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 산책길에 친구와 은사님 생각이 난다
이학원: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친구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로 신음하고 있던 1941년 8월 14일, 부산부 범일
정(지금 부산직할시 동구 문현동)에서 출생했다. 나보다 무려 53일이나 늦게 세상에
태어났다. 오뉴월 하루 낮이 얼마나 길고, 가치 있는 시간인지 잘 헤아릴 줄 아는 지
혜롭고 분별력이 탁월한 친구다.
본은 전주 이씨 이고, 효령대군(孝寧大君) 19대 손(孫)으로 아버지 이강호(李康浩)님
의 2남3녀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왕조의 당당한 로이얼 패밀리(royal fa
mily) 후손이다. 아버님의 고향은 부산에서 가까운 경남 양산이다.
부산 성지초등학교, 부산 개성중학교, 명문인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 초등
교육의 최고 명문대학이며, 초등교육의 성지(聖地)로 꼽히는 부산교육대학 2회 졸업
생이다.
친구는 1964년 부산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경남 거제도에 있는 아주초등학교(옥포와
장승포 중간 지점)에 첫 발령을 받고, 꼭 6개월을 근무한 후, 8월 말에 교사직을 사
임하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살기 어려웠던 그 시절에 교장선생님이 친구의 사임을 극구 말렸으나, 처음 마음먹
었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진학의 꿈을 꺾을 수 없어, 곧 바로 서면에 있는 대입준
비종합반 학원에 등록을 했다. 하루 중 점심 때는 피만두 2개를 먹으며, 잠과 피곤 을 이겨내며 6개월을 견뎌내다 보니 몸무게가 49kg이 될 정도로 줄었다. 신체의 면 역력이 떨어져 잘 못하면 질병에 노출되기 쉬운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사생결단으로 청춘을 잘라 바친 노력 덕택으로 1965년 3월! 친구가 꿈에서도 그리
며 간절히 바랐던 한국교육의 메카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합격, 입학
하는 당연한 행운을 잡았다. 부모님께 염치없고 가난했던 내 친구는, 달랑 한 학기
등록금과 한 달 치 하숙비만 갖고 상경(上京)하였다.
생활비와 등록금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던 친구는 온갖 알바를 다하며, 고생 또 고생
을 하며 학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뜻있는 곳에 길이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도움이 절실했던 친구에게 1965년 2학기부터 운 좋게
앞길이 뚫리고, 하늘의 도움이 찾아왔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동천학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 동천학사에 기숙하면서부
터 경제적 부담이 적어져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동천학사에 기숙하면
서도 생활비, 등록금 등을 직접 마련하기 위해 가정교사와 각종 알바를 끊임없이 해
야만 학업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동천학사는 울산과 부산진구에서 7선의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해석(海石)
정해영(鄭海永, 1915년 생, 作故) 선생이 1955년부터 울산과 부산 출신의 서울 유학
생 중에서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가난한 지역 인재들을 위하여 기숙사를 건립하여
운영한 학사다.
지인들의 추천으로 동천학사에 입사한 친구는 수많은 유명 인사들과 교우(交友)할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가졌다. 서울 성북동 동천학사가 있는 마을을
판사촌(判事村)이라 불렀다. 동천학사 출신 중에는 판사 검사는 물론 장관, 국회의
원, 교수, 고위 행정직 관료, 의사와 같은 수많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배출하였다.
이들 중에는 김태호 내무부장관, 최형우 내무부장관, 안무만 법무부장관, 심완구 울
산시장, 최병욱 전 국회의원 등 유명 인사들을 배출한 유명한 학사이다. 해석 선생
이 작고한 이후 지금까지도 해석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울산•부산 출신의 대학원 학
생들과 울산•부산 고등학교 출신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1966년 여름방학 때, 서울 종로 3가 지하에 있는 호(湖)다방에서 서수인(徐樹仁) 은
사님을 뵈었다. 당신의 제자이기도 하고, 나의 부산교대 2기 동기 친구인 이근재(李
根宰) 교수(당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학생)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은사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듣고 깜짝 놀라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은사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난 후에서야, 은사님께서 모든 것이 부족한 나에게 이근재
친구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신 은사님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경남 고성
출신의 촌놈인 내가 서울 시내 C등급의 이태원국민학교에 발령을 받아 현실에 안주
하며 행복해 하는 얼굴로 은사님을 뵈었는데, 나의 그런 모습이 영 못 마땅하셨던
것이 아니었나 하고 짐작을 할 뿐이었다.
인생을 도전적으로, 야심차고 꿋꿋하게 개척해 나가는 제자 이근재와 당신의 기대
에 미치지 못하는 내가 비교가 되지 않았겠는가. 도전적 용기가 부족한 것이 나의
가장 큰 인간적 약점이란 것을 은사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
았다.
조용한 제자의 가슴에 돌을 던져, 큰 파문을 일으키며 제자의 깊은 잠을 깨워야겠다
는 일종의 충격요법과 같은 제자 사랑의 한 방법을 생각해 내신 것 같았다.
도전적 용기가 보이지 않는 제자인 내 얼굴을 측은한 듯, 한참 바라보시던 은사님께
서는 평소의 말씀 톤과는 전연 다르게 조용하고 낮은 음성으로 타이르시듯 말씀을
이어가셨다.
“2회 졸업생인 자네 동기 중에, 이근재라는 친구가 있재? 그 친구가 거제도 옥포와
장승포 중간에 있는 아주국민학교에 발령을 받았는데, 6개월 만에 사임을 한 후, 서
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응시, 합격하여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던데, 대
단한 친구가 있네. 대단한 친구야!”
학장을 지내신 교육학과 박찬우 교수님도 서울대 사대 교육학과 출신이셨고, 서수
인 교수님도 서울대 사대 지리교육과 출신이시라 제자이면서 자랑스러운 후배가 된
제자 이름을 거명 하시면서 모교 교수님들 간에는 이근재 이름을 자주 화제에 올린
다는 말씀을 전해주셨다.
당시 서수인 교수님은 부산교육대학에 재직하고 계셨지만, 댁이 서울시 종로구 가
회동에 있었기 때문에 여름방학, 겨울 방학이면 부산에서 상경(上京)하시어 종종 연
락을 주셔서 종로 호(湖) 다방이나 가회동 은사님 댁에서 자주 만나 뵙곤 하였다..
1967년 겨울방학인 1월 어느 추운 겨울 날, 오후 3시에 종로 3가 호 다방에서 만나
자는 연락을 주셨다. 약속한 시간에 다방에 나가 뵈었더니, 은사님 혼자 계시는 것
이 아니라, 어느 낯선 초로(初老)의 신사분과 같이 앉아 계셨다. 이름 모를 서류를
뒤적이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데, 은사님의 얼굴 표정은 심각하신데 비해, 초
로의 신사분 얼굴 표정은 아주 밝아 보이셨고, 미소를 머금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호랑이 상 얼굴에, 안광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어서 짐
작으로 예사스러운 분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얼른 들었다. 상황 짐작으로 느낀
바는 은사님은 을(乙)의 입장인 같았고, 초로의 신사 분은 갑(甲)의 입장이라는 생각
이 얼른 머리를 스쳐지나 갔다.
이런 자리에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해지는 그런 찰나였다. 은사님은 은사
님 옆자리에 나를 앉게 하신 후, 마주 대한 그 낯선 신사 분께 나를 소개해 주셨다.
“어서 와, 앉아! 아까 말씀드린 이학원 군이 왔습니다. 이 군, 인사드리게! 여기 계신
선생님은 건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리학과 학과장님이신 이봉수(李鳳秀) 교수님이
시다. 천하의 영재들이 아니면 못다니는 일본 동경고사 지력과(지리역사과)를 졸업
하시고, 초대 대한지리학회 회장을 엮임 하시는 등, 해방 이후 한국 지리학 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셨던 교수님 이시다.”
서수인 은사님께서는 내가 알지 못하게 손수 나의 진주고등학교 졸업증명서 2통과
부산교대 졸업증명서 2통, 성적 증명서 2통을 준비하셔서 건국대학교 물리과대학
지리학과 학과장 이신 이봉수 교수님께 나의 건대 지리학과 3학년 편입학을 의논‧
부탁하고 계셨던 현장에 나를 불러내신 것이다. 사태 파악을 한 나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었고, 온 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왜 어머니의 영혼과 하나님께서 부족한
이 자식을 이토록 사랑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본인인 나도 모르게 당신께서 직접 서류를 발급받아 챙겨 오셔서, 당신께서 전공하
신 지리학 학문을 계속 공부할 것을 강권하시며 우물쭈물 세월만 보내고 있는 제자
에게 꼼짝 못하게 대못을 박으시는 자리를 마련하신 것이다. 나는 두 은사님께 정성
을 다하여 차와 저녁 대접을 하였다. 이와 같으신 은사님을 이 세상 살아서 어디에
서 또 다시 만나 뵐 수 있겠는가!
1968년, 건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리학과 3학년에 편입학 졸업하였는데, 건대에 지
리학과 대학원 과정이 없어서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과에 입학하였다. 서
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강의실에서 친구 이근재를 졸업 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
다. 참으로 반가웠다(미안합니다. 이 글을 1회, 2회로 나누어 싣겠습니다).
첫댓글
맞다!
친구야, 고마웠던 분들 생각해 보고, 친구들이 역경 속에서 피워낸 아름다운 꽃들도 펼쳐 보이고...
그래 그게 보시야, 금천의 지금이 참 부럽다.
우리 주변엔 받는 이보다 주는 이들이 참 많았지!
대부분은 받고 주면서 살아간다지만.
잘 베푸는 사람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고,
무엇을 다른 방식으로 돌려받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으며,
그들의 도움을 받아 변화되고 그 사람에게 이익이 된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고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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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일 행복한 사람은 본인이 은덕을 많이 베풀었으나 아직 보답을 받지 못한 사람이고,
가장 불행한 사람은 덕을 쌓지 않았는데 많이 받은 사람이며,
행복한 인생은 바로 베풀고 사는 것이라고 했어.
그래, 남는 게 있다면 남에게 베푼 것만 남는다고 했다지...
금천 03:55 new
석천!!! 그렇네! 인생을 살아가는데 마음 써 주고, 도움주고, 베풀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있네. 그러나, 그 것이 그렇게 말 같이 수월하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넉넉한 마음으로 베푸는 사람들을 보면, 이미 그들은 참 인간, 선비, 성인 영역에서 이 세상에 사는 인생을 극락과 천당으로 만들어 가는 참 인간들이란 것을 깨닫고 마음 속으로 부터 진정한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부족한 나 자신을 되돌아 보게 만들고, 그 사람을 따라 배우려고 노력하다 죽는 것이 아니겠는가.
서울 청구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신기석 친구는
이근재 친구에게 가정교사 자리를 마련해 주면서 어려웠던 서울대 학업을 도와주었고, 서울 근교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김종문 친구 집에 까지 시내 뻐스를 타고가서 쌀 한가마를 직접 전해주었던 이야기는 동기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가슴뭉클한 이야기 아닌가! 베푸는 삶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친구들 덕분으로 익히고 배우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네. 친구야! 고맙다! 춘천 학원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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