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설적인 투자가. 자본가. 자본배치가. 자본할당자 (Capital Allocator)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 社 회장 겸 최고경영자.
가치에 근거한 투자를 하여 어마어마한 부를 쌓음.
1930년 8월 30일 미국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 출생.
이때는 경제대공황이 극에 달한 상황으로 버핏의 가정도 어려운 시기를 보냄.
할아버지는 버핏 앤 선이라는 조그만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증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경제대공황으로 직장을 잃음.
버핏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집안은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아감.
9살 무렵 주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증권사 객장에서
시세판에 주가를 적는 일을 하기도 함.
11세에 생애 첫 주식을 구입함. 시티즈 서비스라는 회사의 주식을
1주당 37달러에 누나 도리스와 함께 각자 3주씩 구입함.
이후 이 주식은 28달러까지 하락하자 버핏과 누나는 초조해지고
다시 40달러까지 오르자 팔아치움. 그러나 그 후 200달러까지 오름.
어려서부터 숫자에 탁월한 능력을 보임.
주요도시의 인구를 정확히 암기하고 자동차 번호판을 외우는 등
숫자에 관심이 많았고 사진같은 기억력을 보임.
또한 비지니스 감각도 훌륭했음.
어렸을 때 할아버지 가게에서 코카콜라 6개들이 한상자를 25센트에 사서
개당 5센트를 받고 팜. 그러나 자신은 펩시콜라를 먹음.
돈을 벌면 차곡차곡 저축하고 아무도 못만지게 함.
허쉬 초콜렛을 좋아해서 가출해서 허쉬 공장에 간 적이 있음.
15살때 아버지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워싱턴으로 이사감.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데인리라는 친구와 친하게 지냄.
나중에 데인리는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버핏은 30등 이내로 졸업함.
그곳에서 워싱턴 포스트誌 배달하는 일을 함.
고객이 구독을 끊으면 경쟁지인 워싱턴 헤럴드 트리뷴의 구독을 권하여
판매부수를 일정하게 유지함. 나중에 워싱턴 포스트에 흡수 합병됨.
잡지 구독 독자의 계약기간을 파악해 뒀다가 끝날 때 쯤 다른 잡지의 구독을 권함.
데인리와 함께 중고 핀볼 기계를 구입하여 이발소에 설치해서 돈을 범.
어린 아이들의 장난이라고 생각되지 않도록 윌슨 동전 기계 주식회사라는 가명을 사용함.
이때 인생이 그렇게 재밌는줄 몰랐다고 함.
경마장에서 버려진 마권을 긁기도 하는 등 어렸을 때부터 돈버는 일에 무척 관심이 많음.
경마장에서 우승 경주마를 예측하는 시스템을 개발해서
'마구간지기 소년의 선택' 이라는 정보지를 만들어서 팔기도 함.
버려진 골프공을 친구들과 줏어서 팔기도 함.
'천달러를 버는 천가지 방법' 이라는 책을 달고다니면서 읽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6000달러를 손에 쥠.
이 돈은 대부분 신문배달을 하여 번 돈.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스쿨에 진학함.
그러나 그곳에서 배울 것이 없음.
시험 전날밤 책을 펴놓고 펩시콜라를 마시며 다음날 시험을 봐도 만점.
그는 이미 투자와 경제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쌓고 있었음.
이것은 당연히 방대한 양의 독서를 통해 이루어진 것임.
데인리와 중고 롤스 로이스를 구입하여 수리한 다음 대여하는 일을 함.
그러나 각자의 여자친구와 노는 일에 사용함.
대학을 네브래스카 대학으로 옮김.
벤저민 그레이엄이 쓴 '현명한 투자자'를 읽고 충격을 받음.
벤저민 그레이엄은 버핏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 구세주.
그의 평생 정신적 스승이었음.
벤저민 그레이엄은 투기가 판치는 주식시장에서 처음으로 과학적인 투자방법을
제시한 가치투자의 아버지.
버핏도 처음에는 지금도 대다수의 주식시장 참여자가 하고있는 기술적 분석을 함.
스스로 차트를 만들고 그래프를 만드는 등 꽤 많은 노력을 들임.
그렇지만 기술적 분석으로 돈을 벌진 못했음.
그런 그에게 벤저민 그레이엄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
대학 졸업 후인 20세 무렵에 그의 재산은 9,800달러.
네브래스카 대학 졸업 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 지원했지만 실패하고
대신 벤저민 그레이엄이 있는 컬럼비아 대학 경영대학원에 진학함.
벤저민 그레이엄의 수업은 버핏을 위한 수업이었으며 둘은 활발한 토론을 벌임.
벤저민 그레이엄이 컬럼비아 대학에 있는 동안 그에게서 A+를 받은 것은
워렌 버핏이 유일.
어느날 버핏은 그의 스승이 GEICO라는 회사의 이사로 있는 것을 알게됨.
어떤 회사인지 궁금해서 토요일날 기차를 타고 본사가 있는 도시를 방문함.
그렇지만 토요일이라 문이 닫혀 있어 한참을 두드린 후에 경비를 만났고
6층에 올라가보라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올라가 회사의 경영자와 이야기를 나눔.
GEICO는 보험회사였는데 그로부터 보험사업과 GEICO에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음.
그 경영자는 마치 유능한 증권분석가와 대면하고 있는 듯했다고 회상함.
GEICO의 주식을 조금 삼.
1953년 23살의 나이에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수지와 결혼함. 후에 자식 셋을 가짐.
대학원 졸업 후 고향 오마하로 내려옴.
오마하에서 아버지의 증권회사에서 근무함.
고객들에게 GEICO의 주식을 추천함. 그는 1만 달러를 투자해서 1만 5천 달러로 불림.
그렇지만 뉴욕에 있는 스승의 투자회사 그레이엄 뉴먼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편지를 보냄.
그는 무보수라도 일하기를 원했고 마침내 승낙을 받음.
그레이엄 뉴먼에서 투자 아이디어를 배움.
1956년 그레이엄 뉴먼이 해산. 그는 고향 오마하로 내려옴.
이 때 그의 재산은 14만 달러. 이 돈은 대부분 저평가 주식에 투자하여 번 돈.
1950년대에 고향 오마하에 3만 달러에 집을 구입하였고 평생 여기서 삼.
1956년 이제 자신이 직접 펀드를 운용하기로 결심함.
첫번째 투자조합(합자회사 형태의 투자회사. 헤지펀드.) 결성.
투자자는 7명. 누나 도리스, 이모 앨리스, 장인 등 친척과 지인으로 구성.
초기 자본금은 10만 5천 달러. 버핏은 100달러(10000달러라는 얘기도 있음) 투자.
버핏은 무한책임 파트너. 나머지는 유한책임 파트너. 매년 6%의 배당지급.
6%를 초과한 수익의 25%를 버핏에게 배분.
투자자를 점점 늘려가면서 합자회사의 수가 늘어남.
나중에는 여러개의 합자회사를 하나로 통합해서 버핏 파트너십으로 운용함.
버핏은 자신의 수익을 투자조합에 재투자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부가 늘어남.
파트너십은 저평가 주식 투자와 워크아웃(차익거래) 투자로 운용됨.
1969년 저평가 주식을 더이상 찾을 수 없어서 이전의 수익률을 지키기 위해
파트너십을 해산함.
1957~1969년 까지 13년 동안 한번도 손실을 입지 않음.
다우지수가 하락한 해에도 손실을 입지 않고 파트너십을 운용하여
13년 동안 연평균 수익률 30%를 기록함.
파트너십을 해산했을 때 버핏의 재산은 2500만 달러.(1500만 달러라는 얘기도 있음.)
파트너십을 해산할 때 버핏은 투자자들에게 파트너십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으로 받을지
현금으로 받을지 결정하도록 함.
버크셔 해서웨이도 그러한 주식 중에 하나였는데 1960년대에 파트너십이
사들이기 시작해서 1965년 파트너십이 경영권을 장악함.
버크셔 해서웨이는 망해가는 섬유회사였는데 전형적인 저평가 주식이었음.
시가총액(회사전체가 주식시장에서 팔리는 가격)이 장부상의 가치보다 현저하게 낮았음.
이 회사를 버핏이 투자회사로 탈바꿈시키게 됨.
파트너십을 해산했을 때 버핏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으로 이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고
회장이 됨.
이후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를 투자의 도구로 이용함.
버크셔 해서웨이를 통해 여러 보험사를 인수했고 인수한 보험사의 자금으로 투자를 함.
보험사를 선택한 이유는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당시 미국은 버핏처럼 회사를 투자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회사내에 유보된 이익에 대해 세금을 부과함.
보험사는 그러한 세금이 면제되는 몇안되는 업종 중 하나.
버크셔 해서웨이는 법인이기 때문에 법인세는 냄.
버크셔 해서웨이의 운영 원칙은 버핏 파트너십과 마찬가지로
저평가된 주식에 투자하는 방법. 그리고 워크아웃(차익거래).
하지만 파트너십 운용 시절 투자방법에서 변화를 보이게 됨.
파트너십 운용 시절에는 시가총액이 장부상의 가치보다 낮은 주식에 투자해서
한모금만 빨고 버리는 투자를 했다면
버크셔 해서웨이를 운영하면서 그저 그런 비지니스를 헐값에 사는 것보다는
정말로 훌륭한 비지니스를 적절한 값에 사는 투자 방법으로 전환하게 됨.
이러한 사고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 성장주 투자의 아버지 필립 피셔,
그리고 버핏의 파트너 찰스 멍거. (애칭 찰리)
찰리 멍거는 같은 오마하 출신으로 어렸을 때 버핏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기도 했었지만 이 때는 버핏과는 몰랐음.
1950년대 만나게 되었으며 이후 버핏의 파트너가 됨. 버핏보다 나이가 많음.
찰리 멍거는 법대를 나왔으며 역시 똑똑한 사람임.
1972년 주식시장이 불타올랐음. 이 때 버핏은 살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함.
성욕에 가득찬 남자가 무인도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함.
1973년 마침내 주식시장이 엄청난 폭락을 함. 1929년 경제대공황후 최대의 폭락임.
1973~74년 이때 버핏은 '성욕에 가득찬 남자가 하렘에 있는 것 같다. 이제 투자를
시작해야 할 때다' 라고 말함.
이 때부터 버핏이 본격적으로 투자에 나섬.
워싱턴 포스트의 최대주주가 되었고 이후 워싱턴 포스트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영구 보유 종목이 되었으며 현재까지 보유하고 있음.
시즈 캔디, 오길비 & 매더, 캐피털 시티즈, GEICO 등에 투자함.
1980년대 중반 주식시장이 점점 달아오름.
버핏은 보유 주식을 점점 줄이고 1987년에 버크셔 해서웨이의 대량 보유 종목은
캐피털 시티즈/ABC, GEICO, 워싱턴 포스트의 3종목에 불과함.
1987년 10월 29일 주식 시장이 대폭락함.
1988년 버핏은 새로 투자에 나섰고 이때부터 코카콜라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임.
1994년까지 총 10억 달러의 코카콜라 주식을 사들였고 이것의 현재가치는
80억 달러가 넘음.
이 무렵 질레트, 연방주택저당금고(프레디 맥),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웰스 파고 등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였음.
1995년 GEICO의 주식을 전부 사들여 100% 자회사로 만듬.
1990년대 후반 달아오르는 주식시장에 불안을 느꼈고
살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함.
1999년 IT붐이 불어 IT기업의 주식이 폭등할 때도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라며
투자를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 이후 IT 거품은 꺼지고 대폭락.
2000년 대 들어 살 주식이 별로 없다며 주식투자에는 소극적.
기업 인수에 주력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달러화 가치의 하락을 예상하고
해외 기업 인수에 주력할 것으로 알려짐.
버크셔 해서웨이는 지금까지 많은 우량 기업의 주식에 투자해왔으며
많은 우량 기업을 인수하여 자회사로 두고 있음.
워렌 버핏. 그는 투기가 판치는 주식시장에서 많은 투자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음.
해마다 오마하에서 열리는 주주총회에는 전세계의 투자자들이 그의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모여들고 있음.
1993년 부터 빌 게이츠와 친구로 지내고 있음.
처음에는 그를 단순한 주식 투기꾼으로 생각했던 빌 게이츠는
IBM과 IBM의 경쟁우위의 지속성에 대해 질문을 퍼부어 댄 버핏과
심각한 대화에 빠져듬. 빌 게이츠는 그건 당시에 자신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화제였다고 함.
빌 게이츠에 이어 세계 2위의 부자지만 재산의 대부분을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식으로
가지고 있고 체리 코크를 즐기는 등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음.
얼마전 자신의 재산의 85%를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하여 화제가 됨.
투자클럽 골든구스 http://club.cyworld.com/goldengoose
첫댓글 여담이지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버핏이 분명 트레이더로 활동했어도 큰돈을 벌었을거라는.. 위글에도 나오듯 시세판을 적는 일도 해봤고 젊은 시절엔 밤새 주가 그래프를 그리며 기술적 분석에도 미쳐있었죠. 어릴때부터 주식시장을 접하면서 이런 저런 경험을 해봤기에 저런 대범함과 넓은 안목이 나오는 거라고 볼수도 있겠죠.
버핏이 트레이더로 활동했어도 큰 돈을 벌었을 것에는 동의 하지만 지금만큼의 큰 돈(세계 1위)은 벌지 못했을 것라고 생각합니다.
증거자료도 없고.. 기술적 분석으로도 돈을 못벌었다곤 하지만.. 저는 분명히 젊은 시절 그가 트레이딩으로도 꽤 돈을 불렸을꺼라고 생각합니다. 트레이딩을 하다하다 도저히 않되서 투자로 돌아선게 아니란 얘기죠. 다만, 미래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결과적으로 미래에 거금을 안정적으로 굴리는 그런 그림을 그렸기에 역시 투자자가 되겠다고 마음으로 굳혔고 그래서 그 후로 그레이엄 등의 영향을 받아 기업에 대한 연구와 가치투자에 매진했겠죠.
워렌버핏과 조지소로스의 투자습관이라는 책에서 버핏이 처음 이혼을 할때에 위자료를 마련해야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의 대부분은 주식에 묶여있고 그 주식을 팔아서 위자료를 주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단기매매로 위자료를 마련했다고 나왔는데 시간 단위 거래였는지 일 단위 거래였는지 기억이 않나네요. 하여튼 여기서 작가는 버핏도 기술적 분석에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라고 주장하더군요.
혹자들은 버핏과 시장은 무관하다고 말하며 시장흐름 자체를 무시해 버리는데 이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버핏이 과연 시장을 전혀 상관치 않을까요? 전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시장흐름을 잘 읽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기업을 싼값에 살 시점을 더 잘 잡아 내는 것이죠. 그레이엄도 과거 폭락장에서 큰 손해를 입었었습니다. 제가 말한 시장분석이란게 몇달치 분석하는 그런 단기시장 분석이 아닙니다. 중장기 분석이죠.
그러나 그레이엄이 폭락장에서 시장 보다 더 큰 손실을 입었던건 1929~1930년 뿐이고 그 중에 1년은 판단 미스 입니다.(그가 공격적으로 투자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대로 보수적으로 운영했다면 이 기간은 줄었을 거에요) 나머지 기간에는 시장보다 더 큰 이익과 훨씬 적은 손실을 입었죠. 그리고 그의 저서는 그런 폭락장을 경험한 경험이 담겨있고요.^^
가치투자자는 시장흐름을 무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짜피 강세장 혹은 약세장은 짧게는 1-2년, 길게는 4-6년 마다 반복하여 발생합니다. 그러나 가치투자자는 관점을 최소 10년이상 보통 15년 정도의 기업의 미래의 가치를 측정하여 저평가 혹은 고평가를 평가해야하는데 10년에서 15년 사이에는 강세장과 약세장이 최소 1-2번 이상 발생하기에 시장흐름을 무시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가치투자는 시장흐름을 분석하는 것보다 10년 후의 기업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장흐름분석은 버핏의 투자전략과 다른 전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버모어,오닐,코스톨라니 같은 투자전략이요
버핏회장께서 말씀하시길.. 미국에서 태어난 것만 해도 난 행운아다..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라고 말씀하셧는데 만약 한국에서 태어나셧다면 군대 가야하셧기 때문에 힘드셧을듯 ㅋㅋㅋ
"나는 온갖 것을 다 해보았다. 차트를 수집했고, 기술적인 것들을 모두 읽었으며 남의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 -> 결론="투자자의 가장 커다란 실수 한 가지는 가치가 아나라 주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워렌 버핏]
그 글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남의 정보에 귀를 기울였었다' 바로 요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가 아니라 주가에 촛점을 맞추는 것은 투자자의 성향에 따라 다른 것이고. 진정한 고수들은 남의 일이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소신껏 투자나 매매를 할뿐입니다.
또한 budlleaf님의 투자경력이 얼마나 되신진 모르겠습니다만 글들을 보아하니 매매나 투기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못해 혐오하는 수준의 입장을 가지고 계시네요. 저는 그것이 님께서 소신을 가지고 과거의 뼈저린 경험끝에 얻으신것인지 아니면 마냥 투자대가들이 얘기하니까 마치 종교를 받아들이듯 믿고 따르는 건지는 모르겠군요;; (참고로 전 초창기에 깡통도 나보고 전업 3년해서 꽤 돈도 벌어 봤기에 단기매매에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방법의 문제가 아니죠. 투자자 자기관리의 문제지) 어쨋거나 편견은 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글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뭐 그냥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제가 본 글을 모두 퍼오지 못해서 이런 오해가 생겼는데요.^^;; 본 글의 맥락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남의 정보에 귀를 기울였었다' 이 부분이 아니라 그래이엄을 만난 뒤 차트를 버리고 가치를 택한걸 이야기한거랍니다.^^ (본문은 아마 '대가들의 주식투자법'에 관한 글로 기억해요.^^)
허쉬초콜렛을 좋아해서 가출햇다 -_- 자의식이 거의 어릴적부터 남다르셧군요 유뷰브에서 버핏누나랑 동생 인터뷰 봣는데 잼있더군요 ^^ 뭐랄가 도널드트럼프랑 거의 비슷한 ㅋㅋ 유아독존 수준이던데요 ^^
맨 위 사진이 이상하게 나왔네요... 버핏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그냥 평범한 시골 할아버지 느낌이였는데 맨 위 사진은 영 아니네요...ㅜ.ㅡ
정말 평소와는 다르게 카리스마있는 사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