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스승, 빈자의 아버지, 소 알로이시오 신부1964년 마리아수녀회 창립… 부산 판자촌에 고아들을 위한 ‘소년의 집' 세워부산, 서울, 필리핀, 멕시코… 전 세계에서 아이 키우는 150명 천상의 엄마들엄마 수녀도 “중2 청소년은 키우기 어려워… 마음의 큰 구멍 채워주려고 노력"
‘모든, 닿을 수 없는 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리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라고 김훈은 ‘바다의 기별'에서 썼다. 허나 닿을 수 없고, 품을 수 없고, 만져지지 않는 것과 불리지 않는 것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우리는 너무나 지쳐 있다.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뉴스는 온종일 숨 가쁘게 전한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고, 남자가 여자를 추행하고, 기계가 인간을 추방하고, 강자가 약자에게 수치를 주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지배한다고. 닿을 수 있고, 품을 수 있고, 만져지고, 불러지는 ‘사랑'은 씨가 말라 버렸다고. 인류의 보편적 미래는 차치하고, 당장 하루하루 인간의 개별적인 내일이, ‘어둠의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친다고 최면 당하던 즈음, 한 사람을 만났다.
◆ 27세의 젊은 신부, 고아들의 아버지 되다
소 알로이시오 신부. 그의 생애를 다큐멘터리로 만든 영화 ‘오 마이 파파(11월 10일 개봉)'를 통해서였다.
영화는 '부산 송도의 성자'로 불리는 미국 출신 소 알로이시오(한국명 소재건·1930~1992)신부의 삶과 업적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소 신부는 미국 메리놀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57년 6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해 겨울, 판잣집이 버섯처럼 핀 부산으로 왔고, 27세의 젊은 신부는 가난한 고아들의 아버지로 평생을 살았다.
그의 인생은 가난과 사랑으로 넘쳐났다. 소 신부는 가장 먼저 마리아수녀회를 만들고(1964년), 신문에 엄마가 되어줄 사람을 모집했다. 처음엔 한 가정에 수녀 한 사람이 5~7명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다. 1970년 부산 소년의 집을 세운 이후 1975년 서울 소년의 집, 그리고 이제는 필리핀, 멕시코, 브라질,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에도 소년 소녀의 집을 세웠다.
소 신부는 ‘가난한 아이 중에서도 더 가난한 아이'를 ‘1등 예수’라고 추켜세웠고, 그들을 최고로 대우해주었다. 모든 돈 걱정은 소 신부의 몫이었다. 그는 평생 한 벌의 수단(신부복)을 기워입고, 낡은 가죽 가방에 뒤축이 해진 신발을 신고, 비행기 이코노미 좌석만 고집하며 전 세계를 누볐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 기부 사업을 벌였지만, 정작 자신은 성당 옆 쥐가 나오는 판잣집에서 난로도 피우지 않고 살았다.
그는 항상 ‘조금만 더'를 외쳤다. ‘조금만 더 친절합시다, 조금만 더 참읍시다...' 1992년 루게릭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소 신부는 휠체어를 타고 가난한 곳의 아이들을 찾아가 바로 세웠다.
지옥에서 천국을 누렸다. 그 안에서 부자와 빈자가 화해했고, 불운과 행운이 악수했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치듯이, 매서운 추위가 닥친 어느 날, 나는 아주 구체적인 사랑을 찾아 나섰다. 닿을 수 있고, 품을 수 있고, 만져지고 불러지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실체를. 꿈나무마을은 은평구 응암동에서도 아주 깊숙이 물러난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1975년에 소 알로이시오 신부가 서울 시립 아동보호소를 위탁받아 세운 곳. 현재 만 18세 이하 청소년 620명이 자라고 있다. 소 신부 작고 후,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은 마리아 수녀회 소속 43명의 수녀다. 이곳의 책임자인 권글라라 수녀는 검은 카디건에 회색 수녀복을 입고 우리를 맞았다.
◆ 25세의 젊은 수녀, 고아들의 엄마가 되다
그녀는 1984년 ‘엄마 사도' 역할에 자원한 후, 32년간 ‘봉사 중'이다. 무채색 옷을 입고 있었지만, 평온한 미소가 햇살보다 눈부셨다.
-몇 살에 엄마가 되신 건가요?
“(손을 꼽아보며)25살에 엄마가 된 건가? 25살에 39명의 엄마가 된 거죠.”
-그때도 아이들이 예뻤나요?
“그쵸. 여러 사도직이 많은데, 그중에 엄마가 되어주고 싶어서 이 수녀회를 택해서 왔거든요. 평생 엄마로 살 줄 알았죠. 그런데 저는 엄마 소임 만큼 병원 소임 일을 많이 했어요. 도티 기념 병원이 바로 옆에 있는데, 가난한 환자들의 보호자 역할이랄까요. 똑같아요. 아이들에게도 엄마가 필요하지만 의지할 곳 없는 가난한 환자들도 엄마가 필요하거든요.”
-처음 소 신부님 만나 뵈었을 때, 뭘 물으시던가요?
“왜 이 아이들의 엄마가 되려고 하나. 가난한 아이들을 정말 사랑해서 왔는지 확인하셨던 것 같아요. 그분을 만난 게 제 삶의 가장 큰 은총이에요.”
소 신부는 수녀들에게 아이들 곁에 있으라고 자주 강조했다고 한다. “같이 있어 주세요. 기도할 때도 아이가 부르면 멈추고 아이에게 가세요.”
-갓난아기부터 있습니까?
“네. 재작년부터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들을 받고 있어요. 예전엔 여기 1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살았어요. 그런데 한 시설에 너무 많은 아이가 있는 것도 나라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일이라 인원을 좀 조절하려고 했는데, 잘 안돼요. 못 먹고 배고픈 아이들에게 따뜻하게 의식주 해결해주고 공부시켜줄 수 있는 곳이 잘 없어요. 저희가 안 받으면 다른 작은 시설로 분산이 되죠. 그런데 2년 전부터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들이 갈 곳이 없대요. 영아들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또 예쁘게 만들어서 받고 있어요.”
-큰 아이들은, 학교는 어디로 가나요?
“처음에는 초등학교가 이 안에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커서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초등학교는 2년 전에 폐교했어요. 지금은 베이비박스 아이들을 뺀 중고등학교 아이들 580명이 모두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 아이들의 마음에 생긴 구멍,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말로 채워주려
-아침에 등교할 때면 그 풍경이 장관이겠습니다.
“맞아요(웃음). 580명이 아이들이 엄마 수녀에게 인사하고, 다 책가방 들고 70개 학교로 분산해서 가거든요.”
-재작년 KBS 다큐멘터리로 방영됐던 ‘천상의 엄마'를 보면, 엄마 수녀님들이 어린아이들 옷도 만들고, 교복도 다 손빨래하시더라고요. 그래야 사랑이 샘솟는다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끌어 가십니까?
“시설마다 시설장 수녀님이 있어요. 마리아 수녀회 서울 분원장이 지금 저인 거고, 각 꿈터 마다 따로 시설장 수녀님이 있죠. 연두꿈터가 아기들이 있는 집이고 파란꿈터는 여학생, 초록꿈터는 남학생. 이렇게 이 안에 시설이 3개가 있어요. 그리고 무료 자선 병원인 도티 기념 병원이 있습니다. 구립 어린이집도 저희가 하고 있어요. 구립 어린이집은 처음엔 이 안에 있는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이 동네 아이들이 와요(웃음).”
-수녀님들만으로는 돌보는 인력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600명이 넘는 아이들이니… 예전에는 수녀님들만 키웠었어요. 수녀님 한 분이 39명씩 맡아서 39명의 엄마가 돼서 살았었는데, 요즘 아이들 10명도 키우기 힘들잖아요(웃음). 옛날 아이들은 엄마 수녀님을 서로서로 도와준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지금은 수녀님 한 분과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함께해요. 그렇게 더 좋아졌는데도 옛날보다 더 힘들어요(웃음).”
-어떤 부분이 힘드세요?
“청소년들이요. 중2 무섭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중2 아이가 100명이 넘잖아요. 게다가 그 중2가 해마다 더 생기잖아요. 보통 이 시기만 잘 넘기면 괜찮아지겠지, 기다려주면 그 아이는 좋아져요.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면 좋아지는데, 우리는 끊임 없이 중2가 생기잖아요(웃음). 그래서 지금 수녀님들이 아주 힘들게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요.”
-세상에 많은 슬픔이 있지만, 어머니 아버지를 모르고 자라는 슬픔에 비할까요. 아이들의 인생에 어쩔 수 없이 채울 수 없는 빈 구멍이 있을 듯합니다.
“그렇죠. 수녀님들이 아이들을 키우기 힘들다는 것이 아마 그것 때문일 거예요.”
-그 슬픔을 어떻게 어루만지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 그런 생각을 심어주려고 하죠. 그런데 말을 하기 전에 아이들은 이미 마음으로 부모가 없다는 걸 알아요. 우리는 다르구나. 엄마 아빠에 대해서는 고등학생이 되거나 졸업할 때 물어보기도 하는데, 그때는 정말 솔직하게 말을 하죠.”
-부산 소년의 집의 경우는 어떤가요?
“부산은 서울보다 조금 작지만 비슷해요. 거기도 여러 시설이 있지만, 미혼모의 집도 있어서 아이들이 계속 태어나고 있어요. 만약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하면 또 모성의 집에서 돌봐요. 바로 사회에 나갈 수가 없으니 아파트를 마련해서, 수녀님이 아이를 봐주지요. 엄마가 직장 나가서 돈 벌고 자립할 때까지 1년 정도.”
◆ 가난한 자들이기에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 어떤 일보다 ‘엄마가 되겠다’는 소명은 크고 무거운 일입니다.
“그래서 더 절실하죠.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1957년도에 사제 서품받고 한국에 오셨잖아요. 그때 한국에 와서 실정을 보니 부모 없이 사는 아이들 되게 많았던 거죠. 그래서 신부님은 그 아이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게 엄마라고 생각했어요. 마리아수녀회 수녀들은 그냥 ‘엄마가 되겠다’는 소명으로 사는, ‘엄마 사도직’이에요(웃음).”
성경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으나, 실체적 가난은 참으로 아프고 쓰리다. 소 신부는 그 자신, ‘가난한 신부로 살기로' 결심했지만, 가난한 자들은 반대로 최상의 봉사를 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이곳 꿈나무마을을 둘러보면서 놀란 것은, 실제로 시설이 매우 좋다는 것이다. 유아들은 입성이 깨끗하고 밝았다. 의복은 따로 구매하며, 기부를 받아도 상태가 좋은 것만 골라 입힌다고 했다. “고아라고 낡은 옷 입히면 더 안 돼요"라고 동행한 사회 복지사는 설명했다.
청소년 아이들의 기숙사는 아파트 형태로 지어졌으며, 한 건물에는 목욕 치료, 놀이 치료, 음악 치료 등을 할 수 있는 심리 치료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마당에는 수영장과 농구장, 축구장까지 갖춰져 있다. “우리 아이들이 일반 가정 아이들에게 “우리 집에 놀러 올래? 우리 집에 수영장도 있다.” 하면서 데려올 때도 있어요. 그때 참 뿌듯해요." 글라라 수녀의 목소리엔 부모로서의 자긍심이 깊게 배어있었다.
-가난한 아이 중 가장 가난한 아이들에게 최상의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 전복적인 사고입니다. 보통은 최소의 케어만 해도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네. 다른 곳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하찮은 대우를 받잖아요. 돈이 없다는 이유로. 그런데 저희 마음 안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요. 신부님은 도티 기념 병원을 지으셨을 때도 그러셨어요. 이 사람들은 다른 병원에 가면 가장 낮은 대우를 받기 때문에 이곳에서만큼은 최고의 대우를 해주라고. 최고로 좋은 의사, 최고로 좋은 약, 최고로 좋은 장비로 그들을 치료해주라고. 전부 무료로 치료해 주라고.”
“벌써 돌아가신 지 24년이 됐어요.”라고 글라라 수녀가 그리운 얼굴이 되었다. 생전에도 소 신부는 은행에 돈이 있으면 “그걸 쌓아두고 있지 말아라. 그 돈 가지고 더 가난한 다른 나라에 가라"고 했다. 지금도 마리아수녀회는 더 가난한 나라에 소년의 집, 소녀의 집을 세우고 있다. “3년 전에는 온두라스에까지 가서 학교를 세웠어요.”
-그 사업을 지금 누가 진두지휘하세요?
“한국 수녀님들이죠. 한국 수녀님들이 가서 시작하고, 그 나라 수녀님들을 저희가 입회를 시켜서 교육을 하죠. 자국의 아이들을 그 나라의 엄마 수녀님들이 키울 수 있도록.
가령 필리핀은 가톨릭 국가라서 아이들을 버리진 않아요. 그래서 보통 한 가정에 아이들이 12~15명이에요. 낳기만 하고 아이들 교육을 못 하니, 저희 수녀님들이 한 집 한 집 방문해서 가장 공부를 할 만한 아이들을 뽑아요. 한 집에 한 명씩만 기회를 줘요. 그렇게 공부시키고 취업을 시켜서 보내면, 그 아이가 가서 또 제 동생과 부모님을 먹여 살리는 거죠.”
-마리아 수녀회에 소속된 수녀님이 몇 분인가요?
“지금 6개 나라 전체를 다 합쳐서는 380명 정도고요. 한국 수녀님들은 150명 정도 있어요.”
◆ 한국에서 키워낸 아이들만 1만 4천명, “고아 새끼? 소 신부님은 자랑스러운 내 아버지”
-150명 되는 분들이 이렇게 큰일을 하시는군요.
“네. 후원도 받고 마리아수녀회 재단법인이 있어서 기금으로 운영해요. 서울에 도티 기념 병원이 있는 것처럼 부산에도 알로이시오 기념 병원이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어요. 지금 현재 우리가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사람이 해외까지 다 합쳐서 2만 명이 넘어요. 서울 부산은 1천 2백 명 정도 될 것 같고요.”
-소 신부님의 생애를 다룬 ‘오 마이 파파' 영화가 개봉됩니다. 이곳 아이들도 그렇고 사회에 나간 졸업생들에게는 ‘아버지' 이야기일 텐데요.
“안 그래도 아버지 영화 나온다고 굉장히 좋아들 해요. 아버지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다고, 우리 아버지 이렇게 멋진 사람이라고. 우리가 키워낸 아이들이 한국에만 1만 4천 명이에요. 그 아이들이 우리나라 구석구석에서 굉장히 열심히 살고 있거든요.”
‘소년의 집' 1기 졸업생들은 지금 육십이 다 되었다. 소 신부는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면 혼자서 살아가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며, 졸업하기 전에 여러 기능사 자격증을 따도록 했다. 많은 졸업생이 사회에 뿌리내리고 가정을 이뤘으며, 개중엔 대기업 과장급 이상도 많다고 한다.
-“내 희망은 보통 가정의 아버지와 똑같습니다. 이 아이들이 건강하고 교육 잘 받고 사회 나가서 잘 취직하고 살길 바랍니다.”라는 소 신부님이 말씀이 무척 와 닿았어요. 훌륭한 아버지면서도 훌륭한 교육자셨던가 봅니다.
“네. 운동을 잘하는 아이는 운동으로, 악기를 잘 다루는 아이는 음악가로 키울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끌어주셨어요. 그래서 축구단도 있고 부산에는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도 있어요. 여자아이들 중에는 수녀가 된 분들도 있고.”
◆ 아기 낳으러 오고, 아파도 오고… 엄마 수녀의 역할은 여느 엄마와 같아
-한편으로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스스로는 가난을 선택했지만, 아이들에게 가난에 대한 자세를 가르쳐주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것처럼 아이들도 가난하게 살면 나가서 죄짓게 된다.” 또 너무 부유하게 살면 그것도 죄짓는 거잖아요. 아이들이 나가서 너무 잘 돼서 외제 자동차 끌고 와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중간 정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치라는 거죠. 너무 가난하게 살면 또 그 아이들을 도와서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는 게 중요할듯싶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했죠. 아이들이 나가 살면 자기 혼잔데, 건강해야 하잖아요. 몸도 마음도. 그래서 저희 정신도 기도, 운동, 공부 세 가지예요.”
소 신부는 마라톤광이었다. 그는 혼자도 달리고 아이들과도 달렸으며, 달리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필리핀 해안을 뛰다가 쓰레기더미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고는, 그곳에 첫 학교를 짓기도 했다. 소년의 집은 축구팀으로도 유명하다. 축구 대회에 나간 아이들은 “고아 새끼 나왔다”고 무시를 당하다가도 소 신부가 나타나면 기가 살아서 펄펄 뛰었다.
-아이들이 참 훌륭한 아버지, 훌륭한 어머니를 뒀네요.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항상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어요.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 항상 하나님이 옆에서 지켜준다는 것을 신앙으로 가르쳐요. 알로이시오 열매회라고 있어요. 우리 졸업생들이 1만 4천 명 정도 되는데 이 아이들을 계속해서 관리하는 곳이에요.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이 있으면 김장도 해서 보내주고 밑반찬도 해서 보내줘요. 홀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엄마잖아, 우리가.
밖에 나가더라도 이 아이들에게는 우리가 엄마예요. 아기 낳으러 오면 도티 기념 병원에서 아이도 받고 산후조리도 해서 집에 보내요. 아프면 또 오고 결혼하면 가서 봐주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오면 여기가 집이니까 다들 자식들 데리고 세배하러 와요. 그러면 수녀님들이 다 모여서 수백 명 아이들 떡국 끓여서 먹이고.(웃음) 재밌는 일이 참 많아요.”
-부모의 역할이 끝나지 않습니다.
“항상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여기 어머니 아버지가 있으니까 오라고 해요(웃음).”
-신부님이 그리울 때는 언제인가요?
“살다 보면 “아 정말 이건 우리 힘으로는 잘 안 되는데…” 그럴 때가 많죠. 남학생들이 밖에서 사고치고 그럴 때요. 그럴 때 신부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자꾸 생각하게 돼요.”
-우리 사회가 예전보다는 풍요로워졌지만, 더 거칠게 적자생존, 각자도생의 막다른 길로 내몰리고 있어요.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시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많으실 듯합니다.
“안타깝죠. 그러다 보니까 주변을 돌아다 볼 여유가 하나도 없어 보여요.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그분들이 더 행복해하세요. 우리 집에 오셔서 20년, 30년씩 자원봉사를 하는 분들께 고맙다고 하면, “수녀님. 아이들에게 봉사할 때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래요. 체험하지 않으면 모르죠.”
앞만 보고 달려가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좀 가져준다면, 그러면 구태여 수녀들이 이런 큰 시설을 운영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 세상이 빨리 오면 좋겠다고, 글라라 수녀가 포근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엄마잖아, 우리가." 라는 말이 돌아오는 길, 내내 메아리쳤다.
출처 ; 조선비즈
첫댓글 11.10 오마이파파개봉
1957,6 사제서품
1964 마리아수녀회창립
1930~1992 신부님생애
5~7명 초기 한가정인원
1970 부산소년의집오픈
1975 서울소년의집오픈
6 개국 소년의집 운영중
1벌 평생 신부복
1992년 루게릭병으로 소천
620명 서울가족인원
43명 서울 수녀님인원수
580명 서울근교진학
39명 수녀님 담당자녀수
70개 학교 아침등교
중2 키우기 어려워(!)
100명 중2 인원수
1년 미혼모 자립기간
24년 신부님선종 기간
12~15명 필리핀가족수
380명 전체 수녀님수
150명 한국 수녀님수
14000명 한국양성자식
20000명 6개국양성중
1200명 서울,부산 인원
60 소년의집1기 나이
20년,30년의 봉사
심도있는 기사안에 숫자로 알아보는 나와 있는 상식!!
기사에도 있고 서울 집의 공원 비석에도 새겨진 신부님의 아름답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명언입니다.
""나의 아이들아!! 너희들은 진흙탕에서 노는 작은 오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창공을 높이 나는 독수리처럼,하느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태어났다""
참으로 진솔하게 구석구석 빠짐없이 엣날과 지금을 오가며 말씀하신
글라라 수녀님과의 인태뷰 기사내용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달릴길을 끝까지 달리신"
기적같은 신부님의 업적에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