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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예안파의 형성과 25현, 오천7군자의 전통
2017.01.19.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영남유학연구회 강의자료
金圭善(전 대구교육대학교 교수)
1. 광산김씨(光山金氏)의 득성(得姓) 연원(淵源)과 시조(始祖)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新羅)의 국말(國末)에 장차 나라에 난리가 있을 줄 예지(預知)하여 경주를 떠나 당시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지금의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으로 옮겨 자연을 벗 삼으면서 자손 번영의 터전으로 복거(卜居)하였는데, 그 곳 지명이 후에 광주(光州), 광산(光山)이 됨으로써 후손들이 연고삼아 관향을 광산김씨라 하였다.
광김(光金)의 정유대동보(丁酉大同譜, 1957) 기타에서 김흥광이 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의 제3자 하였는데, 또 사찬(私撰)의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 등에서는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의 제3자라 하여 그 확실한 내력은 알 수가 없다. 헌강왕의 경우 역사 기록에 오직 독자(獨子)가 있어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이 된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신라 경순왕(敬順王)을 경모하기 위하여 지은 숭혜전(崇惠殿) 소찬(所撰) 신라 왕통(王統)의 기록인 숭혜전지(崇惠殿誌)에 따르면 시조공을 신무왕의 제3왕자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는 논의도 있었으나, 광김의 대동보 등에서 끝내 그 왕대를 밝히지 못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광김 출신을 일컬어 광산인(光山人), 광주인(光州人)을 아울러 썼기 때문에 광산김씨를 때로 광주김씨(光州金氏)라 한 경우도 흔했고 요새도 그러하다. 그러나 고려(高麗) 말엽의 기록인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 및 장영공(章榮公) 김진(金稹)의 보물 지정 고려 호구문서(戶口文書)를 보면 통혼(通婚)이 가능한 광주김씨가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러므로 이후로 관향을 광산김씨로만 일컫는 전통을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2. 시조 김흥광의 유허(遺墟) 광산현(光山縣) 평장동(平章洞)
광산현 평장동(平章洞)이 김흥광의 복거(卜居) 유허(遺墟)인 것을 처음 전(傳)하는 기록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33년(丁未, 1307), 원(元) 나라 대덕(大德) 11년에 황대전고(黃臺典誥) 김이(金珥)가 지은 광산현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라는 글인데, 그 주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原文],此縣乃新羅時刺史官也,玆時,王子金興光,預知將有亂離,出作庶人,來于此地,卜西一洞而居焉.適一子軾其名,角干其職,今平章之秩也.…….後人以興光王子所居之地,多出平章故,洞號曰平章,傳之至今.僕今提按到此,如此其敍事者,非敢好事也,此縣雖吾之內鄕,接朝累世故,縣人未知本末,由是出此言也.請後來無誚,詩曰,文貞公是海東賢,獨步天場後世傳,承蔭此身提按到,平章一洞尙依然. 大德十一年(忠烈王 33年, 1307) 丁未六月日. 提按黃臺典誥 金珥 書.
그 글에는 그 곳 평장리가 신라 때 무주의 서일동이고 김흥광이 장차 난리를 예견하여 은거한 곳인데, 왕자공이 각간(角干) 김식(金軾)을 낳고, 김식은 김길(金吉)을 낳았는데,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이었고, 김길은 좌복야(左僕射) 김순(金順)을 낳았으며, 김순은 문정(文貞) 평장사(平章事) 김책(金策)을 낳았고, 김책은 평장사 김정준(金貞俊)을, 김정준은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안공(文安公) 김양감(金良鑑)을 낳았는데, 특히 문안공은 희녕(熙寧) 갑인년(1074) 송(宋)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문묘(文廟)의 제도를 처음 도입하여 돌아올 때 소동파(蘇東坡)가 시(詩)를 지어 전송하였다 하였고, 김양감이 평장사 충정공(忠貞公) 김의원(金義元)을 낳았는데, 김의원은 황대전고의 현조(玄祖, 五代祖)가 된다 하였다. 또 김흥광이 살던 곳으로부터 여러 대에 걸쳐 평장사가 다수 배출되었으므로 후세 사람이 동리 이름을 평장동이라 하였다고 기록한 것에 덧붙여 자신의 현조 충정공의 음덕으로 제안(提按)이 되어 고향에 돌아와 보니 평장동 한 고을이 옛날과 다름없더라는 글이었다.
지금 그 곳에는 시조의 제향(祭享)을 위한 평장사(平章祠)와 홍전문(紅箭門) 및 삼문(三門)과 유허비(遺墟碑), 선세(先世) 누대(累代)의 단소(壇所), 취사당(聚斯堂)·경모재(敬慕齋)·수존재(修存齋) 등 재각(齋閣), 평장사(平章祠) 역년(歷年)을 전하는 각종 사적비(事蹟碑) 등 묘정비(廟庭碑), 관리사와 장수각(藏守閣),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 등 시설이 큰 규모로 갖추어져 있다.
3. 광김 선세(先世) 개략(槪略)과 삼한갑족(三韓甲族)
세인(世人)은 연안이씨(延安李氏) 더불어 광김(光金)을 삼한갑족(三韓甲族) 중 대표격이라 말하여 소위 광김연리(光金延李)라 하였다. 자신의 문벌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흔히 삼한갑족(三韓甲族)임을 운위하면서 높은 벼슬에 있었던 조상의 수를 헤아리고 혹은 대과급제자의 수가 많음을 일컬어 금관자(金貫子), 옥관자(玉貫子)가 서 말(三斗)이니<금관자(金貫子)는 조선조에서 正三品 이상 고관들의 망건 줄에 꿰던 玉 혹은 金으로 만든 고리를 뜻하는데, 從一品 崇祿·崇政大夫 이상은 無刻 玉貫子, 從二品 正憲·資憲大夫는 彫刻 金貫子, 正二品 嘉義·嘉善大夫는 무각 金貫子, 正三品 通政大夫는 조각 옥관자를 달았음> 삼대 정승, 부자 영상(領相), 형제 정승이 났느니, 혹은 삼조(三朝)에 개국공신(開國功臣)을 내었느니 하는 등등을 자랑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삼한갑족은 결코 현관(顯官), 달관(達官)의 숫자만 가지고 따지지는 않았다. 과환자(科宦者)의 수는 정치적 혁명기의 처신이나 혹시는 집안에 왕비(王妃)가 나서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한 결과로 얻은 덤일 수도 있었다. 특히 상신(相臣)이나 대과급제자가 많은 씨족은 국성(國姓) 전주이씨(全州李氏)였는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관직에 오를 수 없는 학문 있는 왕손(王孫)들을 대접하는 방법으로 그 수가 많았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 외에도 왕비(王妃)가 여럿 나 세도한 집안이 또한 그러함을 알게 되는데, 그 때문에 왕비가 많이 난 집안을 이른바 '치마양반'이라 하여 문벌, 벌족의 등급을 낮추어 보는 것이 전통이었다.그래서 보통 삼한(三韓)갑족이라는 말은 신라, 고려, 조선 3조에 걸쳐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역사 전(全) 시대에 걸쳐 학문(學問) 및 관위(官位)에서 드러난 조상을 둔 집안이 아니면 결코 삼한의 갑족, 벌족(閥族)이라는 말을 쓸 수 없었다. 유림(儒林) 등에서 삼한갑족을 운위할 때에는 대개 고려 등 전조(前朝)의 인물 배출, 조선조에서의 문묘배향(文廟配享), 대제학(大提學) 문형(文衡)의 배출, 상신(相臣), 대과급재자(大科及第者), 청백리(淸白吏), 호당(湖堂), 남대(南臺)와 경연관(經筵官), 부조묘(不祧廟, 不遷位配享), 몽시(蒙諡)와 봉군(封君), 공신(功臣), 서원 배향 등을 종합적으로 따진 후에야 그런 이름을 부여하였다.
광김의 3세(三世) 김길(金佶)의 보첩상의 기록을 보면 “삼중대광사공(三重大匡司空)의 벼슬로 기위지책(奇偉之策)으로 고려 태조의 왕업을 도와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라 하였다. 그에서 보듯이 고려초부터 광김은 부경(赴京)의 잠영족(簪纓族)이었는데, 세칭 8대(八代)의 평장사(平章事)와 12평장사의 이름이 있었다.
주지하듯이 고려의 통치 기구는 3성(三省-門下, 中書, 尙書省) 육부(六部-吏戶禮兵刑工部)이던 당(唐) 나라 및 송(宋) 나라를 모방하였으되 독자성을 발휘하여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 이성(二省)과 육부의 체제였다. 당나라 때에는 의정(議政)과 조칙(詔勅)의 작성을 담당하는 중서성과 조칙의 심의와 황제(皇帝)의 견제를 담당하는 문하성이 나뉘었는데, 송대에 들어와 황제권의 강화와 더불어 중서성과 문하성이 합쳐져 이성육부가 된 전통을 따른 것이라 한다. 이 중 중서문하성은 일명 백규(白圭)라고도 일컬어진 기관으로서 국정의 전반을 관장하였다. 대개 2품 이상의 관료들이 배치된 재부(宰部)와 3품 이하 관료들로 구성되는 낭사(郎舍)로 이루어졌는데, 재부는 중서문하성의 주되는 기능인 의정 활동과 조칙의 심의를 담당하는 기능을 가졌었다. 이 재부에 소속되어 있는 다섯 명의 재상들을 오재(五宰)라 하였는데,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 참지정사(參知政事), 정당문학(政堂文學),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였다. 이하 3품 이하의 낭사는 어사대(御史臺)와 함께 대성(臺省)을 이루면서 왕명(王命)이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때 여기에 대해 간언하고 바로잡는 간쟁(諫爭)과 왕의 명령이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때 이를 다시 국왕에게 돌려보내는 봉박(封駁), 관리 임명 동의안인 서경(署經), 관리들의 감찰 등을 담당하였다.
이에서 보다시피 평장사(平章事)는 중서문하성의 수상직으로 조선조 3정승에 해당하는 종1품 문하시중의 바로 다음 정2품의 관직으로 문하시랑평장사, 중서시랑평장사, 문하평장사, 중서평장사 등이 나뉘었는데 정원이 각 1명이었다.
고려 초기에서 문안공 김양감(良鑑)이 동방 이학(理學)의 종사(宗師)로서 공맹(孔孟)의 사학(斯學)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하였을 뿐 아니라, 아래에서 보듯이 증직(贈職)을 포함한 정승 상신(相臣) 다수를 배출한 명문이었음을 고려사 등을 통하여 살필 수 있다.
그 가운데 시호를 받은 인물이 16인이었다. 이후 왕조(王朝)가 바뀌어 조선(朝鮮)이 건국되었을 때 전조(前朝)에의 절의(節義)를 지키고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든 이도 있으나 대부분의 현관(顯官), 달관(達官)의 후손들은 신조(新朝)에 출사(出仕)하여 선초(鮮初)부터 다수의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을 배출한 바를 보게 된다.
※광김의 고려조(高麗朝)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 1. 김승길(金承吉)…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판서(典理判書) 김광리(金光利)의 아들인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판서(典理判書) 김인우(金仁雨)의 아들로 호는 사은(沙隱)이며 함종현령(咸從縣令). 2. 김약시(金若時)…통의대부(通議大夫) 군기감사(軍器監事) 김영리(金永利)의 손(孫)으로 직제학(直提學).대사헌, 관찰사 김약채(金若采)의 아우.3. 김자진(金子進)…수첨의정승총부사(守僉議政丞摠部事) 충숙공(忠肅公) 김심(金深)의 5대손으로 호는 수산(首山)이었으며 금위사정(禁衛司正).
4. 광산김씨의 주요 분파(分派)
가. 광산김씨(光山金氏) 5대파(五大派)의 분파(分派)
13세기가 되는 고려 후기 고종(高宗, 23대, 재위 1213-1259)과 원종(元宗, 24대, 재위 1259-1274), 충렬왕(忠烈王, 25대, 재위 1274-1308) 때에 이르러 광산김씨는 삼별초(三別抄)의 난으로 제주(濟州)에서 순절(殉節)한 14세(世) 감찰어사(監察御使) 김수(金須)와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시랑(僉議侍郞)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한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의 두 계열이 현관(顯官)으로 크게 활약하는 처지였다. 동시대 인물로 김수의 아우 대장군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과 또 김수의 아들 판전리사(判典理司) 문정공(文貞公) 김태현(金台鉉)이 걸출하였다. 김수의 계열은 전라도와 개경(開京), 김련의 계열은 충청도와 개경을 각각 활약의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족보가 이루어지던 초기에 광산김씨는 이 김태현, 김주정, 김연 3사람을 각각 대파의 파조(派祖)로 설정하였는데, 고래(古來) 3대파(三大派)라 하여 ‘문정공파, 문숙공파, 양간공파’ 등으로 일컬었다. 그러다가 1939년 전남(全南)에서 이른바 장성대동보(長城大同譜)를 간행하였는데, 그 때 낭장동정(郎將同正) 김규(金珪)를 파조(派祖)로 하여 파보(派譜)를 따로 간행하던 일파(一派)가 새로이 대동보에 들게 되어, 당시 문의(門議)로 13세(世) 김대린(金大鱗)의 차자(次子) 곧 양간공의 아우로 차서(次序)케 하였으므로 이 때부터 광김은 4대파로 되었다. 또 1985년까지 대동보에 들지 아니한 또 한 파가 있었는데, 그 일가들은 시조공 후 17세(世)라 하고 관직이 사온직장(司醞直長)이었다는 김영(金英)의 후손으로 충북 지역에서 따로 파보를 간행해 오던 일파였다. 이 일파를 1985년 음 10월 1일에 대종회의 결의로 13세(世) 김대린의 제3자 곧 양간공의 둘째 아우로 대동보에 수납토록 함으로써 비로소 광김의 대파(大派)가 위 표로 보는 5대파(五大派)가 되었다.
나. 광김 양간공파(良簡公派)의 위상(位相)
2000년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전국의 광산김씨는 238,936가구 인구 837,008명이었는데, 2015년 통계청의 조사 결과는 926,316명으로 전국의 관성(貫姓) 가운데에서 김해김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경주김씨, 경주이씨, 경주최씨, 진주강씨에 이어 제8위이며 다음의 9위가 파평윤씨, 10위가 청주한씨인 것으로 일컬어진다.
대종중에 따르면 그 중 70% 이상이 상게(上揭) 5대파 중 양간공파이라 한다. 그리고 양간공파를 이루는 두 기둥 중 하나가 충청도 연산(連山)을 기반으로 하는 사계(沙溪) 선생 김장생(金長生)의 선후대를 포괄하는 판군기감사공파이고, 나머지 하나가 예안파가 그 중심인 밀직부사공파였다. 양간공은 1215년(고려 고종 3년)에 출생하여 충렬왕 18년(1291)에 서세(逝世)하였고,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시랑(僉議侍郞)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는데, 임진왜란에 소실된 그 화상(畵像)의 화상찬(畵像讚)이 전하며, 1261년(원종 3)에 발행한 준호구(准戶口)와 1301년(忠烈王 27)에 이루어진 손자 장영공 김진(金稹)의 호구단자(戶口單子)가 합본이 된 상태로 예안파 종택에 전한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적문서로 보물(제1018호)로 지정되었고, 양간공은 전북 고창군의 노산사(蘆山祠)에 배향되었다. 김련 이래 3대가 통혼권(通婚圈) 등으로 안동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 중 손자 김진은 외조부가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선생이고, 처외조는 상락공 김방경(金方慶)이며, 처부는 상락군의 사위가 된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 상호군(上護軍) 안동권씨 권윤명(權允明)이었다. 김연의 손자대 이하에서의 안동 복거는 실로 선대의 이와같은 통혼권(通婚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김연의 손자 김진에게는 김광리(金光利), 김영리(金英利), 김성리(金成利), 김안리(金安利), 김천리(金天利) 등 다섯 아들이 있어 각각 양간공파 아래의 중파를 형성하는데, 그 중 김광리, 김안리, 김천리 및 김천리의 장자 김희선(金希善)이 조선 태조를 도와 개국원종공신이었고, 그 중 의학자(醫學者)로도 유명한 김희선은 경상도 등 여러 도의 관찰사와 호조판서를 지냈다. 광김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가 충남 서천(舒川)에 설단(設壇) 봉사(奉祀)하는 김희선은 특히 권중화(權仲和),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등과 1398년-1399년(태조 7-정종1년) 2년에 걸쳐 30권으로 된 의학서(醫學書) 향약재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모두 338개의 한의(韓醫) 병증(病症)과 2,803개 처방(處方)을 내용으로 담았는데, 김희선이 관찰사를 지내던 1399년(정종1) 강원도에서 출간하였으며, 현재 남아 전하는 책은 권6 1책과 권4-5 1책이다. 그 중 권6은 인천 연수구 가천박물관(嘉泉博物館) 소장으로 보물 제1178호(1993.11.5.)로 지정되었고, 권 4-5는 충북 음성(陰城) 한독의약박물관(韓獨醫藥博物館) 소장으로 보물 제1235호(1996.1.19)로 지정되었다.
위 여럿 인물 중 김영리의 후손이 특히 뛰어났는데, 그 5대손이 좌의정 김국광(金國光)이요, 김국광의 5대손이 조선 예학의 태두로 문묘에 배향된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다. 사계의 후손에서 이른바 부자 문묘배향, 부자대제학, 형제대제학, 삼대대제학, 5정승과 한 분 왕후 및 수많은 달관, 현관을 배출한 문화(文華)를 자랑한 처지였다.
다. 광김 안동 복거 시조 김무(金務)와 예안오천 입향조 김효로(金孝盧)
세인(世人)은 예안파 광김을 편한 대로 안동 복거의 시조(落南始祖) 제용소감(濟用少監) 김무(金務)나 선성예안(宣城禮安)에 처음 입향(入鄕)한 바 증(贈) 이조참판으로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던 김효로(金孝盧), 기타 그 후손의 달관 현인으로 강원관찰사 운암(雲巖) 김연(金緣) 혹은 운암공의 장자인 문순공(文純公)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의 자손인 것으로 일컫는다..
그러나 그 기점, 연원이 되는 윗대는 위에서 보듯이 당연히 상게 양간공 김연과 그 아들 김사원(金士元), 김연의 손자 김진, 그리고 김진의 다섯 아들 중 끝째이며 조선 태조-태종조에 걸쳐 생존한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 김천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광김 5대파 가운데의 양간공파는 16세 김진(金稹)의 다섯 아들 김광리(金光利) 등에 의해 소위 6중파(中派)로 나뉘었는데, 그 중 예안파는 김천리(金天利) 연원의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를 달리 일컫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미 본 바대로 김천리는 아버지가 정당문학(政堂文學) 장영공(章榮公) 김진(金稹)이요, 조부가 찬성사(贊成事) 정경공(貞景公) 김사원(金士元)이며, 증조부가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시랑(僉議侍郞) 찬성사(贊成事)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이었다. 예안파 종택 전래 보물 지정 고려 호적인 양간공, 장영공 호적에서 김천리의 생년이 1333년(忠肅王 복위 2년)이고, 태종실록을 통하여 그 졸년이 1407년(태종 7년), 수(壽) 75년이었다. 고려 관직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조선 태조 4년(1404)에 71세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그 녹권이 보물 제1076호로 지정되어 현재 성균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김천리의 장자가 강원도 등 여러 도의 관찰사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대사헌(大司憲)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개국원종공신으로 시호(諡號) 원정(元靖)이었다. 정경(正卿)의 문신(文臣)으로 의술(醫術)에 조예가 깊어 보물로 지정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등 다수의 의서(醫書)를 간행하여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졸기(卒記) 등이 전한다. 생년이 미상이나 실록의 기록으로 1408년(태종 8)에 서세(逝世)하였으며, 호조판서를 역임하던 중이었으니 적어도 50대 중반 이상이었으리라 짐작해 보면 그의 생년은 김천리 20세 경인 1350년 대 중반일 것으로 판단된다.
김희선의 아우인 김무(金務)가 제용소감(濟用少監)을 지내고 안동으로 처음 이거하여 이른바 안동 복거 시조 또는 낙남시조(落南始祖)로 일컬어졌다. 형인 판서 김희선의 생몰년, 또 재주(財主)인 김무가 그의 4자2녀 6남매에게 가산을 상속 분금(分衿)한 분재기(分財記)의 작성이 논리적으로 적어도 작고한 후일 것으로 판단되는 1429년(세종 11)인 점, 그 분재기가 작성된 해에 이미 장자 김탄지(金坦之)가 고인(故人)이었던 점, 함께 안동으로 이거한 차남 김숭지(金崇之)의 부인 죽산박씨(竹山朴氏)의 사후(死後)인 점 등을 감안하면 김무의 생년은 대략 1358년(공민왕 7)이 되고, 분재기가 작성된 1429년 전해까지 생존하였다고 가정하면 졸년은 1428년(세종 10년)으로 71년을 생존한 것이 된다. 김숭지의 부인이 죽은 후에 안동 이거가 이루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김숭지의 연령을 적어도 50세 이상으로 잡아야 하므로 김무의 안동 복거는 대략 김무의 연령 60대가 되는 1418년(태종 18) 경일 것으로 짐작된다.
안동으로 이거 후 김무 이후 3대는 남선(南先)의 노림리(魯林里)에 이어 풍산(豐山)의 도양동(道陽洞)에 살았는데, 그 중 먼저 선성예안(宣城禮安) 지역으로 이거한 분이 김무의 제4자 김효지(金孝之)였다. 광해군 연간에 역정(櫟亭) 권시중(權是中)이라는 분이 지었다는 선성지(宣城誌)에 『오천리시거(烏川里始居)』라 한 항목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오천리(烏川里) 시거(始居)
『고려시대 지인(知印) 황재(黃載)가 마을 입구 산남(山南) 벌판에 시거하였다. 김효지(金孝之)는 안동 풍산으로부터 들어와 지인 황재(黃載)의 사위가 되어서 이곳에 살았으나 아들이 없어 조카 김간(金澗)으로 후사를 이었으나 그 역시 아들이 없어 종손자인 생원 김효로(金孝盧)로 하여금 모시고 봉양하도록 하여 예안 고을 사람이 되었다.』
참고로 1480년(성종 11년) 김효지의 부인 평해황씨가 사촌손 김효로를 계후토록 예조에 소지를 올려 국가로부터 허락을 받은 예사(禮斜)가 후조당 종택 소장 오천고문서 중에 전한다. 또 그 일과 관련하여 이처럼 소목(昭穆)에 어긋나는 계후를 1484년(성종 15)에 국법으로 막아야 한다는 묘당(廟堂)의 논의가 더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이 기록하였다.
당초에 종조부 김효지의 시양(侍養)을 위한 계후(繼後)의 인연으로 김효로가 선성예안 오천 군자리의 입향조가 되었으나 훗날 김효로의 형 되는 김효원(金孝源)이 무후(無後)하게 됨으로써 결국 그 계후는 없던 일로 되었다.
성균생원(成均生員) 김효로가 그처럼 예안 오천에 입향한 후 그 후대에서 관찰사가 나고, 소위 25현과 오천7군자의 문화(文華)가 이루어졌는데, 훗날 그러한 후손의 권귀(權貴)로 이조참판(吏曹參判-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고, 사후 퇴계선생이 묘문(墓文)을 지었는데, 퇴계선생의 조부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繼陽)과 함께 예안 향사우(鄕祠宇)에 배향되었다.
국사학에서 혹 어떤 이는 위와 같은 광김 예안파의 성립이 왕조 개체(王朝改替)에 따라 실권(失權)한 결과의 낙남(落南)이라 하였으나 실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예안파는 결코 왕조 개체에 따른 세부득(勢不得)의 낙향이 아니라 장영공의 외가가 순흥안씨(順興安氏)이고, 처외가가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이며, 처가가 안동권씨였다. 그 통혼권(通婚圈)과 관련하여 당시의 재산상속(財産相續)이 출가녀(出嫁女)를 포함하여 자녀등급(子女等給)이던 예에 따라 모계(母系), 처계(妻系)로부터 분금(分衿)한 노비, 전답 등 정경공 김사원, 장영공 김진의 재산이 안동 지역에 충분히 분포될 수가 있었을 터이며, 제용소감(濟用少監) 김무(金務)의 처가가 또한 안동김씨이고 딸은 의성김씨(義城金氏) 김영명(金永命)에게 출가하였는데, 이분은 학봉(鶴峯) 선생의 5대조가 된다. 그러므로 처변(妻邊)으로부터 분금한 재산도 있었을 터이라, 그러한 유산(遺産)의 관리를 겸하여 소감(少監)의 대(代)에서 4자 2녀 중 이미 독립해서 성가(成家)하여 충남 서천에 자리잡은 장자 탄지(坦地)를 제외한 휘 숭지(崇之), 정지(貞之), 효지(孝之) 및 의성인(義城人) 김영명처(金永命妻), 예천거(醴泉居) 청주인(淸州人) 정보문처(鄭普文妻) 등이 아버지와 함께 안동 남선(南先) 노림(魯林)에 이어 풍산(豊山)으로 이거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김무 이래 4대의 묘소 대부분이 남선 노림리, 풍산 도양동이었거나 서후면 근역이었다가 현재는 모두 노림리로 이장되어 전한다.
라. 경북 지역 광김의 주요 갈래
경북 지역의 광김 집성촌으로 현재는 안동시 와룡면인 예안 오천 군자리를 필두로 그곳 가까운 와룡면 가구리, 녹전면 죽송리, 풍천면 구담리, 풍천면 신성리, 봉화읍 거촌리, 의성군 초전리(초밭), 선산읍 성곡리(솝실), 영천 화북면 자천리, 성주군 초전면, 군위읍 서부리 등 여러 마을이 있다.
광산김씨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위처럼 여러 계파로 분파되었는데, 안동 지방에 정착한 계파는 14세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 1215~1292)의 증손 때에 다시 분파한 김광리, 김영리, 김성리, 김안리, 김천리 다섯파 중에 둘째 김영리(판군기감사공파)와 다섯째 김천리(밀직부사공파)의 후손이다.
판군기감사 김영리의 손자로 대사헌, 관찰사를 지낸 김약채(金若采)의 아들에 김문(金問), 김한(金閑), 김열(金閱) 등이 있었는데, 장자인 김문은 세조조 좌의정이 된 김국광의 조부이니, 사계 선생에게는 7세조가 된다. 그 끝째 아우인 김열은 호를 퇴촌공(退村公)이라 하였는데, 그 증손들이 김여석(金礪石, 忠穆公), 김이석(金以石, 正廊), 김용석(金用石, 潭菴公)이었다.
그 중 담암공 김용석이 안동 풍산 구담의 입향조가 되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98년 무오사화 때 진취의 뜻을 접고 처향(妻鄕)인 구담촌(九潭村, 현 풍천면 구담리)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순천김씨(順天金氏)인 예조참의 김유온(金有溫)의 손서가 되어 구담촌에 정착한 담암 김용석은 여덟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김황(金篁)과 일곱째 아들 김호(金箎)가 구담에 정착하였고, 둘째 김균(金筠)과 셋째 김시(金竹+市)는 각각 봉화 거촌과 성주 초전으로 이거하였다. 넷째 아들 진사 김주(金籌)는 안처정(安處貞)의 사위가 되어 와룡면 가구리에 정착하였으며, 아들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1520~1588)는 퇴계(退溪) 선생의 문인으로서 후진 양성에 힘써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말라는 아버지 김용석의 유훈을 지켜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며 산림처사로 은거하였다. 김언기의 아들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1555~1637)과 김득의(金得礒), 현손 긍구당(肯構堂) 김세환(金世煥)은 세인의 추앙을 받은 학자들이다.
그리고 그 너머지 집성촌 광김은 다 김천리의 후손인데, 오천 군자리 및 녹전면 죽송리, 의성 초전, 선산 솝실, 영천 자천 등에 분포하는 광김 일족은 안동 복거 시조 김무, 예안 오천 입향조 김효로나 운암 김연, 탁청 김유, 후조당 김부필의 자손들인 셈이다.
그밖에 안동 풍산 신성리의 광김은 밀직부사 김천리의 후손이기는 하되 예안파는 아니다. 안동 복거 시조 김무의 아들들 가운데 유일하게 충남 서천에 자리잡은 맏아들 평시서령(平市署令) 김탄지(金坦之)의 후손 계열이다. 그리고 군위읍 서부리의 광김은 김천리의 끝째 아들 밀직대언(密直代言) 김예(金預) 및 비안현감을 지낸 김경갑(金敬甲)의 후손으로 역시 예안파는 아니나 밀직부사공파의 일가인 셈이다.
5. 광김 역대 주요 인물
광산김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이다. 지금도 시골 노인네들 사이에는 『광김』 특히 『사계(沙溪 金長生)』 자손이라면 <알아주는 집안>으로 꼽고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세도가 당당했다기보다는 대대로 석학, 거유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광김]은 조선조에 대제학 7명을 배출하였는데, 그들 모두가 사계 한 사람의 자손이다. 대제학 7명을 배출한 씨족은 광김 말고도 전주이씨(全州李氏)와 연안이씨(延安李氏)가 있으나, 한 사람의 자손에서만 7명이 나온 예는 오직 광김뿐(延安李氏의 『月沙』 자손은 6명)이다. 대제학이 7명이니, 그 중에서 삼대대제학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삼대대제학을 낸 집은 『월사(月沙집)(延安李氏)』, 『백강(白江)집(全州李氏密城君派』, 약봉(藥峯)집(達成徐氏, 大邱徐氏), 그리고 『사계(沙溪)집』의 네 집뿐이다. 『』
그뿐 아니라 사계 김장생과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다 같이 당대의 석유(碩儒)로서 조선 중기 이후 손꼽히는 석유들 중에는 이들의 제자가 많다. 그러기에 또 이들 부자(父子) 는 나란히 문묘(文廟)에 향사(享祀)되었다. 문묘배향은 일문(一門) 일대(一代)만이 아니라 대대손손 영광이요 자랑이었다. 더욱이 문묘에 배향된 18명의 유현(儒賢) 중 한 씨족에서 둘이 배향되기는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과 『광김』뿐인데, 부자가 배향된 것은 사계-신독재(沙溪·愼獨齋)가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한편 『광김』은 조선에서 총 265명의 문과(文科, 大科)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본관별로 전주이씨(全州李氏), 안동권씨(安東權氏), 파평윤씨(坡平尹氏), 남양홍씨(南陽洪氏), 안동김씨(安東金氏), 청주한씨(淸州韓氏)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그러나 남양홍씨(唐洪과 土洪), 안동김씨(新安東과 舊安東)의 경우는 각각 게보(系譜)를 달리한다고 보면 두 집을 합친 숫자이니 실질적으로는 서열 제5위가 되는 셈이다.
광산(光山, 光州) 김씨의 시조(始祖)는 김흥광(金興光)으로 이미 보았듯이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제위 875-886)의 셋째아들 등 여러 이설(異說)이 전한다. 『광산김씨세보(光山金氏世譜)』에 의하면 <預知宗國將亂,卜居于光西洞,仍爲貫,子孫多出平章故,洞號平章洞』(國亂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光西洞에 터전을 잡고 살면서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는데, 자손에서 平章事가 많이 나와 동네 이름을 평장동이라 했다)이라고 적혀 있다.(光西洞은 지금의 光州市 西一洞이며, 平章事는 高麗 시대의 관직으로 3정승에 해당하는 門下侍中 다음 正二品職이다.)』
어쨌든 그의 후손에서 조선에서만 상신(相臣) 5명, 대제학(大提學) 7명, 청백리(淸白吏) 4명, 왕비(王妃) 1명이 나왔는데, 여말∼선초(麗末∼鮮初)에 김약채(金若采)·약항(若恒)·약시(若時)의 3형제 대(代)에서부터 점점 번창하기 시작했다. 이들 3형제는 시조 김흥광의 15대손 김정(金鼎, 三重大匡)의 아들로서 다 같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에 들어와서 김약채는 대사헌(大司憲)·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김약항(若恒)은 태조 4(1395)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태조 5년 병자년에 중국 황제에게 올린 표문(表文), 전문(箋文)의 글자가 잘못되었다는 혐의로 중국으로 잡혀가 남방으로 귀양 가서는 거기에서 죽었다. 정종 2년(1400, 庚辰)에 찬성사(贊成事) 광산군(光山君)에 보국숭록(輔國崇祿)의 위계로 추중되었다. 다만 김약시(金若時, 忠定公)만은 이성계(李成桂)와 구교(舊交)가 깊었으면서도 고려가 망한 뒤 황주(黃州) 산골에 은거하며 새 왕조의 벼슬을 끝내 거부하여 『두문동 72현(杜門洞七二賢)』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광김』으로 첫 정승(政丞)이 된 서석(瑞石) 김국광(金國光, 睿宗朝 左議政)은 바로 그들 3형제 중 맏이인 김약채의 증손이다. 사계선생의 5대조(五代祖)이기도 한 김국광(金國光)은 세조(世祖) 13년(1467) 병조판서(兵曹判書)로서 이시애란(李施愛亂) 토평(討平)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오른 뒤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세조가 죽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처결하였다.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 최항(崔恒)·노사신(盧思愼)·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했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하면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서훈(敍勳)되었다. 이 김국광이 세조로부터는 너무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처지였으나 사후에 악시(惡諡)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시호가 정정(丁靖)인데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정(丁)이요, 공손하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정(靖)-述義不完丁, 恭己鮮言靖‘이라 하였다. 당시 세상에서는 심지어 ”좋게 꾸미어 말하지만 실상이 없는 것을 과(夸)라 하고, 난폭하고 교만하여 친한 이가 없는 것을 여(厲)-華言無實夸, 暴慢無親厲“라 한 시호도 있었다. 그러므로 아들인 광원군(光原君) 김극뉴(金克忸)가 수년에 걸쳐 개시(改諡)를 위해 묘당에 호소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바를 실록이 기록하였다. 광원군의 묘소는 전북 순창 마흘리(馬屹里)에 있는데, 조선 8명당 중 유수한 말명당 등으로 일컬어지면서 풍수가들이 많이 찾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아우 김경광(金謙光, 禮判·左參贊)도 좌리공신 3등에 오르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혔으며, 증손(曾孫) 김개(金鎧, 明宗朝 戶判)도 청백리에 뽑혔다. 중중(中宗) 때 영의정(領議政) 김극성(金克成, 忠貞公)은 서석(瑞石)과 20여 촌(寸)이 되는 먼 일가(一家)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文元公)은 좌의정 김국광의 5대손이요 대사헌(大司憲) 김계휘(金繼輝)의 아들이다. 김계휘는 명종(明宗) 때 문과에 장원(壯元)하여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는데, 선조(宣祖) 8년(1575) 동서(東·西)가 분당(分黨)하면서 서인(西人)쪽이 되고 선조의 당쟁완화책(黨爭緩和策)에 따라 한때 외직(外職)인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다시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사계는 귀봉(龜峰)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예학(禮學)을 전수(傳受)받고, 뒤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선조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임진왜란 때에는 호조정랑(戶曹正郎)으로서 명군(明軍)의 군량조달(軍糧調達)에 공을 세웠으며, 선조 35년에는 정백리에 뽑혔으나 광해군(光海君)이 들어서고 정치가 문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연산(連山, 忠南 論山郡)에 돌아가 학문에만 전념했다. 뒤에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후 다시 기용되어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다시 낙향했다.
그의 예학(禮學)은 아들 신독재(愼獨齋, 金集)에게 전승되어 조선 예학의 태두(泰斗)로서 에학파(禮學派)의 주류(主流)를 형성했으며, 문하(門下)에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등 석학을 배출, 서인(西人)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루어 동인(東人)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雙璧)을 이루었다<대체로 畿湖學派는 西人→老論, 嶺南學派는 東人→南人>. 사계는 비단 학문에만 깊었을 뿐 아니라 성품도 너그러워 『덕행군자(德行君子)』라 일컬어졌는데, 죽은 후(壽 84歲)에 성균관(成均館)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전국의 10여 서원(書院)에 제향되었다.
사계의 아들 신독재 김집(1574-1656, 文敬公)은 인조(仁祖) 때 벼슬에 나아가 지평(持平)·집의(執義) 등을 지내다가 김자점(金自點)에게 맞서 사퇴, 효종(孝宗)이 즉위하고 김자점이 숙청되자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다시 기용되어 대사헌(大司憲)·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냈다. 그는 사계의 예학을 계승하여 체계를 세웠고 아버지와 함께 문묘에 제향되었다. 김집의 아우 김반(金槃)은 송귀봉(宋龜蜂)의 문인으로 인조 때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는데, 그의 여섯 아들 익렬(益㤠, 南原府使)·익희(益熙,大提學,文貞公)·익겸(益兼, 丙子胡亂殉節)·익훈(益勳, 刑參)·익후(益喣)·익경(益炅, 大司憲)이 모두 뛰어나고 이들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광김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역사상 유명한 가인(歌人)인 남파(南坡) 김천택(金天澤)은 맏이 익렬의 증손자이다. 그가 편찬한 최초의 시가집(詩歌集) 『청구영언(靑丘永言)』은 국문학시상 귀중한 자료이며 그의 시조(時調) 57수(首)가 전한다.
둘째 익희(益熙, 號 滄州)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척화신(斥和臣)의 한 사람으로써 효종조(孝宗朝) 대제학(大提學)·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영조( 英祖) 때 벽파(僻派)의 한 사람으로서 시문(詩文)으로서 이름이 높았던 영의정(領議政) 김상복(金相福, 文獻公)은 그의 현손(玄孫)이요, 정조(正祖) 때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김희(金熹, 孝簡公)는 그의 5대손(五代孫)이다.
셋째 익겸(益兼,忠正公)은 유명한 서석(瑞石) 김만기(金萬基)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의 아버지이다. 그는 인조(仁祖)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때 강화성(江華城)으로 피난, 성을 사수(死守)하다가 마침내 청군(淸軍)에게 함락되어 김상용(金尙容, 淸陰 金尙憲의 형)을 따라 분신(焚身) 자결(自決)했다. 당시 나이 스물 셋, 이 때 서포 김만중은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 그의 두 아들 김만기, 김만중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이른바 『사계자손(沙溪子孫)』의 주축을 이루었다.
넷째 익훈(益勳, 忠憲公)과 막내(여섯째) 익경(益炅)은 정치적으로 순탄치 못했다. 익훈은 숙종(肅宗) 6년(1680) 이른바 『삼복(三福, 福昌君·福平君·福善君)의 변(變)』을 고변(告變),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일으켜 남인(南人)을 숙청하는 빌미를 만들고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그 다음해 다시 남인의 뿌리를 뽑으려고 책략을 꾸몄으나 도리어 소장파(小壯派)인 한태동(韓泰東)·조지겸(趙持謙) 등의 반발을 샀고, 결국 이 일로 말미암아 서인(西人)이 노장파(老壯派)인 노론(老論)과 소정파(少壯派)인 소론(少論)으로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당시 어영대장(御營大將)이던 그는 일단 귀양 갔다가 고문(拷問) 치사(致死)를 당하였다. 고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을 지낸 김상현(金尙鉉, 文獻公)은 그의 7대손이다..
한편 익경(益炅)은 송우암(宋尤庵)의 문인으로 현종(顯宗) 초기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있으면서 때마침 『2차예송(二次禮訟)』이 일어나자 송우암과 함께 대공설(大功說)로 남인의 기년설(朞年說)과 맞섰으나 남인측의 주장이 채택되자 귀양가 죽었다. 그의 후손에서 김상휴(金相休, 吏判)·김기만(金箕晩, 吏判)·김기은(金箕殷, 吏判) 등이 나왔다.
김익겸(金益兼)의 아들 김만기, 김만중 형제는 다같이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서석(瑞石) 김만기는 숙종비(肅宗妃)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이다. 숙종이 즉위하자 그는 국구(國舅)로서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병권(兵權)을 장악, 남인 세력과 맞섰고, 다시 김수항(金壽恒, 顯宗朝大提學·領議政,安東金氏)의 천거로 대제학이 되었으며, 『경신대출척』 때에는 훈련대장(訓鍊大將)으로서 공을 세워 김석주(金錫胄, 肅宗朝 右議政, 淸風金氏)와 함께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서훈(敍勳)되었다. 한편 서포 김만중(文孝公)은 김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나 현종 6년 문과에 장원급제, 숙종 초엽에 공조판서(工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가 두 차례나 귀양살이를 겪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는 것을 일생 동안 한(恨)으로 여겨 홀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했고, 독서를 즐기는 어머니를 위해 유배지인 남해(南海)에서 소설 『구운몽(九雲夢)』을 짓기도 했다.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도 그의 작품이다. 숙종 때의 학자로 경종(景宗) 초기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화를 입은 김용택(金龍澤, 老論四大臣의 一人인 李頤命의 사위)은 서포의 손자이다.
대제학 김만기의 아들 김진규(金鎭圭, 文淸公)가 숙종 때 예조판서에 대제학, 그의 아들 김양택(金陽澤, 文簡公)이 또 영조 때 대제학(뒤에 領議政)을 지내니 서포를 아울러 삼대대제학(三代大提學)에 형제대제학(兄弟大提學)이 났다. 대제학 김진규는 문장과 전서(篆書)·예서(隸書) 그리고 산수화(山水畵)와 인물화(人物畵) 등에 뛰어나 무소불능(無所不能)의 인물이었다. 숙종 12년 문과에 장원했고, 동(同) 15년 『기사환국』으로 거제도에 귀양 갔다가 5년 뒤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西人)이 몰려나자 다시 기용되었으며, 소론(少論)인 영의정 남구만( 南九萬)의 탄핵(彈劾)으로 한때 삭직(削職)된 일도 있었다.
그의 형 김진구(金鎭龜, 景獻公)도 『기사환국』으로 한때 귀양살이를 겪고 형조(刑曹)·공조(工曹)·호조판서(戶曹判書)를 거쳐 참찬(參贊)에 이르렀다. 김진구의 아들이 8형제로서 자손이 크게 번창했는데, 8형제 중에서도 특히 춘택(春澤)·보택(普澤)·운택(雲澤) 등이 두드려졌다. 김춘택(金春澤, 北軒)은 숙종 때 이름난 문인(文人)으로서 종조부(從祖父)인 서포 김만중이 지은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을 한문으로 번역했으며 시문집(詩文集) 10권을 남겼다. 고종(高宗) 때 이조판서에 대제학을 지낸 김영수(金永壽, 文獻公)는 그의 5대손이다. 아우 보택(普澤, 惕齋·肅宗朝 觀察使)은 노론(老論)의 선봉으로써 소론(少論)의 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 등을 논핵(論劾)했으며 문장·글씨·그림에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운택(雲澤, 參判)은 경종초(景宗初) 신임사화(辛壬士禍)에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과 함께 화(禍)를 입었는데, 이만성(李晩成)·홍계적(洪啟迪)과 더불어 <노론삼재신(老論三宰臣)>이라 일컬어졌다.
조선의 사색당쟁(四色黨爭)을 말할 때 신임사화(辛壬士禍)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사화야말로 당쟁(黨爭)이 낳은 정치적 사건 가운데에서도 가장 악명(惡名)이 높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당쟁은 이 신임사화에서 그 절정(絶頂)을 이루었던 느낌이다. 또한 신임사화를 말할 때 아계(丫溪) 김일경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사화의 주역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 김일경 또한 광산김씨 출신이다. 그의 파계(派系)를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서 찾아보면 사계 김장생의 증조대(曾祖代)에서 갈리었으니 사계파의 인물은 아니다. 그는 숙종 28년 문과에 장원하고 동(同) 33년 다시 중시(重試)에서 장원했다. 경종초(景宗初)에 노론(老論) 정권이 왕(王)의 병약(病弱)을 이유로 왕세제(王世弟, 延礽君, 뒤의 英祖)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하여 실시케 하자 소론(少論)으로서 당시 이조참판(吏曹參判)이었던 그는 소론의 영수 조태구(趙泰耈) 등과 함께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철회케 하는 데 성공하고, 뒤이어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 金昌集·李頤命·李健命·趙泰采)을 탄핵, 귀양 보냈다.
이에 조태구가 영의정이 되어 소론정권이 성립되면서 대사헌을 거쳐 형조참판에 이른 그는 노론의 대거 숙청에 앞장섰다. 경종 2년(1722) 그는 노론 숙청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노론파에 속한 목호룡(睦虎龍)을 매수하는 데 성공, 노론이 경종을 시해(弑害)하고 왕위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誣告)하게 했다. 경종은 즉시 목호룡이 지목한 혐의자 60여 명을 국문(鞫問)하니, 이들은 왕세제를 모함하기 위한 소론 및 남인들의 조작극임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써 노론사대신은 차례로 죽음을 당하고 2백 여 명이 화(禍)를 입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옥사(獄事)는 경종 1년 신축년에서 동(同 2년 임인년에 걸쳐 일어났기 때문에 신임사화라고 한다.
이 사화 뒤에 김일경은 우참찬(右參贊)에 승진했으나 경종이 불과 재위 4년만에 승하하고 영조(英祖)가 즉위(1724)하니 사태는 반전(反轉)되었다. 영조는 왕세제 시절부터 소론측의 배척을 당하였고 목호룡의 무고로 한 때 생명마저 위협을 받았던 터이라, 김일경과 목호룡은 즉각 체포되어 김일경은 일단 귀양을 갔다가 처형되었고, 목호룡은 참형(斬刑)을 받아 효수(梟首)되었다. 이 때 김일경의 아들도 <4자개교살(四子皆絞殺)>이라 했으니 아마도 그의 자손은 절손이 되었을 것이다.
당쟁에서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은 상례(常例)처럼 되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지만 이 사화는 그 과정 자체가 너무나 악랄했을 뿐더러 그 규모도 엄청났던 것이다.
(부) 광김(光金) 선현(先賢) 서원향사록(書院享祀錄)
6. 광김 예안파 25현 및 오천칠군자의 삶과 학문
가. 오천(烏川) 군자리 25현(二十五賢)
퇴계 선생의 9대손으로 하계(下溪) 출신 당대의 큰 학자였던 이야순(1755, 영조 31-1831, 순조 312) 공은 자가 건지(健之), 호가 광뢰(廣瀨)로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폐하고 성리학의 연구에 전심하였다. 1808년(순조 8) 경상좌도 암행어사 이우재(李愚在)의 천거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광뢰공은 위 표에서 보는 바 증참판 김효로 이하 당내(堂內)인 후손 25인의 세계도를 그려 전하였다. 세인(世人)은 이를 근거로 삼아 위 표 속의 인물들을 오천리 25현이라 하였다. 그리고 후서(後序) 격으로 『서광주김씨오천세계도후(書光州金氏烏川世系圖後)』라는 글을 남겼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烏川左侍郞公之家,彬彬多賢傑,今就而歷數之,雲巖濯淸以下,緦免之親,凡二十有五人,聞人之若是之,盛於一堂之內者,世無等匹,吾先祖碣左侍郞公之墓,稱其子孫之繁且秀而曰,積善餘慶之言,至是益驗,其銘又曰,凡百有家視此詞兮,夫使有家而欲其詞之視者,實亦勸人爲善之意也,先祖嘗爲安文貞公世系圖,蓋以其連世積善之多也,野淳敢效之而爲烏川世系圖,又從而歌曰,光有瑞石應川烏兮,君子之里里門高兮,維善之應捷於桴兮,繩繩繼作理不誣兮,凡百有家視此圖兮-오천의 참판공 가문은 빛나고 빛나게도 현인과 걸사가 많았더라, 이제 곧 그 분들을 역력히 헤아려 보니, 운암공과 탁청공 아래로 8촌, 9촌 일가가 스물 다섯 분이었네. 한 집안에서 남에게 성망이 높이 들린 분들로 세상에 짝이 없었네. 우리 선조 퇴계 선생께서 참판공의 묘갈명을 쓰시고 그 자손들의 번성함과 준수함을 칭찬하였는데, “선행을 쌓으면 자손에게 경사스러움이 있게 된다”는 참판공의 말씀이 여기에서 더욱 징험되는 것이로다.……그것을 본받아서 『오천세계도』를 만들고, 또한 이어서 노래 불러 말하노니, 무등산에 상서로운 돌이 있어 오천에서 그 정기 받았도다. 군자의 마을에는 마을 문이 드높다네. …….
나.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의 삶과 학문
김부필(1516, 중종 11∼1577, 선조 10)은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 안동 예안 출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연(緣)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치당(致唐)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였다. 1547년(명종 2)년 서울 정동(貞洞)에서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더불어 목족(睦族)을 위해 계회(契會)하였던 계회첩(契會帖)이 전하기도 한다.
여기서 잠간 사계파와 예안파의 관계를 살펴보면 김영리(金英利), 김천리(金天理) 두 사람이 형제간이고, 서석(瑞石) 김국광(金國光)이 김영리의 5대손이요, 김천리의 5대손이 운암 김연(金緣)이므로 서석과 운암은 12촌의 형제 항렬이 된다. 사계 선생의 서울 생가(生家)는 정동(貞洞)의 대법원 자리였는데, 선생 당시에 일가의 돈목을 위해 조직되어 있었던 정동계(貞洞契)에서 후조당(後彫堂), 읍청정(挹淸亭), 근시재(近時齋)도 그 계원이었다. 그래서 명종 2년 정미(1547) 8월 보름에 후조, 읍청 양공이 사계 선생의 부친인 황강공(黃岡公, 諱 繼輝, 大司諫, 1526-1582) 등과 정동 송하(松下)에서 계회(契會)하고 음시(吟詩)한 계첩(契帖)이 전하는데, 후조당은 황강공에 비하여 연령이 10년 위이고 항렬로는 증조뻘이었다.
후조당은 아버지 관찰사의 가르침을 따라 인종(仁宗)의 등극을 기대하면서 학문을 닦았는데, 즉위 1년에 승하(昇遐)하자 이후 벼슬을 위한 과업(科業)을 포기하고 처사(處士)로 자락(自樂)하면서 인종의 기일(忌日)마다 밤새 거인산(居仁山)의 운암공 재실로 들어가 인종을 조상(弔喪)하여 통곡하며 절의를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56년(명종 11) 41세의 나이로 퇴계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로서의 예를 올렸으며,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렸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에 이황이 “후조주인(後彫主人)은 깨끗한 절개를 굳게 지켜[後彫主人堅素節], 임명장이 문전에 이르러도 기뻐하지 않는구나[除書到門心不悅] …….”라는 시를 지어 그의 지조와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평소 효제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일생 『심경(心經)』을 애독하였다. 1571년(선조 4) 스승 이황이 작고하자 소의(素衣)·소대(素帶)·소식(素食)하며 심상(心喪) 1년을 행하였다.
아우 김부의(金富儀), 4촌형 김부인(金富仁), 4촌아우 김부신(金富信)·김부륜(金富倫), 고종 금응훈(琴應壎)·금읍협(琴應夾)과 한 동네에 살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덕업을 권장하여 향리에서는 ‘오천7군자(烏川七君子)’라 칭송되었다.
1570년 이황이 역동서원(易東書院)을 건립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1574년에는 조목(趙穆)과 함께 도산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다. 구봉령·권호문·조목 등 동문들과 두루 교유하였으며, 학문과 행실로서 사림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다.
1822년(순조 22) 이조판서에 추증, 문순(文純)의 시호가 내렸는데, 예안의 낙천사(洛川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후조당문집(後彫堂文集)』이 있다.
그는 ‘계문삼처사(溪門三處士(松巖權好文, 梅巖李叔樑)’의 한 사람으로 평생 초야에 은거하며 학문과 지조를 지켜나간 순수 처사형 학자이다. 그가 추구한 학문은 이론 성리학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내면의 심성수양에 무게중심이 있다. 이와 같은 학문 경향은 조부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로부터 내려오는 가학적(家學的) 영향과 스승 퇴계 이황의 가르침에 힘입은 것임을 알 수 있다.그 결과 230여 수가 되는 그의 시문학도 사변적 · 철학적 함의를 담고 있는 철리시 계통의 한시는 거의 없고, 자신이 처한 일상의 환경에서 느끼는 정회를 형상화한 술회시가 대부분이다.그 술회시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스승 퇴계 이황과 학문적으로 주고받은 다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또한 자신이 추구한 학문관점의 시적 형상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황과 매화를 소재로 주고받은 시가 많다는 점이다.요컨대, 그의 시문학은 16세기 이황 문하의 관료형 학자가 추구한 학문 경향과는 달리, 『심경』의 중시에서 오는 내면의 자기 수양과 매화로 표상되는 순수처사의 인간 자세, 즉 맑은 인품과 곧은 지조의 문학적 형상화 그것이었다[국학진흥원, 권진호 박사 논문 참조]
다. 오천7군자(烏川七君子)의 학문과 사상
안동 예안 오천리 입향조는 농수 김효로(金孝虜, 1454~1534)이고, 이후 장남인 운암(雲巖) 김연(金緣)과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형제로 두 파가 나뉘었다. 후조당 김부필(金富弼)은 김연의 맏아들인데, 이 마을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일문 학자들 더불어 '오천7군자'라 불렀다. 후조당(後彫堂) 김부필,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김효로의 친손과 외손들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였다. '군자리(君子里)'라는 마을 이름도 이들에게서 유래됐다. 이 가운데 금씨 형제는 운암의 누이가 봉화금씨 훈도 금재(琴梓)에게 출가하여 낳은 아들들인데, 후조당 형제들과는 표종형제(表從兄弟)가 되는 사이였고 같은 마을에서 살았다.
조선 중기 문신인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안동부사로 재임하면서 오천마을을 방문했을 때 "오천 한 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감탄했다고 해서 그 이후로부터 오천을 '군자리'라고 부르게 됐다.
이들 7군자는 한 마을에 살면서 모두 이황의 문인들로 시문(詩文)을 강론하고 의리(義理)를 변론했다. 이황은 오천7군자에게 이학(理學)과 예학(禮學)을 가르쳤다. 이황의 학문의 핵심어는 경(敬) 한 글자였다. 오천7군자는 이황 문하에서의『심경心經』 등의 강의를 통해 동정(動靜)을 통관(通貫)하는 경(敬)의 의미를 배웠다. 이황과 오천7군자의 사제간은 스승 이황의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사제간의 강론을 통한 실천적 덕성 교육이 주를 이루었다.오천7군자는 벼슬에 나아가서는 명절(名節)로 이름이 났고, 산림(山林)에 처해서는 예의(禮義)를 숭상하고 행의(行誼)를 삼가했다. 오천7군자의 정신은 지식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하였다. 오천7군자는 예학에 있어서도 합리적이고 새로운 해석을 하여 조선사회를 새로운 성리학의 예치사회로 나아가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오천7군자의 사상은 그 후손들이 잘 이어나갔다. 김부인의 아들 김기(金圻)는 1598년에 조목의 추천으로 도산서원 원장이 되어 『퇴계집』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또한 김시찬(金是讚)은 도산서원 건립 후 조선 후기까지 서원에 소장된 장서의 관리가 어려운 것을 보고 장서실을 만들고 그 이름을 광명실(光明室)이라고 하여 도산서원 장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요컨대 오천7군자는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이학과 예학을 공부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학풍을 형성하여, 조선 후기 퇴계학의 수호와 전승에 크게 기여하였고 영남 지역의 유교 문화의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권진호박사 논문 참조]
라. 광김 에안파의 불천위 봉사(奉祀)
안동의 교수 한 분이 『安東의 宗家와 不遷位祭祀』라는 논문에서 역내(域內)의 종가들이 불천위로 받드는 유현(儒賢)이 모두 47위(位)라 하여 지역별, 문중별로 나누어 정리한 바가 있었다. 그 글이 인터넷 기타에 오르고 많은 사람들이 퍼 나르는 사이에 어떤 호사가(好事家)는 그 논문을 기반(基盤)삼아 요지 다음과 같은 통계 도식(圖式)까지 만들었다.
우선 위 47위가 국천(國遷)인가 또는 향천(鄕遷-儒林遷)인가의 구분이 모호하다. 향천이 확실한 여러 유현들이 들어 있으므로 그 둘을 다 포함한 것으로 볼 수는 있다. 기타 이른바 지역 유림(儒林)의 조력(助力)을 얻되 단위 문중(門中)이 향사(享祀)를 주관하는 불천위는 대개 오세이천(五世而遷)하는 가묘(家廟) 사당(祠堂)이 아니라 별묘(別廟)에 따로 신위(神位)를 모신다. 당연히 춘추향사(春秋享祀)나 절사(節祀), 기제사(忌祭祀) 등을 따로 모시는 등의 기준이 있을 수 있고, 지역 유림 기반 후인(後人)이 입사(立祠)하야 향사(享祀)를 하는가 등 기준이 또한 중요한데 이 논문에서는 도대체 그런 기준이 모호하다. 예를 들면 상주의 도남서원은 수백 년래 8위(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노수신, 유성룡, 정경세)를 배향하였는데, 흥양(興陽) 이씨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지역 유림에 공론으로 2006년에야 배향되었다.
혹 별묘(別廟)의 존재(存在)나 춘추향사(春秋享祀)를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 광김(光金)의 경우 지금 군자리(君子里) 문화재(文化財) 단지(團地) 안에 시도유형문화제 제27호로 정해진 별묘(別廟)가 존재하며, 거기에 증참판 김효로(金孝盧)와 임란(壬亂) 때 영남좌도의병대장으로 전진(戰陣)에서 순국(殉國)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된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 향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계암(溪巖) 김영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으로 헤아려야 한다.
진성이씨의 불천위를 논의하면서 노송정(老松亭) 공이 예안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전고대방(典故大方)에서 예안(禮安)의 향현사(鄕賢祠) 또는 향사우(鄕祠宇)는 숙종(肅宗) 임오(壬午, 肅宗 28年, 1702)에 창건(創建)되어 진사(進士) 증이판(贈吏判) 이계양(李繼陽, 老松亭, 退溪先生 祖父)과 생원(生員) 증이판(贈吏判) 김효로(金孝盧) 공을 함께 입사사지(立祠祀之)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서원 훼철 이전까지 오천리 근역에는 광김 예안파 기타의 유현을 봉안한 낙천사(洛川社)가 후일 낙천사(洛川祠), 낙천정사(洛川精舍) 등으로 이름을 바뀌면서 다음 11분이 배향되었음을 『선성지』가 기록하였다.
□ 낙천정사(洛川精舍)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김효로(金孝盧)•김연(金緣)•김부인(金富仁)•김부필(金富弼)•금응협(琴應夾)•김부신(金富信)•김부의(金富儀)•김부륜(金富倫)•금응훈(琴應壎)•김기(金圻)•김해(金垓)를 배향한 곳이다.
춘추향사를 기준으로 삼으면 현재 예안파의 불천위 봉사는 3분[김효로, 김해, 김영]이지만 서원 훼철 이전으로 거스르면 위 11분 중 봉화금씨 두 분을 뺀 9분과 계암공을 포함하여 10분이었다고 해야 한다.
7. 광김 예안파 전래(傳來) 고문서의 위상
광산김씨 예안 오천 군자리 숭원각(崇遠閣)에는 선대 전래의 희귀 전적 및 문집류 2.500여 권과 고려 말엽의 호구(戶口) 문서를 비롯하여 조선 왕조 500여 년간의 교지, 호적, 분재문서, 노비문서, 토지문서, 서간문 등 2.000여 점이 소장돼 있었는데, 최근 2016년에 가까운 안동문화연구원으로 기증되었다. 그 고문서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4년 안동호의 축조로 인하여 조선 초부터 21대에 600여 년간 세거하여 온 오천(烏川, 외내) 구지(舊址)가 수몰되기에 이르렀기에 종택․사당․재사․정각 등을 이건하던 중 비처(秘處)에 갈무리되었던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일부가 1977년 6월에 대구 시립도서관에 전시된 바 있고, 1979년 2월 8일자 대구 매일신문에 다시 그 일부가 소개된 것으로부터 비롯한다.
이후 그 문서 중 일부가 이수건(李樹健, 1981)에 의해 간행되고, 다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2)에 의해 1375건 문서가 『광산김씨오천고문서(光山金氏烏川古文書)』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고부터 널리 학계가 이용하기에 이르렀는데, 거기 실린 고문서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敎書(1), 敎旨․敎牒․差帖(83), 完文(2), 立案(7), 戶口單子․准戶口(46), 試券(26), 所志類(123), 侤音(다짐)(2), 分財記類(47), 土地文記(181), 奴婢文記(3), 手標(1), 完議(1), 問安單子(1), 簡札(647), 婚書․禮狀(18), 通文(1), 祭文․哀詞(57), 輓詞(33), 奴婢賤案(3), 詩文(58), 記錄類․雜文(34) : 計1375件
특히 전래하는 유물 중 고문서 7종 429점과 전적(典籍) 13종 61점이 1990년 3월 2일 문화부(文化部)에 의해 각각 보물 제1018호 및 제1019호로 지정되었는데, 그 자세한 내역은 다음과 같다.
1. 지정 번호 : 寶物 1018號
명칭 : 光山金氏禮安派宗家所藏古文書
수량 : 一括(7種429點)
소유자 : 金俊植
소재지 : 慶尙北道安東市臥龍面烏川里山28
지정일 : 1990.3.2
내용:
(1) 敎旨, 敎書, 敎牒, 差帖 82點
(2) 戶籍單子 43點
(3) 立養, 立案文書 4點
(4) 所志 91點
(5) 分財記 45點
(6) 明文 154點
(7) 禮狀紙 10點
2. 지정 번호 : 寶物 1019號
명칭 : 光山金氏禮安派宗家所藏典籍
수량 : 一括(13種61點)
소유자 : 金俊植
소재지 : 慶尙北道安東市臥龍面烏川里山28
지정일 : 1990.3.2
내용:
(1) 典籍
① 書傳 7冊
② 宋朝名臣言行錄 17冊
③ 梅月堂集 10冊
④ 佔畢齋集 5冊
⑤ 歷代明鑑 6冊
⑥ 朱子大全 2冊
⑦ 論語集註 3冊
⑧ 朱子實紀 5冊
⑨ 懲毖錄 2冊
⑩ 近思錄 1冊
(2) 書帖
① 退陶先生遺墨 8張
② 退溪先生書法 1帖
③ 別詩帖 1帖
위 문서들 중 분재문서, 호구단자 등 여러 문서가 이수건(李樹健), 허흥식(許興植), 최승희(崔承熙), 정구복(鄭求福), 최순희(崔淳姬), 김규선(金圭善) 등에 의해 거듭 연구되었는데, 보물로 지정된 고문서 중에는 호구단자, 준호구라 이름하는 것만도 43점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고려말 고종(高宗, 1214~1259), 원종(元宗, 1260~1274), 충렬왕(忠烈王, 1275~1308) 시기에 걸쳐 생존한 인물인 전게 김연(金璉, 1215~1292)의 준호구(准戶口) 및 그의 손자 김진(金稹, 1292~?)의 호구단자(戶口單子)를 하나로 엮은 문서가 들어 있다. 곧 이 고문서는 1261년(高麗 元宗2년, 辛酉)에 성적(成籍)된 김연(金璉, 匡靖大夫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致仕, 諡良簡公)의 호구에 준(准)하여 1301년(高麗 忠烈王27년, 大德5년)에 등급(謄給) 된 준호구를 포함하며, 전반부는 김연의 손자 김진(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 諡章榮公)의 것으로 1333년(高麗 忠肅王 復位2년, 癸酉)에 성적(成籍)된 호구단자의 사본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 문서는 원본이 아니고 후대에 원본 양식에 따라 필사된 것인데, 국보로 지정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호적과 함께 여조(麗朝)의 호구식(戶口式) 제반 사항을 살피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고문서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보물로 지정된 고문서의 호적단자들 가운데에는 위 표에서 보듯이 조선 인조(仁祖) 14년(1636) 김광실(金光實)의 호구단자에서 광무(光武) 1년(1897) 김제걸(金濟杰)의 호구단자에 이르는 문서가 또한 있는데, 그 전체 문서들을 통하여 11세로부터 39세에 이르는바 무려 29세 900여 년 동안의 종통(宗統)과 세계(世系)를 확실히 더듬을 수 있게 한다.
광산김씨 예안파 소장 이들 전적 문화제 다량을 한국국학원에 기탁함으로써 제13회째의 그 문중특별전이 2016년 4월 25일부터 안동 한국국학원에서 열렸다.
그 전시회의 주제는 『한결같이 군자의 길을 걷다,2016』이었고, 광산김씨 예안파 문중 선대가 4대에 걸쳐 기록한 1백 년간의 일기와 만난다는 뜻을 함께 담았다. 전시회와 연관하여 최은주(유교문화박물관 전시운영팀장)씨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지식인의 반성적 고민이라는 제목의 안내문을 연구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올렸다.지난 4월 25일,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은 ‘한결같이 군자(君子)의 길을 걷다’ 특별전을 개막했다. 이 전시는 박물관 4층 기획전시실에서 8월 25일까지 약 4개월간 지속된다. 4대에 걸친 1백여 년간의 일기를 한 자리에서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하는데, 120여 년 동안 4대(代)에 걸쳐 기록된 총 39책의 일기 자료가 이 자리에서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4대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대장을 지냈던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와 그 아들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1580~1646), 그리고 그 손자 묵재(默齋) 김염(金石+廉, 1612~1659)과 증손자 과헌(果軒) 김순의(金純義, 1645~1714)이며, 김해의 종형제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과 김염의 동생 김선(金石+先, 1615~1670)도 일기를 기록하였다. 한 집안에서 아들과 손자 대를 이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작성된 일기는 그 사례가 매우 드물며, 한꺼번에 실물이 공개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일기는 기록 내용의 특성이나 그들의 호(號) 또는 자(字)를 따서 각각 『향병일기(鄕兵日記)』·『매원일기』·『묵재일기』·『과헌일기』 또 『계암일록』·『여온일기(汝溫日記)』라고 부른다.
SNS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고 그때그때 감성을 토로하고 공감받는 것에 익숙해진 지금,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성격의 ‘일기’를 통해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시선과 감성을 따라가 보는 일은 신선한 경험이다. 이 일기들 안에는 전쟁과 당쟁 등 대내외적 격동기 사회를 살아가는 재지사족의 일상이 담담하게 녹아있다. 일기의 저자들은 하루하루의 일과를 써나가며 자신을 반추하고 이를 토대로 자신만의 삶의 철학과 도덕적 인격을 완성해 나간다. 또한, 자신들의 눈에 비친 그 시대의 모습을 꼼꼼하게 기록하면서 그에 대해 치열하게 염려하고 또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염려와 고민이 이들이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보듬어 안고 그에 부응하는 실천적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일기들을 통해 김해를 비롯한 6명이 어떤 과정을 통해 완성된 인격체로 거듭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기 자료 공개와 함께 이루어지는 이번 전시는 광산김씨 예안파 문중이 험난한 세월 동안 오래도록 지켜온 선조들의 유물들을 선보이는 자리로 꾸며졌다. 지식인의 자기반성과 사회적 역할을 생각해 보는 계기로 마련되었으며, 약 70여 점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광산김씨 예안파 문중의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가 담긴 유물들을 관람하는 동안 나를 돌아보고 남을 생각하며 보다 나은 사회를 함께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는 모두 7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먼서 오천마을의 역사와 광산김씨 예안파의 오천 입향조 김효로(金孝盧, 1454~1534)에 대한 이야기로 1부 ‘외내에서 군자리까지’가 시작된다.
이어지는 2부 ‘대야가 둥글면 그 안의 물도 둥글다’는 오천에 정착한 김효로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첫째 아들 관찰사 운암(雲巖) 김연(金緣,1487~1544)은 청렴강직한 관직자로서 둘째 아들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91~1555)는 처사적 사림으로서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그 터전을 확고하게 다져나갔으며 이와 관련된 유물로 구성되어 있다. 3부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오천25현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김연과 김유의 아들들인 김부인(金富仁)·김부필(金富弼)·김부신(金富信)·김부의(金富儀)·김부륜(金富倫) 등 다섯 (종)형제들은 뛰어난 학문과 활발한 사회적 활동으로 광산김씨 예안파 문중의 입지와 전통을 탄탄하게 확립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그 아래 또 그 아랫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기에 세간에서는 이들을 모두 가리켜 ‘오천25현’이라 부르며 이 가문이 쌓아온 업적과 적선(積善)의 미덕을 높이 평가하였다. 4부는 ‘산림에 은거하는 뜻은’이라는 제목으로 오천 25현의 유업을 받들며 그 정신적 유훈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던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담았고, 5부 ‘1백년에 걸친 자성(自省)의 기록’에서는 4대에 걸쳐 120년 동안 작성된 일기자료와 관련 영상으로 전시가 이어진다. 한 집안에서 아들과 손자 대를 이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작성된 일기는 그 사례가 매우 드물다.
6부는 고인(故人)에 대한 기억들로 채워졌다. 자손과 후학들이 기억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떠한지 보여 주는 유물들이 전시되며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지막 7부는 ‘군자리의 시간과 공간을 그리다’라는 제목으로 수몰을 피해 새롭게 조성된 지금 ‘군자리’의 모습을 사진과 전경으로 담아내었다.
8. 군자리 소재 주요 지정 문화재
오천 군자리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후조당과 탁청정은 국가지정 문화재이며, 탁청정 종가와 광산 김씨 재사 및 사당, 침락정은 경상북도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또 유물전시관인 숭원각에는 '오천7군자'를 비롯해 이 가문 출신의 인물들이 남긴 고서, 문집류, 교지, 호적, 토지문서, 노비문서, 분재문서, 각종 서간문 등이 전시돼 있는데, 이 중 고문서 7종 429점과 전적 13종 61점은 보물로 지정돼 있었는데, 근자 2016년 국학연구원에 기탁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요리책으로 선비 대감집의 음식문화를 적은 '수운잡방'과 고려시대 호구단자, 임란 때 의병장의 진중일기인 '항병일기', 전투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 병자호란 때의 창의록인 '매원일기', 충절을 지킨 선비의 평생기록인 '계암일기' 등은 군자리의 자랑이다.
이곳에 보관된 문헌과 유물은 한 가문이 600여 년 동안 한곳에 살아오면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도 이를 온전히 보존해왔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로 평가된다.
▷후조당(중요민속자료 제227호)
광산김씨 예안파 종택에 딸린 별당으로 선조 때 후조당 김부필이 처음 건립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ㄱ'자형 건물로 왼쪽에 6칸 대청을 두었다. 현판은 조선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의 필적이다. 대청 동쪽에는 2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튀어나온 마루 1칸과 온돌방 1칸이 더 있다. 이런 구조는 이 지방에서는 흔치 않은 형식이며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으로 건축사의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잡석기둥 위에 각주를 세워 만든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지금은 불천위 향사를 지낼 때 사용하고 있다.
▷탁청정(중요민속자료 제226호) 및 종택(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6호)
김효로의 둘째 아들 김유의 종가 건물로, 종택은 김유가 1541년에 건립했고 탁청정은 1544년에 세운 것으로 종택에 딸린 정자다.
정침은 민도리 홑처마의 'ㅁ'자형 기와집으로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총 22칸이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정자의 이름은 김유의 호에서 유래했고 현판은 조선 최고의 명필가 한석봉의 필적이다. 탁청정은 그 규모가 웅장하고 모양이 화려해 오랫동안 인근에서 이름을 떨쳤다.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호)
재사는 사당에 모신 조상을 위한 제사를 모실 때 여러 가지 일들을 준비하는 곳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ㅡ'자형 건물로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구성돼 있다. 동쪽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창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ㄷ'자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재사 뒤편에 자리한 사당에는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인 농수 김효로와 그의 증손 근시재 김해를 모시고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당 앞에는 팔각기둥을 세우고 건물보다 약간 앞으로 튀어나온 퇴를 만들었다.
▷침락정(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40호)
이 건물은 영남 의병대장을 지낸 김해의 아들 김광계가 1672년에 세운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이고 양쪽으로 온돌방을 만들었다. 출입문이 동서 양쪽으로 마주 세워져 있는데 동쪽으로 난 문은 윗부분이 반원형으로 되어 있어 작고 아담한 문에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 2017.1.19.(목).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강의 자료참고-http://cafe.daum.net/chob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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