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독 이번 답사에는 히데요시(秀吉)의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일세를 풍미했던 그의 그림자는, 이후 수백년간 일본 곳곳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제 들르게 되는 히가시야마(東山) 코다이지(高台寺)에서는 또, 그의 본처였던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얘기가 나옵니다...
* 이제 드디어 교토 얘기로 접어드네요...
사실 교토 시내를 차로 돌아보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닙니다... 교토 시내에는 대중교통망도 잘 짜여져 있기도 해서, 비록 돈은 좀 더 들지만,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정도로 동선을 짤 수 있는 데다가, 시내 교통 상황도 꽤 복잡하면서도, 교토 사람들의 분위기가 일본치고도 운전매너가 그렇게 얌전한 편은 아니라는 평도 있고@@, 여튼 그렇게 시내운전이 호락호락한 편은 아닙니다... 만약 답사 내내 교토 시내만 다니는 일정이었다면, 당연히 대중교통으로만 다니는 게 훨씬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답사처럼 교토 시내를 치고 시외로 빠지는 동선에서 불가피하게 시내를 차로 다녀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대중교통만으로 한번 시내를 다녀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예측 불허의 시내로 진입하면서, 지도로 점찍어 놓은 주차장 상황에 대해 기대반 불안반, 고다이지 주차장을 찾아갑니다... 입구에 들어섰는데, 다행히 넉넉한 주차장 상황에 다행이다 싶었네요...
그렇게 도착하고는 우리는 고다이지로 들어갑니다... 이 곳에서 우리가 둘러볼 것은, 두 채의 다실(茶室) 유적, 고아한 전통정원, 그리고 네네(ねね)의 이야기입니다...
코다이인(高台院, ?-1624)은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家定, 1543-1608)의 친동생이며, 어려서 아사노(浅野) 가문에 양녀로 들어갔습니다. 보통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라고도 불립니다. 당대에 네네(ねね) 혹은 오네(おね), 네이(ねい)라고도 불려왔고, 법명(法名)은 코다이지(高台院) 코게츠신코우(湖月心公)였습니다.
오와리노쿠니(尾張国, 지금의 나고야)에서 스기하라 사다토시(杉原定利, ?-1593)의 둘째딸로 태어나, 나중에는 츠시마(津島, 현재 나고야시 서쪽의 츠시마시,津島市)의 아사노나가카츠(浅野長勝, ?-1575)의 양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561년 (당시 14살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친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의 가신(家臣)이었던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藤吉郎, 훗날의 토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1537-1598)와 결혼했습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연애결혼이었다고 하네요..
1582년의 혼노지의 난(本能寺の変) 당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28-1582)에 가담했던 아츠지 사다유키(阿閉 貞征, 1528-1582)가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공격하는 바람에, 근처의 다이키치지(大吉寺)로 피난가기도 했지만, 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28-1582)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이후 히데요시와 함께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거소를 옮겼고, 1585년에 히데요시(秀吉)가 칸파쿠(関白)에 취임하면서 그녀도 종삼위(従三位)에 봉해지고,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계의 일인자의 아내로서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는 조정(朝廷)과의 교섭은 물론 당시 인질로 전국 각지로부터 모여든 다이묘들(諸大名)의 가족들을 감독하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등을 거쳐 1598년 히데요시(秀吉)가 죽고나자, 요도도노(淀殿, 1569-1615)와 함께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1593-1615)의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저 멀리 마이코(舞子) 복장을 한 여자 몇 명이 걸어가네요^^;; 교토에서 흔히 마주치는 낯설은 풍경이기도 하고, 한번은 마주치고 싶은 풍경이기도 하네요... 실제로 관광객으로 교토에 간 사람들이 마이코(舞子)를 맞닥뜨리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저녁 무렵에 혹여 출근 중인 마이코(舞子) 혹은 게이샤(芸者)를 드물게 볼 수 있기도 한다지만, 이마저도 사실, 낮에 같은 관광객인 마이코(舞子) 복장의여자들 대하듯이 방해를 하면 안된다고 하네요... 엄연히 근무중인 직장여성이므로...
마이코(舞子)는 게이샤(芸者) 견습생을 따로 지칭하는 말입니다. 게이샤(芸者)는 많은 경우 여러 형태의 연회 등의 무대에서 일본 전통음악 연주나 전통 무용 공연, 시작(詩作) 등을 통해 모임의 흥을 돋우는 일본 전통 기생입니다. 원래는, 남자들이 맡았지만, 점차 여러 연회에서 여성이 주로 맡으면서 오늘날에 와서는 여성만을 지칭하게 되었다네요.. 그런 의미에서 보수적인 교토에서는 게이코(芸子)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관광객이 마이코 체험을 위해 분장한 것이든, 실제 마이코든, 복장으로 마이코와 게이샤는 쉽게 구별이 가능합니다...게이샤는 오히려 흑백톤의 수수한 복장과 머리모양을 하고 있고, 대조적으로 마이코는 원색 톤의 화려한 복장과 역시 화려한 머리장식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차를 하고 코다이지(高台寺) 경내에 들어섭니다... 아래 도면에서 중앙 빨간 표시한 곳 아래로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공터가 있고, 우리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 길 정면 쿠리(庫裏) 앞 왼쪽으로 난 문으로 들어가 답사를 시작합니다...
코다이지(高台寺)는 임제종(臨済宗) 겐닌지파(建仁寺派)의 사찰로 산호(山号)는 쥬부산(鷲峰山)이고, 정식명칭은 코다이쥬쇼우젠지(高台寿聖禅寺)이고, 위에서 언급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정실(正室)이었던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 법명은 코다이인, 高台院)이 히데요시(秀吉)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사찰입니다. 실제로 키타노만도코로의 법명에서 사찰의 이름을 따온데에서도 어느정도 짐작되기도 합니다... 석가여래(釈迦如来)를 본존으로 하는 선종사찰이기도 하면서, 히데요시(秀吉)와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영묘(霊廟)를 모시고 있는 사찰이기도 합니다.
1598년 9월 18일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사(病死)하자,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 속칭 네네, ねね라고도 불리웠습니다. 출가한 후의 정식 법명은 코다이인코게츠신니, 高台院湖月心尼)는 히데요시(秀吉)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 건립을 발원(発願)하여, 처음에는 불과 얼마전 여의었던 (9월 11일) 친모 아사히노츠보네(朝日局, ?-1598)를 모셨던 코우토쿠지(康徳寺)에 같이 모시려다가, 장소가 협소하여, 현재 위치에 새로 사찰을 짓기로 했습니다.
당시 새로이 권력을 잡게 되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를 후하게 대접하여 휘하의 무사들로 하여금 코다이지(高台寺) 조영을 전담하여 도와주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코다이지(高台寺)는 1606년 조동종(曹洞宗) 사찰로 문을 열었지만, 1624년, 당시 임제종(臨済宗) 겐닌지파(建仁寺派) 대본산이었던 겐닌지(建仁寺)의 산코우죠우에키(三江紹益,?-1650)을 모셔오면서부터, 임제종(臨済宗) 사찰이 되었습니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家定, 1543-1608)는 겐닌지(建仁寺), 산코우죠우에키(三江紹益,?-1650)와 두터운 관계에 있어 실제로 슬하의 칠남이 그의 취하로 출가하기도 했습니다.
창건당시에는 앞에서 얘기한 코우토쿠지(康徳寺)에서 건물을 이축・개조했는데, 방장(方丈), 다실(茶室) 등은 후시미성(伏見城)으로부터 이축했던 것입니다. 또, 사찰 입구에는 후시미성(伏見城)의 케쇼우고덴(化粧御殿)을 옮겨와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거처로 삼았었고, 바로 그 자리에, 현재 코다이지(高台寺)의 서쪽에 엔토쿠인(圓徳院)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후, 몇번의 화재를 피해 남아 있는 창건 당시의 건물은, 산코우죠우에키(三江紹益,?-1650)를 모시고 있는 개산당(開山堂), 히데요시(秀吉)와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를 모시고 있는 오타마야(霊屋), 다실(茶室) 카사테이(傘亭), 시구레테이(時雨亭) 정도입니다.
불전(仏殿)을 새로 짓기보다는 방장(方丈)을 중심으로 서쪽에 쿠리(庫裏), 북쪽에 서원(書院)이 배치되어 있고, 경내에 동쪽에는 엔게츠치(偃月池)・가료우치(臥龍池) 등의 2개의 연못을 중심으로 한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 외에 개산당(開山堂), 오타마야(霊屋), 다실(茶室) 등이 경내에 있습니다.
개산당 주위로 꽤 근사한 일본정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언듯, 나와 걸어보라고 유혹하는 듯한 봉긋한 언덕에 살짝 가린 개산당 건물 안에는 개산조이자,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家定,1543-1608)가 모셔져 있습니다... 코보리엔슈(小堀遠州, 1579-1647)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모모야마(桃山) 시대의 전형적인 정원으로 평가되고 있다네요..
개산당(開山堂)은 선종양(禅宗様) 양식으로 지어진 불당으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1605년의 건물입니다. 원래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지불당(持仏堂)이었다고 하네요... 서원(書院)과 개산당(開山堂) 사이에는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중간 즈음에 칸게츠다이(観月台)가 있습니다. 전하는 말에는 여기에서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가 달을 바라보면서 히데요시(秀吉)를 그렸다고도 하네요...
그 반대편으로는 다시 언덕 위의 오타마야(霊屋)까지 가료우로우(臥龍廊), 회랑이 마치 용의 등을 닮은 모습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타마야(霊屋)까지 올라가는 길은 꽤 가파릅니다.. 길이 다행히도 길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마찬가지로 1605년에 지어진 이 건물 안에 가운데에는 대수구보살상(大随求菩薩像)이 모셔져 있고, 그 오른편에는 히데요시(豊臣秀吉) 좌상이, 왼쪽에는 정실(正室)・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 목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자료를 찾다보니, 실제로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가 사후에 이 목상 2미터 아래에묻혔다고 하네요...
오타마야(霊屋) 오르막길 초입에는 또다른 갈림길이 있습니다. 그 오른쪽 길로, 조금 더 길게 뻗어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면, 그 끄트머리에는, 두 곳의 꽤 재밌는 사연과 모양의 다실이 있습니다...
이 절을 굳이 들른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다실 2곳 때문이었습니다...
카사테이(傘亭)는, 안칸쿠츠(安閑窟)이라고도 하는데,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경내 동쪽으로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이축한 것이라고도 하고, 센노리큐노코노미(千利休好み, 혹은 센노리큐가 지었거나??)로 전해집니다... 우진각 초가지붕에 내부 천장을 대나무로 엮어서 일견 그 형태가 가라카사(唐傘)와 닮았다해서 그런 이름이 붙기도 했습니다...
그 남쪽 옆에는 마찬가지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시구레테이(時雨亭)가 있습니다. 흙바닥 초가지붕의 회랑으로 카사테이와 연결되어 있어 꽤 독특한 구성입니다...만 원래 이 두 건물은 따로따로 지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답니다...
이 다실은 꽤 독특하게 지어진 2층 다실의 모습이 눈길을 끄는데, 2층 남쪽의 죠우단노마(上段の間)은 벽, 가구 등 일체 가설하지 않은 채 두어 눈길을 끈다고 하고@@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에 후시미 성(伏見城)로부터 이축되었고, 센노리큐 코노미(千利休好み)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후시미 성(伏見城) 고가쿠몬쇼(御学問所)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후, 교토신죠(京都新城) 터에 있던 가옥에 살면서 토요쿠니 신사(豊国神社に)에 간간히 들러 히데요시(秀吉)를 공양하는데 전심했다고 합니다.
겐나(元和, 1620년대)년간의 교토 시내를 묘사한 나카무카시쿠게마치노즈(中むかし公家町之図)에 보면, 코다이인도노(高台院殿, 야시키, 屋敷)가 넓은 부지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1603년 양모(養母) 사망 후, 히데요시(秀吉)의 유언이기도 했던 히데요리(秀頼, 1593-1615)와 센히메(千姫, 1597-1666)의 혼인을 지켜본 후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는 출가했습니다. 그리고, 1605년, 이에야스(家康)의 후원하에, 친모와 히데요시(秀吉)의 명복을 빌기 위해, 코다이지(高台寺)를 짓고, 그 정문 앞에 거택을 지었다고 하네요... 당시 히데요시 가문과 토쿠가와 가문간의 파국의 와중에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와 토쿠가와(徳川) 가문의 관계는 극히 우호적이어서,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1579-1632)가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집(高台院屋敷)을 들르기도 했고, 니죠죠(二条城) 안에서 코다이인(高台院)이 노(能)를 주관한 일화도 있습니다. 그리고, 공가(公家)의 일원으로서도 꾸준히 활동하다가, 1624년에는, 코다이인야시키(高台院屋敷)에서 죽었습니다. 향년 76세 (77세 혹은 83세였다고도 합니다. )
유골은 코다이지(高台寺) 타마야(霊屋)의 코다이인(高台院) 목상 아래에 안치되어 있다고 하고, 묘소는 코다이지(高台寺) 경내에 있습니다.
저멀리 법관사 탑이 보입니다... 둘째날의 일정도 이렇게 마무리되었네요... 이제 조금 여유를 갖고 만 하루의 일정을 교토에서 보내기 위해, 숙소인 히이라기야(柊家) 료칸으로 향합니다... 후로(風呂) 때문에 꽤나 정신없는 저녁을 보낼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