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살수차를 운행하는 도로환경미화원들
평양에는 대부분 여름철 위주로 살수차를 운행한다.
워낙 항상 건설 붐이 일어나는 도시이다 보니 차도에 먼지가 그칠 날이 없어
살수차로 도로를 씻거나 태양열에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를 식혀주기도 한다.
살수차는 중국제가 사용되고 있으며 시 각 구역에 한두 대씩 운행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 환경미화원들도 주황색 유니폼위에 야광조끼를 갖춰 입었으며
모두 평양시 각 구역의 도시미화사업소 소속이며 그곳에서 월급을 지급 받는다.
4. 공공기관 건물, 부대시설, 주차장 등을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
필자는 참관지를 방문할 때마다 도로교통 환경미화원들이 아닌
일반적인 청소 업무만을 담당하는 환경미화원들을 볼 수 있었다.
금수산 태양궁전, 전승기념관, 류경체육관, 인민대학습당 등
여러 공공기관에 가면 도로교통 환경미화원들보다 더욱 세련된 디자인과
밝은 계열 색상 유니폼을 입고 청소를 하는 모습을 목격할 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들이 청소하는 모습은 물론 옹기종기 모여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이들은 공공기관이나 중요 국가기관 건축물, 유적지, 사적지,
관광지등에 배치되어 담당을 맡은 건물과 부대시설,
주차장등의 청소를 전담하는 환경미화원들이며
평양시 미화사업소가 아닌 각자가 청소 일을 하는 해당 기관에 소속돼 있다.
가령 인민대학습당에서 청소를 하면 그곳 소속이며
태양궁전에서 일을 하면 그곳 소속인 셈이다.
이들의 유니폼은 매우 화려하고 밝은 색상이며 야광조끼는 착용하지 않는다.
.
▲ 개선문을 방문해서 둘러보고 있는 필자 주변에 환경미화원이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필자가 전승기념관을 참관하던 중에 환경미화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 이들이 휴식을 취하는 바로 인근에는 푸에블로호가 있고 멀리 105층 류경호텔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북 전체 인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참배 장소이자
국제적인 관광 명소가 된 금수산태양궁전 공원에서 잔디 쓰레기들을 정리하는 환경미화원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태양궁전에서 일하는 환경미화원들이 빗자루를 들고 본관 앞 광장을 청소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5. 주택단지와 아파트단지 생활 쓰레기를 수거하는 화물차량 환경미화원들
필자가 목격한 평양의 생활 쓰레기 수거 시스템은 전혀 복잡하지 않았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과학적이며 효율적으로 보였다.
평양시내 일반 주택이나 아파트 단지 등의 살림집 단지에는
어느 곳을 막론하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제법 큰 규모의 쓰레기 수거함이
한쪽 벽에 설치되어 있다
. 버려진 쓰레기가 어느 정도 수거함에 채워질 무렵이 되면
정해진 요일에 쓰레기 수거 전용 화물차(트럭)가 현장에 도착한다.
쓰레기 수거함은 대도시의 경우 각 아파트단지나 주택단지마다 한 개씩 설치되어 있고
농어촌은 반경 1km 정도에 한 개 씩 있다고 한다.
규격과 모양새는 전국이 모두 동일한 구조인데
대부분 시멘트로 만든 축조물이다.
이 시멘트 축조물 한 가운데로 쓰레기 화물트럭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고
양옆에 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흡사 개선문을 닮았다고도 말한다.
거주자가 쓰레기를 버리려면 계단으로 올라가 가로 5m, 세로 5m 크기의 쓰레기 홈통에 쏟아 붓는다.
어느 정도 쓰레기가 찰 때쯤 되면 시군 소속 화물 청소차가 일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온다.
쓰레기 화물트럭이 수거함 아래에 정확히 멈추면
수거원이 조심스럽고 능숙한 솜씨로 수거함 바닥을 열어 제친다.
그러면 쓰레기들이 화물차 안으로 정확하게 낙하된다
. 안전하게 탑재된 것이 확인되면 화물차는 쓰레기를 싣고 곧 바로 떠난다.
수거가 끝난 후 쓰레기통 청소와 주변 청소는 인민반 안에서 순번을 정해서 맡고 있다.
보통 쓰레기 수거함은 콘크리트 계단 두 개 사이에 매달려 있고
거주민들은 계단을 올라가 쓰레기를 수거함에 넣는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이런 방법은 약간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수거함 바닥에 불량 볼트가 있거나
고장이 나서 작동이 잘 안 되는 경우에는
모아 놓은 쓰레기 더미가 한 순간에 쏟아져 나와 주택가 거리를 뒤덮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실제로 그런 일을 발생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이 수거함 시설은 언제나 깨끗하고 깔끔하게 유지되는 듯 했다.
공동 쓰레기 수거함 외에 일반 가정집에서는 가족들이 사용하는 스레기통들은
대개 플라스틱이나 널빤지 나무 등으로 제작한 것을 사용하고 있으며
아파트에서는 철제 쓰레기통이나 양동이를 활용해 사용한다.
최근에 건축한 창전거리, 은하과학자거리 등의 고층아파트에서는
통로마다 쓰레기 투하 입구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고
새로운 주택 단지들도 쓰레기 수거함이 몇 집에 한 개씩 편리한 구조물로 설치되어 있다.
쓰레기 매립장은 별도로 있으나
대개 도시주변의 저지대를 선정해 1-2m 두께로 쓰레기로 메운 다음 흙을 덮어
공장 부지나 공공건물 부지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평양에는 연탄재 쓰레기가 많아
매립공사가 보다 수월한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쓰레기 재활용도가 높고 각 지역 인민반별로 재활용품을 수집하기 때문에
쓰레기통에 버릴 물건들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가 않다고 한다.
▲ 평양시내 각 건물 입구마다 비치된 쓰레기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각 상점이나 식당 등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게 앞을 철저하게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6. 각 인민반별로 집주변과 거리 환경미화를 책임지는 시민들
특권이 있는 평양의 시민들은 그만큼 의무와 책임도 뒤 따르기 마련이다.
지방에 비해 훨씬 많은 문화생활 혜택이 보장되는 평양에 거주한다는 것은
공민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들도 많다.
북을 방문하는 대다수의 외국인들과 남한사람들
, 해외동포들은 평양이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증언한다.
이렇게 평가받기까지는 일반 평양시민들의 눈물겨운 노력들이 숨어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평양시에는 도로를 관리하는 미화사업소가 별도로 있지만
예로부터 인민반별로 혹은 구역별로 담당과 순번을 만들어
매일 아침 마다 청소를 진행한다.
평범한 일반 시민들도 각 지역마다 인민반별로 청소구역이 정해져 있어
집집마다 반드시 참여하여 자기 집과 동네를 책임지고 청결하게 해야 한다.
보통은 새벽에 모여 빗자루를 들고 지저분한 곳들 위주로 쓸어내는 것이 보통이다.
평양시 각 구역의 인민반장들은 새벽 5시가 되면
주민들에게 담당구역의 청소를 하자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깨운다.
특히 해마다 봄이 돌아오는 3-4월이 시작되면서
도로담당 청소 구역을 만들어 도급제 청소를 진행했다.
이 시기는 단순하게 빗자루로 쓸고 닦는 청소가 아니다
. 때로는 새벽이 아닌 한밤중에도 물걸레로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를 방청소 하듯해야만 할 때도 있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빨리 청소를 나오라고 확인해주거나 독촉을 하기도 한다.
거리 청소와 집 청소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나
이와는 별도로 큰 국가적인 행사나 경축일이 돌아오면 대대적으로 청소를 실시한다
. 특히 외국인들이 참가하는 행사나 남측에서 손님들이 평양을 방문하는 날에는 더욱 신경을 쓴다
. 또한 평양에는 기본적으로 매년 최소 네 번은 대대적인 청소를 벌인다
. 2.16(광명절), 4.15(태양절), 9.9(공화국 창건일),
10.10(당 창건기념일) 등이다.
이때는 국제적인 큰 행사가 없어도 거리를 깨끗하게 정비해야 하며
손님 맞을 준비도 해야 한다.
이와는 별도로 국제적인 행사가 있거나
남한 대표단이 대규모로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면 오래 전부터 준비가 시작된다.
예를 들어 남조선 대표단이 대동강역 주변을 지나 통일거리로 통과한다는 연락을 받으면
밤 12시라도 관할 주민들을 비상소집해서
양각 도다리와 대동강 역 주변 도로를 깨끗하게 쓸고 닦는데
도로 연석은 비눗물로 닦는 정도이다.
특정지역의 도로 연석은 찰떡을 굴려 먹을 수 있을 정도 혹은 떨어진 껌을
다시 씹어도 괜찮을 정도로 깔끔하다.
깨끗한 걸레로 비누와 물로 자기가 사는 집 방안처럼 깨끗하게 닦고 검열을 받아야한다.
특히 남북정상회담(북남수뇌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될 경우에는 초비상이 걸린다.
남측 대통령이 참가하게 될 환영 행사장 주변은 호위총국의 지휘로 철통같은 경계 보안이 이뤄진다.
육로 방문일 경우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를 포함해
방북 경로에 대한 경계가 시작되며
차량이 통과하는 주변 지역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펼쳐진다.
또한 환영행사가 펼쳐질 장소와 부근은 크레인까지 동원돼 새로 단장하고
평양 시민들이 각 구역별로 인민반별로 대거 동원돼 시내 주요 거리 청소도 모두 마쳐야한다.
이런 경우에는 인민반별로 청소구역이 정해져 있어
누구도 예외 없이 동원돼야 한다.
중앙당 가족이나 보위부가족 등이라고 해서 결코 예외이거나 빠질 수가 없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 기간에는 보통 아침 5시에 인민반장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깨운다.
모여든 인민반원들은 주변거리는 물론 담당구역을 돌며 쓸고 닦는 것은 물론
가로수 아래 부분에 횟가루(구운 석회석가루)를 칠한다.
평양의 대표적 대동교나
옥류교의 다리 난간과 철제 난간들을 물걸레로 닦는 것은 물론이고
대규모 군중시위나 퍼레이드를 할 경우에는
김일성 광장의 바닥을 중심가에 거주하는 여며어리, 창전거리 아파트 거주민들이 총동원돼
쓸고 닦고 물청소까지 마쳐야 하며 행사직전에는 먼지 한 점 없는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지만
자기가 사는 집주변과 마을을 깨끗이 한다는 보람을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또 오랫동안 마을주민들이 함께 모여 일을 하다보면
이웃 간에 정도 쌓이고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아침 7시가 되면 직장인들은 출근하고
, 직업이 없는 주부와 노인 등 부양가족들은 낮에도 청소를 계속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청소사업에 잘 나오지 않는 세대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직장에 통보해 당 위원회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며
평양시민에게 공급되는 특혜에서 제외될 수가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누적되면 자칫 평양 추방령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평양시내에서 가장 변화된 모습을 꼽으라고 한다면
길거리마다 조성된 푸른 잔디밭이다.
평양 버드나무거리 외에도 시내 곳곳에 수많은 잔디밭이 정원처럼 가꿔지고 펼쳐졌다.
잔디가 푸르싱싱하게 잘 자란 거리도 있었고,
뿌려놓은 잔디 씨가 햇볕에 마르지 않게 비닐막을 덮어놓거나
물을 준다거나 잡초를 뽑는 일등은
모두 각 직장별, 인민반별로 잔디밭 담당구역을 정하여 자발적으로 관리한다.
필자가 거리를 지날 때 잔디밭에 물을 주는 살수차도 보였고,
커다란 비닐물통이 실린 손수레도 보았으며
양동이와 물조리개로 물을 주거나
호스로 잔디밭에 물을 뿌리는 주민들도 보였다.
이처럼 잔디밭 가꾸기와 녹지화, 공원화 작업에도
인민반별로 조직된 일반 시민들의 참여로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7. 도시환경 조성을 위한 공공사업은 군인들과 학생들도 참가한다
평양시 산하 각 구역 도시미화사업소가 하는 사업들은 무수히 많다
. 도로 환경미화원, 도로 청소기운행 전문 환경미화원,
쓰레기 화물차 운전 환경미화원, 공공기관 건물과 시설물들을 담당하는 환경미화원 등
수많은 분야를 관할해야하며
그 외에도 각종 녹지사업은 물론 납골당운영까지 하고 있다.
평양시는 1998년부터 각 구역에 유골보관실을 만들기 시작해
현재는 평양 전 구역에 골고루 설치됐다.
이처럼 미화사업소의 업무가 방대하다 보니
전문적인 미화원들만으로는 도저히 관리가 불가능하다.
자연적으로 일반 평양 시민들이 도시환경미화에 필수적으로 동원되어야 한다.
특히 한 겨울 제설작업은 각 구간별로 인빈반 별로 인민들에게 할당되나
때로는 엄청난 폭설이 내리면 군인들도 동원된다.
이와는 별도로 특별한 국가행사나 도시환경 조성을 위한 공공사업이 벌어질 경우
군인들이 대거 동원되어 참가한다.
대대적인 도로 보수작업이나 하수구 사업,
궤도전차 공사, 아파트와 빌딩공사 등에는
인민군 군인들이 대거 동원되어 작업을 해왔다.
또한 소학교와 고등중학교 학생들
혹은 대학생들도 나름대로 만수대 언덕 기념탑을 청소하거나
여러 가지 공공 작업에 참가하여 임무를 마쳐야 하는 경우도 있다.
▲ 김일성광장을 청소하는 담당 인민반 청소담당자.
청소를 하는 여성은 전문적인 환경미화요원이 아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청소기계로 도로 주변의 광장을 청소하는 인민반 청소담당자.
이 남성도 전문적인 환경미화원이 아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인민반 주민들이 차도 연석을 청소하는 모습.
얼마나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지 찰떡을 굴려 먹어도 될 정도라고 한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자신들의 가게 앞을 물청소하는 시민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인민반 주민들이 차도 연석을 청소하는 모습.
얼마나 깨끗하게 청소를 하던지 씹었던 껌을 버린후 다시 입에 넣어도 될 정도라고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여성 교통보안원이 차도에 떨어진 쓰레기를 쓸어 담고 있다.
모든 시민들이 이처럼 애착을 갖고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 곳이 평양이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한겨울 폭설이 내리면 각 구역 인빈반별로 제설작업을 한다.
때로는 엄청난 폭설이 내린 경우에는 군인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지역 인민반원들이 인도에 조성된 잔디밭 녹지를 손질하고 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보통강변에 사는 주민들이 차도 주변과 도로 연석 등을 물청소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만수대언덕의 대형 기념탑을 청소하는 당번날이 돌아오자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출처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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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편)
<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96회) |
2018.4.23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자체 생산한 새 전동차운행은 평양지하철 역사의 분기점
필자가 볼 때 평양지하철의 역사는
자체기술로 생산한 새로운 최신형 전동차가 운행된 2016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
최신형 전동차가 도입된 후에는
기존과 달리 전동차 안에 김일성 김정일 두 지도자 영상(사진)이 걸려있지 않았다.
또한 새 전동차가 도입되기 전에는
모든 전동차들의 앞부분 좌석을 특별좌석으로 분류해
‘전쟁로병 자리(우대석)’만 마련했으나
새 전동차가 도입된 후에는 ‘노약자석과 임산부석’도 추가적으로 마련되었다.
또한 1973년 평양지하철이 정식 개통되면서는
그 이후 중국 장춘시객차공장(장춘궤도객차주식유한회사)에서 생산한 새 전동차를 사용했으며
2000년부터는 독일에서 생산한 신형객차를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나
2016년 1월부터 운행되는 신형 전동차는
북의 자체기술력으로 생산해 보급하고 있다는데 큰 의미가 있어보였다.
또한 그동안 평양지하철 전동차는 자동시스템으로 열리고 닫히는 서울지하철과는 달리
수동으로 열거나 닫아야 했으며
역내 열차봉사원이 표지판을 높이 들고 수신호로 지하철 도착과 출발 신호를 보냈으나
신형 전동차는 출입문이 자동으로 개폐 되었다.
또한 전동차 객실 내부는 디스플레이가 설치되어
전동차가 어느 역을 통과하는지 알도록 했으며
플랫폼에도 전광판을 설치해 승객들의 주의사항을 알리고 있었다.
또한 과거 필자가 처음 지하철을 탑승하던 시기에는
지하철 내부와 승강장 전체 공간을 절전모드로 전환해서
전체적으로 침침하거나 어두웠으나 김정은 위원장이 취임한 이후에는
역사 내부와 에스컬레이터 통로,
승객이 탑승하고 하차하는 승강장 공간 등이 매우 밝고 환했으며
전동차들도 전력부족으로 인한 열차 지연 현상은 거의 없이 정상적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북한 자력갱생의 상징인 첫 전기기관차 ‘붉은기’ 1호.
1961년도산 이 전기기관차가 오늘도 힘차게 달리고 있다고 한다.
[사진-조선신보 갈무리]
▲ 평양지하철 천리마선 봉화역 역사 앞에선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지하철 천리마선의 승리역 지하계단 입구.
평양은 각 지하철역마다 역사건물이 있으나 승리역만 역사가 없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황금벌역 역사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건국역 역사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지하철 매표소 앞에선 평양시 승객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지하철 매표소 입구 앞에 선 필자. 뒤로 노선 안내판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는 승객들과 지하철 남녀 보안원들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지하철 개찰구 모습. 정액권 티켓을 구입한 승객은 개찰구 위에 표를 찍고 출입할 수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가장 붐비는 역은 승리역, 가장 화려한 역은 영광역
평양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에 도착해 표를 구입하고 티켓 개찰구를 통과해야한다
. 그리고 지하 플랫폼으로 가기 위한 첫 행동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에스컬레이터를 타야만 한다.
유사시 방공호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돼
일반 승강기(엘리베이터)가 비상용으로 있고,
에스컬레이터도 있으나 평소에는 승강기는 개방을 안 하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 외에 다른 이동 루트나 방도가 전혀 없다.
지하 150-200미터로 내려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타니
마치 끝없이 깊고 깊은 거대한 동굴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오르내리는 승객들은 과거와 달리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거나
덕담을 나누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었으며
친구들과 가벼운 장난을 치는 학생들이나 연인끼리 팔짱을 끼거나 밀착한 채
오르내리는 모습도 간혹 목격할 수 있었다.
의복들도 더욱 화려해지고 고급스러워졌으나
퇴폐적인 의상을 입은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평양지하철 요금은 2000년대 초반까지 국돈(북 화폐)으로 2원이었으나
2010년 이후에는 5원으로 인상됐다.
평양지하철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매표소에서 현금을 주고 일회용 티켓을 구입해도 되고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승객들은 정액카드를 구입해서 카드를 찍고 개찰구로 출입할 수 있다.
일회용 표나 정기 카드 없이 개찰구를 통과하려고 시도하면
개찰구 게이트가 닫힌다
. 필자가 자세히 살펴보니
카드 없이 개찰구를 지나가려고 하는 외국관광객들이 간혹 있었으나
평양시민들은 그런 승객들이 전혀 없이 모두가 질서를 잘 지켰다.
필자가 시간을 측정해보니 가장 깊은 지하철역은
개찰구에서 승강장(플랫폼)까지 5분가량 걸렸다.
전동차는 보통 5∼7분 간격으로 다녔으나
혼잡한 출퇴근 시간대에는 2분 간격으로 왔다.
원래 지하철 운행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이며
보통 운행간격은 5분으로
아침과 저녁 출퇴근시간대에는 3분 간격으로 운행되었으나
2017년 초반에 확인결과 오전 5시 30분부터
오후 11시30분까지 연장 운행을 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 아마 배차시간과 시작시간, 마감시간에 관한 문제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인 듯 했다.
승객들의 표정을 보니 학생들도 조잘조잘 떠들지 않고 조용했으며
일반 성인들도 전동차 내에선 거의 말이 없이 침묵을 지키며 평온해보였다.
간간히 휴대전화(손전화) 사용자가 눈에 띄었다.
북에서는 휴대전화로 로동신문을 읽을 수도 있고
갖가지 생활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인트라넷이 깔려있어서
과거와 달리 손전화에 집중하는 젊은 승객들도 많아졌다.
또한 지하철 창문을 응시하거나 독서에 집중하는 승객들도 보였고
컴퓨터 노트북 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태블릿을 사용하는 승객은 보지 못했다.
독서를 즐기는 승객들은 차량을 기다리는 승강장이나 객차 안에서 흔하게 목격되었으며
객실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플랫폼에 설치된 신문 게시판에 모여 머리를 들이밀고
조용히 신문을 읽는다.
물론 지상에는 신문을 판매하는 가판대도 있으나
모든 역의 승강장에는 로동신문 판독대를 설치해서
로동신문 6면을 그냥 서서 편하게 읽으면 되기 때문에 그런 듯했다.
아무튼 지나칠 정도로 질서정연하고
조용한 승객들의 빈틈없는 모습들이 나에게는 언제쯤 익숙해지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이나 서방세계 지하철처럼
스마트폰을 사용하느라 옆 사람을 처다 보지도 않는 삭막한 풍경도 없었다.
서로 밀치고 밟고 떠밀고 저녁에는 술 먹고 토하고 여성들을 추행하고,
소매치기가 들끓는 서울지하철과는 비교되었다.
왁자지껄한 서울지하철에 비해 모두 조용하고 차분하고 격조 있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서로에 대한 예의를 잘 지키는 평양의 승객들에게 매료되었다는 의미이다.
지하철역 가운데 가장 붐비는 곳은 승리역이었다.
승리역사를 빠져나오면 주변에 만수대언덕, 김일성광장,
인민대학습당, 평양제1백화점, 평양학생소년궁전,
만수대의사당 등 중요한 국가기관 건물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항시 붐볐다.
특히 김일성광장에서 평양시민궐기대회나
군사퍼레이드나 열병식 등이 벌어지는 국가행사 날이 되면
수많은 인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간혹 안전사고도 발생하기도 한다.
지하철 내부가
다른 역에 비해 가장 크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역은 아무래도 영광역이다
. 선로 주변 풍경도 웅장했고
높다란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화려한 빛을 뿜어내는 영광역은
평양역(국철)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근무하는 로동당 중앙당 청사와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역이다.
승강장에는 3미터 높이의 김일성 동상 입상이 설치돼 있고
천정에는 대형 무리등(샹들리에)이 달려 있어
은은한 조명 아래 동상을 더욱 돋보이게 했으며
승강장 전체 벽면은 갖가지 벽화로 장식돼 있다.
모든 평양지하철 역사에는 지상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는데 반해 영광역에만 두 개가 있다.
▲ 지하철 전동차를 타기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승강장을 내려가는 필자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모습. 우측 두 개는 올라가고 맨 좌측은 내려온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서울지하철과 평양지하철
평양에 지하철이 개통된 시기는 서울지하철 1호선보다 1년 빠른 1973년이었다.
1년 먼저 개통했지만 외형적인 발전은 서울이 더 빨랐다.
그러나 서울지하철이
아무리 눈부신 초현대식 최첨단 장비나 설치물로 운영이 된다 해도
서울지하철과는 달리 인민의 지하궁전으로 불리는 평양지하철은
건축형식과 양식에 있어 주체성과 민족성이 철저히 반영되었다.
설계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하철 공간을 활용한 결과물을 볼 때
철두철미하게 인민들의 이익과 편의를 우선시하였음을 익히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미국 자동차 전문매체 ‘잘롭닉(Jalopnik)’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지하철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세계 1위에 ‘서울 지하철’을 선정했다
. 이어서 ‘평양 지하철’은 세계 9위로 선정했다.
같은 남북조선 우리민족이 모두 10위권 안에 들었다니 기쁘기 그지없다.
그러나 서울지하철은 단지 시설의 편리함과 첨단장비를 적용한
현대식 운영방식임을 인정하나
출퇴근 시간에는 마치 전쟁터를 불사할 만큼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거기에 따른 폐단 또한 매우 부정적이다.
필자는 서울지하철이나 미국의 지하철과는 판이하게 다른
평양지하철의 일상을 느끼기 위해 방북 시마다 반드시 지하철을 탑승하였다.
처음 탑승했을 때 보다 최근에는 새로운 전동차가 운행되어
매우 밝고 화사한 느낌을 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플랫폼에서 빨간 피켓을 들고 전동차의 도착과 출발 신호를 보내주는
아리따운 여성봉사원들과 제복을 입고
전동차를 운전하는 기관사들의 모습은 그대로였고 여전히 이채로웠다.
그동안 운행되던 전동차 객실내부는 나무벽면으로 처리되어
포근한 이미지를 주었는데 새로운 전동차는
최첨단 금속성 내장재로 마무리하였기 때문에
서울지하철을 탄 것인지 평양지하철을 탄 것인지 어리둥절했다.
그렇다고 모든 객차가 새 전동차로 교체된 것은 아니다.
이제 조금씩 늘려가는 추세에 있다
. 아무튼 늘상 인파들로 몸을 부딪혀야하는 복잡한 서울지하철과는
사뭇 다른 평양지하철은 운치와 낭만 그 자체이다.
평양지하철만의 특징은
캡슐카나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오르내리는 등산철도를 연상시킬 정도로 가파르고 까마득하다.
보통 10∼30m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도착하는 서울과 달리
평양에서는 지하 150∼200미터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
도대체 그 옛날 70년대 초반에
어떻게 그런 고도의 에스컬레이터 기술력을 확보했는지 미스터리이다.
서울에도 깊은 곳에 설치된 지하철 궤도가 있는데
이는 1996년 11월 개통한 8호선 남한산성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깊이가 겨우 지하 56미터이니
그야말로 평양 지하철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
서울지하철은 서울시와 위성도시 전체를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는데 비하면
평양지하철은 십자형의 2-3개 노선이기 때문에 매우 단조롭다.
또한 서울지하철은 354개의 역을 보유하고 있고
수도권에만 562개의 전철역이 있다.
부산지하철을 비롯해 지방의 지하철을 모두 합하면
전국적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평양지하철은 모두 17개의 역만 보유하고 있으니
숫자적으로는 비교가 되지는 않는다.
노선도 평양은 3개 노선이지만
서울은 10개 노선이며, 지하철의 길이도 서울은 332Km이지만
평양은 39Km 정도라 서울지하철 길이의 10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지하철은 10개 노선의 지하철이 하루 5백만 명을 태우는 반면
평양지하철의 하루 이용객은 대략 30만 명으로 매우 약소한 규모지만,
인구대비 남측과 북측은 절반 수준이며
서울과 평양인구는 4분의 1수준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평양에도 출퇴근 시간대는 혼잡한 편이다.
평양지하철은 각 역의 명칭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추상명사이다.
지하철역 이름이 하나같이 전투적이고 혁명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봉화, 승리, 통일, 개선, 전우, 붉은별역 등이 사용되고 있으나
애초에는 봉화역이 당창건,
승리역은 공화국창건,
통일역은 혁명전통,
개선역은 조국개선,
전우역은 토지개혁,
붉은별역은 경제국방역 등으로 잠정 결정됐으나
최종 승인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현재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기둥과 엘리베이터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밖에 없는 서울지하철과 달리
평양지하철은 각 역마다 역사(건물)가 자체적으로 있으며
지상의 역사가 없는 지하철역은 승리역이 유일하다
. 아울러 지하철 역사 출입구가 모두 하나뿐인데 반해
영광역만 두 개다.
또한 서울지하철은 지상 구간이나 고가 구간에도 전동차 철로(궤도)가 설치돼
지하철 전동차가 달리는 반면 평양지하철은 철저하게 땅속만을 달린다.
또한 서울지하철 노선은 교각 또는 해저 터널을 통해
한강을 가로지르는 반면 평양지하철은 대동강을 지나지 않고 오로지 땅 속만을 통과한다.
그 결과 대동강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에
동평양 쪽에는 지하철 자체가 없다.
대동강을 건너려면 지하 전동차 궤도가 지상으로 나와야 하는데
평양 지형상 급경사가 돼 곤란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북 당국은 대동강 하저터널을 뚫어
동평양 쪽으로 지하철을 연결하려고
5∼6차례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고 한다.
평양지하철 객실 안에서도 서울지하철처럼 크고 작은 사건사고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 가장 흔한 것은 승객들의 돈주머니를 터는 소매치기인데
대부분 지방에서 원정 온 부랑아들이 그런 짓을 저지른다고 한다.
필자도 가짜 산삼을 진짜 산삼으로 속이는 어린 학생들에게 대동강변에서 당한 적이 있었다.
▲ 플랫폼이 하나로 형성된 평양지하철역 광경. 이런 경우 플랫폼을 가운데 두고
상행선, 하행선 전동차 철로가 양쪽 벽면 쪽으로 배치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플랫폼이 두 개로 형성된 평양 건설역 플랫폼 모습.
이런 경우 상행선, 하행선 전동차 철로가 서로 쌍둥이처럼 붙어있듯 나란히 배치된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 전동차가 도착하자 탑승하려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전동차 도착과 출발 출입문 개폐 여부를 기관사에게 수신호로 알려주는 여성 철도봉사원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제복을 입고 전동차를 운전하는 기관사 모습.[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전동차 내부 모습.
대체적으로 생각에 잠겨있거나 조용히 독서나 손 전화를 보는 승객들이 많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평양 지하철은 그 자체가 미술관
지하철을 타 보면 그 도시의 정신과 철학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 있듯,
서울지하철과 평양지하철은 마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상징처럼
각기 고유한 특성들이 뚜렷하게 대비되었다.
어느 평양의 인민은 지하철에 대한 자부심에 대해 말하기를
“심청이는 인당수에 뛰어들어 용궁을 보았다지만
우리 인민들은 지하로 100메타만 내려가면 용궁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지하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평양에 있는 철도박물관과 전차박물관에 가면
평양시민들이나
북녘의 인민들이 왜 그런 자부심과 긍지를 지니는지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장식무리등)는
오색찬연한 꽃다발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장식됐으며,
곳곳에 아름답게 장식된 고풍스런 대리석 기둥들이 줄지어 있고
아치형으로 처리한 천장과 벽화들은 차량을 기다리는 인민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그 웅장함과 예술적 분위기는 평양지하철이 뉴욕이나 모스크바 지하철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승강장의 선로 벽면에도 모자이크화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내부 인테리어 장식에는 대리석, 부각, 조각작품들이 전시되었다.
특히 ‘부흥역’과 ‘영광역’은 내부가 가장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
얼마 전까지
해외동포나 외국인 관광객들이 단골로 직접 탑승하고 견학할 수 있는 구간이었다.
이 두 곳은 특히 지상역사를 들어가 개찰구를 통과해 지하를 내려가면
대형 샹들리에와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고,
벽면에는 혁명을 상징하는 벽화와 조각으로 장식돼
지하 궁전을 연상하도록 해
마치 ‘지하의 평양’이라 일컬을 정도로 매우 화려하고 인상 깊은 곳이다.
특히 세계에서 유일하게 지하공간을 격조 있는 독특한 미술관으로 보이도록 한 일등공신은
이곳저곳에 그려진 화려한 장식 벽화 때문이다.
그 자체가 ‘벽화 미술관’이었다.
지하철 특유의 어둡고 무거운 공간을 적절한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지혜와 경륜이 놀라울 뿐이다.
에스컬레이터에서 하차해 넓고 큰 계단을 내려오면 플랫폼(승강장) 공간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큰 계단을 내려오기 직전의 큰 벽면에는
어느 역을 가던지 “선군 조선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문구가 적혀있거나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과 관련된 사실화나 혁명화를 대형 벽화로 그려 놓았다.
또한 벽과 기둥들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양식의 모자이크나 소조로 장식했는데
인민들의 노동의 삶과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삶을 다양한 형식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영광역에 모셔진 김일성 동상과는 달리 개선역 플랫폼 공간에는
양복정장을 입고 오른손을 들고 있는 김일성 주석의 황금 반신상이 모셔져있다
. 주변공간은 상대적으로 어둠속에 있는데 반해
동상은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며 지하공간을 압도했다.
승강장 샹들리에 조명이 비추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뿐 아니다. 개선역보다 더 멋지고 화려한 동상은 광복역에 모셔진 김일성 동상이다
. 이 동상은 평양지하철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화려한 기념물 중 하나일 것이다.
청년시절의 김일성 주석이 항일투쟁하던 무장 복장을 입고
그 위에 외투를 걸친 모습을 형상화한 이 동상은
침침해야 할 지하에 한 송이 찬란한 꽃이 피어 있는 듯 보였다.
순백의 샹들리에 조명아래 흰색 둥근 아치 벽면 앞에 모셔진 동상은
다른 동상들과는 달리 유난히 황금색이어서 눈이 부셨다.
황금동상은 지금까지 보아온 만수대 언덕 동상이나
다른 동상들과는 달리 완전히 순황금 동상으로 보여
매우 찬란했으며 지하철의 모든 작품들과 조형물들중에 가장 인상 깊은 랜드 마크가 되었다.
필자는 지하철 대형벽화가 17개 역마다 각기 그 이름에 걸맞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부흥역’의 벽화는 젊은 노동자들이 직장과 일터로 나가는 역동적인 모습을 그렸다거나
‘영광역’의 경우에는 전후 폐허가 된 평양 시가지를 복구한 모습을 형상화했다.
어느 역에 가면 철로 벽면에는 ‘조선독립만세!!’라는 글씨와 함께
일제 강점기 3.1운동 장면을 그린 대형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대개 선로 안쪽에는 전쟁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벽화나 혁명화가 그려져 있었다.
어느 역에 가면 플랫폼 기둥에는
“여성해방만세!”라는 제목의 모자이크벽화가 그려져 있고,
‘황금벌역’에는 황금과일과 풍성한 가을을 연상하는 타일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런 그림들은 캔버스에 그린 대형 유화처럼 보이지만
한 발짝 다가가면 조그만 색자기(타일) 쪽을 이어 붙여 만든 소위
‘우리식 쪽무이(모자이크) 벽화’ 방식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벽화의 크기와 규모에 놀라고
아름다운 색상에 다시 한 번 놀란다.
대형 유화같이 보일 정도로 섬세하였고 색깔도 화사하고 선명했다.
또한 동판화도 아주 많았다.
대미결전을 상징하는 청동판화들을 보면
소위 남조선 농부 일가족이 주한미군기지 부대 앞에서 출입금지 간판을 보고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습을 그린 장면,
지하철 공사를 위해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등을 걸어놓았다.
또한 항일투쟁 당시 백두밀영에서의 회의장면
, 혹은 항일 돌격대가 나팔수의 신호와 함께
일제 적들을 물리치는 장면 등의 동판화가 거의 모든 역마다 부착돼있었다.
▲ 과거에는 전력을 아끼기 위해 하루 중 잠시 절전모드로 전환하여 절전했다.
절전 모드로 바꾼 승강장 공간에 필자의 얼굴이 빼꼼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절전모드에서 다시 밝게 조명이 켜진 지하철 승강장 공간.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외국인 담당 안내원과 함께 승강장 공간을 돌아보는 필자.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승강장 벽화 앞에 선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승강장 신문판독대에서 로동신문을 읽고 있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동판화 그림이 부착된 통일역 승강장 기둥.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개선역 승강장 공간에 모셔진 김일성 주석의 반신상 황금동상을 배경으로
상행선과 하행선 전동차가 정차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개선역 승강장 공간에 모셔진 김일성 주석의 반신상 황금동상.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광복역 승강장 공간에 모셔진 항일투쟁 복장의 김일성 황금동상.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김일성 주석이 지하철 건설현장을 현지지도하는 모습을 담은 벽화.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지하철 공사 노동자들이 땀흘려 지하철 공사 작업을 하는 모습을 담은 벽화.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신형 지하철 전동차를 보니 김종태, 신영복 선생이 생각나다
지하철 내부와 플랫폼에서는 외국인이 사진촬영을 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제한은 없었다.
그러나 지하철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에는
군사시설로 전환되기 때문에 사진이나 영상 촬영을 금지한다.
필자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신형 전동차에 탑승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승객들의 표정은 대체로 수줍어하는 느낌이었다.
이때 불현 듯 잠시 김종태, 신영복 두 선생이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생각난 이유는 2016년 1월 1일부터 새롭게 운행된 이 지하철 전동차가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에서 만든 제품이기 때문이다.
제품을 만든 회사이름이 1969년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에서
가장 주동자급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 김종태의 이름을 땄기 때문이며
신영복 선생도 그때 김종태와 함께 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의 연혁을 보면,
처음에는 1945년 11월 평양철도공장(서평양철도공장)으로 설립되어
1961년 전기기관차를 처음 생산하면서
'평양전기기관차공장'으로 발전됐고
다시 회사 명칭이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로 변경된 것이다.
김종태 선생이 사형당한 뒤 해주사범대학교 이름도
‘김종태사범대학교’로 바뀌었으며
평양전기기관차공장도 ‘김종태기관차연합기업소’로 바뀌었다.
재판결과 김종태 선생은 사형을 언도받아 결국 집행되었고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신영복 선생은 20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었다.
북 자체능력으로 제작된 새 전동차가 탄생한 배경을 살펴보면
김정은 위원장의 대담성과 추진력에 따른 결과물로 보였다.
2015년 7월 20일 김정은 위원장이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며
“우리식 지하철 전동차를 개발”할 것을 최초로 지시했다.
원래 이 기업소는 객차, 전동차, 궤도전차 등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다양한 공장들과 설비들을 갖추고 있어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완성 시기가 문제였다.
김 위원장이 신형 전동차를 당창건 기념일까지 개발해 완성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 그런데 그 결과, 주변의 걱정을 불식시키고 불과 석 달 만에 전동차 제작에 성공한 것이다.
그후 그해 10월에 다시 이곳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은 큰 만족을 표시하였고
드디어 그해 11월 19일 밤 10시30분 새로 개발된 지하철 전동차의 시운전 행사에 참석했다
. 개선역에 직접 현지지도를 나와 통일역, 승리역, 봉화역,
영광역까지의 구간을 왕복하는 운행 과정을 지켜보았으며 큰 만족을 표시했고
관계기술자들과 플랫폼에서 기념촬영도 했고 전동차에 직접 시승도 했다
그 후 2016년 새해 1월 1일부터 운행을 시작하기 위해
2일 토요일, 새로운 지하철 전동차량이 지하궁전에
자강력 제일의 기적소리를 뿜어내며 운행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박정희 정권 당시 통혁당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김종태(맨 우측) 선생과
신영복 선생(우측에서 네 번째).
김종태는 사형이 집행됐고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20년형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기존 전동차는 ‘전쟁로병우대석’, 새 전동차는 ‘임산부석’과 ‘노약자석’도 추가
자체기술로 개발 생산한 신형 지하철 전동차는 지금도 운행을 하고 있지만,
서너 대만 교체되어 일부 시간대에만 운행되고 있었다.
보통 출퇴근 시간에는 약 5~7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었으나
워낙 지하철 노선 전체 구간이 짧다보니
신형 전동차가 쉬지 않고 반복적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사실은 전동차 객실 출입문 위에는 차량이 통과하거나 정차하는 역과
주행속도 등을 표시하는 전광판(디스플레이)이 각 객실마다 설치돼 있었으며
전자광고판 스크린도 설치되었다. ‘
붉은별역’과 ‘부흥역’을 잇는 천리마선에 투입된 최신형 전동차는
차량 내부 조명이 기존 전동차량보다 밝아졌고
객실은 핑크색 손잡이와 좌석들이 설치되어
여성 승객들의 취향을 고려한 듯하였고 노약자나 장애인 전용좌석이 설치되었다.
그동안 기존의 평양지하철 전동차 안에는
서울지하철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좌석이 있었는데
이는 전쟁참가 노병을 위한 좌석이 따로 마련됐다는 사실이다.
다른 나라처럼 전동차 객실 내부 양쪽에 노약자나 임산부,
환자, 장애인들을 보호하는 좌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화국영웅이나 로력영웅 혹은 영예군인(상이군인),
전쟁참가로병(6.25전쟁 참전경력이 있는 노인)들의 자리가 우선적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과연 선군정치를 추구하는 사회다웠으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퇴역군인들을 사회적으로도 매우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새 전동차가 도입된 후에는 노약자보호석과 임산부석이 마련돼 있어
천만대행으로 생각되었다.
객실 내부구조는 버스처럼 가운데에 통로가 있고
양쪽으로 좌석이 배치돼 서로 마주보면 앉게 돼있는 구조이다.
그동안 경로석이나 여성전용칸이 별도로 없이 로병우대석만 있었지만
배가 부른 임산부나 노인들,
환자들 혹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여성들이나 유아를 업은 산모들이 객실에 나타나면
승객들이 순식간에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도 자주 목격했다.
또한 지하철 플랫폼에는 비디오 패널 광고도 새롭게 등장했다.
비디오 패널에는 심장약이나 아동용품 광고가 주기적으로 나왔으며
서방세계의 옥외 전광판처럼 생긴 플랫폼 전광판에는
승객들에게 당부하는 주의사항 글자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올라갔다.
또한 객실 출입문 위에는 전광 스크린에는 해당 전동차의 운행속도와 경유하는 역이 표시되었고
요일과 날씨는 물론 그날의 온도 습도등도 표시돼있다.
평양에는 평양지하철 외에도
통근형 전동차를 이용한 통근열차로 평양뿐만 아니라
신의주, 혜산, 무산 등지에서도 운행되고 있는데
이들 객차에도 전산화가 되어 디스플레이를 적용하는 중이라고 한다.
평의선, 평남선 국철은 1구역 대동강역 → 평양역 → 서평양역, 2구역 대동강역 →
평양역 → 보통강역까지 운행되고,
트램으로 불리는 무궤도전차는 서평양역에서 영광역 쪽으로 뻗은 선,
서평양역에서 부흥역 쪽으로 뻗은 선,
앞 두 갈래 선 중앙 쪽을 가로지는 선 이렇게 세 갈래로 나뉘어져 운행되고 있는데
더욱 편리하도록 현대식으로 변모중임을 알 수 있었다
▲ 기존 전동차 안에는 전쟁참가로병 우대석이 마련돼 있다.
그러나 신형 전동차에는 노약자와 임산부석이 추가로 마련됐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소에서 제작한 최신형 전동차가 플랫폼을 향해 진입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최신형 전동차가 출발하기 직전 출입문이 열려진 상태
. 객실 내부에는 여성 열차봉사원이 개폐여부를 점검하며 승객의 안전을 책임진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평양지하철의 역사를 알게 되다
필자 일행을 보호해주는
안내원과 해설자가 평양지하철의 역사와 좋은 점,
특징들에 대해 설명해주는 바람에 평양지하철에 대해 더욱 소상히 알게 되었다.
특히 여성 철도봉사원과 역무원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평양지하철은 제1차 7개년 계획기간 중인 1961년에 착공돼,
1973년 9월 남북노선 천리마선 즉 1호선이 개통됐고
그 뒤, 1978년 9월에는 제2단계 공사로 동서노선 광복역과 낙원역을 잇는 2호선
즉 혁신선이 완공됐고,
1987년에 봉화역에서 부흥역간의 연장공사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 평양지하철은 1957년 1월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께서
수도건설과 관련한 교시와 함께 평양지하철도 건설을 최초로 발기하셨습니다.
그 결과 1961년 지하철도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건설 초기부터 제4계단 건설에 이르기까지 수십 차례의 현지지도와
수백 차례의 교시를 내려주신 결과에 의해
오늘날의 웅장한 공화국 지하철도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안내원이 설명한 4단계를 살펴보면
1단계는 1973년 9월에 개통된 천리마선(붉은별-봉화역 구간 12km)을 말하며
2단계는 1975년 10월 개통한 혁신선 일부(락원역-혁신역 구간)를 말한다.
3단계는 1978년 9월 개통한 혁신선(혁신역-광복역 구간 추가 공사) 총 20km 길이를 완공한 것을 말하며
4단계는 1987년 4월 개통된 만경대선(천리마선의 봉화역에 영광역, 부흥역 연장)을 말한다.
정리하자면,
그동안 평양시내 지하철 규모는 2개 노선에
총 17개 역이며 총 연장 길이는 35km에 이르렀다.
그중에 천리마선이 20km, 혁신선이 15km이다.
별도로 추가 건설된 만경대선의 3개 역의 길이는 천리마선에 포함되어
총 길이가 24km가 되어 현재 총 길이는 39km이다.
결국 평양지하철은 40km에 가까운 길이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승차요금은 구간에 상관없이 당시에는 무조건 2원이었으나 지금은 5원이다.
노선도를 보면
동서노선은 혁신선 “광복 - 건국 - 황금원 - 건설 - 혁신 - 전승 - 삼흥 - 광명 - 락원”과
남북노선은 천리마선 “승리 - 통일 - 개선 - 전우 - 붉은별”이고,
만경대선은 “부흥 - 영광 - 봉화”이다. 현재 총 길이 24km인 천리마선과 혁신선 등 두 갈래로 나뉘며
경우에 따라 천리마선에 만경대선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동평양, 만경대 노선의 지하철을 추가 건설을 계획하였으나 아직 답보상태이다.
평양 최초의 지하철은 공화국 건국 25주년인 1973년 9월 6일 맞춰
1호선인 천리마선이 개통되어 1974년 8월에 개통한 서울지하철 1호선보다 1년 앞서 개통되었다
. 본래 총 17개역이 있었지만
김일성 주석 서거 후 유해가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에서 하차하는 혁신선의 광명역이 폐쇄돼
현재 16개의 역만 운영되고 있다. ‘광명역’은 ‘락원역’과 ‘삼흥역’ 사이에 있었다.
잘 알다시피 평양의 지하철은
핵 대피소를 겸해서 만들어진 방공호 기능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고심도(高深度) 지하철이다.
도시철도의 기능과 공습대비 방공호의 기능이 있다 보니
그동안 보안상 외국인에게는 천리마선의 부흥역(보통강호텔 앞)부터
영광역(평양역 앞)까지 1개 구간 정도만 부분적으로 개방을 해왔다.
그 후 점차 공개 구역이 넓어져서 관광객 이용가능 구간은
만경대선(봉화-영광-부흥 구간)과 천리마선의 영광역, 승리역 등
내부 장식이 가장 잘 된 몇 개의 역만을 외국인에게 참관을 허용했었다.
그러나 2014년도부터는 평양지하철의 모든 역사를 외국인 관광객에게 일제히 개방하고
직접 전동차를 탑승 가능하도록 허락했다. 해외동포나
외국인 관광객에게 처음으로 평양지하철 2호선(혁신선)의 이용도 허용된 것이다.
관광상품에 1호선(천리마선) 모든 역을 둘러보고
다음날 2호선의 모든 역도 다 방문하도록 했으며
개인적으로 안내원을 동반한 상태에서
모든 전철역의 방문도 가능해졌다.
외국인들이 1호선 부흥, 영광, 봉화, 승리, 통일, 개선, 붉은 별 등의 역들을 모든 역들을 둘러보고,
다음날 2호선의 광복, 건국, 황금벌, 낙원역 등 모든 역들도 다 방문할 수 있게 됐다.
혹은 1호선 역들을 다 방문한 후
평양시에서 최초로 하루 24시간을 여는 식당인 ‘해맞이 식당’을 방문하는 코스도 있었다.
또 외국인 관광객들은 1, 2호선을 모두 견학하고 개성시, 함흥시의 공업 지역들도 방문하고
, 외국인들에게 최초로 소개되는 평양시의 ‘경흥바’라는 동네 맥주집도 방문하는 상품도 있었다.
▲ 플랫폼에 마련된 전광판에는 반복적으로 글자가 올라가며 승객들 주의사항 문구가 뜨고 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전동차 객실 내부 출입문 위에는 전광판 디스플레이가 작동되어
전동차의 속도, 경유역 등을 표시해주고 날자와 날씨 온도 습도 등도 표시해준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승강대 신문판독대 옆을 지나는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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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 편
<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98회) |
2018.5.7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오토바이도 자전거와 함께 인민들의 중요 교통수단
김정은 위원장 취임 이후부터 북측 사회는 그동안 금기시 됐던 여성들의
자전거 타기 금지가 허용되는 등
비교적 자유롭고 파격적인 조치들이 내려지는 훈훈한 분위기가 엿보였다.
현재는 여성들도 자전거뿐 아니라 오토바이를 타는 것도 허용된다고 필자는 들었다.
이동 수단 중에 가장 수월한 것이 자전거다 보니 남성은 물론
여성들도 자전거를 많이 타고 있는데
이제는 젊은 여성들도 오토바이를 직접 몰고 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울러 여성이 오토바이 뒤편에 탑승해
남성 운전자의 허리춤을 꼭 붙들고 타고 가는 모습은
평양시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오토바이 이용자들은 평양을 비롯해 이북 각 지역에 골고루 늘어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국가 차원에서 오토바이에 대한 수요와 공급체계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듯 보였다.
몇 년 전 필자가 평양시내에 있는 평화자동차 대리점을 참관하던 날
우연히 금강 오토바이회사의 판매 대리점을 본 적이 있었다.
금강 오토바이회사는 지난 2013년
조중합작으로 세운 조선금원무역총회사 산하에 설립한 회사라고 한다.
필자가 2014년 당시 이 회사 총판매 대리점이 평양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란 적이 있었다
. 청진, 원산, 남포, 해주, 함흥 등지에 오토바이 판매소를 두고 있는데
판매량도 갈수록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오토바이를 구입해서 타고 다닐만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미 타고 다니는 듯 보였다.
다만 돈이 있어야 구입이 가능하기에
경제적 형편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쉽게 구입할 수 없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오토바이는
승용차, 화물차보다 연료비가 적게 들고 운전이 쉬워
인민들 속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교통수단 중에 하나임이 틀림없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평양이나 대도시에 거주하는 청년들 중에는
소위 ‘날쌘 제비’처럼 스포츠 클라스 스타일의 속도감 있는 오토바이를 선호하는 반면
나이가 든 중년층들은 소위 ‘말(馬) 안장형’이라 부르는 오토바이를 선호하는데
이는 운전자가 착석하는 안장이 넓고 푹신하여 편안하게 제작된 오토바이를 말한다.
그동안 필자가 만났던 여러 안내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1990년대는 주로 일제 중고 오토바이가 유행했다고 한다
. 이는 폐기되기 직전의 오토바이와 중고 오토바이를 중국에서 들여와
수리하거나 재조립해 유통된 것이라서 값이 저렴하다보니
웬만큼 여유가 있는 집에는 지방이든 도시든 집집마다 소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산 신형 오토바이가 수입되면서
온통 거리마다 중국산이 누비고 다녔으며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구매가 점점 많아져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구매자가 부쩍 많아지면서 가격이나 비용이 많이 들게 되자
아무나 구입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토바이 회사는 두 곳인데
이중에 하나는 평양의 조선부강회사이다.
부강회사는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오토바이를 생산해 팔고 있다고 한다.
이어서 2013년에 조중합작으로 세운 금강 오토바이 회사도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국산 오토바이를 생산하고 있는데
인기가 매우 좋아서 생산하자마자 무섭게 팔린다고 한다.
▲ 평양시 금강오토바이 판매 대리점에 전시된 금강오토바이 제품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시 부강오토바이 판매 대리점에 전시된 부강오토바이 제품.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부강오토바이 회사의 오토바이 기체 홍보 카탈로그.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운전자가 직접 오토바이를 몰고 있는 부강오토바이 홍보 카탈로그.
측별히 오토바이 매니아들을 겨냥을 한 홍보물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필자를 태운 승합차량 앞에 중국제 수입 오토바이가 앞서가고 있다.
뒷바퀴 가림막에는 독특한 꽃문양이 새겨져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역 앞에 주차된 중국제 수입 오토바이
. 이 오토바이에도 뒷바퀴 가림막에 독특한 꽃문양이 새겨져 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오토바이 ‘매니아족’과 ‘폭주족’이 생길 정도로 고급화되다
필자가 참관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평양시내와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보면
대부분의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안전을 위해 반드시 헬멧을 착용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간혹 헬멧을 안 쓰는 운전자도 눈에 띄었다.
또한 멋스럽게 치장을 하고 오토바이를 타는 청년들도 자주 목격했는데
그들은 소위 “오토바이 매니아”들로 간주될 정도로 여러 가지 면에서 돋보였다.
오토바이 매니아들의 필수품 중에는 가장 중요한 헬멧은 물론이고
어떤 운전자 중에는 헬멧 대신 바이크 두건과 바이크 마스크 같은 것을 멋스럽게 착용한 것을 보았다
. 게다가 오토바이 운전자 전용 장갑, 슈트, 부츠까지 모두 한 세트로 착용한 후에
한껏 포즈를 잡으며 대도시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도 몇 차례 목격하기도 했다.
안내원의 말에 다르면 이런 연유로 북에서도 오토바이 폭주족이 생기면서
각종 사건 사고도 자주 발생한다고 했다.
남이나 북이나 오토바이 교통사고는 가정마다 가족들마나 늘 걱정거리다.
오죽하면 남측에서는 “오토바이 한 대를 구입하면
과부 한 명이 또 생겨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오토바이 사고율이 높아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데 북측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시는 물론 특히 평안남도 남포시, 평성 등지에 일부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 주축이 된 오토바이 폭주족이 늘어나다보니
인민보안성이 특별단속 지시문까지 내릴 정도라고 한다.
몇 년 전에는 뉴스에 보도된 대로 량강도 혜산시에서
청소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혜산경기장 쪽을 달리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오토바이 폭주족들과 서로 부딪쳐 2명이 숨지는 등
모두 11명의 사상자가 생기는 사건도 발생했고,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구역에서만 하루 4건의 오토바이 사고가 일어나 2명이 숨지고
여러 명이 다칠 정도로 오토바이 사고빈도는 남과 북이 비슷했다.
특히 중국과 국경지역인 혜산시는 가정의 절반 이상이
중국산 중고 오토바이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다보니
사고율도 높았다.
혜산시에서는 연료 가격이 급등하자 일반 성인들은 오토바이 대신
자전거를 주로 타고 다니는 반면
소수의 젊은이들은 과시용으로 오토바이를 많이 타고 다닌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올해도 지난해보다 오토바이 사고가 많이 발생했는데
량강도 혜산시 성후동과 위연동을 잇는 도로에서 새해 벽두인 1월 1일 오후 2시경
과속으로 달리던 양강도 군사학교 학생 7명의 오토바이 무리가
마주 오던 혜산통신기계학교 학생 4명과 부딪혀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 대개 운전 미숙이나 들뜬 기분에 속력을 내서 발생하며
특히 음주 운전 등으로 인해 오토바이 사고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오토바이 폭주족 단속은 인민보안부 호안과에서 집중적으로 단속을 한다고 한다.
▲ 고급스런 오토바이를 몰고 가는 미남 청년이 평양시내 어느 건물 앞을 지나가는 장면.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고급스러운 오토바이를 몰고 가는 평양시민이 승합차를 뒤따라오듯 가까이 다가오자
뒷 유리창에서 촬영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오토바이 구입비와 유지비는 다소 비싼 편이다
2010년도 들어 손전화(휴대전화)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오토바이도 급증했다.
그 이유는 손전화가 보급되며 상인들 사이에서 정보교환이 활발히 이뤄지다 보니
오토바이 시장도 활성화 됐기 때문이다
. 1980년대와 90년대는 상인들이 주로 자전거를 이용했으나
2000년대 들어 직접 오토바이를 몰며 장사를 시작한 결과물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오토바이는 가격이 얼마 정도이며
한 해 유지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알아보았다.
현재 순수한 중국산과 조중합작 국산 오토바이가 각각 있는데
가격은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비싼 편이었다.
우선 100CC짜리 오토바이는 대당 미화 1,200~1,300달러 정도였고
125CC는 2000달러 정도에 육박했다
. CC는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붙이는 연소 배기량 수치를 말하는 데
CC의 숫자가 클수록 제품의 규모가 크고 속도도 더 빠르다.
평양 보통강구역에 위치한 오토바이 전문공장인 조선부강회사는
2005년에 125CC짜리 ‘부강 CM125형’을 출시했는데,
이는 5단 변속장치와 공기냉각 장치 등이 성능에서 우수하다고 한다.
그러나 국산 오토바이가 중국보다 가격이 오히려 더 비싸고,
등록비도 더 많이 드는 것이 단점이라고 한다.
중국 최대 오토바이 생산업체 남방그룹이 제작한 125CC 제품 중에
‘Qingqi’라는 오토바이는 중국의 전자상거래 사이트 알리바바에서
위안화 3천-5천원(미화 500-900달러)에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1980년대부터 오토바이 수요가 서서히 증가하자,
북 당국은 이처럼 설비와 기술을 중국에서 들여다
합작으로 평양에 오토바이 공장을 차려놓고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오토바이 제작 회사가 바로 조선부강회사와 금강오토바이 회사다.
그동안 이런 조중합작회사를 설립하기 전에는 오토바이를 연간 6백만 대를 생산한다는
중국의 남방그룹에서 오토바이를 수입해 북 전역에 보급해왔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오토바이 구입 가격도 만만치 않았으며
등록비와 번호판 수령 비용도 비싼 편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오토바이 구입비는 수입제품이든,
국내 생산용 제품이든 저렴하지도 않고 비싸지도 않고 적절하다고 한다.
한편 오토바이 번호판을 발급 받으려면
경우에 따라 미화 300-500달러의 비용이 든다.
처음 오토바이를 구입하는 고객들에게는
합법적으로 신청하면 번호판을 주게 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전국적으로 운행되는 오토바이 활용 실태는 석유 값과 비례한다.
트럼프가 미국 시민권자 방북 금지조치를 내린 직후인
작년 9월 초 평양을 중심으로 휘발유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고,
지방에서도 연유 가격이 전반적으로 오름세를 보였다.
휘발유 가격이 평양에서 1kg당 18,000원으로 급등했고
며칠 후 23,000원까지 오르기도 했으며
이때 경유도 1kg당 12,000원대를 치솟았다고 한다.
이런 경우 인민들의 오토바이 운행 활성화 여부는 석유 값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휘발유 값이 폭등하면 평양시내 거리도 당장 오토바이들이 자취를 감출 정도로 타격이 심하다고 한다.
특히 오토바이나 자동차로 화물이나 승객을 운송하는 운수사업 계통들은 큰 타격을 받는다
. 그런 와중에도 기름 장사꾼들은 호기를 맞는 반면
일반 시장의 장사꾼들은 혼란스러워하며 요동하며 경기가 흔들린다고 한다.
▲ 평양시민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차분하게 이동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평양시민이 만수대 인근을 지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황해북도 시골길에 오토바이, 자전거, 손수레가 동시에 지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오토바이 운전자가 지인을 태우고 목적지로 이동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 외곽지역에서 순찰을 돌던 교통보안원이 지인들과 잠시 휴식을 취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농촌 인민반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서해갑문을 가는 길에 작은 도시를 통과하자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헬멧을 쓴 채 조심스럽게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오토바이 개인소유 허용과 박탈 정책
오토바이를 구입한 고객에게 번호를 발급하는 기관은 인민보안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보안성에서는
교통질서와 치안을 위해 오토바이 운행을 전면 금지하거나 통제령을 내리기도 한다
. 필자가 방문했던 2014년에는 급증하는 오토바이 숫자를 제한하기 위해
개인소유 오토바이 운행을 전면 금지시키기도 했다는 소식을 직접 듣기도 했다.
인민 보안성과 교통당국은 2014년 7월 중순부터 평양시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오토바이 운행시간을 규제한 적이 있었는데
개인용 오토바이는 아침 출근시간을 제외하고
저녁 8~10시까지만 운행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이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 만일 금지시간에 운행하다가 적발되면 무조건 회수조치 한다고 했다.
교통보안 당국은 그동안 상황에 따라 교통경찰에 해당하는 ‘교통보안원’과
헌병에 해당하는 ‘경무원’들의 업무용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모든 개인 소지 오토바이에 대한 운행시간을 새롭게 제정해
오토바이 운전자들에 대한 질서를 유지해왔다
. 오토바이 운행시간 규제는 야간운전을 금지시킴으로 대형 사고를 사전에 방지하고
동시에 휘발유 연료 공급 문제들을 고려해 에너지 절약의 목적도 있는 것이라고 한다.
시내 운행 금지령을 내리고 위반한 오토바이들은 압류해서 농촌으로 보내진다고 한다.
지난해는 오토바이의 개인소유를 허용하지 않는다며
개인들의 오토바이를 전부 회수했는데
최근 들어 다시 오토바이의 개인소유를 허용했다고 한다.
당국이 개인 오토바이 소유권을 박탈한 것은 작년 7월이었는데
다시 11월 초부터 인민보안부를 통해 소유권 금지를 해제했다고 한다.
또한 인민보안부 산하 군인상점에서도 오토바이를 판매도 하는데
이곳에서 팔고 있는 오토바이 가격은 시장가에 비해 훨씬 비싸지만
그 대신 개인의 소유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인증서가 포함되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군인상점은 개인의 오토바이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오토바이를 구입할 때 비용 부담이 크다.
함경북도의 경우 군인상점에서 판매되는 오토바이는 ‘보통강’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데
이 오토바이의 가격은 현재 중국 인민폐 9천 위안 정도의 판매가격에 비해 비싸다고 한다.
군인상점에서 거래되는 이 오토바이는 시장가보다 훨씬 비싸지만
등록에 필요한 복잡한 절차가 생략되어 매우 편리하며 확실한 개인소유 증서가 지급된다.
특히 평양의 모든 교통보안원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모두 ‘보통강’이라는 명칭이 크게 쓰여 있다 보니 시민들은 흔히 ‘보통강 오토바이’라고 부른다.
인민군, 교통보안원, 관료들이 타는 오토바이 종류
대중교통 수단으로 활용되는 오토바이들 중에 매우 특별한 오토바이 종류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영업용 택시 오토바이였다.
택시용 오토바이는 평양은 물론 해주, 신의주 같은 도시를 포함해
각 도, 군, 리 소재지들을 오가며 왕성하게 영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일명 ‘삼발이 오토바이’라고 불리는 이 오토바이는 영업용 택시 오토바이라고 보면 된다.
삼발이 오토바이는 운전자 뒤편에 서너 명의 승객들이 앉을 수 있도록
좌석틀을 만들었으며 풍(지붕이나 덮개)도 씌워
영업용으로 사용하는 오토바이를 말한다.
또한 이와는 달리 일반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기존의 뒷좌석을 떼고
수레를 부착하듯 좌석을 늘려 사용하는 등
기존의 평범한 오토바이가 기동력 있는 오토바이로 재변신한 것이다.
간혹 평양시내 거리에서 부부나 남녀 한 쌍
혹은 관광객들이 이처럼 자동차 바퀴 등을 이용해 만든 삼륜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는 것을
여러 차례 신기한 듯 바라본 기억들이 생생하다.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오토바이를 구입해 타고 다니는 부류는
모든 계층들과 모든 직업군을 총 망라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일반 인민들을 비롯해 군인들(조선 인민군),
경찰들(남성 교통보안원)은 물론이고
공무원(관료)들도 오토바이를 통해 자신들에게 부여된 공적 임무를 수행하거나
업무를 보고 있는 것을 손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인민군 병사나 장교들이 평범한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는 모습들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군인들이 일반 오토바이를 타고 부대로 출근하는 모습도 보이고
, 2차 대전 영화에 등장하는 독일군 병사들처럼
인민군들이 평양 시내에 질주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무엇보다 군인들 전용 삼발이 오토바이는 그 모습 자체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그 외형이나 기능 자체가 고풍스럽고 매력적이며 매우 실용적이다.
아울러 평소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벌어지는 열병식에 등장하는 전투용 오토바이들도 매우 독특했다.
또한 교통 위반자들을 단속하는 남성 교통보안원들은
대개 ‘대동강 오토바이’를 타고 평양시내를 질주하거나
운전자들을 단속하는 모습을 너무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교통보안원의 오토바이는 남측과 동일하게 일명 “교통 싸이카”라고도 불렀다.
.
▲ 현실에 맞게 개조한 실용적인 오토바이가 평양시내를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일반 시민들이 사용하는 개조된 오토바이가 시내에 주차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군인들이 타고 다니는 듯한 군사용 삼발이 오토바이가 주차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스쿠터처럼 앙증맞은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인민군 장병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김일성광장 열병식에 나타난 전투용 삼발이 오토바이.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완전무장한 경무원(헌병)이 동료와 함께 자신이 모는 오토바이 뒤와 옆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아침 출근시간이 되자 마을 입구 길목에는 학생들과 노동자,
관료들이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출근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춘추복을 입고 평양시내를 순찰하는 교통보안원,
오토바이는 모두 ‘보통강’이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여름이 되자 하복을 입고 오토바이를 운전하며 평양시내를 순찰하는 교통보안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추운 겨울이 되자 동복을 입고 오토바이를 운전하며 평양시내를 순찰하는 교통보안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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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편)
최재영 목사
2018.04.30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인민들과 뗄 수 없는 독특한 자전거 문화
필자에게 있어 평양은 한 겨울이든,
봄기운이 완연한 따듯한 날씨든,
아니면 한 여름 폭염이든 1년 365일
언제나 자전거 바람이 불고 있는 도시로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출퇴근 시뿐 아니라
하루 중 언제든지 자전거를 이용하는 시민들이 갈수록 눈에 많이 띄었고
최근에는 여성들도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됐다.
아울러 자전거 운전자의 이동수단뿐 아니라
작은 짐들을 실어 나르는 운반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자전거 이용자가 점점 늘면서
평양에도 자전거 전용도로가 생겼으며,
자전거 임대소와 자전거를 맡아 보관하는 보관소 시설까지 운영되고 있었다.
심지어 대동강 시민공원에는
웬일인지 자전거 주차료를 500원을 내야 할 정도로 비싼 요금을 받고 있었으며
시내 한복판에서는 자동차 운전자와 마찬가지로
자전거 운전자가 관련 법규를 위반하면
교통보안원에게 범칙금을 발부 받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교통규칙은 남측과 대략 비슷하지만,
평소 자전거 운전자에 대한 교통규칙이 엄격해서 그러지
자전거 운전자들은 의외로 준법정신이 강한 듯 보였다.
자칫 잘못하면 교통보안원에게 여지없이 범칙금 고지서를 즉석에서 발부 받기 때문에
나도 입장이 바뀌면 그럴 것 같다.
이처럼 자전거 보유자나 운전자들에 대한 질서와 법규가 엄격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전거가 많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자전거로 인한 범법사례가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와 같이 평양뿐 아니라 전국에서는 자전거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이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 대중교통 수단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서
자전거가 주요 운송 수단으로 대치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식량난으로 인해 인민들이 장사나 상업 활동에 나서면서
자전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 후 도시나 농어촌을 막론하고 자전거는 인민들의 생활필수품이자
생계수단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주요품목이 되었던 것이다.
현재 북에서는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자전거가 연간 20만대가 된다고 한다.
이북의 교통수단이라고 해서 중국이나 한국,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전거, 오토바이를 비롯해 자동차, 버스, 택시, 트럭,
지하철, 무궤도전차, 궤도전차,
철도, 선박, 비행기, 직승기(헬리콥터)등 매우 다양하다.
대부분의 교통수단은 크게 승객을 운반하는 수단과 화물을 운반하는 수단으로 나뉘는데
그중에서도 사람과 화물을 가장 조화롭게 동시에 운반하는 교통수단은 아마 자전거일 것이다.
자전거는 특별한 탑승 기술도 필요 없고 자동차처럼 연료비도 들지 않는다.
또한 자전거를 소유하는 것은 자동차처럼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남녀노유 할 것 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교통수단이다.
서방세계에서도 자전거가 교통수단의 일종이지만
대개 운동이나 여가용으로 주로 활용되듯이
북측도 머지않아 운동이나 여가용으로 활용될 날이 급속도로 다가올 것으로 예측된다.
북에서는 누구나 자전거 갖기를 원하지만 가격이 아주 저렴한 편은 아니라서
일반 가정의 절반 정도 가구가 보유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평양시내는 각종 대중교통이 활발히 운영되고 있어서
자전거 없이도 크게 불편함이 없지만
지방에서는 단거리, 장거리 이동에 자전거가 필수품이다.
▲ 자전거로 출근하는 평양시민들의 활기찬 모습. 대동강변 너머 멀리 주체탑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대동강변 자전거 전용 도로를 달리는 출근 길의 평양시민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황해북도의 가을 들녘을 달리는 농부의 자전거. 앞 뒤 짐칸에는 평균 용량이 초과되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시내 만수대 인근 아파트단지 부근에 주차된 자전거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 보통강 인도를 달리는 중년의 시민이 자전거를 타고 외출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자전거 면허증과 번호판 제도를 시행하게 된 까닭
필자는 틈나는 대로 이북의 자전거 문화에 대해 알고 싶어 만나는 관리들과 안내원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시민들을 붙들고 이것저것 구체적으로 알아보았다.
평양과 각 지역의 자전거가 대중화된 시기는
김일성 주석 서거 후인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한다.
구체적인 발단은 함경북도 청진과 강원도 원산 등지에서
일제 중고 자전거들이 대거 유입되면서부터라고 한다.
당시 일본을 오가던 북측 기업인들과 무역선원들,
무역업자들이 중고 자전거를 일본에서 저렴한 가격대에 대량으로 사들여와
시장에 내다 팔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로 인해 평양은 물론 지방도시와 농촌지역의 시장에도
자전거 전용 매장이 생길 정도로 자전거가 전국에 급속히 보급됐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무거운 짐이나
곡식을 운반하는 운반수단으로 자전거가 가장 적절했기 때문에 요긴했고
, 연료조달 등의 문제로 인해 대중교통들이 제 때 역할을 못하게 되자
자전거는 더욱 요긴했던 것이다.
아울러 자전거로 인해 장사도 활발해지는 효과가 있고
개인이 보유한 기동력 있는 교통수단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 당시는 마치 ‘교통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자전거가 인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각국 시민들의 자전거 이용률을 통계적으로 볼 때
일본은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자전거를 많이 타는 나라이다.
그러다보니 길거리에 방치된 자전거와 불법 주차로 인해
압류 당해 당국에 의해 보관중인 자전거가 엄청 많이 발생하게 됐는데
그 숫자가 한해에만 무려 300만대 이상이 됐다고 한다.
이 가운데 일부는 일본 당국에 의해 고철로 팔리고,
나머지 일부가 북으로 유입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워낙 수입된 자전거 수량이 많다보니
평양은 물론 지방 각 도시마다 자전거 보급이 활화산처럼 번지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교통법규상 자전거를 아무 데나 세워두면 안되고
지정된 장소에서만 자전거를 주차할 수가 있다고 한다.
불법주차를 하면 지역의 교통 당국에서 무조건 압류해 가져다가
보관소에 비치해두고 주인이 찾아갈 때 까지 메타기 요금부과 방식으로
압류된 시간부터 찾아가는 시간까지 카운트되어 요금이 부과된다고 한다.
또한 일본은 평소에도 자전거 값이 워낙 저렴하다보니
당국이 압수한 자신의 자전거를 찾아가려면 보관료 지불과 찾으러가는 시간과
노력등에 대한 부담이 발생하기 때문에 아예 포기하고 새 제품을 산다고 한다.
특히 자전거를 생산하는 일본기업들이 중국이나 제3국에서 조립해 제작하기 때문에
값이 아주 싸고 구매하기가 쉬워지다 보니
당시 일본인들은 자전거를 그냥 쓰다가 버리는 생활용품 정도로 여길 정도였다.
그래서 당국은 자신들이 압수해서 보관한 자전거들이 포화상태가 되면
처리할 방법이 없다보니 중개업자에게 헐값으로 팔게 되고
결국 그 자전거들은 업자들에 의해 마지막으로 거래수단으로 이북으로 수출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인민들이 사용하는 자전거들이 매우 많아지다 보니
돈을 받고 자전거를 맡아 주는 보관소도 생겼으며
자전거를 도색해 주는 도색점포와 수리해주는 수리점포들도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했다
. 특히 평양시 사동구역에 있는 장마당에는
일제 중고 자전거 판매시장이 밀집돼 있어
자전거를 사고파는 남녀 상인들과 고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사동구역은 평양에서도 발전이 더딘 낙후된 지역이라 높은 건물도 없고
작은 규모의 아파트들만 간혹 드문드문 있는 정도이고
주로 거주자들의 신분이 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이다.
비포장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짐을 싣고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인민들,
혹은 자전거 펑크를 때우는 모습들을 여기저기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역이다.
한편 일제 중고 자전거들이 인기를 끌자 좀도둑들은 자전거를 훔쳐서 돈을 벌려고 하고
반면 자전거 주인들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갖가지 묘책을 짠다고 한다.
그래서 인민들 사이에서는 자전거가 하나의 재산이다 보니
“자전거와 이불 속에서 같이 잔다”고 할 정도의 농담까지 생겼다고 한다.
집 대문 밖에 세우면 도둑을 맞을 수 있으니
집안에 보관하다보니 이불 속에서 같이 잘 정도로
귀중한 재산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아무튼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일제 중고 자전거가 미화로 약 50달러,
품질이 좋은 고급은 미화 100달러 전후에 거래됐으니
도둑들이 욕심을 낼만 했고
주인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시 세간에는 일제 중고 자전거는
인민들의 재산목록 1호이자 동시에 도난목록 1호라는 말도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자전거가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면서
자전거로 인한 도난범죄가 급속도로 증가하자
결국 정부 당국 차원에서 대책을 세운 것이 바로 자전거 소유자에 대한 등록제도였다.
1997년 평양을 시작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 3-4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자전거 면허증과 번호판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전거 면허증 미소지자는 교통위반 시에 벌금이 부과됐고
별도의 자전거 운행 도로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범칙금이 부과되었다
. 필자가 자전거 번호판을 유심히 바라보니
모든 자전거마다 앞과 뒤편에 빨강색 둥근 원판에
소유자의 등록 고유번호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으로 일본이 해산물을 비롯해
북에서 생산한 모든 물품들에 대한 수입을 전면금지하면서
북측 무역선이 일본에 입항하지 못하게 되며 중고 자전거의 반입도 중단되었다
. 그후 계속 늘어나는 자전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당국은
중국과 합영으로 자전거 공장을 설립해 직접 생산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통제하던 여성의 자전거 이용을 전격 허용하기도 했다.
그 이후 점차 자전거 면허제도가 완화되고 2018년 현재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 자전거를 많이 보급하는 정책을 세우면서
자전거 면허증과 번호판 제도가 없어졌다.
▲ 필자가 지나가는 자전거를 세워 궁금해하는 내용들을 질문하자
친절하게 답변해주는 평양시민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달리는 자전거 운전자를 세우고 필자일행을 위해 사진촬영을 부탁하자 흔쾌히 응해주며
카메라 작동법을 익히는 시민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달리는 자전거 운전자를 세우고 필자일행을 위해 사진촬영을 부탁하자
흔쾌히 응해주며 카메라 셧터를 누르고 있는 시민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아침 출근길의 평양시민이 교통보안원의 단속에 걸려 범칙금을 발부받는 모습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자전거 통행금지판. 금지지역에서 자전거를 타면 운전자는 범칙금을 발부받는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아침산책길에 나선 필자 앞에 자전거를 끌고 가는 시민이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잠시 후 이 자전거 주인은 교통보안원에게 범칙금을 발급 받았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 외곽지역인 사동구역 길가에서 자전거를 세워두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서해갑문으로 가는 어촌지역에도 자전거는 인민들에게 매우 요긴한 이동수단이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조중합영회사 자전거공장 제품들이 온통 평양거리를 누비다
평양의 각 거리마다 자전거 전용도로들이 개통되면서 자전거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 특히 평양의 조중평진자전거합영회사(朝中平津自行车合营会社)에서 생산하는
다량의 자전거들이 평양 시내를 온통 물결치고 있어
앞으로 시민들의 자전거 사용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였다.
이는 마치 중국산 비야디(BYD) 택시가 평양시내를 온통 점령하듯
평진자전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 결과 조중평진합영 자전거공장의 시장 점유율은 이미 70%를 초과했다고 한다.
과거 고난의 행군시절부터 도입된 일제 중고 자전거들은 점차 사라지고
2018년 현재 새로운 제품의 자국산 자전거들로 교체되고 있는 과도기에 있었다.
이렇게 된 까닭은 2006년 제1차 핵실험 이후
미국과 함께 일본도 대북제재가 강화되면서
일제 중고 자전거의 수입이 크게 줄어들자
2005년부터 조중합작의 평진자전거합영회사가 설립되며
자체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대표 브랜드는 ‘모란봉’, ‘질풍’ 등의 이름을 지닌 제품들이며
하루 생산량이 500~800대,
연간 판매량이 3만~4만대를 넘는다고 한다.
자전거 생산공장은 평진 외에도 여러 개가 또 있다.
한편 새로운 자전거 생산뿐 아니라 다양하고 현대적인 첨단기능의 자전거들이 생산되면서
급기야 전기 자전거까지 개발되어 평양시내에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후 전기 자전거는 평양을 비롯해 전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으로
청소년, 노약자나 여성들에게도 매우 인기라고 한다.
또한 새로운 자전거 대여점이 생기면서
전기자전거 사용자들도 눈에 띄게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시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생기다
한편 자체 생산하는 자전거들이 봇물처럼 출시되고
전기 자전거도 활개를 치고 다니면서 마침내 자전거 전용도로까지 생겨났다.
평양시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생긴 시점은 필자가
10.4선언 5주년 통일토론회 참가차 북을 방문할 무렵이었다
. 필자 일행이 평양에 도착하기 한 달 전인 2012년 9월 초경에 처음 생겼다고 한다.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로 만든 목적은 여러 가지였다.
시민들이 자전거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 결과로 보여졌으며
당시로서는 차도와 인도에 자전거 도로가 따로 분리돼
정해진 것은 매우 혁신적인 조치로 보였다.
또한 자전거 전용도로는 아니어도 자전거를 타기에 편리한 도로망이
도시 전체에서 갖춰있음을 볼 수 있었으며
요즘 평양에서는 과거와 달리 여성들도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는 평양이 세계적인 트렌드와 발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 또한 자전거 전용도로를 새로 만든 것은
평양에서 자동차 통행량이 부쩍 증가한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 예전에 자동차가 많지 않을 때는 자전거들이 차들과 뒤섞여 도로 한복판을 달렸으나
근래에는 자동차 통행이 많아지면서
자전거 이용자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별도의 전용도로가 생긴 것이다.
한편 전용도로가 생긴 또 다른 목적은
평양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적절한 운동을 권장하고
복잡한 교통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차원에서
자전거 타기를 장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공해 없는 맑은 환경을 보장하고
시민들에게 교통 편의를 제공하는데 일조하기 위한 의도도 엿 보였다.
그동안 무궤도전차와 궤도전차 노선이 있는 곳에서는
많은 경우 인도(걸음길)를,
그렇지 않은 데서는 차도(찻길)로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해왔는데
이제는 그곳들도 자전거 이용자들의 안전을 위해 흰색으로 표지선을 그었다.
뿐만 아니라 전용도로와 함께 자전거 전용 주차장도 생겼다.
평양과 여러 지방도시, 농어촌에도 자전거 주차장이 늘어나고 있으며
당국에서는 자전거 이용에 관한 규정과 상식에 대해
각 지역 당국이 직접 방송이나 책자로 홍보하며
인민들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아침 산책을 위해 대동강변을 걷다보면
체육공원이 여러 곳 등장한다.
그런데 이 체육공원과 유원지를 이용하려면 입장료가 어른은 20원,
어린이는 10원이며 자전거
주차비는 1시간당 500원이다.
버스비나 전차, 지하철에 비해 자전거 주차비가 매우 비싼 편이었다.
▲ 하늘색이 칠해진 평양시내 자전거 전용도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녹색이 칠해진 평양시내 자전거 전용도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대동강 체육공원 모습. 이곳의 자전거 주차료는 시간당 500원으로 메우 비싼 편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대동강 체육공원내 입장료를 내는 요금계산소. 자전거 주차비가 시간당 500원이라고 적혀있고,
입장료가 성인은 20원, 아동은 10원이라고 적혀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평양시내 다섯 곳에 자전거 대여 정류소 운영 중
뿐만 아니라 현재 평양에 자전거 공유서비스도 실시되고 있다.
2017년 중순부터 평양에 자전거 대여소 설치가 시작되어
8월 첫주부터 본격적으로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차원에서 가동되다가
올 2018년 1월부터 정식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전거 공유 시스템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이 대여소들은 평양 시민이나
외국 방문객 누구든지 시내 곳곳에 설치된 자전거 정류소에서
초록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예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
이 공유 자전거의 이름은 ‘려명(Ryomyong)’이며
녹색과 노란색등으로 심플하게 디자인돼 있다.
대여소는 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필요한 이용자들에게는 매우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평양에서 이미 자전거를 보유해 통근용으로 사용하는 시민들이 많지만
아직도 자전거가 필요한 소수와 외국 여행객들을 위해 이런 대여소를 운영하는 듯했다.
평양과 같은 대도시에서 이런 자전거 대여 시스템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대여 시스템은 지나가는 지역 거주자들이나
외국 여행객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여소는 평양 시내 가장 중심 지구에 두 군데, 광복로에 세 군데 등 모두 다섯 군데에 설치됐다.
다섯 곳의 임대소 위치를 살펴보면
만경대구역 팔골1동(광복지구상업중심 앞),
칠골 3동(칠골3식료품상점 앞),
갈림길 2동(4월15일소년백화원 옆),
금성 2동(만경대학생소년궁전 옆),
축전 2동(평양교예극장 앞)이다.
평양시내 신도시 개발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광복거리에서 1킬로미터 거리마다
다섯 곳의 자전거 대여소가 즐지어 시범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작년 8월 첫 주부터 대여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평양 시민들은 많은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연말을 기점으로 자전거 공유 정류소 설치공사와
시범운영 기간이 끝났고 2018년 1월부터
모든 대여소가 인기리에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시민권자들의 방북금지를 선포한 트럼프에 의해
작년 가을부터 발목이 잡힌 필자는
평양 과기대교수로 활동하는 지인을 통해
대여 자전거에 대한 자료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았다.
그의 전언에 의하면 작년 8월 1일부터 연말까지 5개월간은 임시로 시범운영 기간이었으며
올 2018년 1월 중순(15일)부터 부족했던 보완점을 마무리하고
시스템을 재정비한 후 본격적으로 자전거 임대봉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대여봉사 시간은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이며
쉬는 날 없이 1년 365일 대여 봉사를 한다고 했다.
자전거는 려명자전거카드로 임대 받을 수 있으며
자전거를 이용하는 이용자들은 미리 발급받은 카드신청서를 가지고
평양자전거임대관리소에 가서 ‘자전거 성원’을 뜻하
는 ‘전성카드’로 자전거 카드를 구입한 후에
카드에 요금을 충전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면 된다.
자전거 카드신청서는 평양자전거임대관리소 산하에
해당 5곳의 임대소들에서 배포하고 작성하여 제출하면 된다
. 자전거 이용자들은 자신이 편리하게 찾아갈 임대소를 아무 곳이나 방문해
사용한 후에 다시 아무 곳이나 방문해서 자전거를 반환하면 된다.
특히 임대관리소에서 발급받은 카드를
자신이 임대하고자하는 지점에 설치된 카드 인식기 센서에 카드를 대서 인식시키고
자전거 주차대에 설치된 번호입력기에 고유암호를 입력시켜 자전거를 꺼낸 다음
필요한 시간만큼 이용하고 편리한 임대소에 반환하면 되며
이때 요금을 카드로 자동 결제하면 된다.
분당 요금은 40원이고
시간당 요금은 3천원이어서 저렴하지는 않은 편이다.
대여 서비스가 아주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에 자전거 정류소에는
담당자가 별도로 근무하는 유인 부스가 있어
이용자들의 편의를 도와주고 있으며
특히 자전거를 빌리거나 반납할 때,
자전거를 세우거나 뺄 때는 유인 부스에 있는 근무자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확인을 받으면 친절하게 도와준다.
결재할 때는 자전거 전용 적립카드,
내나라 직불카드로 결재하거나 자신의 신분증과 연동된 카드나
나래전자 직불카드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앞서 밝혔듯이 결재를 마친 이용자가 이 자전거를 보관소 거치대에 꺼내려면
근무자에게 부여받은 특정 비밀 번호를 입력해야 자전거를 꺼내 쓸 수 있고
반납 할 때도 같은 방법이다.
이는 최근 한국, 중국, 미국등지에서 큰 인기를 끄는 공유 자전거 방식을 평양에서 도입한듯했으며
특히 북과 혈맹국인 중국의 교통문화 추이를 세심히 관찰해
중국의 방식을 직접적으로 참고한 듯 보였다.
▲ 평양시 자전거 임대소 유인 부스. 이곳에서 신청서를 발급받아 제출하고
절차를 밟으면 자전거를 임대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만경대구역 팔골1동(광복지구상업중심 앞)에 설치된 자전거 임대소.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칠골3동(칠골3식료품상점 앞)에 설치된 자전거 임대소.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갈림길 2동(4월15일소년백화원 옆)에 설치된 자전거 임대소.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금성 2동(만경대학생소년궁전 옆)에 설치된 자전거 임대소에 보관중인 려명자전거.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평양시내를 활보하는 ‘대한민국’
나는 어느 날 차를 타고 평양시내를 지나고 있었는데
도로에 평범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연세가 지긋한 중년의 시민을 창밖으로 목격했다.
그런데 자전거가 휘청거릴 정도로 무거워 보이는 누런색의 큼직한 포대가 짐칸에 실려 있었는데
자세히 바라보니 녹색으로 “대한민국” 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미 쌀포대 자루였던 것이다.
놀란 마음에 옆에 안내원에게 물으니 빙그레 웃으면서
“남조선(대한민국) 쌀 포대는 질이 좋기 때문에 주민들이 많이 사용합니다”라며
별일 아닌 듯 천연덕스럽게 답해 주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대한민국 쌀 포대는 질이 좋기 때문에
그것을 쓰고 싶은 사람들은 돈을 주고 사서 쓰거나
여러 개를 짜집기해서 방수포로 만들어 요긴하게 사용한다고 했다.
또한 40kg 짜리 누런색 대한민국 쌀포대는
북에서 인민들이 곡식이나 물건을 담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운반용기라고 한다.
평양 한복판에 “대한민국”이 거침없이 달려도 아무런 제재나 반감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의 민족, 같은 피를 나눈 동족으로서 남측을 대하는 북 인민들의 여유와 포용, 관용심을 느꼈다.
그러나 반대로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쓰인 글자가 활보하고 다닌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까를 생각해봤다.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서울 하늘 아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평양 하늘 아래는 ‘대한민국’이 활보하고 다녀야 진짜 통일인 것이다.
비록 자전거에 실려 평양시내를 활보하는 “대한민국”이었으나
이것마저 북 인민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어주었다.
남쪽도 하루빨리 북에 대해 관용과 포용
그리고 내재적 접근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 평양시민이 자전거 짐칸에 짐을 싣고 대한민국 정부미 자루로 덮고 묶은 후
대동강 다리를 건너는 장면.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연세가 지긋한 평양시민이 자전거 짐칸에 짐을 가득실고 대동강 다리 진입로 초입을 통과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자전거에 엄청난 분량의 화물을 실고 평양 청춘거리 교차로 인근을 지나는 자전거 운전자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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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에서 굶어죽다니 북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