 투쟁 방책없어 임정 내분이 격화되었다.
이동휘ㆍ안창호ㆍ김규식ㆍ신채호ㆍ박용만 등 임정과 결별.
이 때 만주에서는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등 무장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현실성이
없는 외교론만 주장했다.
1921년 5월 29일 1년 반 만에 다시 임시 정부를 떠나 미국 행, 워싱턴 D. C의 구미 위원부를
한국 위원회로 바꾸고,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던 김규식이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2년 2월
하와이로 귀환하여 이듬 해 6월 자신이 운영하는 한인 기독 학원 남녀 학생 20명으로 <하와이 학생 고국 방문단>을 구성하고, 일본 총영사관과
교섭 끝에 일본 여권으로 한국을 방문케 했다. 명색이 임정 대통령 신분으로 한 일이다.
이때 하와이의 한 강연에서는 청ㆍ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모범적이라 찬양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그의 비반일, 친일적 발언의 사례를 찾아 본다.
1915년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즈>신문에 “자신은 한국은 물론 하와이에서도 혁명 운동을 꿈꾼 적이 없다”고 언급.
1915년 <호놀룰루
스타블렌탄>에 “우리는 어떤 반일적 내용도 가르치지 않는다. 정반대로 우리는 전 인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우리
백성들이 어떠한 반일 감정도 일으키지 않길 바란다”고 기고.
1919년 일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한국에 자유를 준다면
일본에 감사하고 우정을 느낄 것이고, 거절한다면 일본은 정복자로서 불신과 멸시를 받을 것이다”라고 언급.
1922년 9월
하와이 귀환 회견에서 “대일전은 불가능하며 새로운 총독이 개혁을 단행해 한국인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고 언명.
임시 정부 의정원은 1922년 6월 17일 1주일간의 토론 끝에 재적 3분의 2의 찬성으로 이승만 불신임안 결의, 정부 수립 6년여 만에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었다.
다음은 ‘불신임’ 이유 5개항이다.
임시 대통령 피선 6년에 인민의 불신임이 현저하여 각지에서 반대가
날마다 증가되며 그 영향이 임시 정부에 미치는데 민중을 융화하지 못하고 감정으로만 민중 여론을 배척하는 까닭에 분규와 파쟁이 조장되고 독립 운동이
침체 상태에 빠져 있다.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대미 외교 사업을 빙자하며 미주에서 동포들이 상납하는 재정을 수합하여 임의
사용하였고, 정부 재정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국제 연맹과 열강 회의를 대상으로 하던 구미 위원부 외교 사무가 중단됨에도 불구하고 헛된 선전으로 동포를
유혹하여 외교용 모집을 계속하여 그 재정으로 자기의 동조자를 매수하고 있다.
국무 위원이 총사 직을 제출하였으나 임시 대통령이 그
사직 청원서를 처리하지 못하고 몽매한 처사로 여러 번 국무 총리를 임명하였는데 당사자가 알지 못하게 단독적 행사를 하여 혼란을 계속할 뿐이고, 아직도
정부를 정돈하지 못하고 있다.
국무 위원은 총사 직을 발표한 다음 아직도 거취를 작정하지 못하고 다만 임시 대통령의 처사를
기다린다고 하여 곤란한 시국에 대책 없이 앉아서 감정적 행동으로 정부 위신을 타락시키고 있다.
이상의 사실이 임시 대통령과 국무원
불신임안 제출의 이유다.
1923년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크게 비난하면서 ‘어리석은 짓들’이라고 조소했다.
미국
신문 <크로니클>에 따르면 이승만은 ‘비밀 사절’을 상해 임정에 파견하여 테러 행위를 즉각 중지토록 설득했다. 이봉창ㆍ윤봉길 의거가
한국 독립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탄압하는 구실 밖에 주는 것이 없다는 주장.
상해 임시 정부는
1925년 4월 10일 구미 위원부 폐지령을 내렸다. 이승만은 이에 불복하여 윤치영 등을 시켜 명맥을 유지하면서 임시 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성명
발표했다.
하와이 체류 중에 한인 사회 단체를 자기 중심 체제로 바꿔 교민 사회 분열, 대한인 동지회를 개편하여 자신이 ‘종신 총재’에 추대되었다.
중ㆍ일전쟁의 발발로 국제 정서의 변화를 지켜 보면서 1939년 10월 임시 정부 김구 주석에게 구미 위원부의 인정을 요구,
임시 정부는 미ㆍ일 전쟁이 임박해지자 1941년 6월 이승만을 주미 외교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임정의 주 워싱턴 전권 대표로 임명했다.
미ㆍ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활동을 개시했다. 이승만과 한미 협회는 1943년 3월 미 정부에 임시 정부의 인정을 요구했으나 미
정부는 거부했다.
한인 연합회 하와이 지부 등 한인 사회는 임정에 이승만의 소환을 요청했다. 이유는 교민 사회의 불화ㆍ분열을 주동한다는 것.
미
정부의 한국 임정 승인 거부에는 미주 한인 사회의 분열과 이승만에 대한 불신도 작용했다.
일제의 패망이 내다보이고, 미국
한인 사회에서 이반된 자신의 조직을 복원하려는 의도에서 그리고 미주 한족 연합회가 중경 임시 정부에 자신의 해임을 요구하는 시점인 1944년 6월 4일
주미 외교 위원부 산하에 내무ㆍ경제ㆍ교육ㆍ정치 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별도의 임시 정부를 설치하려다 교포들의 반발로 무산.
<미 국무부 895. 01 / 1260> 임정 승인 문제로 이승만과 부딪히고 있었던 미 국무부는 이승만이 참신한 계획이나 대안 없이
일방적인 요구만을 되풀이하는데 거부 반응을 갖고 있다.
군사적 지원 문제로 이승만과 접촉하고 있던 정보 전략국은 그가 제시하는 계획의 신빙성과 실행 능력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이승만에 대한 재미 한인 사회의 비판적 평가가 편지 검열과 면담을 통해 속속 입수되었다. 예컨대 북미 국민회가 임정에
보내는 긴급 전문이 국무부 극동국에 입수되었는데 내용은 이승만의 ‘이기적 야심’과 ‘무책임한 선동’ 그리고 ‘외교적 무능력에 대한 비판이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을 여러 차례 경고하는 등 미국 사회에서 매스컴의 총아가 된 재미 한족 연합회의 한길수를 공산주의자,
이중 첨자라고 매도하며 축출하는 등 한인 사회의 분열상을 내보였다. 이는 미 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재미 교포 사회의 유능한 실업자 한순교, 국무부와의 접촉에서 “이승만이 전반적으로 상황 판단의 능력이 부족하고, 상황 판단이
좁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최상급의 능력있는 한인들이 모이지 않는다. 이승만이 국무부로부터 냉대를 받게 된 배경에는 한인 사회의 비판적 분위기
때문이다”(미 국무부 자료)
1945년 7월 말 태평양전쟁을 이끌고 있는 맥아더에게 전문으로 강력한 반소ㆍ반공 입장을
전달, 맥아더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일제의 항복으로 귀국 서둘렀다. 중경의 김구보다 먼저 귀국을 위해 맥아더 접촉에 성공했다.
그의 주선으로
9월 16일 군용기를 타고 일본을 거쳐 하지와 함께 귀국. 도쿄에서 맥아더ㆍ하지와 한국 문제에 대해 요담. 미군 장교 복장으로 귀국(윤치영 증언).
1945년 10월~11월 ‘선구회’라는 단체 여론 조사 ‘가장 뛰어난 지도자’의 설문에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 퇴현배 7%, 김규식 5%, 서재필 5%, 홍남표 5%의 순위.
대통령 적합 인물에는 이승만 431명, 김구 293명, 여운형 78명, 기권 176명이고, 최고 혁명가 여론 조사에는 여운형 195명,
이승만 176명, 박헌영 168명, 김구 156명, 허헌 78명, 김일성 72명의 순위였다.
이승만의 선호가 높은 배경은
1941~42년 사이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OWL가 방송한 <미국의 소리> 방송과 미 정보 조정국의 요청으로 행한 한국어 단파 방송의 영향
그리고 미 군정 체제에서 ‘미국이 지원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귀국 뒤 공산주의 우호 발언 “나는 공산당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 경제 정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습니다”(매일신문.
45. 10. 26),
미 군정의 공산당 불법 조치로 극렬 반공주의자로 다시 선회했다.
1946년 6월 3일 ‘정읍 발언’으로
단정 수립을 처음으로 주장하고, 김구ㆍ김규식 등의 남북 협상 방안에 반대했다.
46년 말 미군이 제공한 군용기로 미국에 건너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안> 6개항을 제시하고, 미국의 반소 정책을 촉구하는 등 대미 활동.
1948년 5·10총선에서 동대문 갑구에
출마, 독립 운동가 최능진의 입후보를 봉쇄하고, 6ㆍ25전쟁기에 내란 음모 혐의로 총살 형, 정치 보복 1호 희생자
철학 부재ㆍ정책 부재의 비판을
피하고자 ‘일민주의’를 내걸고 국민을 일원 체제로 묶고자 시도.
제헌 헌법 내각제 시안을 대통령제로 바꾸게 하고, 초대 대통령
당선, 반민특위 해체하고, 김구 암살 배후 의혹. 국회 프락치 사건도 의혹 투성이, 정치 보복 자행.
제주 4ㆍ3사건 발발하자
계엄 법률 제정 이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무 회의에서 “강력히 처벌하라”고 지시하여 2만 5천~3만명의 희생자 발생. 제주 4ㆍ3 사건,
여순 사건 등 빌미로 국가 보안법 제정, 정적 제거와 언론 탄압에 활용했다.
측근 신성모 국방 장관의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 타령만 믿고 안보 소홀, 6월 24일 저녁 군 수뇌부는 육군 장교 클럽 개관식 파티, 전 장병에 외출, 외박 휴가 실시, 6ㆍ25 전면
남침 6시간 뒤 경회루에서 낚시 도중에 보고 받고, 긴급 국무 회의는 전쟁 발발 10시간 뒤에야 열려. “국군 서울 방어” 라디오 녹음 틀어 놓고 6월
27일 국회가 수도 사수를 결의한 지 1시간도 안 되는 새벽 2시 국회와 육본에 통보 않고 피난. 한강 철교 폭파, 4천명 이상 현장에서 희생,
서울 시민 피난 길 막히고 3개 사단 병력을 적 수중에 남겼다. 피난 길에 김구 암살범 안두희 석방.
6ㆍ25 직전 정부는
북한군 남침 정보 갖고도 방치한 의혹이 많다. 북한에 첩보원 보내 정보 입수, 육본 정보국 산하 작전 정보실 보고서, 측근 임영신의 개인적 첩보원 보고서
등 적 남침 예상을 방치.
6ㆍ25전쟁 직전 이승만은 정치적 궁지에 몰렸다. 2대 총선 결과 위기 국면, 전쟁 발발하지 않았다면
1952년 2대 대통령 당선 불가능. “전쟁을 정치적 기회”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서.
국민 방위군 사건, 거창 사건,
한강 철교 폭파해 놓고 잔류 서울 시민들에게 ‘부역 혐의’로 탄압, 보도 연맹원 수십만명의 학살 등 6ㆍ25 전후 100만명의 민간인 학살에 정치적
책임.
1950년 7월 15일 유엔 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 육해공군 지휘권 이양에 관한 공한>을 보내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이양, 시효도 명시하지 않아 62년이 되는 현재까지 ‘전작권’을 미군에 넘겨줘.
3.8선을
경계로 휴전이 성립되면 정치적 추궁이 무거워 회피용으로 맹목적인 휴전 반대 운동 전개, 전쟁 당사국이면서도 휴전 협정에 서명하지 않으므로써 주권 문제
훼손, 향후 평화 협정 체결 과정에서도 한국이 배제될 위기.
피난 수도 부산에서 야당 의원을 감금한 채 대통령 직선제 개헌 감행하여
장기 집권 획책, 이후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보안법 파동, 라이벌 조봉암 사법 살인, 장면 암살 미수, 3ㆍ15 부정 선거 등 영구 집권을 위해
헌법 유린, 민주주의 파괴.
1954년 7월 28일 미 상하 양원 합동 회의 연설에서 3차 대전을 촉구하는 초강경 연설.
북한은 물론 중국과의 결전, 소련과의 전쟁 벌일 것을 촉구하면서 한국군 20개 사단 제공 용의 밝혀. <워싱턴 포스트>는 “불행한
연설”이라 비난. 이승만 “일생 일대의 가장 큰 잘못”이라 올리버에게 서신.
경제 정책의 실패, 미군기의 폭격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된 북한보다 경제적 낙후, 반공 체제 유지를 통해 독재 채제를 강화하고 냉전 의식 고취, 평화 통일론 탄압, 그의 북진 통일론은 ‘통일의 외피를 쓴
반통일론’이란 평가. 경향신문 폐간 등 언론 탄압.
3ㆍ15 마산 의거를 ‘공산당의 조종’ 담화. 4ㆍ19시위를 ‘난동’이라
담화. 매카나기 주 한미 대사에게 “장면의 조종으로 학생 시위”라고 왜곡하는 등 시민 혁명을 모독. 3ㆍ15에서 4ㆍ19혁명까지 200여 명의 사망과
수천명의 부상, 정치적 책임.
대국민 사과 없이 망명,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사망.
박정희는 국민장 추도사에서 “조국근은 대화의 상징적 존재”라고 극찬. 박정희의 남로당 사건 당시 사형을 무기로 감형, 6ㆍ25전쟁 발발하자 군에 복귀시켜 주는 등 시혜를 베풀었다.
출처 http://v.daum.net/link/29858651?&CT=B_NEW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