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명사에게 듣는 호남이야기_송수권(시인,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
남도의 소리와 가락
-남도 토속어가 지닌 특유의 멋과 맛, 시인 송수권이 말하는 남도의 미학-
초청자 : 송수권(시인,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
대담자 : 정명중(호남학연구원 교수)
정명중 :
안녕하십니까? 호남학연구원의 원로 명사에게 듣는 호남이야기 여덟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연사로 나오신 분은 송수권 선생님이십니다. 박수로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주제는 “남도의 소리와 가락”입니다. 그전에 송수권 선생님의 약력을 소개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40년에 전라 고흥에서 태어나셨고, 고흥중학교, 순천사범학교, 서라벌예대를 졸업하셨습니다. 1975년에 <문학사상>에 「산문(山門)에 기대어」 외에 여러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셨습니다. 1982년 광주여자고등학교 교사도 역임하셨고, 2011년에 한국풍류문화연구소를 설립하셨고 연구소장으로 계십니다. 현재 순천대학교에서 명예교수를 하고 계십니다.
수상경력을 보니,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문학계에서 쟁쟁한 상을 받으셨습니다. 한편 ‘김달진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한민족문화예술대상’, ‘지리산인삼문학상’ ‘김삿갓문학상’등 여러 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저서로는 단독 시집만 14권을 내셨습니다. 1980년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 <아도(啞陶)>,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들의 땅>,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 최근에는 장편서사시 <달궁 아리랑>, 그 다음에 <빨치산>까지 해서 단독 시집만 모두 14집입니다. 그 외의 시선집이나 산문집, 동화 등도 다수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대담을 시작하겠는데요. 대담에 앞서 먼저 송수권 선생님의 기조강연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실 주제는 “남도의 소리와 가락”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제시해 드린 주제에 굳이 구애 받지 마시고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셨던 이야기들, 생생한 이야기들을 듣는 것으로, 그러니까 시인으로서 그 다음에 교육자로서 살아오셨던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희들이 소망하는 것은 선생님의 삶 속에서 이 호남 문화의 삶의 정수들을 한번 파악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략 20분에서 30분정도 기조강연을 해 주시고 그 이후에 대담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송수권(시인) :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제가 올해 나이가 칠십이 넘었습니다. 칠십으로 안 보이죠? 젊게 산다고 그래요. 어디가면 아직도 정년퇴임을 안 하고 그저 그렇게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벌써 정년한지도 6년이 넘었네요. 그런데도 저는 참 복을 타고 났다고 그럴까, 순천대 들어갈 때도 특채로 들어갔어요. 공채가 아니라, 저에게는 박사학위도 없고, 참 부끄러운 이야깁니다. 석사학위도 없습니다. 오로지 시만 써가지고 다행히 순천국립대학교 문창과가 있어가지고 거기서 특채를 해서 제가 해방 후 국립대학교 특채 교수 1호라고 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해방 전에는 서정주 시인이라든가, 박목월 시인이라든가 이런 분들이 동국대, 한양대에 모두 계셨잖아요. 그런데 국립대학교로는 제가 최초입니다. 그 점이 저는 복을 타고 났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지금도 제 연구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지인들이 와서 보고는 또 이게 무슨 일이다냐고 부러워도 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다리에 힘이 빠질 때까지는 무엇보다도 후학을 길러봐야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꼭 잘 산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생각을 해도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던가요? “우물쭈물하다가 그럴 줄 알았다.” 저도 어떻게 우물쭈물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그래서 크게 이룬 것 같지도 못하고 항상 부끄럽습니다. 그 점 양해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의 주제 강연인 「남도의 소리와 가락, 남도 토속어의 맛과 멋에 실린 나의 시」를 말 해보도록하겠습니다.
그 동안 문학인생 40년에서 저의 시작업은 남도정서, 즉 토속정서를 누비는 일이었습니다.그래서 저의 시에는 남도부족 방언인 토속어가 많이 나오고 이것이 지형학의 위치인 남도의 소리와 가락으로 저의 시에는 못박혀 있습니다. 저는 이 토속어들을 봉인(封印)된 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 봉인된 말을 찾아내어 쓴 시 한 편을 먼저 예증해 보도록 하지요.
캄캄한 대숲 오래된 부뚜막엔 언제나 앵병이 놓여있습지요, 왱병 속엔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가전비법으로 전해져 오는 식초 눈이 살아 있어 들척지근* 혀끝이 오그라붙기도 하지요, 남도 사람들은 이 맛을 두고 왱병이 운다고 합니다. 봄바람 불어 한 번, 가을바람 불어 또 한 번, 그래서 앵병을 아예 왱병이라고 부르는데 그 병모가지만 보아도 눈이 절로 감겨 오고, 황새목처럼 목이 찔룩거려 옵니다.
봄은 쭈꾸미 철이고 가을은 전어 철입지요. 부뚜막 왱병이 한 자리 얌전히 있지 못하고, 오도방정 떠는 통에 잠자리 구들장 들썩거려, 빙초산 초파리들처럼 잠 못 이루는 밤이 시어집니다. 앞대 개포, 쭈꾸미 배 들었나 전어 배 들었나 한겨울 밤에도 허리가 쑤시고 아린 가슴 늙은이는 잠 못듭니다. 죽을 때도 허공에 깍지 손 얹고, 왱병 모가지 잡는 시늉하며 손 무덤 짓습니다.
그래서 남도 사람 소리는 시어진 초맛이 배어 해맑은 목소리도 되고 수리성도 됩니다.
또 이것을 시김새 소리라고도 합지요, 시김새** 붙은 소리는 왱병*** 속에서 왔기에 소리 중에서도 땅을 밟는 뱃소리, 하다못해 한바탕 바가지로 설움을 떠내는 큰 소리꾼도 되고 명창도 되는 것입지요.
―「왱병」전문
「왱병」은 전라도 사투리로 부뚜막 위에 놓인 가전비법으로 전해오는 식초병을 말하지요. 저는 엉뚱하게도 「남도의 소리와 가락」이 왱병 속에서 왔다고 상상해보는 것이지요. 우리 어머니가 집안에서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면 ‘얘야, 그 왱병 모가지 비트는 소리 작작해라!’ 또 ‘왜 이리 시끄럽냐? 영산포구에 추자 멸젓배 떴냐?’라고 꾸짖던 것을 기억하고 그 모티프로 꺼내 본 것이 ‘왱병’이라는 봉인된 말입니다. ‘남도 사람은 죽을 때도 허공에 깍지손 얹고 왱병 모가지 찾는 시늉하며 죽는다’는 것이 남도음식에 스민 멋이나 가락 또 시가 아닐까라는 물음입니다. 서울 사람이면 죽을 때 허공에 까지손 얹고 아마도 골프채 찾는 시늉하며 죽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왜나면 그들에게는 고향이 없어 향토성이 없고 토속정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국어의 표준어는 서울 말이고 남도 판소리의 언어는 전라도말이 그 표준말이 됩니다.
특히 토속어인 원형감각을 지금까지도 고집스럽게 밀고 온 까닥은 표준어보다는 부족방언의 기능이 훨씬 시적이라는 데 있어요. 표준어에선 언어의 대활령(大活靈)이 숨쉴 시간과 공간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 대활령을 흔드는 정서는 모어중인 모어인 서북정서와 남도정서가 그 표본적 정서로 작용합니다.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던 것이지요. 위의 시에서 ‘시김새 붙은 소리(가락)’라는 대목이 보이는데 「시김새」란 곧 삭힘새, 삭힘새는 ‘곰삭다’라는 음식에서 온 말입니다. 개미 또는 그늘로도 쓰지요. 그늘 있는 소리, 그늘 있는 시, 그늘 있는 사람 등 시김새가 붙으면 판소리에선 천구성이 아닌 득음으로 이를 수리성 또는 통성(뱃소리)이라고 하지요. 이것이 곧 남도 음식이고 이 가락이 곧 초맛에 젖은 남도의 삶, 그늘 있는 삶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이 시김새가 빠져버리면 남도의 시나 소리는 맹탕 즉 떡목(캄캄한 목)이 됩니다. 또한 풍류도 밥상(식탁)에서 나온다는 말은 이 말입니다. 민중의 허튼 가락인 산조(散調)(시나위 가락)는 겨레혼을 추스르는 심원한 가락으로 우리들의 ‘한’을 극복하는 대안이 됩니다. 즉 역사를 추스르는데 풍자와 해학으로 이루어지는 ‘한’이 극기로서의 역동적 힘이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시에서 이것을 ‘생기로 피는 한’ 또는 ‘역동적인 한’ ‘생산적 한’으로 표현합니다. 한이 한으로 가라앉으면 원한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패배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찍이 시에는 두 가지로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 저는 여기에 착안한 것이죠. 하나는 언어의 성취도. 언어는 ‘얼마나 그 겨레말의 숨결을 잘 골라서 쓰느냐’, ‘시를 얼마나 높은 시적인 아우라로 끌어올려서 좋은 시가 되느냐’ 이것의 문제지요. 그래서 시 창작은 언어와의 싸움입니다. 오늘날 영어가 아름다워진 것은 셰익스피어가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워졌다는 그런 말들 하죠. 독일어가 아름다워 진 것은 괴테나 쉴러가 출현해서 그 모레 씹는 듯한 말이 아름다워졌다고 그러지요. 이런 것들은 전부 시인이, 그 운명인 겨레말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그런 사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은 정신. 이것은 만해지요. 그것도 알다시피 불교 중심이죠. 상상력의 코드는 불교지요. 그 다음에 30년대 이미지즘이 도입되면서 이 땅에 이미지즘이 창궐합니다. 알다시피 김광균, 정지용. 당시에는 사실 김광균 선생이 이미지즘에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래요. 저는 교육을 안 받아 봐서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정지용은 처음 이미지즘으로 출발해가지고 우리 토속주의 정신, 다시 말해 산수정신, 국토나 산수정신으로 돌아 와가지고 ‘아! 우리 것이 무엇이다’ 하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옥류동」이나 「백록담」또는 「정수산」 등은 산수정신을 누비는 깨끗한 시편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분을 전범으로 삼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영랑시는 줄줄 외고 다녔고, 나중에 영랑시 「모란이 피기까지」도 알고 보니까 널리 유포는 되지 않았습니다마는 최승희하고 연애할 때 쓴 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수능시험에 영랑이 말한 “찬란한 슬픔의 봄”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식의 문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답이 하필 “조국 광복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식으로 모범 답안이 정해졌어요. 이런 것들이 지금은 많이 반성이 되었지요.
재작년 2010년에 제 시 「지리산 뻐꾹새」가 수능에 출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입수를 해서 보니까 고친 부분이 있더라고요. “여러 산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이 말이었는데 ‘길뜬’을 저는 원래 띄어 썼어요. 근데 출제자가 딱 붙여 놓았더라고요. 그래 놓고 밑에다 설명을 잘해 놓았어요. “길뜬: 처음으로 길을 나섬”. 이렇게 되어 있어서 ‘참 이거 오륜데…’,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훑어보니까 그 표현이 훨씬 나아요. 그래서 입을 딱 다물었거든요. 그 뭐 메가스터디나 이런데서 그때 인터뷰가 많이 나왔어요. 입 딱 닫아버렸죠. 때로는 출판사들이나 출제자들이 시를 만들어준다, 시를 길들이고 가르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사실 소월의 「진달래」라는 원시가 처음 나왔을 때도 껄껄했어요. 그것이 여러 출판사를 돌고 돌면서 다듬어져가지고 오늘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가락으로 탄생 된 것이지요.
그 다음에 언어의 성취도냐 정신의 성취도냐. 그래서 시는 이 두 가지로 남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저는 욕심이 많게 정신도 추구해야 되고 언어도 추구해야 하고, 이때 언어는 남도 언어죠. 남도의 살결, 남도의 숨결, 남도의 핏줄. 그런 것들이 태생을 속일 수 없는 거니까. 탯줄서부터 걸고 나오는데 이 언어라는 것도 그 다음에 정신은 제 시집 중에 동학을 1976년도인가요? 그 광복 30주년 기념 문학작품 공모에 응모를 했었는데 그 해에 그것이 당선이 되었어요. 그때는 ‘동학란’이라고 불렀어요. 얼마나 이 땅의 역사라든가 이런 게 우스꽝스러운가요? 아무튼 1976년도에 ‘동학란’이라고 썼어요. 학자들도 다 그렇게 불렀지요. 그래서 저도 따라서 배운 대로 동학란이라고 해서 장편 서사시를 써서 응모를 해서 그것이 당선이 됐습니다.
그 다음에 86년도에 와서 동학란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놔두면 안 되잖아요. 그 무렵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다들 불렀거든요. 동학란을 ⌜동학혁명서사시집 ‘새야새야 파랑새야’⌟로 개정판을 냈어요. 처음에 광주사건도 그랬잖아요. 똑같습니다. 이것이 역사발전이고 민중들의 어떤 빼어난 의식들이죠. 그래서 ‘동학정신’에 이어 역사정신을 말하기 위해 최근에는 달궁 아리랑이라는 시집을 냈어요.
순천에 살다보니까 아무도 빨치산이야기를 손을 안대요. 그 큰 여순사건이 있는데 그리고 만성리를 ‘통곡의 언덕’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당시 여수 서 국민 학교에 주민들 5만명을 끌어내놓고 막 잡아 갈겨 죽였는데 그 다음에 순천 북 국민 학교에 또 4만명 끌어내가지고 막 갈겨 죽인 것이 여순사건입니다. 더구나 전라도는 그 옛날도 이를테면 호남 좌파주기철학이 돼가지고 삐딱하잖아요. 어떻게 통제를 해 버리니까 여순사건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를 두려워해요. 그러면 이것을 누가 말해 줄 것이냐. 사학자냐. 그럼 작가가 아니면 누가 말해주나. 이런 관점을 두고 썼고, 빨치산이 언제까지 빨치산이냐. 그리고 대부분 빨치산들을 중음자라고 부르거든요. 이 사람들이 진정으로 이데올로기가,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처럼 그런 이데올로기가 있어서 지리산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는 거죠. 자기 가족이 끌려가고 부역하고 그러니까 모두 숨어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여기다 대 놓고 너는 좌익, 너는 우익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이거 참 무서운 거 아닙니까. 옛날로 말하면 우리는 삼족을 멸해버리는 그런 통치시대를 살아 왔습니다. 삐딱하면 반공법으로 집어 넣어버리면 못 살아남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그걸 쓸 때는 참 조심스럽더라고요. 거기는 이제 북침설까지를 허용해서 썼는데 북침설도 그 누굽니까? 그 조선유격대총사령관 이승엽이 서울시 인민위원장이 돼요. 그래 가지고 고려대학교 부근 어느 2층 여관방에서 했던 소리예요. 자기 스승이 “이렇게 민족이 학살되면 쓰겠냐? 빨리 김일성장군한테 말을 해서 전쟁을 종식시켜라.”라는 이런 주문을 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이 남아있어요. 저는 그래서 이 기록에 의해서, 저도 이것 참 조심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여관에서 점심 먹으면서 한 소리인지 아니면 그것이 진짠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북침설이 터져 나온 것이 아니냐, 하고 판단해 봅니다. 이승엽이 한 소리가 거기서 ”우리가 미국에 가서 미국 농촌에 들어가서 농민 한 사람 해친 적이 없다. 그리고 소련군은 다 물러갔는데 왜 미군이 아직도 안 물러가고 이런 전쟁을 일으키는가?”라는 대목이죠.
사실 저는 북침을 안 믿어요. 엄격이 말하면 남침이죠. 제가 북침이라고 그러면 이상하게 되어 버리죠. 오늘부로 당장 작살나버리죠. 근데 순진한 대학생들은 ‘북침, 북침’ 하니까 그것을 또 믿어요. 그리고 막 유포를 해요. 그래서 제가 그런 것을 규명해보기 위해서 썼던 것이 달궁 아리랑입니다. 아마 이게 한국통일 100년을 담는다고 그러면은 이 지리산 빨치산들을 어떻게 처리를 하고 어떻게 민족의 이름으로 이들을 평가할 것이냐 이런 시대가 분명히 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지리산에 빨치산 문학관이 들어설 겁니다. 그럴 때는 빨치산 문학관에 이 시대에 금서와 같은 이 시집이 들어갈 겁니다. 저는 그것을 자신하고 믿으면서 썼습니다.
다행히 저에게 면죄부를 준 것은 도서관협의회에요. 제 시집이 우수도서로 선정됐거든요.
발단부터 이야기를 하죠. 원고를 한 700매 썼는데, 아무래도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미리 검증부터 받아야겠다고 해서 한겨레신문하고 중앙일보에 동시에 탈고된 원고를 보냈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어디서 기사화 되어서 나오겠어요? 중앙일보쪽입니까? 한겨레쪽입니까? 진보를 표방하고 있는 한겨레 쪽이겠죠? 그러지 않겠어요? 중앙일보는 보수꼴통 신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조중동 침묵했어요. 조시 한 페이지를 안 내보냈어요. 그런데 묘하게도 해럴드경제 신문에서 그날 아침에 연락이 왔더라고요.
“왜 내가 써야?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내가 써야?”
“조중동은 터져 나오겠죠? 그러니까 우리 신문에 선생님같이 이름 없는 분이 쓰셔야지요. 대가들이 조중동 쓸 거고….”
“어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래서 썼는데 안 터져 나왔어요. 근데 해럴드경제신문엔 가득 터져 나왔죠. 이게 작년에 김대중어록집을 내면서 정진백사장이 서울에 가서 도록전시회를 하고 광주에서도 하고, 목포에서도 하고 이번에 26일 날 또 그 행사를 합니다. 이번에는 조통달이라든가 이런 분들이 내려와서 소리로도 합니다. 여기 전남대 교수 김광복씨가 이 프로젝트를 다 맡았을 거예요. 저는 이제 조통달이 내려온다고 해서 소리대본을 써 달라고 해서 그것을 써 줬는데, 이렇게 해서 달궁 아리랑이 중앙일보에서 터져 나왔어요. 한겨레에서는 안 나왔고요.
저는 이게 신기하데요. 이게 삐딱한 소리고 전라도고 한겨레에서 터져 나와야지 왜 중앙일보에서 나오나. 지금도 이 대목이 의심스러워요. 제가 의외였으니까. 그 다음에 연합신문 막 이런데서 받아 써 버렸어요. 거기서 1차 면죄부를 받았고, 안기부 누가 와서 끌고 가도 “느그 보수신문 중앙일보에서 봐라 이렇게 해 놓았어!” 라고 말할 자료가 생긴 거지요. 거기서부터 면죄부가 생겼고, 더구나 도서관협의회에서 인증해 놓아서 면죄부가 생겼고, 그래서 제가 시집을 잘 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전에는 멈칫거렸는데 지금은 안도의 숨을 쉬고 그 이후로 장편 서사시의 밑그림이 되었던 짧은 시들 이를테면 지리산 빨치산 내용을 담은 단시만 모아서 빨치산이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2012년도에 상재했어요.
조정래 태백산맥을 읽었더니 지리산을 가만히 빗겨가고 있어요. 지리산이야기가 아니고, 벌교 이야기지요. 그래서 제목도 태백산맥이라고 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또 참고자료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어쨌든 해방 이후로 저의 달궁 아리랑은 지리산 사건을 시로 다룬 것으로서, 특히 서사적 이야기를 가미해서 다룬 것으로서 최초의 일이죠. 그래서 이점에 대해서는 제가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 다음에 동학 때부터 이현상의 빨치산까지 그 시차를 보니까 60년이에요. 이게 한국현대사예요. 더 길게 말할 것도 없어요. 이것이 한국 현대사더라 그 말입니다. 1894년의 전봉준에서 1953년의 빨치산까지의 세월이 60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얘기를 잡지에 연재 했어요. “이 현대사의 문을 사학자가 못 열면 누가 열 것이냐. 사학자는 한계가 있다. 그러면 작가가 열어야 할 것이 아니냐. 작가가 입을 열어야 한다.”라고 이야기 했어요. 기록이 햇빛에 물들면 역사가 되지요. 기록이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됩니다. 신화와 역사의 차이는 별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따금 단군신화냐 단군역사냐, 하는 식의 이런 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저는 단군세기를 역사로 보는 것이죠.
왜냐하면 달궁이란 옛날에 제천 행사를 지내던 솟대마을이에요. 지금도 달궁에 가면 솟대가 서 있어요. 노고단 아래에 가면 달궁이지요. 심원계곡 있고, 그 다음에 달궁 계곡이 있고 그 아래 달궁 계곡을 타고 내려가면 뱀사골입니다. 빨치산 구례 2차 전투 때 김지회 같은 이가 여기서 다 죽었죠. 김지회의 부인이 도립병원 간호사였습니다. 결혼해가지고 여수 국군창설부대로 들어갔을 때 최초의 장교였죠.
또 광주 갑부 지창수라고 있어요. 지창수가 그때 하사관으로 있었습니다. 이 하사관이 주동을 했습니다. 하사관급 반란이죠. 그 다음에 남로당에서 그것을 알고 남로당에서는 하사관급을 관리하는 당이었고, 그 다음에 중앙당은 장교들을 관리하는 당이었어요. 근데 지창수가 이것을 몰랐던 거죠. 나중에 김지회가 됩니다. 순천역에서 이현상이 하고 만나서 이현상이 인계 문책을 하고 김지회한테 바톤을 넘겨준 것이죠. 그래서 구례 1차 전투, 2차 전투가 시작이 됩니다.
여러분 최인훈의 광장을 알죠? 주인공이 이명준이든가요? “더럽다. 이 땅은. 북쪽 땅도 더럽고 남쪽 땅도 더럽다.” 그래서 제3국을 택하잖아요. 인도로 가다가 배에서 투신자살을 하는 이야기가 최인훈이 쓴 광장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그림이 있는데, 그것이 오른쪽으로 보면은 토끼고, 왼쪽으로 보면 오리고. 그림 한번 그려 볼까요? 비겐트슈타인의 ‘애매 도형’ 알아요? 시집 속에 제가 넣어놓았어요. 간단해요. 비겐트슈타인의 ‘애매 도형’이 열 가지가 있습니다. 이쪽으로 보면 오리주둥이죠? 그죠? 이쪽으로 보면 뭡니까? 토끼죠. 그래서 수수께끼가 나옵니다. 토끼냐? 오리냐? 왼쪽으로 가면 빨갱이 또는 좌파, 오른쪽으로 가면 우익 또는 우파. 이 세월이 무려 얼마입니까? 지금까지 계속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정명중 :
30분 정도 지났습니다. 조금 더 말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송수권 :
다행이 도서관에 있을 겁니다. 대학교수들이 문학텍스트로 놓고 쓰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한국현대문학선집이 있어요. 그거 알고 계실 겁니다. 문학선집인데 4권으로 되어 있을 겁니다. 그 중에 한 권이 북한문학만 집대성해 놓은 것이죠. 그 다음에 남한 소설 두 권, 나머지 한권이 시입니다. 1908년 최남선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2000년대까지 시인 개별을 점검하면서 작품선정을 해 놓고 평론가들이 동원되어가지고 ‘이 시인의 시 세계는 어떻다’ 이런 것들을 쭉 써 놓았죠. 그래서 많은 참고자료가 됩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게 반쪽짜리 삶을 살고 있고, 교육도 반쪽짜리 교육 받고 있잖아요. 이것이 앞으로 100년이 갈지 저는 ‘통일한국 100년을 예언하면 쓴 기록’, 이라고 시집 발문에 썼습니다. 100년이 갈런지 어쩔런지 앞으로 몇 년이면 끝이라고 속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제 시적 경향을 말씀드리자면, 저의 초기는 고향 서정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평론가들이 말해준 거예요. 그때 썼던 것들이 「산문에 기대어」, 「지리산 뻐꾹새」, 「시골길 또는 술통」, 「왱병」 등인데, 제가 봐도 서정성이 가장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런 시대죠. 주로 유년 시대에 치우쳐 있었죠.
그 다음에 고향을 떠나면서 광주시대가 됩니다. 그래서 제 광주시대 이야기도 「곡선과 느림의 미학」이란 단행본 연재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제 광주시대는 계산해보면 15년 동안입니다. 저는 광주일보에 「젊은 광장에서」(「도청 앞 광장에서」)라는 복간 시를 썼습니다. 계엄사령부에 걸려가지고 80행이 50행으로 절단해서 실렸어요. 김준태가 전남매일에 「우리들의 광주여 십자가여」 쓴 것이 6월 2일입니다. 복간되어서 6월 2일이고, 내가 쓴 게 6월 4일이고, 그 당시에 문순태가 편집국장이었어요. 문순태는 저하고 친구니까, 저를 아무리 찾고 돌아다녀도 없으니까 김준태한테 쓰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 이틀 후에 지금의 광주일보였던 전남일보에 시를 썼지요.
그 다음에 광주시대가 끝나고 변산시대가 시작됩니다. 저는 변산에 가서 한 3년 살았어요. 왜 변산에 가서 살았냐. 거기서 낸 시집이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입니다. 노을 속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 이것이 수저통에 기어들어서가지고 밥을 퍼서 먹고 있으면 내가 노을을 먹고 있는지 밥을 먹고 있는지 분간이 안 갈 때가 많이 있었어요. 그쪽 노을이 그래요. 그래서 붙인 이름이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이었고, 그것이 제9시집인가 그럴 겁니다. 변산 기행을 가는 사람들이 이 시집을 많이 활용하는 것을 봤습니다. 변산에 있는 별의별 숨어있는 기록들을 모조리 읊어냈기 때문이죠. 한데 제가 변산에는 왜 갔느냐. 이른바 ‘시의 시정신인 3대정신 중 대(竹)의 정신 황토정신 뻘의정신’을 캐기 위해서였어요.
그러니까 아까 말했던 고향시대와 광주시대는 저에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 국토 3대 정신 중의 하나인 ‘대[竹]의 정신’시대입니다. 황토와 대, ‘황토정신’ 그리고 ‘대의정신’ 그 다음에 변산 시대는 ‘뻘의 정신’. 저는 이것을 우리 국토의 3대 정신으로 보는 것이죠. 그래서 제 시는 여기에서 한 치, 반치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제 시의 코드, 정신은 이것이 서북정서와 남도정신을 기르는 공식적이죠. 전부 이 안에 몽땅 저의 언어는 녹아들어가 있어요.
알다시피 여러분 황토는 다 알죠. 진상품 농작물에 황토가 안 베이면 맛이 안 나오잖아요. 그 다음에 ‘대’, 담양에 죽녹원이 있습니다만, 누가 우리 밥상을 엎어 버리면 대밭에 들어가서 죽창 깎아서 들고 나가죠. 그래서 전라도 의병이 60%죠. 수틀리게 누군가 밥상 엎어버리면 나가서 찔러 버리는 것이고, 그 보기가 동학혁명이죠. 그 다음에 태평성대가 되면 이것이 남도의 소리와 가락으로 뜹니다. 그것이 3죽으로 대금, 중금, 소금 이렇게 말이죠. 퉁소하고 피리 다 알죠? 여러분은 전부 대의 자식들입니다. 그래서 시를 여기서 한 대목만 읊고 싶은데, 「줄포 마을 사람들」이라는 시의 2연부터 한번 읊어 보겠습니다.
언제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산농민의 상놈의 도둑놈의 떠돌이의 반생으로, 동학군이 날개가 잘리면서 어느 안핵사에게 호되게 걸려, 혀를 뽑힌 채, 한패거리들로 숨어와 터를 잡았더라는데 할아버지가 보기는 잘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근동에서는 씨종에다 씨문서를 가진 벙어리 쌍것들로 구매 혼인에도 가마에 흰 띠를 못 얹혔다지만, 그래도 귀 떨어진 엽전 하나는 꼭꼭 때워 쓰는 착한 사람들이더라는 것이다.
한번은 읍내 장터거리 그 쇠전머리 윷판막의 말뚝을 뛰어올라 반벙어리 장쇠아범이 혀를 집게로 뽑혀도 쌍놈의 말은 쌍놈의 씨로 남는 법이여, 그라믄 쓰간디. 그래도 우리 동학장이들의 바구미같이 바글바글 끓던 그때 그 장날이 멋있었당께. 이러고서는 한참 외장을 놓더라는 것이다.
아 동헌 마루를 우지끈 부수고 알상투를 끌어내어 수염을 꼬시르고 깨를 벗긴 채 볼기를 쳐 삼문 밖으로 내쫓았더니 그래도 양반 때는 알았던지 옴팡진 씨암탉처럼 두 손으로 쇠불알을 끄슥드랑깨 작것 죽창 끝에 안 걸렸드랑가. 뚝 소리 내고 떨어졌당께.
지금 여러분은 남도 판소리 대본을 듣고 있는 겁니다.
옴마. 그란디 한 여편네가 엎어지드니만, 옴마. 이 작것. 이 작것. 우리 딸내미 잡아먹은 갓끈 달린 이 작것 하드니만 치마폭에다 싸들고 줄행랑을 쳤드랑께. 혀는 뽑혀도 말은 바로 허지만 말이여. 내가 그 달딴 녀석 아닌가 말이여. 알긌어. 이러더니란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늘 조금 때쯤 바다는 복날 개 혓바닥 빠지듯이 그 길게 뽑힌 혀를 두 지네 대궁지 사이로 밀어 넣고는 혀 뽑힌 줄포마을 사람들처럼 궁궁을을 궁궁을을 궁궁을을 맨날 이러더라는 것이다.
근데, 줄포마을이 나와서 말인데, 저는 그때 줄포마을이 어디가 있는지 몰랐어요. 한자로 줄자가 날 출자 위에 초두가 있더라고요. 그리고 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썼는데, 묘하게도 나중에 변산에 가 살면서 보니까 거기가 줄포항이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몽둥이 맞지 않을까 지금도 그 생각에 조마조마 하면서 사는데, 이게 우리 동학 현장이죠. 그쪽이 고부죠. 아까 사또 불알 딴 이야기 아닙니까? 그 사또는 고부군수 조병갑이죠.
그래서 여기서 남도의 판소리 이야기를 하자면, 여러분이 알다시피 아니리, 중머리, 중중머리, 휘모리가 나오지요? 제 시는 이런 소리 가락으로 전부 구성이 됩니다. 현대시가 재미없는 것은 말끝마다 다, 1연도 다, 2연도 다, 3연도 다, 4연도 다로 끝나요. ‘탁탁탁’ 끝나 버려요. 가장 쓰기 쉬워요. 근데 제 「산문에 기대어」 같은 것을 보면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를 봐도 ‘다’로 끝나지 않잖아요? 이것을 제가 누구한테 배웠냐면 영랑과 삼천포의 박재상 선생님한테 이 가락을 배웠습니다. ‘구슬리는 말법과 눙치는 가락’이 곧 남도가락입니다.
“‘다’로 끝나는 것은 재미없다. 시는 노래여야 하는데 왜 이러느냐 현대시는 노래 같지 않다.”
그래서 시도했던 것이 「산문에 기대어」입니다. 이것은 뒤에 설명 배경이 나와 있죠? 남동생 자살사건을 다룬 것인데 ‘누이야’ 하는 것은 시적 화자를 남동생으로 바꾼 것입니다. 이를테면 누이에 대한 근친상간 모티브입니다. 우리 시에서 ‘누이’를 호명하는 전통은 신라의 「제망매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죠. 거기서부터 누이에 대한 근친상간적인 것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 시가 울음으로 가라앉지요. 그리고 아주 여성적이에요. 칼융의 심리학에서 보면 아니마의 가락이죠. 아니무스가 아니라 부드러운 가락. 그래서 영랑이나 만해나 이런 사람들의 것은 전부 아니마 가락이죠. 아니무스 가락이라고 그러면은 이육사와 같은 분이 대표적이죠.
그래서 저는 남성적인 가락을 일찍이 제 시에 도입했습니다. 한이 한으로 가라 앉아 버리는 것은, 곧 민족의 한 속에 매몰돼버리기에 한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거죠. 고려가요의 “가시리 가시리 나난바리고 가시리잇고...”와 같은 이런 한적인 가락을 목이 터지게 외쳐봐야 그것은 역사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죠. 그래서 가라앉아 있는 한을 새로운 역동적인 힘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래서 제가 만들어 낸 용어가 ‘부활의지’나 ‘재생의지’ 이런 것입니다.
76년도에 이 「산문에 기대어」어가 좋아서 유명해진 것이 아니죠. 76년도에 모 시인의 작품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어요. 모 시인의 작품이 거기는 ‘누이어 아는가’가 ‘풀잎이어 아는가’, 또 나는 「산문에 기대어」라고 했는데 거기는 「풀잎에 누워」 이렇게 해서 표절을 귀신같이 잘 했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76년도 시상식 직전에 독자들이 들쑤시니가 결국 당선 취소되었지요. 몇 천 명이 되는 독자들이, 신문 해마다 신춘문예라는 게 1월 1일 아침에만 좋은 것이여. 독자들이 알고 막 들고 쭈시니까 취소했죠. 그때 박두진, 조병화 선생이 공동사과문을 냈고 해서 이것이 급속히 입소문으로 퍼져가지고 그때부터 사실 「산문에 기대어」가 유명해 진 것입니다.
장관을 지낸 이어령 선생이 당시 문학사상 주관이었는데, 이어령 씨가 편집실 데스크를 지나가다가 휴지통에 쌓여 있는 종이들을 보고 이게 뭐냐고 묻자, 당시 편집장이 “시 쓸지도 모르는 거, 원고지에다 안 쓴 거 싹 버렸습니다.”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어령씨가 “원고지에 안 썼다고 그렇게 버리냐.”고 핀잔을 주면서 버려진 종이들을 끄집어냈답니다. 저는 그 당시 갱지, 백지에 써 가지고 보냈더니 편집장이 거기다 쳐 박아 놔 버린 거죠. 그것이 무려 열편이었죠. 근데 꼼꼼한 이어령 선생이 그것을 끄집어 올려가지고 보니까 「산문에 기대어」가 괜찮거든요.
그래서 1년 후에 이 작품이 발굴됩니다. ‘송수권이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라!’ 근데 주소를 보니까, 여관 주소로 ‘화성여관’만 나와 있더래요. 그렇게 수소문해서 찾은 것이 1년 후에요. 그때는 제가 고향에서 수박농사를 짓고 있을 때인데 사람이 찾아 왔더라고요. 그래서 부랴부랴 올라가서 사진 찍고 해서 하마터면 휴지통에 묻힐 뻔한 작품이 빛을 본거죠. 휴지통에서 나온 작가들이 많습니다. 박범신이라든가 여러 작가들이 전부 휴지통에서 나왔지요. 그래서 저는 이따금 문학도 팔자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때부터 묘하게 늦바람이 나가지고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까도 남도 3대 정신을 말했는데 바로 남도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지요. 저는 남도를 ‘물뚝의 고향’이라고 부릅니다. 이 나주벌판(김만경 벌판)을 비롯 우리나라의 5대 못자리 중에 3대 못자리가 바로 이 ‘안땅’에 있어요. 나는 이것을 ‘안땅의 정신’이라고 불러요. 김제의 벽골제, 그 다음에 고부의 눌제, 다음에 익산의 황등제가 3대 못자리이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저의 시는 3대 정신에서 한 치도 안 벗어난다는 거, 그리고 언어는 남도 언어의 순결성, 그래서 제가 초기에 썼던 이런 작품들은 순결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지금은 때가 묻어가지고 그 순수성이 다 어디로 가버렸어요. 그냥 달궁 아리랑 같은 역사물에 손을 대게 된 것도 이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렵니다.
정명중 :
고맙습니다. 선생님 강연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마어마한 창작역량을 보여주셨습니다만, 사실 이 자리에서 선생님의 문학 작품 쪽보다는 선생님의 삶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선생님의 삶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 몇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남도는 선생님께 시 창작의 원동력이자 문학적 좌표와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곧 “시의 본질은 서정이고, 더구나 나의 시적 체질은 남도의 표본 정서를 뿌리로 흑백을 뛰어넘는 비논리적 육화된 생명, 그것도 저 영원한 가시적 생명을 허무는데 있다.” 사실 저희 호남학연구원에서 감성연구도 하고 있고 해서 귀에 솔깃했던 것은 바로 ‘남도의 표본 정서’라는 대목입니다. 남도의 표본 정서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남도의 미학’하고 우리의 삶하고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궁금합니다.
송수권 :
제가 한 3년에 걸쳐서 남도정신 또는 남도정서와 관련해서 연재했던 연재물이 있습니다. 결국 남도정신이란 다른 말로 풍류정신이 될 것입니다. 남도정신을 더듬는다 함은 남도 풍류의 맥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도는 풍류의 고장입니다. 한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풍류의 맥을 잡아서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노력이 없어요. 아시아문화전당만 크게 때려 짓고 있지 그 중심 작업을 안 해요. 이걸 시장이 알아요? 도시사가 알아요? 모르잖아요.
참고로 하나 말합시다. 최치원은 풍류도를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라고 했습니다. 곧 나라의 현명한 도리가 있으니 이것을 풍류도라 했던 것입니다. 유불선을 아울러 뭇 생명과 접촉하니 이를 감화한다는 뜻에서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유홍준 선생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남도 답사의 일번지를 강진과 해남이라고 했습니다만, 그런데 여러분은 남도 풍류의 일번지가 어딘지 아세요? 아마 잘 모를 것입니다. 방금 그 최치원이 이쪽 태인 칠보산, 칠보댐있잖아요. 거기 신라 때, 신라 말이죠? 태산군수를 했어요.
태산현. 그래서 태산풍류라고 그럽니다. 그 태산풍류가 번져서 하나는 섬진강으로 흘러 내려갑니다. 한 줄기가 섬진강으로 흘러갑니다. 또 한 줄기는 동진강으로 흘러가요. 동진강으로 흘러들어간 것이 이제 동학혁명, 그래서 거기서 일어납니다. 우리 풍류현장이 마지막 꺾인 자리죠. 그 다음 하나는 담양 추월산으로 타고 넘어와서 무등산으로 들어와서 소쇄원, 계산풍류가 됩니다. 그 다음에 동시에 나주평야에서 일어났던 풍류가 적벽을 타고 들어와서 적벽풍류가 됩니다. 적벽풍류하고 소쇄원 계산풍류가 막 싸움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정여립사건입니다. 그때에 이 땅의 선비들이 천명이 죽었어요. 오늘날 광주사건보다 더 큽니다. 이것이 역사에 묻혀 있을 뿐예요. 그래서 선조실록을 보면 ‘흉혼독철’이라고 딱 못 박아놨어요. ‘흉혼’은 서인의 성흔을 말하는 것이에요. ‘독철’은 독하기로는 정철이다 그런 뜻이죠. 정송강 알죠? 정송강이 위관으로 들어가 이쪽 선비들 천여 명 물고를 냈다는 이야기죠. 근데 무슨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쓰면서 인간 다르고 문학작품 다른가라는 수용과 배제의 원리가 나와요. 서인과 동인의 싸움 즉 원효문풍과 적벽풍류가 정면 충돌합니다. 적벽풍류는 서원 즉 학풍이고 원효풍문은 시풍인데 이것이 정면충돌한 것이지요.
저는 정철보다는 송순의 「면앙정가」를 남도 표본의 풍류 정서로 보고 있습니다. 아까 표본 정서가 뭐냐고 그랬는데 이게 정극인의 「상춘곡」에서부터 흘러나옵니다. 「상춘곡」은 나옹화상의 「서왕가」에서부터 쭉 맥이 이어져가지고 이것이 송순으로 와서 「면앙정가」로 돼요. 「면앙정가」를 이어받아서 쓴 것이 정철의 「성산별곡」이죠. 정철의 「성산별곡」과 「면암정가」를 방송통신대학교에 가서 수용과 배제의 원리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그렇죠! 「면앙정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고, 땅을 굽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사람이다.” 그야말로 불굴의 선비정신이죠. 그런데 이게 그 맥이 정철에 와서 버려져버렸어요. 같은 노래여도 우리 사설시조 최초라고 하는 「장진주사(將進酒辭)」라는 걸 봐도 알 수 있어요. 송순은 풍류에서 보면 청기(淸氣)요, 정철은 탁기(濁氣)입니다. 그래서 저는 ⌜남도의 풍류의 맥을 찾아서⌟를 연재할 때 이 탁기의 인물들은 걷어내 버렸어요.
한 잔(盞)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그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우러예나, (중략)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제, 뉘우친들 엇더리
그 때 잔나비가 원숭이인데 이 땅에 원숭이가 있었는가 지금 그것도 고증해볼만한 자료죠. “뉘 한잔 더 먹쟈할고” 식의 이 질퍽한 술 노래. 이건 선비정신, 특히 남도정신인 검약과 절제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요. 검약과 절제의 성품이 선비정신인데, 정철에 와서는 이게 완전히 무너져 버려요. 그리고 남평 광산 이씨들, 그때 동인의 거두가 남평의 이발입니다. 이발은 동인의 거두고, 서인의 거두는 방금 말한 정철이에요. 같은 호남사람끼리, 정철은 사실은 여기가 고향도 아닙니다. 동인 서인 싸움이 일어난 것, 이것이 정여립사건입니다. 그래 가지고 이쪽 선비들이 천여 명이 죽은 것이죠. 선비는 처(處)가 본(本)이고 출은 말(末)입니다.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조광조가 능주로 내려와 사약을 받고 그 문하인 소쇄옹이 소쇄원 원림을 짓고 들어와 본을 소쇄원풍류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사실을 놔두고 고등학교에 가면 이런 얘기 많이 하죠? 정철의 4대 가사 작품 좋아하지 말아라.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님’짜 빼면 시가 안 되지 않아요? 근데 정철의 가사 작품들도 ‘임금 군’짜 빼면 그 노래가 성립이 안 되어요. 그래서 면앙은 자유로워도 이 풍류정신에서 정철은 절대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가 풍류열전을 쓸 때도 정철의 이 대목을 짚으면서 ‘이러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죠. 지금도 왕곡리에 가면은 제사를 지내는데 아낙네가 도마 위에 고기를 놓고 막 조사요. 그러면서 주문을 외워. 그 무슨 주문이냐? 정철을 욕하는 소리예요.
이런 정신이 있는데 제가 생각할 때 5・18정신도 김대중 대통령 서거로 끝났으면 좋겠어요. 지역을 언제까지 볼모잡아가지고 이 더러운 싸움을 하고 있어요. 김대중 대통령 하나로 끝나면 되지요. 언제까지 민주당 옷만 입혀 놓으면 다 당선되고 말이죠. 이따위의 행태들은 이제 좀 우리가 깨어나서 자유정신을 추구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광주 콤플렉스. 전남대에서 들으면 안 좋아할 거지만 여기에 매달려 있으니까 좋은 시인들과 좋은 작가들이 안 나와요. 이 콤플렉스 때문에. 그대신 도청앞 광장은 금남로와 함께 민주, 인권, 평화의 거리로 설정성역화 거리로 누구나 맨발 벗고 걷는 거리로 만들어 세계화의 성지를 만들 것을 제안합니다. 장본인 전두환 대통령부터 맨 먼저 맨발로 걸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아까 광주일보 시 써가지고 2년간 광주여고에 있을 때 형사하고 똑같이 출근하고 똑같이 퇴근했어요. 형사한테 돈도 많이 얻어 쓰고, 밥도 많이 얻어먹고 그 짓거리 했습니다. 백형모 형사라는 분이 그때 동부경찰서에 있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하룻밤 새벽에 서광여중으로 쫓겼던 피눈물 흘리는 세월을 겪었습니다.
내일 모레인가 그 무렵에 남도김치축제를 하니까 나보고 참석해달라는 거에요. 한데 외국학자나 김치학 박사가 온다는데 내가 나가서 무슨 말을 하겠어요? ⌜남도의 맛과 멋⌟ 또는 주간동아에 2년간 전국 음식기행을 연재해서 낸 ⌜풍류맛 기행⌟ 음식 시리즈를 써놔서 사람들이 대강은 아나봐요. 아무튼 저는 그래서 음식축제 심사위원으로 위촉이 와도 안 나가요. 대학의 가정과 교수들이 싫어해요. 왜냐하면 음식에 대해 영양 분석적으로 말해야지 풍류 따위를 말하니까 송수권이 들어오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그래요.
아까 그 표본 정서라는 것, 우리 판소리 가락이 바로 표본 정서입니다. 전라도 말은 이를테면 쌍말, 막말로 막 끌어내리는데 묘미가 있어요. 이를테면 임방울이 「춘향가」를 완창하다가 옆에 경찰서장이 앉았어요. 그러니까 “요놈의 새끼들 모가지를 빼다가 장구통 마개를 해버려야지. 이것들 요새도 그런 다면서?” 이러니까 경찰서장 얼굴이 어떻게 되겠어요? 경찰서장 멱살을 잡으면서 그랬다고 그러는데. 실제로 흔들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이런 일화들이 전해옵니다.
남도의 말결, 참 찰지고 잘 눙치는 가락이죠. 표본정서라는 측면에서 농악을 보면 우도농악하고 좌도농악이 다르잖아요. 우도농악은 12진법으로 꺾어 들어가지요. 좌도농악은 마치 수양버들이 봄바람에 춤추듯 흐드러져 버립니다. 저는 이런 감각을 가지고 시를 쓰지요. 그래서 제 시에 대해 판소리 가락과 결부시켜서 언급한 연구 논문도 있고 그래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남도표본 정서’라고 그럽니다. 이건 타고 나는 것이죠. 즉 구슬리는 말법과 눙치는 가락- 그것이 남도가락이고 시고 음식입니다. 이것이 곧 곡선과 느림이고 표본정서로서 건축에서 보면 선조주의 공법(線造主義 工法)으로서 남도예술의 미학입니다. 경상도 말가락은 촉새처럼 빠르고 서울 말가락은 예술에서 폭력적인 말씨로 재미가 없어요. 쉽게 말하면 우리 국토에서 서북정서(소월, 백석)와 남도정서의 차이성입니다. ‘오리 오너라 업고 놀자~’ 다른 지방에서 이런 말가락이 나옵니까? 다시 말하면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 진양조가락이 나올 리 없지요.
정명중 :
고맙습니다. 남도의 표본정서는 풍류이고, 그것을 송순의 「면암정가」나 우리의 전통 판소리 가락에서 찾아야 된다는 말씀인 듯합니다.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아무래도 10분정도 쉬셨다가 후반부 대담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선생님께서 담배도 한 대 태우셔야 될 것 같고요. 그래서 10분정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5시 10분입니다. 그래서 5시 20분에 후반부 대담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2.
정명중 :
여러분 좀 쉬셨습니까? 그럼 후반부 대담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좀 전에 선생님께서 5월 문제를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만, 남도 내지 호남의 정서를 이야기 할 때 5월 항쟁을 결코 빠뜨릴 수 없을 겁니다. 선생님께서도 5월을 체험하셨고 선생님의 문학적 편력에서도 그 사건이 굉장히 중요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아까 광주시대라는 말씀도 해주셨는데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광주 5월은 무엇이고,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덧붙여 요즘 광주의 5월을 민주, 인권, 평화의 가치나 혹은 아시아의 보편적 가치로 승화시키니 마니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런 방식의 가치화가 올바른 것인지 이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송수권 :
아까 말했듯이, 광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이 광주 콤플렉스에 시달려서 창작과 비평사에서 시집을 낸 게 있었어요. 제 시집에 아도(啞陶)라는 게 있어요. 아도가 뭐냐 그러면 이성계가 이씨 조선을 건국할 때 지식인들은 싹 잡아 죽였잖아요. 왕씨들은 몰락하고 이씨만 남았죠. 그때 정도전을 시켜서 그릇을 만들게 했어요. 주먹만한 그릇이에요. 이 그릇이 아도입니다. 벙어리 아(啞)자, 질그릇 도(陶)자. 그러니까 그 시집이 나가니까 ‘아도가 뭣이냐?’ 놀음판에서 그냥 “아도 친다.” 뭐 그런 뜻이냐 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거 시집 이름도 쉽게 지어야겠더군요. 아무튼 그래 가지고 뻣뻣한 지식인들의 문간에다가 아도를 100개씩 쌓아놓아요. “너는 앞으로 입을 놀리면 죽을 줄 알아!”라는 그런 경고장인 셈이에요. 그래서 유행했던 게 아도라는 질그릇입니다. 광주를 주제로 하면서 글을 쓰니까 지식인들이 그때는 함부로 입 열었다가는 아도 100개짜리죠. 그래서 낸 시집이 아도입니다. 광주 콤플렉스 이야기하면 끝이 없죠. 아까 대강은 이야기 했어요. 인권, 평화,민주는 광주가 풀어야 할 이땅의 영원한 남도정신입니다. 이 정신이 30주년인데도 4・19정신처럼 폭발하지 못했던 것은 마산운동에서 김주열(고등학생)같은 희생이 바다에서 시체로 떠오른 것이 도화선이었습니다. 그런데 광주는 이 운동이 고등학생들을 일거에 도청앞 광장으로 돌격시켜야 했는데 그 선동을 못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막급입니다. 그래서 한 달이 지연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는 ⌜달궁아리랑⌟에서 무등산 비둘기는 오씨팔오씨팔로 울고 지리산 비둘기는 소탕소탕 운다고 썼거든요.
정명중 :
네, 잘 알겠습니다. 다음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남도의 기질 내지 정신을 이야기하시면서 3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유명한 내용인데요. 첫 번째로 대의 정신, 그 다음에 뻘의 정신, 세 번째가 황토의 정신입니다. 게다가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작품은 이 3대 정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정신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다소 다른 차원에서 선생님께 질문을 드려볼 생각입니다. 호남에서는 싫든 좋든 간에 지역 정체성을 설명하는 용어로 ‘예향’이나 ‘의향’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역 정체성 논의를 선생님께서 제기하시는 남도기질론 또는 남도정신론과 연관시켜서 설명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송수권 :
예향 혹은 의향, 맞는 말이죠. 아까 말했듯이 의병의 60%가 이 땅 출신입니다. 지리산에 살았던 남명 조식선생이란 분이 있었어요. 선비로서 정철과는 달리 출처(出處)가 분명했던 학자였습니다. 평생 출사하지 않고 후학들만 길렀던 분이지요. 정인홍이나 홍의 장군이라 불렸던 곽재우 등이 그분의 제자였죠. 맨 처음 의병을 일으켰던 이가 홍의장군 곽재우입니다. 그 이후에 호남의병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죠. 호남의병이 전체 의병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니, 호남은 틀림없는 의향이죠.
예향은 대[竹]와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대의 생태환경적인 남방한계선이 어디까지이신지 아십니까? 대는 충북지방으로 올라가면 점점 없어져요. 그 마지막 지점이 강릉입니다. 동쪽으로는 밀양입니다. 지금은 기후 변화 탓에 대를 저 백두산에 갖다 심어도 될 것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 생각이에요. 예컨대 지금 동해안의 물고기가 서해안에서 잡히듯이 말이죠. 이렇게 생태환경이 지금 어지러워져 버린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향이라는 말을 쓰죠. 이를테면 문 밖에 나가면 대밭이 있고 방 안에 들어가면 어찌 난초가 없겠는가, 라는 말이 있어요. 해서 광주에서는 어지간한 음식점에 가면 벽에 대 그림이나 난초 그림은 다 걸려있어요. 이게 남도가 예향이라는 증거입니다.
제가 언제인가 백담사에서 대에 대한 특강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즉 소월이나 백석의 시에는 절대로 대 숲이 안 나온다. 그들은 평북 정주가 고향인데 그들이 언제 어려서 대를 보고 자라겠느냐? 한데 한 평론가가 이의를 달더라고요. 즉 백석의 시에 「남행시초」라는 작품이 있는데, 거기에 ‘청대놀이’라는 게 나온다는 거예요. 청대놀이가 뭐냐 하면 대 막대기를 가랑이 사이에 껴 가지고 기차놀이를 하는 것이죠. 동네를 막 돌면서 말이죠. 이것을 우리는 ‘죽마고우’라고 그래요. 대막대기 타고 놀았던 깨복쟁이 친구들을 죽마고우라고 하죠. 하여간 그 평론가가 백석의 시에 이 청대놀이가 나온다면서 제 말이 틀렸다는 거예요. 하지만 백석의 「남행시초」는 통영에 가서 쓴 시에요. 그 당시 백석 애인이 통영에 살았어요. 그러니까 뻔질나게 잘 내려갔어요. 동네 아이들이 청대놀이 한 것을 보고 쓴 시예요. 그랬으면 그랬지, 백석의 시에서 대숲바람 소리가 나옵니까? 소월의 시 어디서 대숲 바람소리가 나오나요? 이 문학이라는 것은 생태적인 탯줄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죠. 이 피는 못 속이는 거다, 이런 말입니다.
또 허균이 도문대작이라는 책에서 ‘죽순은 노령이남이다’라고 했죠. 노령이남 쪽으로 나오면 죽순이 맛있어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순에 맛이 든 고을의 관찰사가 평양으로 전근을 갑니다. 한데 3년을 순한 죽순 맛에 길이 들어가지고 그 관찰사가 평양에 가서 밥상을 받아보니까 죽순이 안 나와요. 그러니까 밤비할매에게 호통을 칩니다. “죽순나물이 왜 안 나오냐?”라고 말이죠. 그 할매가 “영감님 여기는 대가 없어서 죽순이 안 나옵니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관찰사의 무식함이 폭로된 거죠. 아무튼 그래서 그 관찰사는 “아이고 이 사람아! 시장에 가면 대바구니라도 있잖아. 대바구니라도 사다가 삶아야지.”라고 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우리가 대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넘어가야 해요. 대 이야기와 한정식 이야기는 「남도의 밤 식탁」이라는 시에 자세히 나옵니다. 앞으로 국민소득 3만불 시대가 오면 이 풍류문화가 살아날 겁니다. 지금의 한정식, 이건 우리 밥상이 아니에요. 전통한정식이 아닙니다. 요즘 한정식은 쫓치기 상이고, 모듬상이죠. 저는 단 한번 받아 봤어요. 저기 ‘송죽헌’이라는 곳이 있어요. 그때 제가 ‘금호문화예술상’을 받았던 무렵이에요. 그때 박정구 회장, 이 서울서 내려 와 그날 밤에 초대를 해서 따라 간 적이 있는데 그곳이 송죽헌이었어요. 송죽헌에 가니까 하룻밤 내 음식이 나와요. 그것도 많이도 안 나와요. 아주 인색해요. 아까 검약과 절제의 정신이 남도정신이라고 말했는데, 구운 것은 구운 것대로 한 점씩, 뺑 돌면 몇 사람이 앉아서 한 저금씩 찍어 먹으면 없어요. 맛만 봐라 이거지요. 영암어란을 알죠? 맛만 보란 것이 영암 어란 입니다. 검판사하는 사람들 선물용으로 많이 들어가죠. 지금도 한 짝이 쌀 한가마니 값이죠. 힘깨나 스는 주인이 불칼로 백짓장처럼 발라내어 술 안주로 내어 놓습니다. 그 인색함이라니!
한정식탁은 구운 것은 구운 것대로, 찐 것은 찐 것대로, 삶은 것은 삶은 것대로 내오는 거죠. 적어도 이것이 한정식상이라면 열두 순배는 돌아야 돼요. 지금 어쩝니까? ‘시간 없다. 시간 없다. 얼른 주라. 얼른 갖다 주라’ 그러니까 얼른 갖다 줘 버려야지요, 모듬상으로. 이것이 요즘의 퓨전식탁 아닙니까?
3만불 시대가 오면 아마 적어도 1인분에 한 10만원씩 받고 이래야 한정식 시대를 제대로 누린다고 할 것입니다. 서울 한정식 집은 인왕산 바위 속에 들어 있는 게 멋이죠. 대밭이 없으니까. 남도 한정식 집은 대숲 속에, 창창한 대숲 바람을 깔고 있는 것이 멋입니다.
어느 고샅길에 자꾸만 대를 휘이며
눈이 온다
고샅길은 그 외진 골목길입니다.
그러니 오려거든 삼동(三冬)을 다 넘겨서 오라
대밭에 죽순이 총총할 무렵에 오라
손에 부채를 들면 너는 남도 한량
죽부인을 껴안고 오면 너는 남도 잡놈
전부 대로 만든 것들이죠. 죽부인(竹夫人), 죽부인 알아요?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 뒤란 우물터에서 등멱을 하고 와서 대청에 드러누워서는 죽부인을 껴안고 누워서는 “워 시원타!”하셨죠. 무덤 속에까지 가지고 가는 게 죽부인이죠.
대가지를 흔들고 오면 남도무당이지
남도무당은 손에다 댓가지를 들고 흔들어요. 그래야 신이 내려요. 저 북쪽 무당은 대가 없으니까 대를 못 잡아요. 그래서 북쪽 무당은 ‘강신무’들입니다. 강신무, 신을 하늘에서 받는다는 얘기죠. 그래서 작두날도 타고 막 그래요. 남도 무당은 그래서 저는 대숲에 들어있는 마을을 ‘광대촌’이라고 부릅니다 그 집안이 무당이면 딸도 교육에 의해서 무당이 됩니다. 이것을 강신무가 아닌 세습무라고 불러요. 지금은 무당 자손들이 전부 판소리 유명한 명인들이 되어 있죠. 모두 당골네 그 비슷한 자손들 아닙니까. 시대가 이렇게 바꿔졌어요.
올 때는 대도롱태를 굴리고 오너라
도롱태 알아요? 굴렁쇠. 굴렁쇠는 쇠로 한 것이 아니지요. 댓가지를 쪼개 가지고 둥글게 말아서 굴리고 가요. 88 그라운드 올림픽 때 대도롱태로 히트친 양반이 이어령 선생이에요. 충청도는 대밭이 있으니까 아마 생각해 냈겠지요. 88년 올림픽 할 때 조그마한 소년이 빨간 모자 쓰고 도롱태 굴리고 가서 손 흔들고 안 들어갑디까? 이걸로 그때 세계 인구를 한 순간에 조용하게 잠재워 버리잖아요.
그러면 너는 남도의 어린애지
대롱태를 굴리고 오면 이게 남도 아이고 어린애예요.
그러니 올 때는
저 대밭머리 연(鳶)을 날리며 오너라
연도 대로 만들어서 들판에 나가서 띄웠잖아요.
네가 자란 다음 죽창을 들면 남도 의병(義兵)
남도 의병이 뭐예요? 죽창 들고 나가는 거지. 이것이 의향이지요.
붓을 들면 그때 너는 남도 시인(詩人)이란다
시인 묵객이죠. 즉 이것이 예향인입니다.
대숲마을 해 어스름녘
저 휘어드는 저녁 연기 보아라
남도의 정서, 그 아까 남도의 표본정서라고 말했죠? 이 남도의 굴뚝과 북도의 굴뚝은 달라요. 남도의 굴뚝은 낮아요. 북도는 굴뚝이 높아요. 그래서 연기가 산을 타고 기어오릅니다. 남도는 굴뚝이 낮으니까 연기가 대밭을 휘감고 들판으로 낮게 배를 깔며 흘러가요. 이게 남도 정서입니다. 북도의 정서하고는 엄연히 다르죠. 그러니까 시에서도 서울의 시적정서, 백석의 시적정서하고 우리들 남도의 시적정서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거예요. 황혼 무렵 그 연기가 깔려 나갈 때 얼마나 배고픕니까? 그때를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술시라고 하지요. 술 먹고 싶은 시간. 보릿고개에 있었던 그런 정서들입니다.
오래 잊힌 진양조 설움 한 가락
저기 피었구나’
연기가 낮게 깔려 나가니까. 진양조는 느리디 느린 가락입니다.
시장기에 젖은 남도의 밤 식탁
낯선 겨집이 지나는지 동네 개
컹컹 짖고
그새 함박눈도 쌓였구나
낯선 겨집은 그 마을을 지나는 과객이에요. 이를테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예요. 봇짐지고. 저도 어려서 우리 사랑방에서 과객을 할아버지가 많이 접대했어요. 사랑방에 짚신이 한 축씩 걸려있어요. 과객들의 접대용이지요. 그게 바로 거집, 한자로는 거접(巨接)입니다. 크게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거접입니다. 남도말로는 거집이죠. 노잣돈 떨어지면 조금 주고, 짚신 한 축 짊어지고 또 그래서 선비가 한양길을 걸어 올라갑니다. 그래서 이런 선비들이 밤에 찾아들 때는 동네 개들이 막 컹컹 짖죠.
이 대숲 바람 속에서 눈 쌓이는 밤에 한정식을 하룻밤 내 드는 모습, 그 얼마나 다소곳하고 아름답습니까? 그래서 진짜 한정식집 가면 윗목에는 항상 서상대가 놓여 있고, 문방사우 집필묵이 놓여 있고, 하다못해 북, 장고, 병풍이 있어야 이게 한정식 집이죠. 지금같이 어디 교양머리 없이 해태나 명동식당을 한정식집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이야기지요. 일제시대에 우리 화가들이나 시인 문객들이 이런 밤을 맞으면서 그 안주인이 맘에 들면 치마폭 벗으라고 해 가지고 거기다 그림 한 폭을 쳐요. 거기다 또 휘갈겨요. 그 치마가 지금 한 벌 발견 된다면, 아마 몇 억은 호가할거에요. 얼마나 멋스러운 밤 아니겠어요?
그러니 올 때는
남도 산천에 눈이 녹고 참꽃 피면 오라
참꽃은 진달래죠.
불발기 창 아래 너와 곁두리 소반상을 들면
마주 앉은 상은 곁두리 상입니다. 셋이 앉으면 셋두리, 넷이 앉으면 넷두리입니다. 이게 남도의 찰진 언어들이에요. 아까 제가 한 300단어 올려놨다는 그 말 했죠? 콩을 소반상 위에 올려놓고 다듬는 거 알아요? 그걸 ‘소반다듬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60대 할머니도 소반다듬이라는 말을 물어보면 모르더라니깐요. 우리 어려서 소반상위에서 썩은 콩 얼마나 많이 골라냈어요. 그때 불렀던 노래가 있어요. 가나다라 강낭콩, 흥부네 집 제비콩, 우리 집 강낭콩. 그리고 그때 샜던 숫자가 하나 둘이 아니에요. 하니, 두니, 서니, 너니. 이런 따뜻함 속에서 우리가 자라왔습니다. 하나, 둘, 셋, 넷 하면 얼마나 운치가 없습니까. 시에서 하나, 둘 하고 나와 보세요. 그게 막대기 부러지는 소리지. 구슬리는 말법, 눙치는 가락은 아니지요.
나주 소반상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3대 밥상이 있습니다. 나주 밥상, 통영 밥상, 해주 밥상 이렇게요. 무슨 뜻인 줄은 알겠죠? 나주밥상, 천년고도 나주 밥상 말입니다. 개다리 소반상이 있어요. 쌍놈들이 먹는 밥상이죠. 상다리가 개다리같이 생겼어요. 조그마한 상이에요. 그 반대가 호족상이예요. 개다리가 아니라 호랭이 발목처럼 생긴 상이 있어요. 이것이 진짜 귀빈들이 받았던 그런 상입니다. 그러니까 개다리소반상 혹은 막치소반상은 서민들의 밥상인 셈이지요
아 맵고도 지린 홍어의 맛
남도에서 잔치를 치르려면 홍어죠. 제 아무리 소를 잡았다고 해도 홍어 안 올라오면 그 집 잔치 잘했다는 말 안해요. 반드시 흑산 홍어가 올라와야 돼요. 북도의 잔치는 홍어대신 뭐가 올라 오냐 하면 무젓이 올라와요. 꽃게를 양념 넣고 막 주무른 거예요. 한데 거 젓갈이라는 용어를 안 붙여야 되는데 왜 젓갈이라는 용어를 붙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원래 막 주물러서 먹는 거죠. 오랫동안 제가 전국 음식기행을 하고 음식 거시기를 해 놔서 음식 가지고는 내 앞에서 장난 잘 못 쳐요.
어느 고샅길에 자꾸만 대를 휘며
눈이 온다
눈이 오는 밤에 멋스러운 한정식밥상 한번 받아보고 싶지 않습니까? 이 풍류가 어디서 나옵니까? 밥상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이 근검절제 정신으로 이루어진 남도풍류의 맛과 멋이지요.
정명중 :
큰일 났습니다. 오늘 저녁에 선생님을 모실 곳이 풍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어서요.
송수권 :
요새는 그런 곳 없습니다.
정명중 :
다음 또 여쭤보겠습니다. 제가 사실 선생님의 음식철학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었는데 그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그건 생략하구요. 오래전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흔해 빠진 민족이라는 이름을 팔아 천하통일을 꿈꾸는 시인이기 보다는 깨끗한 지역 공간에 남아 한 마을을 지켜나가는 무명시인이 되겠다.” 이런 각오를 한번 피력하신 바가 있으신데 그래서 선생님이 이 지역에 갖는 애착이나 사랑은 남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지역이 우선은 소위 서울중심주의에, 그리고 돈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게다가 문화적 천민들에 의해서 황폐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좀 염려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광주는 현재 지금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한다고 홍역을 앓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시국에서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문화란 무엇인지 내지는 문화는 어떤 모습이어야 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제 개인적 소망이지만, 이 지역의 실태에 대한 따끔한 일침을 포함해서 말씀을 좀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송수권 :
그러니까 다분히 스노비즘(속물근성) 쪽으로 사람들이 막 휩쓸려가지고 정신을 못 차리고 그래요. 좀 자기중심들을 잡아 줬으면 좋겠어요. 마을정신에서 무엇인가를 찾아야 해요. 광주의 도시정신이 아니고 마을 전통, 마을 정신 말입니다. 제가 말한 달궁도 단군시대에서부터 있던 마을입니다. 남도의 4대 반촌이 있어요. 소위 말하는 양반이라고 불렸던 마을이 아까 말했던 태산풍류가 나왔던 태인향약. 「상춘곡」을 썼던 정극인을 중심으로 만들었던 마을향약입니다.
마을향약은 고을 사또도 간섭을 못해요.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마을규약이라는 것이 말이죠. 한데 요즘 이 마을정신이 없어요. 마을에 가 봐야 순 감꼭지들만 살잖아요. 어중이, 잡둥이, 이제는 다문화 가정이라고 해 가지고 흰둥이, 검둥이, 노란둥이. 저도 시에다가 썼습니다마는 시엄씨가 애기를 받다가 까만놈이 나오니까 ‘이게 뭔 일이야’하고 문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이죠. 또 한 번 노란놈 받다가 ‘이게 뭔 일이냐’하고 뛰쳐나오고. 이것이 지금 농촌이 어떻게 망해가고 있는가. 망해가는 것이 아니라 다문화 가정으로 초현대화로 옮겨오는 그런 과정이죠. 농약 먹고 죽은 이야기를 시에다가 써서 뭐하겠어요. 쌍팔년도 이야기를, 이런 것들을 써야 오늘날 마을 정신을 되돌아볼 수 있어요.
그래서 남도 4대 마을이 태인, 그 다음에 영암 구림. 구림이 몇 호인 줄 압니까? 800호였습니다. 동구림, 서구림. 백제 왕인이 여기서 배를 타고 논어와 천자문을 싣고 일본에 초청을 받아서 들어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일본의 아소카문화에 원조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마다 왕인 박사의 행사가 여기서 벌어지잖아요. 그래서 구림, 지금도 제 시에도 있습니다마는 그 골목길을 가는데 참깨 볶는 냄새, 긴 골목길에서 이 냄새가 후각을 어떻게 자극하는지 그 골목길이 깨밭길 같습니다. 그 다음에 누구집 인줄 모르겠는데 한약 끓이는 냄새가 사람을 죽이 드라고요. 그래서 저는 시에다가 “이 긴 봄날 나도 병을 앓고 싶다.”라고 쓴 적이 있죠.
구림, 태인 그리고 어디입니까. 나주 금안동 12동네. 신숙주 생가가 거기가 있죠. 요즘 신숙주 무슨 연속극을 하더라고요. 신숙주 아들놈하고 수양대군 딸하고 역사에 없는 것을 갖다가 그것을 ‘픽션’이라고 그러지요. 허구와 사실을 잘 구별해야 하는데요. 그런데 역사를 얼마나 오도시킵니까? 바로 고흥 송씨가 단종 왕비 오라비가 당시 선전관인데 오라비가 계유정난 때, 사육신 죽을 때 고흥까지 쫓겨 내려와요. 피난 와서 뿌린 성씨가 지금 고흥 오천호 송씨들입니다. 그러니까 송씨들이 조금 삐딱해. 이따금 송대관이 나와서 ‘나도 양반 자손이예요’라는 그런 말 들어봤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숙주나물 안먹습니다. 변덕스러운 나물이지요.
그 다음에 영암 구림, 지금 3대 마을까지 했나요? 그러면 위백규사는 동네가 장흥방촌인가요? 이게 소위 말하는 남도 4대 마을입니다. 그리고 다 향약이 살아있어요. 거 어디서 파문이라는 말이 나왔냐면 거기서 파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마을에 문둥병자나 이런 것이 생기면 일단 1차경고로 나가라고 그래요. 그때는 무서웠으니까 이게. 안 나가면 마을 공동 샘을 못 길러 먹게 해요. 그 다음에 또 말을 안 들으면 마을 장정들이 가서 사립문을 둘러 파버려. 고립시켜 버려요. 그래도 안 나가면 가서 솥단지를 두드려 버려요. 그러면 안 나갈 재간이 없잖아요. 이걸 관에서도 간섭을 못했다는 거예요. 사문난적만 파문(破門)을 당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 다음에 마을의 유서를 알려면 사장나무가 그 그늘이 얼마나 깊으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아 저 마을이 참 반촌이었구나!’, ‘아, 저 마을은 옛날부터 참 보잘것 없는 마을이었구나’ 그 그늘이 옛날에는 무슨 그늘입니까? 이게 여론의 광장입니다. 그 마을의 여론을 듣는 광장이에요. 유럽에만 시민의 광장이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도 마을마다 이런 광장문화가 있었어요. 광주에선 고싸움 마을인 옻돌부락이나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로 500년 마을인 충효동 같은 마을인데 광주향약 같은 규약이 살아 있었던 마을이 다 황폐화 되어 있습니다. 충효동 같은 곳은 전통 한옥촌으로 조성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거기서 이제 백중날이면 ‘들독놀이’도 하죠. ‘들독’이란 말 알아요? 힘겨루기입니다. 이만한 돌이 있는데 그걸 드는 거예요. 훌쩍 들어 올리면 상머슴, 쌀 20가마니짜리. 그 다음에 발발발 떨다가 중간쯤에서 탁 내려 놔버리면 중머슴. 아예 꿈쩍도 못하는 놈은 소꼴이나 베는 꼴머슴. 이게 백중날에 머슴들 세경을 이 사장나무에서 결정을 해요.
이 마을의 풍습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런 것이 새마을 사업한다고 다 베어 눕혀 버리고, 그 공터가 주차장으로 둔갑해서 서울서 돈 깨나 벌어가지고 온 청년들이 차 쓱쓱 대놓고 폐촌이 다 돼버렸지요. 옛날에는 그 마을에 불효자가 나오면 사장나무 밑에 끌어다 놓고 덕석에다가 돌돌 말아서 몽둥이로 패버리죠. 불효자식 이런 놈들. 누가 팬지도 몰라요. 그래 가지고 죽어도 관에서 터치도 못해요. 호남 최초의 향약은 태인향약입니다. 이퇴계가 만들어 놓은 ‘예안향약(禮安鄕約)’보다 60년이 앞섭니다. 물론 향약의 최초는 중국의 여씨춘추 향약으로부터 들어오지요.
이렇게 해서 시작된 마을정신이 살아있다면 오늘날 공동체 문화는 훌륭하게 살아 남았겠지요. 지금 광주 원로 누가 있습니까? 우리 문단에도 원로가 없어요. 새까만 후배들이 ‘원로 좋아하고 있네!’하며 아주 무시해 버리죠. ‘온고지신’이라고 그럴까요? ‘법고창신’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아까 말한 한정식이 바로 이 보수전통 식탁입니다. 이 식탁이 잘 간수되어야 합니다. 한데 지금은 어쩝니까? 식탁이 다 엎어져 버렸죠? 19세기는 ‘악마의 세기’라고 그럽니다. 왜 그러냐? 자크 아탈리라는 미래학자가 쓴 용어인데, 힘 있는 나라가 군대를 몰고 와가지고 정부를 엎어버리지요. 이게 제국주의죠. 지금 전쟁은 거꾸로 완전히 바꿔졌어요. 맨 먼저 세계화란 이름으로 다국적 상품이 올라와 식탁부터 엎어버립니다.
아까 표본정서 이야기도 했지마는 세계화라는 글로벌리즘을 타고 우리 고유정서가 절단난 것입니다. 우리 국어의 표준말은 어디입니까? 서울말이고, 판소리의 표준말은 어디 말입니까? 전라도 말이죠? 전라도 언어가 안 들어가면 판소리가 안 돼요. 이게 전라도 말가락인 겁니다. 어렵게 해석하지 마세요. 그래서 같은 거시기라고 해도 강원도 비탈 X지, 전라도 뻘X지. 뭔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 전라도 뻘보지라고 그러죠. 애들 열을 낳아도 튼튼해요. 더구나 부삭 앞에서 불을 때는데 우리 주택용어로 ‘복룡간’이라고 합니다. 사방 한자 길이로 황토를 묻습니다. 황토, 아까 황토정신 말했죠? 그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산에서 해 온 솔가지로 불을 때고 있어요. 아낙네들이 짝 벌려놓고 불을 쬐고 있어요. 그러면 황토 기운하고 불기운하고 조화를 이루어서 다 어디로 들어갑니까? 다 뱃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밭 메다 낳으면 밭순이고, 길가다 낳으면 길순이고, 똥간에서 낳으면 똥순이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다 땅을 밟아서 땅을 치면서 땅을 울리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진도 소리. 그 전에 강원도 정선 아리랑을 진도아리랑에 비교해 봅시다. 정선 아리랑은 어쩐가? 이곳은 산이 높아요. 산에서 살아. 배에서 소리를 못 내요. 항상 목을 흔들어서 소리를 내요. 대표적인 것이 스위스의 요들송이죠.
이렇게 소리와 가락이, 음색이, 정서가 문화가 이렇게 감각이 다르잖아요. 이런 문화의 특수성을 지닌 것이 남도의 문화 속에 들어있는 표본정서입니다.
정명중 :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 관계자가 와서 좀 들었어야지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었지만 선생님께서는 75년 등단이후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물론 최근에도 시집을 내셨고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향후 선생님의 창작 방향이랄까 집필계획 같은 것을 듣고 싶습니다. 아울러 최근에 선생님께서는 ‘한국풍류문화연구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래서 연구소와 연관된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을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송수권 :
풍류, 아까 풍류문화에 대해서는 얘기했었죠? 그러니까 풍류는 남도문화를 아우르는 것이죠. 시도 판소리도 그 무엇도 전부 음식에서 다 나온 겁니다. 음식은 1차 문화예요. 예술은 2차 문화지요. 배고프면 예술이 없어요. 배가 불렀을 때 소리도 나옵니다. 풍류문화의 1차적인 것이 밥상이에요. 밥상이 걸지면 배가 부르니까 풍류가 나오지요.
여러분 성경 식탁을 보세요. 모세 5경중에 레위기에 있는 말입니다. 모세가 황야에서 40년간 자신의 종족을 이끌고 다니면서 뭘 먹고 살았겠어요? ‘너희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메뚜기 떼와 흰 개미떼와 딱정벌레 떼와 도마뱀….’ 이런 식으로 나와요. 이건 이동 식탁이잖아요. 이게 유목식탁입니다. 우리 식탁은 저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벽골제가 삼한시대부터 건축된 물둑이죠. 아까 물둑의 고향이란 말을 했습니다. 물둑의 정신 또는 안땅의 정신이라는 말로 제가 남도의 정신을 표현했잖아요. 그래서 벽골제에서부터 우리는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잖아요. 이것이 고정식탁이 됩니다. 이게 전통식탁이 됩니다. 고정식탁이 되면서 그전에는 주부식이 분리되지 않은 시대죠. 주식이 따로 없고 부식이 따로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 다음에 쌀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주식과 부식이 분리가 되고 국물 문화가 나와요. 그래서 숟가락이 등장해요. 이것이 우리 식탁의 1차 혁명입니다. 그 다음에 2차 혁명, 3차 혁명, 4차 혁명을 거쳐서 우리 음식이 가장 아름답게 꽃피기 시작한 것이 고추, 그렇죠. 이것이 임진왜란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고추가 들어오기 전에는 김치도 절임김치예요. 된장 뭐 이런 것으로 거기다 절여 먹는 거죠. 고추로 김치를 비비니까 색깔도 좋고 맛도 담박하게 살아나잖아요. 그래서 고추가 들어 온 식탁을 3차 혁명이라고 그럽니다. 그 대표적인 음식이 전주비빔밥이겠죠.
저는 음식기행을 쓸 때 ‘전주비빔밥은 절대로 깡통 속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음식은 깡통 속에 들어가면서 맛이 없어지는데 전주비빔밥은 깡통 속에 들어갈 수 없다고 썼어요. 가끔 산악인들이 개고기를 깡통 속에 넣어봐라 그러면 이게 날개 돋친 듯이 팔릴 것이라는 말을 해요. 그런데 거꾸로 되었더라고요. 개고기가 깡통에 들어갔다는 소리는 못 들었어요. 그런데 전주비빔밥은 지금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이 되어 있어요. 아무튼 이렇게 해서 최정점에 있는 음식을 전주비빔밥으로 봅니다. 21세기 음식의 꽃으로 보지요. 그래서 우리 식탁은 붙박이식탁, 고정식탁입니다. 이른바 전통보수 식탁이죠. 5・18이란 것도 전통보수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보수전통입니다. 한마디로 말합시다. 우리 밥상을 누가 뺏으러 달려들면 우리는 죽창을 들고 나가요. 이것이 5・18이고, 4・19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이고, 동학혁명정신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이게 남도 문화인데 이런 밑작업을 좀 해줬으면 쓰겠는데, 아시아문화전당만 근사하게 지어놓는다고 될 일입니까? 아시아문화전당을 지으려고 그러면 그 밑바탕에 정신적인 이론이나 학문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저를 호남학연구원에서 초청한 거잖아요.
정명중 :
고맙습니다. 향후 호남학연구와 관련해서도 여러 참고점이 있을 듯합니다. 이제 저와 선생님의 대담은 여기서 마치구요. 청중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청중께서는 의문점이나 하고 싶은 말씀을 자유롭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궁금하신 게 많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송수권 :
이제 여러분이 공동 대안이라든가 이런 거 한번 내 보세요. 그래야 저도 연구를 해 들어가지요. 연구 과제를 던져 주란 말입니다. 이게 바로 호남학 아닙니까?
김경호(호남학연구원 HK교수) :
선생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밥상이 걸지면 거기서 풍류가 나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데 밥상이 걸진 것은 어떻게 보면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그런 일일 텐데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풍류라고 하는 멋과 품격이 가난한 자들의 저항이라고 하는 것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송수권 :
제가 아까 말했죠? 남도 풍류가 마지막 꺾인 자리가 동학 발상지, 저쪽에 동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배들평야. 그 다음에 한줄기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따라 나가는 산마을(남원)과 강마을인 구례로, 한 줄기는 추월산을 넘어서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소쇄원 풍류(원호문풍)와 적벽풍류로 이어지는 문풍(시)과 학풍(서원)으로서 이 풍류의 현장들이 꺾인 자리고 다 큰 싸움이 있었던 현장들입니다. 그것이 좋건 싫건 말이죠. 다시 쉽게 설명하자면 물뚝의 고향인 안땅(南澤)을 누가 침범했을 때 이때는 당연히 저항정신이 일어나지요. 그래서 저는 저항과 풍류는 따로 떼어서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질문의 요지가 배부른 자의 소리 아닌가, 라는 이런 얘기로 들리는데, 맹자의 말에 나물먹고 물마시니 대장부 살림 이만하면 어떠한가 하는 대목도 있고, 우리 육자배기 가락도 있잖아요? 그래서 꼭 어떤 부자의 밥상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죠. 저는 아까 이 풍류역사에 대한 간극을 수용과 배제의 원리로 설명드렸습니다. 오히려 두레마당의 신바람은 풍류의 원조라고 할 최치원이 말한 접화군생(接化群生)으로서 대다수 민중들의 밥그릇에서 나왔음을 설명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김경호 :
한데 실은 남도의 풍류라고 했을 때 그 풍류의 실체를 정확히 어떻게 개념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지가 의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수준에서 일반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공유되는 듯 하는 그런 풍류라는 것이 과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한테도 과연 가능하긴 했었을까, 하는 것이죠.
송수권 :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매천이 쓴 책 중에 ‘오하기문’이 있죠. 곧 ‘오동나무 아래서 듣다’는 뜻이죠. 거기 보면 매천이 동학교도들을 ‘비적’이라고 불러요. 비적이라고 그러니까 쳐 없애라 이 말이죠? 이랬을 때에 그말은 깨어있는 소리가 아니죠. 의병 동학잔당들이 죽창 드는데, 그런 것에서 틀려가지고 양반들 잡아다가 방금 말한 것처럼 개고기 퍼 먹이고 생파먹이고. 그렇게 동학교도들이 못된 짓거리들을 좀 했어요. 동학이 실패했다는 건 양반 귀족층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죠. 그러면 매천도 지금의 어떤 민중편은 아니고 뭐 옛날 선비들은 다 그랬겠지 않아요?
남도에서 보면 누정문화가 따로 있고 농막문화가 따로 있어요. 복날을 날 때 보면 산 위의 누정 속에서는 개고기 안 먹어요. 양반들이 그때는 민어탕이나 삼계탕이나 선비들이 끓여 먹는 음식이에요. 밑에 평야지대 농막에서는 개 잡아서 개고기 먹어요. 그러니까 복날 개 패듯이 한다는 말이 거기서 나온 말이죠. 산 위에 있는 선비들이 바라보고 ‘아이고 저 상놈의 새끼들 또 더러운 냄새피운다고’고 내려다보고, 이제 밑에 농막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이 ‘야, 느그들 배가 부르니 이런 음식 꺼려하지 자식아. 니네 한번 맛을 봐라’고 동학 때 양반들 잡아가지고 개장국 막 퍼 먹이죠. 북한에서는 개장국이 제사상에 올라갑니다. 남도에서는 제사상에 올라가는 법이 없죠. 거기서 싸움이 일어나고 아까 말했던 저항정신이 터져 나오고 그러지 않았는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풍은 ‘바람 풍(風)’자를 쓰지요. 이건 하늘의 소리입니다. 류는 ‘흐를 류(流)’자입니다. 이 가운데 사람이 서면 풍류인이 됩니다. 바람과 물의 흐름이 잘 만나야 꽃이 핍니다. 이것을 우리는 ‘수류화개’라고 그럽니다. 수류화개, 그래서 저 화개라는 말이 거기서 생긴 겁니다. 물이 흐르는 곳에 꽃이 핀다. 꽃이 피면 이제 뭘 보냐? ‘화조월석’ 아침에는 꽃을 보고 밤에는 달을 본다. 이게 다 풍류지요. 그래서 우리 국토는 유도강산 불도강산 선도강산으로 그 풍류현장이 나누어집니다.
이것도 이제 이상하게 흘러가다 보니까 외국 사람들이 한국사람 와서 보면 버스 칸에서 한국 어디 관광을 갔더니 한국의 중년 부인들이 타가지고는 술이 취해가지고 치마를 반쯤 흘려가지고 니나노를 버스 칸에서 틀어 대는데 외국 사람들은 기가 차는 거여.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인 거여. 이것은 문화의 차이잖아요. 아까 귀족문화, 양반문화가 차이가 있듯이. 한국의 풍류가 뭐다 하는 것, 이것을 이해하면 그것이 쉽게 이해되겠죠. 한국 문화의 풍류는 즉흥적이고 그래서 신바람이 나는 겁니다. 신바람이 지금 우리 역사를 걷어 올린 것 아닙니까? 경제 부흥이 그렇게 해서 된 거 아니에요? 지금도 그 근성이 기질로 남아 있죠. 추석 명절이 되면 알아요. 저 고속도로를 깨지고 엎어지고 8시간이 걸린대도 내려옵니다. 엎어지고 깨지면서 고향으로 내려오지요. 고향에 누가 있습니까? 부모가 있고 선산이 있죠. 그래서 그렇게 성묘하고 올라갑니다.
풍류란 다른 게 아니에요. 우리 사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겨레의 심원한 정서고 멋인 것이지요. 풍류의 노래는 하늘에서 나와서 땅에 깃들고 사람에 의해서 그 품격이 완성됩니다. 이것이 우리 시고 노래죠. 풍류정신이 로고스 측면에선 역사의 추동력이 되었고 파토스 측면에선 겨레의 한과 멋의 가락으로 분출된 것이 아닌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태성(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
저 사소한 것이지만요 아까 읽어주신 시구 중에서 ‘삼동’이라는 시어가 있었거든요?
송수권 :
석삼(三) 자, 겨울동(冬) 자. 초동, 중동, 맹동. 가장 깊은 겨울이 삼동이죠. 질문의 요지인 남도풍류의 실체는 태산풍류를 원류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내려와 호남 제일의 피향정(披香亭)을 짓고 반곡천가에 포석정을 짓고 호남유림들을 기러 먹였지요. 유상대(流觴台)비문이 그것입니다. 이 태산풍류의 맥을 이은 것이 정극인의 ‘사춘곡’이고 ‘태인향약’이며, 상춘곡을 이어 받은것이 ‘면앙정가’이고 면앙정가를 이어 받은 것이 ‘성산별곡이 되기 때문입니다. 면앙정 3언詩 ‘면유지(俛有地),앙유천(仰有天),정기중(亭其中),흥호연(興浩然)이야말로 즉흥성과 구강성으로 흥바람을 일으키는 남도풍류의 실체가 될 것 같습니다.
조태성 :
아, 거기에 겨울 동자를 썼나요? 고려가요인 동동가 중에 삼동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단어를 학자들이 지금까지 해석을 못했습니다.
송수권 :
삼동이라는 말을 기막히게 써 먹은 시인은 정지용 시인입니다. 책력, 우리 할아버지들은 달력이라고 안 불렀습니다. 아무튼 “책력도 없는 산 중에 삼동(三冬)이 하얗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삼동이 하얗다’는 말은 깊을 대로 깊은 침침한 겨울이고 인적이 없는 그런 산골짜기의 겨울입니다. 그런 산골짜기에 무슨 달력이 필요 있겠어요? 조선생이 말한 것은 ‘동동가’ 동동, 즉 조리돌림 때 치는 북소리 아닌가요, 마을에 풍기문란한 여자가 나오면 코를 꿰어 북을 짊어지고 온 고을을 돌렸어요. 그것을 조리돌림이라고 했지요.
정명중 :
더 궁금하신 게 있을 줄 압니다마는 일단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여기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송수권 선생님을 모시고 진행한 여덟 번째 원로 명사에게 듣는 호남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장시간 대담에 응해주시고 저희들에게 귀한 말씀을 전해주신 송수권 선생님께 다시 한번 존경과 감사의 뜻으로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송 수 권 (宋 秀 權)
1940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창과를 졸업했다. 호는 평전平田.1975년 ‘산문에 기대어’ 외 4편이 ‘문학사사’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남도의 서정과 질긴 남성적 가락으로 ‘종래의 서정시가 생生의 에너지를 상실하게하고 자기 탐닉의 울음으로 떨어지는 한을 민족적·역사적 힘으로 부활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는 송수권 시인은 문공부예술상을 비롯해 금호문화예술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영랑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만해님시인상, 한민족문화예술대상, 김삿갓문학상 등 상을 수상했다. 개인시집14권, 시선집, 육필시집 등 5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전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현재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