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알로이시오 신부는 스스로를 두고 머리에 여러 개의 모자를 쓰고 산다고 했다.
첫째 모자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 모자였다. 이 신분은 평생 지니고 있어야 했다. 한국어를 정복한다는 것은 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송도 본당신부 모자 였고, 세 번째는 우편 모금 사업의 책임자 모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알로이시오 신부의 우편 모금사업은 전문 대행업체에 위탁해 놓은 상태였고, 한국 자선회 본부는 미국에 있는 그의 아버지 집을 임시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우편모금을 위한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직접 모금편지를 쓰고 사진을 찍어 팸플릿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편물 수취인 목록을 정하고 모금결과를 분석하며 전체사업을 이끌어 갔다. 그러다 보니 몸은 한국에 있지만 우편모금 사업을 위해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문제는 이 세 가지 모자를 쓰고 하는 일 가운데 어느 하나도 쉬운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한국어 공부는 하면 할수록 어렵기만 했다. 당시 그는 일요일을 빼고는 날마다 박 다미아노와 함께 한쪽은 영어, 다른 한쪽은 한글이 인쇄된 포켓북을 하나씩 들고 다니며 한국어를 공부했다. 한국어 공부도 어려웠지만 열악한 환경은 그를 더 힘들게 했다.
한국의 겨울은 알로이시오 신부에게 살인적이라 할 만큼 매서웠다.
당시 온기가 있는 곳이라곤 그의 침실에 있는 작은 연탄난로가 유일했고, 성당 내부와 사제관은 완전히 냉골이었다. 요즘 실내화를 신는 것도 아니었고, 차가운 마룻바닥을 양말 만 신고 다녔기 때문에 알로이시오 신부는 동상이 걸리고 말았다.
동상은 초기에 선홍색을 띠다가 심해지면 검붉은 색을 띠는데 그의 발은 겨울 내내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가 난로 가까이 앉아 공부를 하다 보면 난로 열기에 동상 걸린 발이 무척 가려웠는데, 한국어 공부를 방해한 것은 바로 그 가려움이었다.
1963년 1월 매우 추운 아침이었다. 연탄난로에 거의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 앉아 신부님과 한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연탄난로 열기에 얼어 있던 발이 녹으면서 발바닥이 가렵기 시작했다. 가려움이 점점 심해져 참기 어려웠다. 나는 무심코 두 발을 서로 비비기 시작했다.
계속 발을 비비고 있는 나를 보고 분심이 든 신부님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나는 동상 걸린 발이 열을 받아 몹시 가려워 비빈다고 했다.
당시 신부님의 침실과 내 방에만 연탄난로가 있었고, 성당 내부와 사제관 복도는 완전한 냉방이었다. 그 추위에 양말만 신은 채 차가운 마룻바닥을 걸어 다니다보니 동상이 걸린 것이다.
잠시 말없이 가만히 계시던 신부님은 양말을 벗어 내게 발을 보여 주셨다. 온통 검붉은 색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신부님은 다시 양말을 신었다. 겨울에도 에어컨을 트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지극히 안락한 미국 사회를 두고 신부님은 지극히 가난한 선교 나라에 오셔서 추위에 고생하시며 초인적인 인내심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여전히 살아계신 우리 신부님 』중에서
알로이시오 신부를 또 힘들게 한 것은 음식이었다. 당시 모든 본당의 사제관에는 식복사가 있어 신부들은 그들이 준비해주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알로이시오 신부는 손수 준비한 지극히 검소한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삶거나 프라이한 계란 하나와 토스트 한 조각에 버터와 잼을 발라 커피와 함께 아침으로 먹었다. 점심은 언제나 땅콩버터를 바른 빵 한 조각과 ‘탱’이란 상표가 붙은 오렌지 가루를 물에 타서 만든 주스 한 잔이 전부였다. 이런 단출한 식사는 훗날 그가 루게릭병에 걸려 병석에 눕기 전까지 한결 같이 계속 된 것이기도 하다. 저녁 메뉴만 조금 달랐는데 그래봤자 빵과 인스턴트 수프와 통조림 음식이 전부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검소한 식사였다. 그나마 그렇게 먹고부터는 위장장애가 덜했으니, 그는 체질적으로 한국의 음식과 기후가 아주 맞지 않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물론 외국인이었으니 기본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당시 한국에는 많은 수의 외국인 신부와 수도자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한국 음식과 기후에 잘 적응하는 편이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알로이시오 신부에게는 한국에서의 생활 그 자체가 엄청난 고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도 본당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 주교관에서 생활할 때 알로이시오 신부가 유일하게 미국 음식을 즐긴 것은 부산 항구 3부두에 있던 미국 선언 클럽에 가서 먹는 샌드위치와 콜라였다. 그 클럽은 군수물자를 싣고 온 미국 상선의 선원들이 식사를 하고 술도 마시는 식당이었는데, 알로이시오 신부는 그 식당에 1주일에 한 번 또는 2주일에 한 번 정도 같다.
그곳에서 그가 가장 좋아한 음식은 치즈를 넣어 철판에 구운 샌드위치였다. 그는 샌드위치를 콜라와 함께 먹었다. 하지만 그 식당도 송도 성당 발령을 받고 난 뒤에는 발길을 끊었다.
부산 교구에서 사목하던 미국 메리놀회 신부들은 월요일이면 서면에 있는 미군 부대에 가서 소고기 스테이크를 포함한 각종 미국 음식을 즐겼다. 하지만 알로이시오 신부는 단 한 번도 그곳에 간 적이 없다.
이렇듯 알로이시오 신부는 처음부터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삶을 택했다. 그가 쓴 『가난은 구원의 징표이다』라는 책에는 교구 사제들에게 권하는 10가지 권고 사항이 나오는데, 세 번째 항목에 이런 내용이 있다.
“자발적인 독신 생활이 육체적 만족을 주는 음식물을 탐닉해도 좋다는 무한의 허락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러시아 격언에 ‘빵과 소금을 먹고 복음의 진리를 전하시오.’라는 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