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각(sculpture)에 대해 무식하다.
불상도 조각품인데 아는 체 할 수 없다.
이 불상은 "고려적인 불상의 힘과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걸작으로 여겨진다." 고
보물(제376호)로 지정한 문화재청이 말하니까 그런 줄로 믿을 뿐이다.
고려때 작품이라면 최대 1천여년,최소 6백여년에 걸쳐 모진 풍상을 겪었으니 성한 곳이
있겠는가.
다만, 나그네가 궁금해 하는 것은 사찰에 있어야 할 보물불상이 왜 중학교(함양) 교정에
눌러 앉아 학생들 한테 시달려야 하는가다.(아래그림1. 2)
"원래 청룡사 터 또는 용산사 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 설명판이 말하는데 그 절터에
이 학교가 들어선 것인가.
봉화대로 걸을 때, 춘양종합고교 교정에 있는 삼층석탑 2기(보물 제52호)를 보았다.
태백산록 각화사의 전신인 남화사 터로 알려져 있는데 각화사 주지에 의하면 풍수지리
학상 이전해서는 안된다 해서 그대로 둔다는데 여기 석불 역시 그런 이유라도 있는가.
지근에 보림사(寶林寺)가 있다(아래그림3)
조계종 제19교구인 해인사의 말사로 1912년에 창건했다니까 역사가 일천한 절이다.
용산사 터에서 출토된 도유형문화재 제318호 '함양용산사지석조여래입상' 을 대웅전에
모시고 있다는 보림사가 이전해 가면 좋으련만.
그러면, 읍 중심부에 위치해 포교활동을 통한 불교진흥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사찰이라
하나 역사가 빈약한 보림사의 위상도 높아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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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초여름, 내가 하루를 참으로 편히 즐겼던 상림은 영영 없어졌다.
뱀이 있을 듯 한데도 전혀 없다는 목판 행상여인의 말만 믿고 아무 데에서나 벌렁 누워
오수를 즐겼던 상림이 아직껏 남아 있을 리 있는가.
경이롭게도 뱀은 물론 개미와 모기, 파리 등 물것이 전혀 없는 숲이었다.
그 때도 행상 여인이 단호히 말했다.
모두가 최고운 선생님 덕이라고.
모친이 대관림(현 상림) 숲에 산책나갔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라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고운이 숲에 가서 미물들에게 호통을 쳤다는 것.
"다시는 나타나지 말뿐 아니라 아예 멀리 사라져라"고.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고운을 신격화 하는 전설임이 틀림 없다.
"인공 숲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숲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함께 우리 선조들이
홍수의 피해로부터 농경지와 마을을 보호한 지혜를 알 수 있는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
도 매우 크다" 는 문화재청이 상림을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한 이유다.(아래그림1)
일리 일해(一利一害)의 진리가 여기라고 예외겠는가.
잘 정돈되었으나 사라진 예전의 자연스러움이 아쉽다.
경남 유림(儒林) 주축으로 최치원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정자를 세우고(고종46년:1906),
모현정(慕賢亭)이라 했으나 고운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사운정(아래그림2)으로 고쳤고,
도 문화재자료 제75호인'文昌侯崔先生神道碑'(문창후최선생신도비: 아래그림3)는 숲을
조성해 홍수 피해를 없앤 태수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23년 경주최씨 문중에서
세운 비란다.
문창후는 그의 시호(諡號)다.
산청은 좌안동 우산청이라 하고 함양은 좌안동 우함양이라 한다.
자기 고장 자랑의 일환이겠는데 함양은 오랜 역사를 통해 무수히 배출된 훌륭한 인물중
11인을 선정, 새 밀레니엄기념사업으로 조성한 역사인물공원에 모셨단다.(아래그림4)
한데, 이 야심찬 프로젝트가 말도, 탈도 많은 듯 하다.
그 중 한 분(李炳憲)에 대해 친일 의혹을 제기하여 당국자들이 당혹상태라니까.
뿐만 아니라, 이 인물공원 안에 세운 역대현감(군수) 비석들 중에 탐관오리의 전형이며
고부 동학혁명의 단초를 제공한 조병갑의 비석이 있다는 것.
철거를 주장하는 여론이 비등한데도 엉거주춤한 당국의 속 사정은 무엇일까.
"다시는 되풀이 않도록 다짐두면 된다"고?
"그러라는 가르침으로 서있는 빗돌"이라고?
서천소가 웃을 호도(糊塗)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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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連理枝:아래그림1)는 접목(接木)의 원리와 다를 것 없는데 '사랑나무'라 한다.
부부 또는 남녀의 애정이 깊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니까 그렇게 부를 만 하겠다.
상림 외에도 울창한 숲에서 종종 보게 된다.
상림 숲의 연리지는 고지식하고 낭만적인 표현으로 시선을 끈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는 협박조의 표현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데.
연리목 주위에 시주등들을 비치하고 "점등해야 사랑이 이루어지며 오래간다"고.
도 유형문화재 제258호인 함화루(咸化樓: 아래그림2.3)는 원래 함양읍성의 남문으로
지리산이 바라보인다 하여 망악루(望嶽樓)라 했단다.
그런데 왜 현 위치로 이건하고 이름도 함화루라고 바꿨을까.
1932년, 사재로 이 일을 단행했다는 분(함양읍죽곡리의 고적보존회대표 盧悳泳)에게
물어야 하는가.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랠 텐데.
상림에도 척화비(아래그림4: 도 유형문화재 제264호)가 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침범하는 서양오랑캐와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운"까닭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이은리석불(아래그림5)도 운좋게 생환해 영광을 누리고 있다.
1950년경, 이은리 냇가에서 출토돼 이 공원으로 옮겨왔으며 도 유형문화재 제32호가
되었다니까.
출토지점 주위 약 300m 지점에 망가사(望迦寺)라는 이름의 사찰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절의 유물로 추정된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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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후묘(前學後廟), 5성(聖) 18현(賢) 배향, 판박이인데다 환영하지도 않는(문이 닫힌)
향교들을 굳이 방문하려는 까닭이 무엇인가.
향교는 옛 학교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향교는 그 지역의 지리적, 역사적 환경을 가늠해 보는데 호재다.
태조7년(1398)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함양향교는 도 유형문화재(제225호)다.
고려때 경학을 가르치던 소소당(昭昭堂)이 향교의 전신이라고.
정유재란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후 복원과정을 거치면서도 600여년 넘게 붇박이라니
드문 경우다.
그러나, 함양읍 북쪽 산록 원교(元校)마을에 있으므로 접근이 썩 용이하지 않겠다.
원교리는 향교의 창건과 동시적으로 생성된 마을이라 향교마을이라고도 불린다는데,
이색적인 점은 천주교가 함양땅에 최초로 전래된 지역이 바로 이 향교마을이란다.
따라서 함양 최초의 서양건물이 이 마을에 세워졌으며 유학(儒學)마을에 천주교인도
많다니 이색적이라 할 수 밖에.
향교마을에서 상림으로 가는 지름길은 야산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고개 저편(상림쪽) 양지에는 세종대왕의 열둘째 아들 한남군의 묘(도기념물 제165호:
아래그림3)가 있다.
한남군(漢南君)은 세종의 18남 4녀 중의 12남으로 혜빈 양씨 소생이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 왕(世祖)이 된 후 금성대군과 함께 상왕(端
宗)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함양군 휴천면 새우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세조2년(1456)의 일이며 더러는 사약을 받았다고 하지만 세조5년(1459)에 이 곳에서
병사한 것이 맞는 듯.
휴천면 남호리 한남군이 유배됐던 마을은 그의 지조를 기려 한남마을이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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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읍에서 팔량치로 오르는 24번국도.
자전거로 오르던 50년 전에는 유감이 참 많았던 길이다.(그 때는 도로번호가 없었다)
팔량치에서 내려올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인월로 리턴(return)할 때는 비포장 자갈길이
왜 그리도 가파르고 험하고 멀었던지.
다단 변속기어가 달린 이즈음의 고급 자전거와 달라 웬만한 고개도 오르기가 벅찼으며
자전거 안장(鞍裝)에 시달린 샅(股間)이 엉망이 되어 여러 날 고생했기 때문이다.
지리산으로 가는 첫 관문인 '오도재'길이 분기되는 삼거리 갈은치(葛隱峙:아래그림1. 2)
저 아랫마을은 대추나무가 많았다 해서 대추나무마을, 즉 조동(棗洞)이다.
사근도찰방에 소속된 제한역(蹄閒驛)이 있어 역촌이라고도 했다는 마을이다.
여기, 오도재(悟道嶺)길이 지금은 1023번을 단 어엿한 포장지방도로인데다 '한국의 아름
다운 길 100선'에 뽑혔지만 그 때는 참으로 막막한 소로였다.
더구나, 어찌나 험했던지 한 고승(印悟祖師)이 이 고개를 오르내리는 동안에 득도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니 미루어 짐작할 만 하잖은가.
그럼에도, 내륙의 함양인들이 남해안의 해산물과 직거래를 하려면 이 길을 따라 오도재
(773m)를 넘고 마천 백무동에서 해발1.650m 지리산 안부까지 올라가야 했다.
그 안부가 장이선 곳이라 해서 '장터목'이다.
함양 수동면 출신이며 충효청검(忠孝淸儉), 시문(詩文), 필력(筆力)으로 당대의 3절(絶)
이라 일컬은 뇌계 유호인(兪好仁1445~1494)의 오도재 시가 갈은치 삼거리에 서있다.
여객(旅客)들을 지리산으로 안내하려 하는가.(아래그림2)
'아래그림3'은 경남과 전북을 가르는 팔량치(八良峙) 고개마루다.
팔량치는 삼봉산(1186m)과 오봉산(871m)중턱(鞍部)에 있는 해발513m재인데 팔량,팔령,
팔랑 등으로 불리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조경남 등 8명의 장군이 이 고개에서 용전 끝에 왜적을 섬멸한 공이
있다 하여 팔량재라 이름지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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