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교회 최홍준 목사
![]() ![]() 2007/04/05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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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엔 사랑의교회, 부산엔 호산나교회
부산 호산나교회 최홍준 목사 파워인터뷰
1,200리 낙동강 물줄기가 가 닿는 풍경은 그대로 장관이다. 국내 최대의 철새 도래지 을숙도, 낙동강을 동서로 끼고 있는 부산의 강서구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섬이다. 김해국제공항이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 하단공단, 녹산공단, 신호공단 등 부산 경남의 대표적 공단들도 이곳에 밀집해 있다.
낙동강 하구를 매립해 만든 부산의 명지주거단지. 내년부터 아파트들이 입주할 예정인 이곳은 아직 황량한 벌판이다. 11층 높이의 부산 호산나교회(담임목사 최홍준)는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원래 교회가 있던 곳(사하구)은 완전히 환락가가 되어 버렸어요. 기존 예배당도 너무 비좁아져서 교인들 사이에 교회 이전에 대대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마련된 것이죠.” 바다처럼 넓게 펴진 낙동강과 건너편 진해땅이 보이는 교회 건물 11층에 자리잡은 사무실에서 최 목사는 허허벌판에 자리잡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최 목사가 호산나교회를 시작한 지는 올해로 딱 20년째다. 최 목사가 부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예배의 혁신. “예배의 여러 가지 원리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력이 넘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와서 구원의 확신을 갖고, 회복이 되는 역사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예배드리는 자들이 예수님을 가슴으로 만나고, 그에 따르는 감격과 기쁨의 표현이 넘치는 예배. 그 원칙 하나로 10여 년을 끌고갔을 때 결국 예배는 그렇게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또 하나 있다. 제자훈련. 호산나교회는 부산의 사랑의교회라고 할 수 있다. 지교회라는 의미가 아니다. 최홍준 목사와 옥한흠 목사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제자훈련. 최 목사는 서울 장성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했고, 옥 목사는 사랑의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때 옥 목사의 요청으로 최 목사는 사랑의교회 부목사로 가게 된 것이다. 최 목사가 나이는 몇 살 가량 적지만, 동역자로서 사랑의교회 제자훈련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다. 옥 목사는 은퇴했지만 지금까지도 두 사람의 관계는 동역의 끈으로 굳건히 묶여 있다.
최 목사는 “사명감을 깨닫게 되면 헌신하게 된다”며 제자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자훈련을 통해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명감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교인에서 제자로 바뀌는 것이다. 최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제외하고는 헌금이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이 사랑의교회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곧 교인들의 헌신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척도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제자가 된 사람은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호산나교회도 5천여 명밖에 안모이비나 연간 예산이 110억 원입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가 이 정도 규모에서 그만한 헌금이 나오겠습니까. 우리 교회 교인들은 기껏해야 중소기업을 합니다. 한 달 3백만 원 사람이 제일 많이 내죠. 하지만 전체 교인의 8~90퍼센트가 십일조를 합니다.”
물론 최 목사가 말하는 헌신의 척도가 헌금이 전부는 아니다. 그 외에도 자신의 시간과 삶과 생명을 바치는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자훈련을 통해서. 호산나교회는 순장들이 리더가 되어 각 소그룹을 양육하는 시스템이다. 사랑의교회와 똑같다는 게 최 목사의 설명이다.
20년 전, 최 목사가 이곳에 부임할 때 망설임이 많았다. 모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교회이기 때문이다. 원로목사도 있었고, 장로들은 그야말로 반골이었던 것이다. 피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다. 최 목사는 부임을 망설일 정도로 어렵던 교회가 이렇게 건실한 교회로 성장한 배경을 짧은 말로 풀이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는 설명할 수가 없죠.”
호산나교회는 국내 유일의 입양사역을 하고 있는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입양전담 사역자를 두고 현재까지 20 가정이 입양에 참여하고 있다. 입양 가정에 제공하는 인센티브도 적지 않다. 수만 원에서 수십만 원까지 매월 지급하고 있다. “입양도 하나의 목회 본질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하지만 한국이나 동양신은 핏줄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깁니까. 이스라엘도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씨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게 깨지게 된 거죠.”
최 목사가 입양사역을 도입하게 된 건 20년 전. 미국 그랜드캐년에 관광을 갔을 때 젊은 부부를 통해서다. 백인 부부는 아이들 다섯을 데리고 관광을 왔는데, 알고 보니 두 아이는 입양한 흑인과 남미 아이였다. 젊은 부부가 크리스천인 사실을 안 최 목사는 큰 도전을 받았다. 그게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입양한 손주도 있을 정도로 최 목사는 솔선하여 입양사역을 이끌고 있다.
최 목사는 개척사역을 천직이라 여긴다. 교회 부임을 망설인 것도 그 이유가 컸다. 개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량한 벌판 가운데 우뚝 서 있는 호산나교회. 개척을 천직으로 아는 최 목사의 삶 그대로를 상징해 주고 있었다.
최홍준 목사가 들려주는 ‘내가 목회를 하게 된 이유’
1960년대, 이명박 시장보다는 조금 어리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너무 가난하니까 ‘세계적인 사업가가 되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의 마음을 살 때도 나이 ‘30대, 40대, 50대 때 이렇게 살겠다’는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60대 때는 자가용 굴리면서 편안하게 사는 거였다. 그런데 아이를 셋 낳은 다음 직장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철학이 바뀌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나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성경을 보기 위해서 휴가 때마다 금식을 했다. 밥을 먹으니까 졸음이 와서 성경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식을 하니까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다’는 말씀을 그대로 경험했다.
주일날 봉사도 했는데, 직장생활에 매이니까 그것도 문제였다. 툭하면 주일날도 직장엘 가야 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바르게 하고, 교회 봉사도 할 수 있는 그런 직장을 위해서 기도했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직장생활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사업을 시작했다.
구로공단에서 철물계통 사업을 시작했다. 꽤 재미를 봤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가 온 것 같았다. 제일 잘 나가던 때인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친구가 소개한 사람을 통해 사기를 당한 것이다. 빚 갚는다고 1년간 얼마나 수고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었다. ‘내가 술도 안먹고 모범적으로 회사를 운영했는데, 이렇게 망한 이유가 뭘까?’ 금요일마다 교회에서 밤을 지새며 기도하면서 주의 뜻을 구했다. 당시 내가 성경을 많이 안읽었더라면 시험에 들었을 것이다.
[출처] 호산나교회 최홍준 목사|작성자 정연이
공장을 내놓고 철야하면서 기도했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사업을 정리하고 신학교를 가게 된 것이다. 주위에서 야간신학을 많이 권했다. 나이도 서른다섯인데다가 아이들이 셋인데다가 어머니가 계셨었다. 야간신학을 하는 게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때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한다면 여섯 식구의 호구지책을 해결안해 주시고 나를 불렀겠느냐. 야간엘 가서 학위증이나 따는 그런 것이 도저히 나한테는 용납이 안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야간대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낮에 내가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가족들 먹고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전세금이 올라서 더 작은 집으로 이사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장학금 나왔고, 필요를 채워주시는 걸 체험을 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셨고, 나를 부르신 게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도 난 ‘내일 일은 난 몰라요’가 내 삶의 주제이다. (2007. 4. 5. 뉴스파워 / 김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