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23) - 2024 .05. 04(토)-06(월) |
성지순례 23차는 2박3일인데 2박3일은 처음이다. 5월 5일 어린이날이 일요일이라 5월 6일 월요일이 대체 공휴일이다. 그래서 2박3일로 계획했다. 순례코스로도 우리 지역에서 가장 먼 춘천교구, 의정부교구, 인천교구 지역이라 멀어서 승용차로 운전하여 가기가 힘들어 KTX를 이용하기로 했다.
서울역에서 친구이면서 교우인 신 모세 형제를 만나 2박3일을 함께 하기로 했다. 모세 형제는 전국 성지순례를 두 번째 다니고 있다. 남들은 한 번도 어려운데 두 번째라니 참 대단하다. 따라서 이번 회차 순례코스는 모세 형제에게 일임했다. 대강의 계획은 서울에서 일단 춘천 교구에 속한 포천 순교성지와 광암 이벽 진묘터, 그리고 의정부 교구 관내 7개 성지, 그리고 시간이 된다면 인천 교구의 강화도까지 순례할 계획이다.
경주역 출발이 05시 48분이라 성당에서 새벽 05시에 출발하기로 하고 조금 일찍 도착하니 어두워서 기도서의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달리 하늘은 파란데 초승달이 하늘 한 모퉁이에 걸려있다.
2024. 05.04. 05 : 00 성당 출발. 경주역 05 : 50 출발. 08 : 57 서울역 도착.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포천 순교성지에 도착하니 11시 20분이다.
포천 순교성지 - 복자 홍교만 · 홍인 부자의 순교정신이 살아 숨쉬다 |
순교 성지 주소 -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호국로 1564
포천 성당 주소 - 경기도 포천시 왕방로 191
포천 성당 연혁
포천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로 본다. 박해가 이어지자 다른 지방의 신자들이 이곳 포천 산간지역으로 옮겨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그의 아들 홍인(洪鏔) 레오의 순교 사실에서 증명이 된다.
그러나 이 지역 최초의 공소가 생기기까지는 100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900년 초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 해룡마을에 포천 지방 최초의 공소가 설립된 이후 내촌, 맑은 데미, 송우리, 고일리, 오가리, 새묵이 등지에 잇달아 공소가 설립되었다고 한다. 공소 설립이후 포천 지역의 사목은 1921년경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전교 활동을 하고 있었던 손성재(孫聖載) 야고보 신부에 의해 수행되다가 그 후 1930년 개성 본당,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행주 본당, 1935년부터 덕정리 본당(현 의정부 주교좌본당)의 관할 지역에 속하였다.
포천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56년이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포천 지역에 주둔했던 6군단 군단장 이한림 가브리엘의 도움이 컸다. 독실한 신자였던 이한림 장군은 포천지역의 신앙 역사가 신유박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도 지역에 성당이 없는 것을 알고 익명의 독지가가 기증한 1,000여 평 대지에 공병 부대의 도움을 받아 성당 건축을 추진하였다. 그는 포천지역 어디서든지 잘 보이는 왕방산 인근 덕정리에서 가져온 화강석으로 성당 건립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55년 11월, 60평의 석조 건물로 된 성당과 20평의 사제관을 완공하였고 12월에 춘천 대목구장 퀸란(Thomas Quinlan, 具仁蘭)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건축을 전후로 잠시 6군단 조상익(趙相益) 베드로 군종 신부가 포천 신자들의 사목을 담당하다가 1956년 2월 김진하(金瑨河) 요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포천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포천 본당은 춘천교구 서부 지역, 즉 경기 북부 지역 복음화의 산실이 되었다.
이처럼 6ㆍ25 전쟁 후 군부대 지원을 받아 지어진 옛 포천 성당은 1990년 7월 11일 한 취객의 방화로 인해 거의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주임 신부와 신자들은 화재 발생 다음 날인 7월 12일 성당 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성당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였다. 박우성 신부와 신자들은 새 성당 건립을 위한 ‘사랑과 나눔의 바자회’ 개최 등을 통해 모금한 기금과 전국 각지에서 받은 성금으로 1992년 3월 새 성당 기공식을 거행하였고, 12월 10일 총건평 205평, 연건평 204평의 지하 1층 · 지상 2층으로 된 새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불탄 구성당은 비록 뼈대만 남았지만, 역사 보존 차원에서 1992년 새 성당을 건립한 후에도 헐지 않았다. 구성당은 한국 전쟁 직후에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의장적 특징인 종탑과 뾰족한 아치 창호와, 공간적 특징인 단일 홀로 구성된 강당형 평면, 그리고 화강석 조적법(組積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 또 한국 전쟁 이후 많은 교회 건물을 석조로 지었지만 군부대가 직접 세운 것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종교 건축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9월 19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순교성지 지정
2006년 5월 1일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행사를 한 포천 성당은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홍인 레오 부자의 순교 정신을 계승하여 더욱 활기찬 신앙 공동체로 거듭나고자 했다. 2011년 성당 구내에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할 레오 회관을 신축했다.
2014년 8월 16일 포천의 사도인 홍교만과 홍인 부자가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품에 오르자, 춘천교구는 같은 해 9월 27일 포천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시복 감사 순교자 현양대회에서 복자 홍인 레오가 순교한 포천 2교 인근 저잣거리 한내천변 순교터(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723-3)를 순교성지로 선포하였다. 춘천교구에서 순교성지로 선포된 곳은 여기가 처음이다. 그리고 2015년 9월 순교성지 선포 1주년을 기념해 홍인 레오의 순교 정신을 기리고자 순교현양비를 건립해 축복식을 갖고 주변을 정리해 포천 순교성지를 조성하였다.
복자 홍교만 · 홍인 부자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양 출신으로, 훗날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고 있었으며, 그도 높은 벼슬을 지낸 맏형과 함께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진사가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홍인 레오는 그의 아들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철상 (丁哲祥) 가롤로는 그의 사위이다. 포천으로 이주해 사는 동안,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양근에 사는 고종사촌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을 드나들다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신앙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먼저 천주교에 입교한 아들 홍인에게서 교리에 대해 자세히 들은 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찾던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실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사돈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 두기도 하였다. 얼마 후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곧장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는 어떠한 위협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으며, 박해자들 앞에서 끊임없이 ‘천주교 교리가 진리’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실제로 박해자들이 오히려 그의 용감한 태도에 놀랄 정도였다.
“하느님은 천지의 큰 부모가 되시니, 어찌 큰 부모를 섬기지 않겠습니까? 또 큰 부모를 섬기는 천주교를 감히 사악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천하의 진리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후에도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끊임없이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홍인(洪鏔) 레오는 부친에게 교리를 배웠는데, 오히려 부친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에 입교한 후 홍인 레오는 세속의 꿈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고 교리를 전하는 데만 열중했다. 그러면서 효도를 다하는 길은 부친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해 부친을 설득해 178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함께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했다. 1801년 부친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당시 부자를 함께 처형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홍인 레오는 포천으로 이감되어 약 10개월 뒤인 1802년 1월 30일 포천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저잣거리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4세. 부친인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이미 1801년 4월 8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뒤였다.
포천 순교성지
포천 순교성지에 들어가니 실제 순교현양탑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현양탑 앞에 순교자 부자의 순교 내력을 설명해주는 안내판과 현양탑 옆의 커다란 순교자 안내막이 쳐져 있을 뿐이다.
포천성당
성당 입구에는 성모님 촛불 봉헌대가 있다. 귀여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자상인데 뒤에는 사랑마크 줄장미 화환이 원형 광배처럼 받쳐주고 발밑에는 아름다운 꽃잔디가 빈틈 없이 수놓고 있다. 5월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그 앞 잔디밭 가에는 순교복자 홍씨 부자의 신앙과 순교에 관한 안내판이 읽기 좋은 각도로 줄지어 서 있다. 십자가와 팔마가지로 상징되는 사진으로 시작하여 성지 안내로 끝맺고 있다.
위의 국문 내용을 보면 유학자로서의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유교의 경전인 시경, 서경, 역경을 끌여 들여 천주강생이라는 천주교 핵심 신앙이 유학의 진리에도 어긋나지 않음을 역설했다.
성당 내부에는 벽은 붉은색 벽돌로 짜여져 흰색 천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제대 왼편 벽에는 말씀살이 캠페인이라 하여 불조심을 패러디한 구호와 본당의 미션현수막이 늘여뜨려 있고 오른편에는 순교복자 부자의 사진이 걸렸는데 그 아래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되어 있다.
성당을 나와 성당 바로 위 언덕에 있는 석조 구성당으로 향했다.
구성당(국가등록문화재 271호)
1955년에 군부대의 도움을 받아 지은 석조 성당이다. 다듬지 않은 화강암을 2열로 쌓아 건축되었는데 벽체의 두께가 60~65㎝에 이른다. 외벽 좌우로 부축벽(버트레스)을 각각 10개씩 두어 벽체를 받치도록 했다. 부축벽은 바닥에서 측면 창호 높이까지 높이가 긴 삼각형 모양으로 쌓았는데, 성당을 안전하고 견고하게 보이도록 하는 의장 효과까지 겸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990년 사업에 실패한 전직 경찰 출신 한 교우가 성당 안 제의실에서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다가 불을 내어 마룻바닥, 지붕, 제대, 성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지었기에 벽체만은 남았다. 성당을 다시 지으면서도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현재도 헐지 않고 유지하고 있다.
구성당 내부에 들어가니 목재 천장을 보완하였지만 철제 십자고상과 석제 제대와 성모상, 그리고 석조 벽과 바닥은 옛날 그대로였는데 참으로 황량했다. 한 구석에는 화재 당시 타다 남은 목제들이 세워져 있어 처참했던 당시를 말해준다. 한 사람의 작은 실구가 이렇게 큰 결과를 초래함을 우리는 이 현장 통해 깨달아야 한다.
그래도 내부 한 곳에는 홍씨 부자의 가계도와 순교자의 신앙을 소개하는 패널이 전시되어 있다.
실수를 범한 당시의 교우는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하다. 한때는 포천지역의 신앙의 중심이요 횃불이었던 성당이 이런 형해로 남은 것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나마 역사적 자취를 보존하려는 뜻은 고귀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이어져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좋게 말해서는 보존이지만 반대로 보면 방치에 불과한 것이다. 문화재 보존이란 어떤 형태로든 활용을 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다. 좀 불편하더라도 안전 점검을 하여 피정 등 기타 시설로 활용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
12시가 다가오는 시간, 이제 다음 성지인 광암 이벽 진묘터를 가야하는데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광암 이벽 진묘터 - 한국 천주교 창설 주역 광암 이벽의 첫 묘소 |
묘소 :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산 289-1
생가터 :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동로 477번길 39-11 (화현리 543-1)
광암 이벽은 누구인가?
이벽(李檗)은 경주 이(李)씨 부만(溥萬)의 둘째 아들로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광암(曠菴)이다. 건장한 신체에 무술에도 능했으며, 경서(經書)에 정통하고 언변이 물 흐르듯 했다고 한다. 아버지 부만은 이벽이 무관으로 출세하길 바랐으나 그는 완강히 거부하여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벽(僻)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
1777년(정조 1년) 남인 학자 계열인 권철신, 정약전 등과 하늘, 세상, 인성(人性)에 대해 토론하였고 옛 성현들의 유교 경전과 함께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한역판(漢譯版) 철학, 수학, 종교서적 등을 공부하였다.
1779년 이벽은 권철신(암브로시오) 등이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천주학에 관해 논했고, 다른 학자들도 이벽의 논증에 동조하여 성리학적 분위기를 천주교 교리 탐구와 실천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783년 겨울 이승훈이 북경사절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훈에게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 서적을 구하고 영세도 받아서 돌아오도록 부탁하였다.
부탁대로 이승훈은 북경에서 그라몽(Grammont, 梁東材)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는데 1784년이었다. 이 해가 한국천주교의 원년이다. 귀국할 때 그는 천주실의, 기하원본과 같은 서학서적, 상본, 망원경 등을 가지고 오자 이것을 받아든 이벽은 천주교 교리연구와 묵상에 몰두하였다.
1784년 음력 9월경 드디어 한양 수표교에 있던 자기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복음의 전파에 나섰다.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김범우, 지황 등의 중인계급과 마현의 정약전 · 약용 형제,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 등의 양반계층에도 복음을 전파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부터 1년 후인 1785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집회를 하던 중 관원에게 적발이 되어 김범우가 형조에 끌려가 혹독한 형벌을 받고 귀양을 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였다. 비록 양반 신분이라 풀려나긴 했으나 이러한 소식을 들은 유림(儒林)은 천주교 교리가 국가의 지도이념인 성리학적 윤리체제를 송두리째 파괴한다고 생각하고 들고 일어났다. 이씨 문중에서도 이벽의 아버지에게 강력한 조치를 요구했다. 이벽의 아버지는 집안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아들에게 배교를 요구했지만 아들이 쉽게 말을 듣지 않자 자살 소동까지 벌어졌다.
이후 이벽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활동을 접고 집안에 갇혀서 울분과 가책으로 괴로워 하다가 1985년 3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벽의 말년에 대해서는 병사설(病死說)도 있고 아사설(餓死說)도 있다. 배교(背敎) 여부에 대한 이견도 상존한다. (달레 Dallet는 그의〈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배교로 단정하였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병사를 했든 아사를 했든 배교를 했든 안 했든 그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의 주역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를 한국 천주교의 성조(聖祖)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광암 이벽의 묘지 발견과 이장 내력
이벽의 묘와 그 후손들의 흔적을 찾아오던 변기영 몬시뇰(천진암 성지 개발자)는 백방으로 꾸준히 노력한 끝에 1979년 2월 15일 마침내 경기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산 289-1 번지 공동묘지 갓등산 낮은봉에서 이벽의 묘를 발견했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곳에서 이벽 성조의 부친 이부만 옹의 묘와 동생 이석의 묘도 함께 발견됐다.
그러나 이장이 불가피한 처지였으므로 이장 준비위원회를 꾸려 1979년 6월 21일 목요일에 주교님을 위시한 많은 신부, 수녀, 평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묘를 발굴했다. 박희봉, 변기영 신부 지휘로 진행된 발굴현장에는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 춘천교구장 박토마스 주교와 교회사가 오기선 신부 유홍렬 박사 이원호 교수 등 교회 내 관련인사들과 이벽 선생의 7대 직계후손인 이상국 이상철씨 8대 장손 이완영씨 등이 함께 참석, 한국교회의 밑거름이었던 이벽 선생의 유해가 2세기만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 깊은 순간을 지켜보았다.
이장 전문가인 박동진씨에 의해 이벽 선생의 유해가 드디어 드러나자 참관했던 모든 신자들은 마음과 마음을 모아 감사의 기도를 바쳤고 발굴되는 동안 혜화동성당 어머니성가대는 이벽 선생이 지은 천주공경가에 곡을 붙인 성가를 계속 불러 발굴의 의의를 더욱 깊게 했다
발굴 결과 무덤 주체부에서 “通德郞 慶州 李檗之墓”라는 지석(誌石)과 "恭人 安東權氏之墓"와 "恭人해州鄭氏之墓"라는 두 부인들의 지석이 좌우편에서 나오고 그들의 유해가 완연하게 나왔다.
이벽 선생의 유해는 이날 오후 5시 포천 발굴현장을 출발, 혜화동 성당내에 안치됐다. 혜화동 성당내에 안치돼 있는 동안 이벽 선생의 유해는 가톨릭의대 해부학과장 권흥 교수에 의해 면밀히 검사를 받았는데 2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에도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키는 약 1백 78㎝로 추정돼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기록에 나타난 대로 8척 장신에 건장한 체구였음을 입증해주었다.
다음날 혜화동 성당에서 이벽 성조의 유해를 새 관에 입관하면서 머리 상투와 치아 23개, 우측 두골 등을 취해 냈으며, 그 유해들은 묘지석과 함께 새로 건립될 천진암 기념관에 모시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 이벽 성조의 유해는 주교좌 명동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다음 날 즉 24일, 주일이며 동시에 이벽 성조의 영세 본명 축일을 맞아 낮 12시에 그곳 명동 성당에서 한국인 최초의 주교 노기남 대주교와 역시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의 공동 집전으로 이장 미사를 성대히 거행됐다.
전날부터 줄곧 내린 빗속에서 강행된 이날 이벽 선생의 묘 이장 미사에는 이벽 선생의 후손을 비롯 교회사 관계자들과 수많은 신자들이 참석, 어려운 시기에 한국교회를이땅에 심고 가꾸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봉헌했던 이벽 선생의 깊은 신앙을 마음깊이 되새겼다.
이날 미사를 주례한 김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이벽 선생의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그분은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진리를 통해서만 이 겨레가 구원될 수 있다고 믿었음을 강조, 이 시대의 우리 모두에게는 그 믿음과 신앙이 절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장 미사에 이어 이벽 선생의 유해는 명동대성당을 떠나 천호대교 → 신장본당 → 천진암으로 이어지는 약 1백리 길을 달려 천진암에 도착했다.
천진암 묘역의 한가운데 자리한 이벽 선생의 새 묘지는 시멘트ㆍ철근 콘크리트 속에조선 강희로 다시 구축한 이중 묘지로 설계돼 보존에 만전을 기했다.특히 이벽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새 묘지에는 동으로 만든 진공상태의 상자 속에 묘 발굴당시의 관과 유골 상태, 크기 및 지석 등에 대한 보고서와 이장에 관한 일체자료, 또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모든 역사서, 이벽 선생에 관한 각종 보도자료(가톨릭시보 포함) 등을 함께 묻어 후대에 역사의 자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유해는 미사가 끝난 후 즉시 출발해 15일 전부터 구축된 천진암 새 묘지에 1979년 6월 24일 오후 3시 30분에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하관 예절을 마쳤다.
[가톨릭신문, 1979년 7월 1일에서 발췌]
광암 이벽의 진묘터
택시를 보내고 입간판을 따라 이벽 세례자 요한의 묘를 찾아 산을 올랐다. 공동묘지라서 인근 산에는 많은 일반인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한참을 오르니 이벽의 묘가 나타난다. 커다란 묘비 뒤에 나지막한 묘가 있고 그 뒤에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의외에 십자가 위에 고목 둥치가 있고 그 위에 조그만 성모상이 있다.
묘비에는 韓國天主敎 創立主役 若翰 曠菴 李檗之墓 遺址라고 적혀 있다. 내용 중 若翰은 세례자 요한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若望이라고 쓴다. 묘비 뒷면은 그의 약전을 소개하고 있다.
분묘 옆에 혜화동 본당에서 세운 조그만 진묘터 조성비(造成碑)가 서 있다. 발굴 당시 혜화동 본당에서 많이 지원했고 처음으로 유해를 옮긴 곳이기도 하다.
광암 이벽 유적지
이벽 진묘터에서 약 300-400m 내려오면 2023년 5월에 개관한 광암 이벽 유적지가 있다. 안내도에 의하면 재현관, 기념관, 아레나 광장, 십자가의 길이 있다. 여기에다 기념성당도 동시에 봉헌했다.
아레나 광장은 야외 집회나 공연을 하는 곳이며 기념관은 광암 이벽과 관련된 전시장이다. 그리고 재현관은 생가를 재현한 건물이다.
기념관 앞에는 철판에 구멍을 뚫어 시 구절을 새긴 독특한 육면체 조형물이 3개가 놓여 있다. 이성우 작가가 만든 것으로 안내되어 있다
거경궁리(居敬窮理)요 격물치지(格物致知)라
마음을 바로잡고 사물을 탐구하여
그 이치를 파고들매 결국 앎에 이르렀으니
진리 앞에 스스로 그리한 이 있어
깨어 있던 자 광암 이벽이라
깨달은 자 기쁨에 넘쳐
요동치는 선상에 서서
천지조화의 시작과 삶과 죽음의 이치를 전하니
그 언변이 강물의 흐름보다 유려하여
배보다 빨리 닿은 곳이 사람의 마음이러라
문무의 재덕을 겸양한
경주이씨 명문의 자제여
가진 모든 것에도 영달은 멀리하고
양명에 연연하지 않으니
정약용이 이르길
‘신선나라에 학이 내려와
그 풍채를 보이셨다‘ 하였다.
넓고 넓은 영화의 길을 버리고
흐르는 무장이 피로 지킨 것 하나
먹고 마심을 비워
목숨으로 진리를 지켰으매
험난한 순교의 길은 묵연하여 고결하였다.
‘
이르고자 하는 곳이 앎이었으나
앎 너머 구원에까지 이르러
사마리아 땅 끝의 증인이 되었으니
오늘 수백만의 신자의 밀알이 된 자
푸른 두건을 쓴 이 땅의 아브라함이여.(조각가 이성우)
기념관 - 광암 이벽 관련 전시실
▲광암 이벽 - 포천에서 내어나 포천에서 순교하고 포천에 잠든 한국교회의 설립자
▲마음을 움직이다
천명의 도를 자신에게 찾고 그것이 聖道 로 마음의 중심을 잡았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자 비망록에서 “이 벽은 키가 8척이요, 한손으로 무쇠 백근 을 들 수 있었으며,풍채가 당당하고 마음 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특 히 언변은 기세좋게 흐르는 강물과 같 다”고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다
1779년 천진암에서 권철신을 중심으로 정약전 등과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책을 연구하였다. 1784년 수표교 집에서 이승 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복음 전파에 주 력하였다.
▲세상을 바꾸는 내 안의 바람
이벽은 1754년 경기도 포천 화현면 화 현리에서 탄생하여 경기도 광주 배알머 리에서 수학을 하였으며, 1883년 29세 때 만천 이승훈을 북경에서 셰례를 받아 올 것을 권유하였고 이듬해 자신도 신자 가 되어 선교하다가 32세로 죽었다.고향 선선에 있는 유해를 발굴하여 천진암으 로 이장하였다.
▲천주교의 길이 되다
교회사적으로 이벽은 천주교회 창설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는다. 물론 이벽 이 전에서 천주교를 학문으로 연구한 사람 은 있으나 신앙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벽이 처음이었다.
재현관 - 광암 이벽의 복원 생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던 광암 이벽의 생가를 재현한 것이다. 생가는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541-22(구 내촌면 신기동)에 위치하고 있다. 1750년 당시에는 내촌면을 ‘안마을’, 신기동을 ‘새터’임을 후손과 관리인의 증언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기념성당
‘광암 이벽 기념성당’은 2023년 5월 20일 포천시가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1754~1785)의 생가 터이면서 순교지인 화현리에 ‘광암 이벽 유적지’를 조성하면서 춘천교구와 협력해 건축했다.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전실인 독특한 공간을 설정하여 기념 성당의 의미를 살렸는데 그 공간에는 지붕이 없고 사방 현무암으로 벽만 쌓았고 그 가운데 자갈을 깔았다. 지붕이 없는 것은 늘 하느님이 계시는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바닥의 자갈은 박해시 고난의 여정의 길을 나타낸 것이며, 현무암은 다른 암석들과 달리 물을 머금으나 물이 세지 않는 돌인데 이는 단단한 신앙의 열정을 의미한다.
성당 앞 한쪽에는 성모상이 있다.
새의 날개로 푸른 하늘을 오르시는 예수님상 아래 제대 좌우에는 파티마의 성모님과 성 요셉상이 배치되어 있다.
일단 춘천교구는 여기까지다. 이벽의 생가터도 찾고 싶었으나 잘 모르는 곳이고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어 바로 의정부 교구로 향한다. 식사도 거르며 오후 2시 10분 출발.
양주 순교성지- 경기의 큰 고을, 순교자를 배출한 치명지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233(양주 향교 앞)
경기도 양주시 부흥로1399번길 62
양주 지역의 천주교세
신유박해 이전에 형성된 경기 북부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나 박해가 진정되고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재건 속도가 빨라져 1830년대 초 고양(高陽) 지역에선 70-90명 규모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지역은 서울 인근이라는 지리적 배경 때문에 경기 동부나 남부에 비해 교세적인 측면은 약했지만, 새로운 교우촌 형성과 기존 교우촌 재건을 통해 신앙을 이어갔고 이리하여 초기 교회 때보다 더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그후 병인박해의 혹독한 시련을 거치면서도 1883년 이전에 경기 북부 지역에는 이미 양주의 고령(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가라비(현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연천 밤골 등에 공소가 있었으며, 1886년 한불조약 체결 이후 약현 본당과 송도 본당이 설립되면서 이 지역 신자 수가 크게 늘었다.
이후 1909년 고양 행주 본당과 1925년 양주 신암리 본당 설립 이후 경기 북부 지역의 공소 수는 이전에 비해 감소했지만 기존에 공소가 없었던 지역에까지 신앙이 전파되어 새로운 공소가 설정되었다. 1924년 448명에 불과하던 이 지역 신자 수가 1937년에는 1,700여 명으로 증가한 것이 이를 잘 방증해 준다.
양주 지역 순교 현황
양주 관아는 1866년 병인박해 때 경기 용인과 양주 본 지역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순교성지가 되었다. 치명일기(致命日記)는 바로 이곳에서 김윤오 요한과 권 마르타 부부, 김 마리아, 박 서방,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이렇게 5명이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김윤오와 그의 아내 권 마르타는 용인 굴암에서 거주하다가 1866년 10월에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부부가 함께 치명했고, 김 마리아는 중국으로 가서 죽은 최 프란치스코의 아내였는데 용인 한덕골에서 거주하다가 1866년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치명했는데 나이는 42세였다.
양주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 서방은 홍주에서 치명한 박사행의 부친으로 양주 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는데 나이는 55세였다. 홍성원 아우구스티노는 광주(廣州)에서 치명한 46세의 홍 아우구스티노의 아우로 본디 양주 일담리가 세거지였는데 포천 고약리에서 가서 살더니 1868년 5월19일 양주 포교에게 잡혀 43세로 치명하였다. 홍성원의 부친 홍몽노 베드로는 포천 고약리에서 공소 회장을 하다가 한양에서, 형 홍성국 요한은 경기도 광주에서, 동생 홍성선은 공주에서 치명하였다.
그런데 이 다섯 순교자 가운데 양주와 관련된 신자는 박 서방과 양주 일담리 출신으로 포천 고약리에서 체포된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정도이며, 용인에서 잡힌 3명은 양주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순교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기에 양주에서 신자들이 처형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양주를 비롯한 경기 북부 지역의 신자 집단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이에 양주 쪽에서도 신자들을 체포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성지 조성
순교성지 조성은 대략 2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하나는 양주시에서 순교자를 문초하고 형벌을 내렸던 양주 관아 복원이고 다른 하나는 의정부 교구에서의 순교성지 선포와 성지 조성이다.
양주 관아는 1506년(중종 1년) 현재 위치에 설치되어 1922년 시둔면(현 의정부시 의정부 1동)으로 이전될 때까지 417년간 양주목(楊州牧)을 관할한 행정관청이었다. 1871년(고종 8년)에 부천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35개 군의 읍지를 합편한 6책의 필사본인 “경기읍지(京畿邑誌)” 등에 양주 관아에 동헌(東軒), 객사(客舍), 사창(司倉), 군사시설 등 약 31개의 관아 시설을 갖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큰 고을 첫 자를 따라 8도 이름을 정했는데(경상도, 전라도 등) 고려 이래로 조선 초에도 양광도(楊廣도)라고 한 것은 바로 楊洲와 廣州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그만큼 양주는 경지지역의 큰 고을이었다.
양주시는 1997년 양주목사의 집무처인 동헌(매학당)을 복원하고, 1999년 4월 23일 양주 관아지를 경기도 기념물 제167호로 등록했다. 2000년부터 2017년까지 5차례의 발굴조사를 진행해 관아의 부속 건물로 추정되는 다수의 건물지와 담장지, 각종 유물 등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동안의 발굴조사 결과를 반영해 동헌부 부속 건물 및 내아에 대한 복원작업에 들어가 2017년 동헌부 부속건물인 동행각, 서행각, 내삼문, 사령청, 외삼문, 중렴성문, 외렴성문과 양주목사의 관사였던 내아, 내아삼문에 대한 복원을 완료하고, 이듬해까지 주변 환경 정비를 시행했다.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 초대 위원장 최성우(세례자 요한)신부는 첫 번째 사업으로 교구 지역 내 성지 및 사적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섯 분이 순교한 양주관아와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에 의해 생겨난 공소들과 그 역사를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었다.
곧 2011년 당시 관할 구역 녹양동 성당 주임 이진원(바오로)신부가 지역 증언자를 통해 과거 순교터 표지석이 있었던 현재의 위치를 찾게 되었고 2013년도부터 부지 매입을 시작하여 양주 향교 앞의 순교터 3,766㎡를 매입하였다. 여러 해에 걸쳐서 현재의 토지까지 완료한 후 2016년 5월 28일에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하여 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집전으로 의정부 교구 내 첫 성지선포 현양 미사를 거행하였고 2017년 전담사제를 임명하고 순교 터 천막성당에서 매일미사를 봉헌하며 본격적으로 성역화와 순교자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2018년에 성지 내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고, 2020.12 18 성모동산 성모상 축복식, 2021. 6. 11 양주성지 순례자의 집 축복식을 했다. 1층은 순례자 경당이며 2층은 순례자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는 임시 조립식 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기념성당 건립 등을 추진하고 있다.
오후 3시가 다 되어 양주 성지에 도착하여 택시를 보냈다. 양주 성지 길 건너편에는 양주 향교가 소슬 외삼문의 위엄을 보이며 터줏대감처럼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거기 비하며 성지의 임시 성당은 초라하게 보인다.
임시 성전
임시 성전 앞에는 천막 공간을 마련하여 성전으로 통행하는 동시에 교우석 역할도 한다. 성전은 제단 없이 그냥 마룻바닥에 제대를 마련하였다. 제대 뒤 벽면에는 예수님 고상과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이 걸렸다.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신심은 17세기 초 오스트리아 출신 야콥 렘 신부(예수회)가, 결혼생활 위기에 처해있던 독일 귀족 부부를 위해 성모님께 기도한 데서 시작됐다.
렘 신부는 성모님께 “부부 사이에 묶인 모든 매듭을 풀고 둘 사이를 매끄럽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부부는 이혼을 피하고 가정의 평화를 되찾았다. 몇 년 후 이 부부의 손자가 감사의 뜻으로 렘 신부가 사목했던 아우크스부르크의 성 베드로 암 페를라흐성당에 요한 슈미트너가 그린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성화를 봉헌하면서 이에 대한 신심이 지역에 퍼지게 됐다.
손으로는 긴 매듭이 있는 줄을 들어 매듭을 풀고 있고, 발로는 뱀의 머리를 밟고 있다. 성화 맨 하단에는 토비야와 그의 아내가 될 사라에게 그를 인도하는 라파엘 대천사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토빗기 참조) 여기서 뱀은 사탄을 상징하며, 매듭은 우리가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는 어려움들을 의미한다. 물론 위의 성화는 원본 성화를 한복 입으신 성모님으로 패러디한 그림이다.
살다 보면 갖가지 어려움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도저히 풀 수 없을 것만 같은 문제들을 마주할 때도 있다. 이럴 때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보는 건 어떨까.
비가 오락가락 흩뿌려 퍽 을씨년스러운데 그래도 일군의 순례객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모습에 그나마 성지임을 드러내주고 있다.
옥외 시설
성전을 나와 옥외 시설을 둘러본다. 옥외 시설이라야 넓은 잔디 광장 둘레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고 광장 가운데는 옹기로 조성하여 십자고상을 모신 조그만 동산 모양 의 시설이 있다. 그리고 성전 쪽에 성모동산과 예수 성심상이 있고 반대쪽에는 순례자의 집과 순례자 경당이 있다. 이것이 전부다.
십자가의 길 - 녹쓴 철제물인데 사람과 십자가 형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순례자의 집 - 1층은 순례자 경당, 2층은 순례자 쉼터이다.
바로 옆이 양주 별산대놀이 공연장인데 마침 오늘이 공연하는 날이라 소리가 성지에서도 들린다. 양주 관아 가는 길에 잠시 관람하였다.
양주 별산대 놀이(중요무형문화재 2호) 공연장
경기도 양주시에 전승되는 탈놀음을 별산대라고 하며 서민의 애환과 풍자를 그대로 살린 마당놀이 공연으로 상설공연, 정기공연으로 전통 양주별산대놀이 마당을 시연하는 곳이다. 약 200여 년 전 양주사람 이을축이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들에게 배워 양주에 정착시킨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상좌마당, 옴중마당, 먹중마당 등 모두 8마당으로 짜이며 연희의 내용은 양반에 대한 풍자, 모욕, 서민 생활의 애환 등 당시의 현실폭로 및 특권계급에 대한 반항을 담고 있다. 하회 별신굿, 고성과 통영의 오광대 놀이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알려진 경기지역 대표적 탈놀이이다.
양주 관아 - (순례기 앞부분 성지 조성 참조)
양주성지 사업이 잘 이루어지게 되면 수도권임을 감안, 인근 향교 등 유교유적이나 회암사지 등 불교문화, 그리고 민속 문화와 연계하여 관광 사업이 활성화되리라고 본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벌써 오후 3시 40분. 택시를 불러 의정부 성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