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
최환철
부산은 세계로 무역하기 위한 큰 항구 도시, 그리고 '관광도시' 이다.
해안가를 중심으로 형성되다보니 '평지'가 거의 없고, 산 비탈에 집과
도로를 내다보니 '부산'에서 운전하려면 힘들다.
전국에서 '운전'을 가장 거칠게 한다는 말도 들은 적 있다.
그러다보니 차를 이용하지 않고, 전철을 이용해서 여기저기를 다녔다.
부산에는 수많은 '박물관'이 있는데, 그중에 가장 눈여겨 봐야 할 곳이
바로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이다.
위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이다.
3층에 지하 1층까지 제법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건물 스타일.. 특히 유리창을 보면 '을 보면 '日'자 형태가 많은
것을 볼 때에, 일제강점기 때에 지어진 건물느낌이 났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남도 도청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그렇게 사용하다가 1950년 피난 시절에는 '임시'국회 건물로 사용하다가
서울이 회복된 다음에 다시 도청으로 사용되었다.
경남도청이 1983년에 '창원'으로 옮기면서, 이후 '부산고등법원'이 건물과
부지를 사 들여서 1987년 9월 1일 개원했다.
2001년 9월 20일 부산고등법원이 연제구로 이전하면서 이땅을 동아대학교에서
매입했다. 그리고 2003년 동아대학교 법과대학 등이 부민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이 건물을 본격적으로 리모델링 했다.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인 '구 정부청사 건물'은 2002년 9월 13일에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란 이름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일반 사립대학이 도청건물을 인수해서 사용하는 것을 볼 때에...
설립자(석당 정재환 박사)가 정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이 있었을 것으로 느껴진다.
(뭐랄까.. 그냥 개인적인 느낌...)
동아대학교는 해방되고 1946년 11월에 개교했다.
그리고 1950년 6.25 전쟁을 통과한 후..
1957년 2월 10일에 '박물관'을 준공했다.
1976년 1월 30일 박물관 국보관을 존공했다.
1957년 먹고 살기도 바쁜 그 상황에 '대학박물관'을 만들었다는 것은
놀랍고.. 참신하고.. 믿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이다.
전국 대학교 안에 있는 '대학박물관' 중에서는 최초로 '박물관'을 지은 것이다.
또한 부산에 있는 모든 박물관 중에서 가장 역사가 길다.
국보 2점, 보물 18점을 포함해서 23,418개의 소장품이 있다.
일반인 입장에서 보자면, 국보와 보물등 20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그나마 대학박물관 치고,
국보/보물이 많은데... 그곳에 국보3개, 보물4점이 전부다.
'대학박물관' 대부분이 국보는 고사하고 '보물 1점'도 없는 대학이 많다.
(국보, 보물이 있다고 정부에서 지원금을 더 주는 것도 아니다.)
또한 '대학박물관' 중에서 최초로 '박물관'을 개관한 그 자부심대로,
대학박물관 중에서는 국보/보물 숫자가 가장 많고 화려하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창업자가 1950년대 6.25전쟁 당시에 부자였고,
'신분이 판검사'였으니 신분이 높았다.
전쟁통에 수많은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려 들었고, 고향으로 떠나온 사람들이
생계를 위하여 국보, 보물들을 시장에 팔았다.
그때 석당 창업자가 관심을 갖고, 보물들을 구입해서 개인이 소장했고,
그것을 모두 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었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을 지키는 '학예사'는 과거에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 인연으로 박물관 전체를 편하게 안내 받을 수 있었다.
전시된 것들 대부분이 특이하고, 흥미로웠지만.. 일단 본인 기준으로
몇 개만 공유해 보자.
경남 사천시 앞바다에 위치한 '늑도'에서 삼한시대 중심의 집터, 조개더미,
무덤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그때 발굴된 개뼈..
어떤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 박물관에 전시해 놓았겠지만..
개뼈를 박물관에 전시한 것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아래)조선시대에 한의학 '병원'에서 사용하던 '자기'들이 흥미로웠다.
아래 분청사기를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주전자 뚜껑이 없고,
물이 나오는 주둥이 입구가 너무 크고 특이하다.
이 용도는 병원이나 집 안에서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사용하던
'요강' 역할을 했던 자기다. 여성은 '요강'을 사용했다면, 남성이
소변을 처리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
이런 것을 사용할 정도면.. 그에 신분이 낮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남성에 성기를 넣고 볼일(?)을 보기 위해서 입구 모양이 둥글다.
아래 분청사기 역시 한의원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도자기 입구가 지나치게 넓다.
이것은 환자가 자기 입구를 입에 넣고 토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박물관 건물이 일제 강점기에 '도청' 역할을 하기 위해서 건축한 오래된
건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리모델링 중에 일부를 남겨 놓았다.(아래 사진)
건물이 지어진 시기: 1923년
조선(19세기) 미인도 / 부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시대에 미인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두개의 가락지를 낀 오른쪽 손가락은 치맛자락을 약간 들고 있다.
이런 자세와 복장은 송암미술관 소장의 8폭 팔도미인 병풍 중에
강릉 미인과 같다.
저고리는 인동사각형문 안에 꽃무늬가 들어간 문양이 균일하게
펼쳐져 있고, 끝동, 깃, 고름을 붉은 색으로 댄 반희장 저고리이다.
저고리의 소매 배래가 곡선이며, 폭이 좁은 끝동, 폭이 넓은 고름을
볼 때에, 19세기 말경의 저고리 임을 알 수 있다.
저고리 고름에는 금으로 장식된 패도가 달린 '단작노리개'가 있고,
비녀를 꽂은 쪽머리는 순조(1800-1834) 중엽 이후 정착된 문화 양식이다.
가슴에는 절개를 지킬 때에 사용하라는 의미로 '은장도'가 메달려 있다.
1905년 한국에 온 스웨덴 출신에 '종군기자'가 쓴 기행문을 보면..
서울을 구경하고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가지 있었다.
양반으로 보이는 여인은 '장옷'이라고 얼굴 일부만 빼꼼 드려내고
나머지는 모두 안 보이게 덮은 옷을 입고 다녔는데, 그 뒤를 따르는
여종 의복은 얼굴을 개방한 것은 물론, 상의 저고리가 짧아서 가슴이 보였다는 것.
실제로 1905년 당시.. 신분이 낮은 여성들 저고리를 보면 가슴을
공개하고 다닌 것 같은데.. 그 기행문에는 사진까지 올려져 있었다.
시골에서 물동이를 지고 가는 아줌마 역시 가슴을 보이게 드러내고 다녔다.
위 '미인도'를 보면.. 가슴을 일부 노출을 시켰다.
서양 사람 입장에서 이러한 복장을 보고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한말 순종 시절에 사용하던 옷장과 침대
지금은 이런 '자기 옷장'을 사용하지 않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이 든다.
구한말 이런 '자기' 침대를 부자들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 지역은 과거 '가야 문화권'에 속한다.
그래서 가야 시대에 분묘 방식이 많이 남아 있고, 도굴된 것들도 많다.
위 전시된 것들 역시 도굴된 것이 흘러흘러.. 구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야에서 만든 '철기 문물'은 어쩌면 그 부족을 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철기 무기'가
필요했다. 철을 독점한 지배자의 권력도 상승했다.
특히 신라와 백제를 가야의 철기 문화를 수입했지만, 국력이 따라주지
않는 가야 부족국가를 점령할 욕심을 가졌을 것이다.
결국.. '가야'는 신라와 백제가 서로 나눠 먹어서 완전히 통합되었고,
그나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가야'의 흔적은 산처럼 큰 '고분'만 남아있다.
'국방'은 중요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돈을 지킬 능력이 없다면 다 빼앗길 수 있다.
부산에 가면.. 박물관이 많다.
본인이 여기저기 다 둘러보면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박물관은
바로 '동아대학교 박물관'이다.
< 끝 >